영혼의노래-십자가의 성요한

제 22 노래

Skyblue fiat 2014. 5. 24. 13:19

 

 

 

 

 

 

                  다음 노래의 설명

 

    1. 이 신부를 감성이나 마귀의 손에서 완전히 해방하고 빼내오려는 강렬한 원의에 떠밀린 신랑은 자신의 계획이 성공한 것을 보고 온통 기쁨에 잠긴다. 그는 마치 잃었던 양을 찾아 이곳 저곳 뛰어다니다 마침내 이것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착한 목자와 같다. 또 촛대를 밝히고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 간신히 찾은 보화를 들고 즐거워서 친구나 이웃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세요. . . . ”하는 여인과도 같다. 이 사랑 많은 목자 이 영혼의 다정한 신랑이 높은 덕에로 인도하여 당신 것으로 만든 이 영혼이 그의 어깨에 기대어 이토록 고대한 포옹과 일치로 그의 손안에 있음을 보고 기쁨에 넘친 모습은 참으로 감탄할 만하다. 그는 오직 당신만이 기뻐하는 것으론 만족하지 않고 당신의 행복을 천사들이나 거룩한 영혼들에게도 나눠주신다. 그리고 아가에서처럼 “시온의 처녀들아 나와서 보려므나 혼인 날 경사 날에 어머니가 씌워 준 그 왕관을 솔로몬이 쓰고 있구나”( 3, 11)라고 했다. 그는 이 구절 가운데 영혼을 그의 왕관, 그의 신부, 그의 마음의 기쁨이라고 부르고 신부를 팔에 안아 옮기는 신랑처럼 신부와 함께 혼인 방에서 나온다 이것을 그는 다음 시구로 설명한다.

 

 

 

                                      제 22 노래

 

                        신부는 그 그리워하던 아리따운

                        동산으로 들어 왔도다

                        그는 사랑하는 이의

                        포근한 팔에다

                        목을 베고 흐뭇이 쉬도다

 

 

 

                  해 설

 

     2. 신부는 여우들이 모두 잡히고 삭풍은 사라지고 님파(女精)들은 가라앉히기 위해 말하자면 영적 혼인을 완전히 즐기기에 방해되는 모든 장해가 제거 되도록 이미 열심히 노력했다. 그리고 이 노래에서 보는 것과 같이 성령의 바람을 부르고 또한 이것을 얻었다. 이것은 이러한 단계의 완전한 준비이고 방법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노래에서는 영적 혼인 그 자체를 말해야 할 것이 남아 있다. 이 노래에서 하늘의 신랑은 영혼을 이미 신부라고 부르면서 말한다. 그리고 두 가지를 알려준다. 하나는 이 영혼이 원수를 쳐 이긴 뒤 두 사람은 저토록 서로 갈망한 영적 혼인의 즐거운 경지에 어떻게 다다랐는가는 것이다. 다음은 영혼이 이미 즐기게 된 이 단계의 특질인데 가령 영혼은 사랑하는 자의 정겨운 팔에 머리를 기대어 맘껏 쉬고 있음을 말한다. 이제부터 거기에 관해서 설명하겠다.

 

 

 

                  신부는 그 그리워하던 아리따운

                  (일어 역 : 신부는 들어 왔다)

 

