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노래의 설명
1. 이 영혼이 동경하는 높은 완덕의 상태 - 그것은 영적 혼인인데 - 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낡은 사람을 벗어버리고 영혼의 하부가 이미 상부에 복종하고 따라서 이 하부에서 오는 온갖 불완전함, 반역, 불완전한 경향에서 씻어진 것만으로는 아직 넉넉지 않다. 저토록 강하고 그다지도 밀접한 신적 포옹을 견디기에는 큰 힘과 그지없이 드높은 사랑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영적 혼인 상태에서 영혼에게 매우 고도의 순결과 아름다움을 입혀 주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힘까지 주신다. 이 힘은 영혼과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루어지는 긴밀한 탄탄한 결합에서 온다.
2. 그러므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영혼은 순결과 힘과 사랑에 합당할 정도에 다다라야 한다. 그래서 이 영적 결합에 개입하고 이것을 이룩해 주실 성령은 영혼이 이 은혜에 맞갖기 위해서 앞서 말한 특성을 갖도록 원하여 아가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함께 말씀을 나누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이 어린 우리 누이는 유방이 없네 혼담이 있을 적에 누이 동생을 어찌할꼬. 누이가 성벽이라면 은탑을 그 위에 쌓아 올리리 그 누이 대문일랑 향백으로 꾸미리( 8, 9-10) 은탑이란 힘있고 영웅적이고 백금으로 상징되는 신앙으로 감싸여진 덕을 나타낸다. 이 영웅적 덕은 영적 혼인의 덕이어서 성벽이란 말이 상징하는 늠름한 영혼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영혼의 힘 안에 평화의 신랑은 어떠한 나약에도 흔들릴 염려도 없이 쉬고 계시다. 향백은 고상한 사랑의 특성이나 우유성을 뜻한다. 그리고 이 숭고한 사랑은 향백으로 상징되는 영적 혼인의 사랑이다. 신부가 사랑을 입기 위해서는 그는 신랑이 거기를 통해 들어가실 수 있게 열려진 대문이라야 한다. 말하자면 영적 혼인 전에 영적 약혼 때 승낙했던 진실한 사랑의 온전한 승낙으로 의지의 대문을 신랑을 위해 열어두어야 한다. 신부의 유방이란 신적 혼인이 완성되기 위해 신랑인 그리스도 앞에 나아갈 때 신부가 갖추어야 할 사랑의 상징이다.
3. 성서에는 신부는 신랑을 뵙고 싶은 소망에 애타서 당장 대답한다. “나는 성벽입니다. 내 가슴은 탑과 같아요”(아가 8, 11) 이것은 “내 영혼은 강하고 내 사랑은 매우 높으므로 이 일치에 부족함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 말은 또한 신부인 영혼이 일치와 완전한 변화에 대한 동경과 함께 앞의 노래에서 밝혔듯이 특히 마지막 노래에서 신부는 신랑을 강요하려고 그 분에게서 받은 덕이나 뛰어난 경향을 그 분의 눈앞에 두었다. 그래서 신랑도 또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다음 두 노래를 읊는다 그분은 영혼을 그 감각적 부분도 영적 부분과 함께 완전히 정화하고 굳세게 하여 이 상태에 맞갖게 준비를 마치려고 감성 또는 마귀에서 오는 반항, 반역에 대항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 20. 21 노래
신 랑
가뵈야운 새들
사슴들 뛰노는 숫사슴들
산과 골짜기와 바닷가와
물이며 바람이며 뜨거움들이며
뜬 눈으로 새는 밤의 무서움들이여
달콤한 칠현금과
<시레나>이 노래로 너희게 맹세하노니
너희들 분노들 가라앉히고
벽에단 손도 대지 말거라
한껏 편안히 새 색시가 잠자게
해 설
4. 이 두 노래에서 하느님의 아들인 신랑은 신부인 영혼의 하부를 상부에 알맞게 하여 신부를 그 모든 불완전에서 씻어 주시어 그 자연적 모든 능력과 이성을 질서 잡아 주고 그 모든 욕구를 가라앉히고 따라서 신부에게 완전한 조화와 고요를 주신다. 이것이 위의 두 노래 안에 포함되었고 그 뜻은 아래와 같다.