     3. 이 노래들의 순서를 더욱 뚜렷이 밝히고 하느님의 은혜로 지금 말하려는 가장 높은 단계인 영적 혼인 상태에 다다르기까지 가야하는 영혼의 여정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 것에 유의하기 바란다. 곧 영혼은 이 상태에 다다르기 전에 억제의 노고와 쓰라림 가운데 또한 영적 사물의 묵상 중에 수련을 잘 쌓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혼의 노래 첫 번째부터 “온 즈믄 은혜(아름다움)를 뿌리면서”(노래 5)란 노래까지 나타냈다. 다음에 영혼은 관상적 길에 들어가 사랑의 좁은 길을 통과한다. 이것은 위의 노래에 계속 되는 노래에서 영적 약혼이 이루어진 “사랑하는 이여, 저것들을 치워 주소서.”(노래 13)로 시작하는 노래까지의 노래에서 기록하셨다. 그 뒤에 영혼은 일치의 길에 들어서는데 거기서 갖가지 숭고한 교류, 방문, 약혼녀가 받듯이 신랑의 선물이나 보석을 받는다. 그리고 영혼은 신랑의 사랑을 더 더욱 깨닫고 또한 사랑으로 완성되어 간다. 그것을 약혼의 성립을 뜻한 지금 말한 노래 곧 “사랑하는 이여 저것들을 치워 주소서”로 시작하는 노래부터 이것들을 설명하려는 “신부는 그리워하던 아리따운 동산에 들어 왔도다”의 노래까지 말했다. 그럼 지금 남은 것은 이 영혼과 하느님의 아들의 영적 혼인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혼인 상태는 약혼 상태에 비교도 안될 만큼 뛰어나다. 그것은 애인으로 완전히 변화하는 것이어서 양자는 서로 완전히 소유하기에 서로에게 자신을 넘겨주고 이 지상에서 가능한 한 영혼을 신적인 것으로 만들고 참여로써 하느님과 이루는 사랑의 일치의 어떤 유의 완성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 이 상태는 영혼이 은혜로 다져지는 어떤 유의 은총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이 은총으로 하느님의 충실함은 영혼 안에 확인되기에 쌍방의 충실함은 확고부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 상태는 생애에서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것이다. 육체적 혼인의 완료에도 성서가 말하는 대로 둘은 한 몸이 되는 것과 같이(창세 2, 24) 하느님과 영혼 사이의 영적 혼인도 그것이 맺어지면 둘의 성은 같은 영, 같은 사랑 안에 녹아 버린다. 이것은 바로 성 바울로가 같은 비유로 선언했던 것이다. 곧 “주님과 결합하는 사람은 그 분과 한 영이 됩니다.”(1고린 6, 17) 이것은 또한 별이나 촛불의 빛이 태양 빛에 합하면 별도 촛불도 빛을 잃고 다른 온갖 빛을 흡수하는 태양 빛밖에 남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랑은 이 시구에서 이 감탄스러운 단계에 관해 말하여 “신부는 들어 왔도다 . . . ”고 하는데 그것은 신부가 온갖 이 세상의 것, 자연적인 것, 또 모든 애정, 영적 양상이나 방법을 버리고 온갖 유혹, 혼란, 고민, 걱정, 근심을 잊고 그토록 숭고한 포옹으로 변화되어짐을 뜻한다.

 

 

 

                  동산으로 들어왔도다

                  (일어 역 : 그리워하던 즐거운 동산 안에)

 

     4. 이 뜻은 영혼은 하느님으로 변화되었다.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찾은 즐거운 상쾌함 때문에 여기서는 하느님을 즐거운 동산이라고 한다. 이 완전한 변화의 동산(그것은 혼인의 기쁨, 즐거움, 영광이다.)에 들어가는 것은 우선 영적 약혼으로 맺어지고 약혼자 서로간의 성실한 사랑의 실천을 경과한 뒤라야 한다. 이 충실한 정겨운 사랑으로 얼마 동안 하느님의 아들에게 맞갖은 약혼자임을 보여준 뒤에야 비로소 영혼은 하느님께 불림을 받아 하느님과의 혼인이라는 이 가장 행복한 상태를 완성하기 위해 꽃피는 동산으로 영혼을 들어오게 한다.

     거기에서 이 둘 사이에 필설로는 다 할 수 없는 긴밀한 일치가 맺어져 신성과 인성 사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교류가 이루어지기 위해 신성도 인성도 그 본질을 바꾸지 않고 더구나 각각 하느님인 것처럼 보인다. 이 일치는 이승에서는 완전한 것일 수는 없다지만 그것은 사람이 말할 수 있고 또 생각할 수 있는 일체를 초월한 것이다.

 

     5. 이것은 이미 신부가 된 영혼을 이 단계에로 부르시어 아가의 신랑이 매우 명백히 말하였다. “새색시 내 누이야 내 동산으로 내 향료와 마르타를 따내었단다”( 5, 1) 하였다. 신랑은 영혼을 누이 새색시라 부른다. 왜냐하면 영적 혼인에 부르기에 앞서 영혼은 사랑과 자신을 내어 드리므로 이미 누이 새색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랑은 향기 좋은 향료와 마르타(몰약)를 따냈다고 한다. 몰약이라든가 향료는 영혼을 위해 준비한 이미 잘 익은 덕의 꽃의 열매를 말하고 그것은 이 단계에서 신랑이 영혼에게 교류시키는 당신의 완덕과 기쁨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에게는 신랑이 그리워하던 아리따운 동산인 것이다. 영혼의 모든 행위와 하느님과 영혼이 원하고 목적하는 모든 것은 이 신적 혼인을 성취하고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그 곳에 다다르기까지는 쉼을 모른다. 말하자면 거기에서는 영적 약혼 때보다 훨씬 뛰어난 하느님의 풍요와 충만 더욱 안전하고 안주된 평화, 완전한 상쾌함을 발견하겠기 때문이다.

     영혼은 마치 이 멋진 신랑의 팔에 이미 안긴 듯하다. 그러므로 흔히 영적으로 세차게 껴안아 줌을 느끼는데 그것은 참으로 포옹이라 할 만하고 이 포옹을 통해서 하느님의 생명으로 산다. 사실 영혼은 “나는 살아 있지만 이미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갈라 2, 20)하신 성 바울로의 말씀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여기서 하느님의 생명이라는 그토록 행복하고 영광스런 생명을 살고 있으므로 여러분은 만일 할 수 있다면 이 영혼이 사는 생명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생각해 봄이 좋으리라 하느님은 아무런 불쾌도 느끼지 못하심과 마찬가지로 이 영혼도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영혼은 하느님으로 변화된 자신의 실체로 하느님의 영광의 기쁨을 느끼고 즐긴다. 그 때문에 다음 시구에

 

 

 

                  목을 베고 흐믓이 쉬도다

 

     6. 목은 여기서는 영혼의 힘, 곧 앞서 말한 대로 영혼과 신랑과의 결합 일치에 도움이 된 저 힘을 뜻한다. 영혼은 매우 강하지 않고는 이토록 세찬 포옹에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 힘으로서만 영혼은 노고하고 덕행을 실천하고 악습을 이겨냈다. 노고하고 승리를 얻은 이 힘을 쉬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목을 베고 쉰다.

 

 

 

                  그는 사랑하는 이의

                  포근한 팔에다

 

     7. 하느님의 팔에 목을 베고 라 함은 자기 힘이라기 보다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하느님의 힘에 합치는 것이다. 하느님의 팔이란 하느님의 힘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나약함을 이 힘에 견디어 이에 변화되면 그것은 하느님의 힘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영적 혼인 상태를 “사랑하는 이의 포근한 팔에다 목을 베고”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매우 옳은 표현이다.

     하느님은 영혼의 힘이시고 또한 단맛이다. 하느님 안에서 영혼은 온갖 악에서 지켜지고 보호되고 모든 선에 도취된다. 그 때문에 아가의 신부는 이 복된 상태를 그리워하면서 신랑에게 말했다. “아 차라리 당신이 내 오빠였던들 내 어머님의 가슴에서 젖을 빨았던들 밖에서 당신을 만나도 키스할 수 있을 것을 아무도 나를 보고 멸시하지 않을 것을”( 8, 1) 하느님을 형제라 부르면서 영적 혼인에 이르기 전 사랑의 약혼으로 두 사람 사이에 갖고 있는 동등성을 암시한다. 내 어머니의 젖을 빤다함은 내 안에 있는 욕구나 정욕을 고갈시키고 소실시키는 것을 뜻한다. 욕구나 정욕은 육체의 우리 원조 하와의 젖가슴이자 젖이고 그것은 영적 혼인에 장해가 된다. 이 일이 일단 이루어지는 날에는 내가 밖에서 당신을 만날 것이다.

     이것은 위에 말한 욕구를 없앰으로써 얻어지는 영의 고독과 적나 가운데 온갖 것과 또한 나 자신의 밖에서 당신을 만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혼자가 된 나는 당신께만 입맞춘다는 것은 내 본성은 현세적 자연적 또는 정신적 모든 더러움에서 해방되어 고독하게 되어 아무런 매개도 없이 오직 당신 혼자에게만 당신의 신적 본성에 일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다만 영적 혼인에서만 가능하다. 영적 혼인은 영혼이 하느님께 하는 입맞춤이다. 그 때문에 그 뒤에는 아무도 영혼을 감히 업신여기지 않는다. 사실 이 단계에서 영혼은 이미 마귀에게서도 육에서도 세속에서도 또 자기 자신의 욕구에서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가에서 또 말한 것을 실현한 것이다. “겨울은 이미 가고 비도 멎어 버리고 땅에는 꽃이 피었다.”(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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