우선 신랑은 헛되이 헤매는 상상력에게 앞으로 그것을 멈추도록 청하고 또 명하신다. 또한 전에 이 영혼을 괴롭히던 두 가지 자연적 능력 곧 분노와 욕망을 질서 잡으신다. 그분은 영혼의 세 능력 곧 기억, 지성, 의지를 이 지상에서 가능한 한 각기 그 고유의 능력에 따라 완전한 대상으로 인도하신다. 또 그분은 영혼의 네 가지 정, 기쁨, 희망, 슬픔, 공포에게 좀 더 조용해지고 질서 잡도록 청하고 또 명한다. 이 모든 것은 첫 노래(20)가운데에 나열하는 명칭으로 나타냈는데 영혼을 괴롭히는 이 활동이나 움직임을 신랑은 이때 하느님이 영혼과 통교하고 영혼에게 당신을 내 주심으로 영혼에게 주시는 감미, 기쁨, 힘의 도움으로 멈추게 하신다. 이 통교로 하느님은 영혼을 생생하고 선명하게 당신으로 변화시켜 주심으로 영혼은 모든 능력, 욕구, 활동은 타고난 불완전함을 잃고 신적인 것으로 변화한다.
가븨야운 새들
5. 가벼운 새란 떠돌아다니는 상상을 말한다. 실은 상상은 매우 가볍고 재빨리 여기저기 날아다닌다. 의지가 애인과의 감미로운 사귐의 고요 속에서 즐길 때 상상은 끊임없이 재빨리 날아다니고 영혼의 즐거움을 맛없게 하고 없애 버리기가 일수이다. 그래서 신랑은 음률이 아름다움 칠현금. . . 등으로 그들에게 간청하신다. 말하자면 앞으로는 영혼이 엄청난 풍요로움과 자주 기쁨에 충만 되기에 이토록 높은 경지에 이르기 전처럼 상상의 헤매임은 이미 그를 흩어지게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심한 불안과 지나친 날아다님은 이미 그쳐야 한다. 이것은 앞으로 설명할 다른 능력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슴들 뛰노는 숫사슴들
(일어 역 : 사자야, 사슴아, 뛰노는 들사슴아)
6. 사자란 분노의 쓴맛과 격렬함을 뜻한다. 왜냐하면 이 능력은 그 행위가 대담하고 무모하기는 사자와 같기 때문이다. 사슴과 뛰노는 들사슴이란 욕망이라는 영혼의 능력을 뜻한다. 이것은 무엇인가를 원하는 능력이어서 두 가지 결과를 갖고 있다. 그 하나는 겁쟁이고 다른 하나는 대담이다.
겁쟁이라는 결과가 낳은 것은 일이 자기 뜻대로 안될 경우 그 때 이 능력은 소극적이 되고 위축되어 겁먹고 만다. 이는 흡사 사슴과 같다. 사슴은 욕망이란 능력이 다른 동물보다 강하기에 이런 경우 온통 겁먹고 무척 안절부절 한다.
대담이란 결과는 자기에게 알맞은 것을 만났을 때 생긴다. 그 때 무서워 하든가 위축되지 않고 그 소망과 애호의 힘에 의지하여 이것을 어쨌든 제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이 능력이 애호의 힘에 빼앗기는 양상은 마치 들사슴에 견줄 수 있다. 말하자면 이 동물은 자기 기분에 맞는 것을 너무도 경렬히 원하고 그 곳을 향해 달린다기 보다 오히려 날아가기에 그 때문에 “뛰노는 들짐승”이라 한다.
7. 그러기에 사자에게 간청하여 신랑은 노여움이 지나친 격정에 고삐를 잡고 사슴에게 간청하여 두려움과 겁먹음 때문에 여태껏 위축된 욕망을 강하게 하고 뛰노는 들사슴에게 간청하여 욕망을 채우려는 들사슴처럼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소망이나 욕구를 가라앉힌다.
그런데 욕망은 칠현금의 기분 좋은 가락을 즐기고 인어(人魚)의 달콤한 노래 소리에 가라앉아 이미 채워진 것이다. 그리고 유의할 점은 여기서 신랑은 분노와 욕망 자체에 간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능력들이 영혼에게 모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이 능력에서 오는 성가신 무질서한 행위, 사자, 사슴, 뛰노는 들사슴으로 상징되는 행위에게 간청한다. 실은 이러한 것은 영적 혼인의 상태에서 필연적으로 없어지기 때문이다.
산과 골짜기와 바닷가와
8. 이 이름은 영혼의 세 능력 기억, 지성, 의지의 부정 무질서한 행위를 말한다. 이 행위들은 극단으로 높든가 또는 극단으로 낮든가 혹은 소홀히 하든가 또는 그토록 극단은 아니라도 이 양 극단 어느 쪽엔가 기울어져 있는 적에 무질서하거나 부정한 것이다. 매우 높은 산일 경우 매우 무질서하고 극단의 행위를 상징한다. 매우 낮은 골짜기인 경우 이 세 능력의 행위 가운데 적당하기보다도 훨씬 낮은 무질서한 행위를 상징한다. 바닷가는 높지도 낮지도 않고 그렇다고 편평하지도 않고 높낮음의 양극단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지나치고 모자라기 때문에 중용과 올곧음이 결핍된 행위를 상징한다.
이 행위들은 극단의 무질서는 아니다. 곧 대죄까지는 아니지만 약간의 질서가 결핍되어 있다. 왜냐하면 소죄를 이루기에 가능하고 또는 적어도 지성, 기억, 의지에는 아주 사소한 것이라곤 하지만 어떤 불완전을 이루기 때문이다.
신랑은 가락 좋은 칠현금과 앞의 노래로 올곧음에서 어긋난 이런 행위 모두에게 정지하도록 간청한다. 이 신비적 멜로디는 영혼의 세 능력을 매우 완전한 균형 가운데 있게 하므로 그것들은 완전한 중용을 보존하는 행위로 극단의 것은 안 할 뿐 아니라 그런 것에 약간이라도 기울어지지도 않는다.
물이며 바람이며 뜨거움이며
뜬 눈으로 새는 밤의 무서움들이여
9. 위의 네 가지 이름은 영혼의 네 가지 정 즉 앞서 말한 대로 슬픔, 바람, 기쁨, 두려움의 특성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물론 영혼의 슬픔을 주는 비애의 정을 뜻한다. 그것은 마치 물처럼 영혼 안에 들어가므로 다윗은 이것에 관해서 하느님께 말씀드렸다. “하느님 나를 구하소서 목에까지 물들이 들어 찾사오니”(시편 68, 2) 바람은 희망의 정을 뜻한다. 희망의 정은 자기에게 모자라는 좋은 것을 바라서 바람처럼 날아가기 때문이다. 다윗은 말하기를 “당신 그 말씀이 그리웁기에 나는 입을 벌리고 헐떡이나이다.”(시편 118, 131) 열은 (뜨거움이며) 불처럼 마음을 태우는 기쁨의 정을 뜻한다. 이에 관해서 다윗은 “내 마음은 내 속에서 뜨거워져 묵상 동안 불은 타올랐나이다.”(시편 33, 4)고 했다. 이는 “묵상 동안 기쁨이 타올랐다.”라는 말과 같다.
잠을 빼앗는 밤의 두려움이란 넷째 정이며 곧 두려움의 정을 뜻한다. 이 두려움들은 이제 곧 말하려는 영적 혼인의 경지까지는 아직 다다르지 못한 영적 사람들에게 자주 심하게 일어난다. 때로는 그 원인은 하느님이여서 하느님이 어떤 특별한 은혜를 그들에게 주시려는 때에 일어난다. 그 때 그들은 공포, 놀라움을 느끼고 육체나 감각은 위축된다. 말하자면 그들의 천성은 아직 튼튼하지 못하고 완성되지 않았기에 이유의 은혜를 받는데 익숙치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경우 이 공포들은 마귀에게서 온다. 마귀는 하느님이 영혼에게 기분 좋은 잠심을 주실 때 이 영혼이 즐기는 평화와 행복을 보곤 큰 부러움에 안달한다. 때로는 영혼이 넋을 협박한다. 마귀는 이 영혼이 깊이 잠심하고 하느님과 일치하였기에 그 속에 들어가기는 불가능함을 보자 하다 못해 밖에서 괴롭히려고 그 감각적 부분에 산심, 변덕, 빈곤과 감각에 고통과 공포를 일으키고 이처럼 하면서 신부를 불안케 하고 할 수만 있다면 혼인 방에서 끌어내려 한다. 이 공포들을 “밤의 공포”라 한다. 왜냐하면 마귀에서 오는 것이어서 마귀는 영혼 안에 어둠을 번지게 하여 영혼이 즐기는 신적 빛을 캄캄하게 하기 위해 이런 것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또 “뜬 눈으로 새는 밤의 두려움들이여” 하는데 이유는 영혼을 내적 감미로운 잠에서 깨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려움들의 원인인 마귀는 이 두려움을 일으키기 위해 늘 깨어서 기회를 엿본다. 이 두려움들이 하느님에게서 오든 마귀에게서 오든 모두 이미 영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수동적으로 주어진다. 내가 여기서 다른 자연적 공포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하겠다. 이런 공포를 품는 것은 영적 사람들에겐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앞서 말한 영적 두려움은 영적 사람들에게 고유한 것이다.
10. 이처럼 애인은 영혼의 네 가지 정에서 일어나는 네 가지 격정에 간청하여 그것들을 가라앉히고 멈추게 한다. 이 영적 단계에서 애인은 좋은 가락의 칠현금의 기쁨과 인어의 노래의 감미로 신부를 취하게 하고 넘치는 풍요로운 힘과 만족을 전달하기에 이 정들은 이미 신부를 지배하지 않고 또 어떠한 방법으로도 신부를 불쾌하게는 못한다. 그리고 이 경지에 있는 영혼의 숭고함과 안주성은 매우 뛰어나기에 전에는 어떤 비애의 물이 영혼에게까지 다다랐다 하더라도 지금은 이미 그런 일은 없다. 가령 그것이 영적 사람들이 가장 쉽게 느끼는 자타의 죄에서 오는 슬픔일지라도 이 영혼은 그 죄들을 잘 분별하지만 이미 그것에 관해서 슬퍼하지도 감동도 느끼지 않는다. 또한 동정이라는 것은 영혼의 감동인데 이 상태의 영혼은 동정의 행위를 완전히 갖추면서도 슬픔의 정을 이미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영혼들은 전에는 그 덕 안에 인간의 나약에서 오는 것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오직 강한 것 변하지 않는 것, 완전한 것만을 거기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슬퍼할 것을 완전히 분별하지만 슬픈 정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자비를 행하지만 동정의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이렇게 사랑의 변화에 다다른 영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러한 영혼이 사물을 강하게 느껴 그것을 괴로워하는 것을 하느님이 하락하실 경우도 있음은 사실이다. 그것은 공덕을 쌓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나 사랑을 활기 있게 하기 위해서나 또는 그 밖의 이유 때문이다. 하느님은 성모님이나 성 바울로나 그 외의 성인들에게도 이처럼 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상태에서는 이 슬픔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11. 이 영혼은 또한 기대의 열정으로도 괴로워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한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그 모든 소망은 이미 채워졌기 때문이다. 그는 이세상 것에는 아무런 기대도 두지 않고 영적 것도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자신이 하느님의 온갖 부로 채워졌음을 보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에 관해서도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합치하고 있다. 그 감각적 부분에서도 영적 부분에서도 그는 오직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하면서 거기에는 다른 욕망이나 욕구의 격정은 조금도 없다. 하느님을 보고 싶다는 그 소망에는 이처럼 아무런 고통도 따라 오지 않는다. 기쁨의 정도전에는 다소 감동을 일으켰는데 지금은 기쁨이 모자라도 느끼지 않고 그것이 풍요로워도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영혼이 일상 즐기는 기쁨이 너무나 완전한 것이기에 마치 강물이 흘러 들어와도 별로 수량이 불어나지 않고 강물이 흘러 들어오지 않아도 줄지 않는 바다와 같다. 말하자면 이 영혼은 그리스도가 요한 복음에 “그 물은 솟아올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4, 14)하신 저 샘이 되었기 때문이다.
12. 이런 영혼은 생명이 변화의 단계에서 새것은 아무것도 받지 않는다고 내가 말했으므로 이 영혼에게는 우유적 기쁨은 결여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헌데 영광의 상태에 들어간 영혼들에게도 우유적 기쁨은 존재하는 것이다. 사실 우유적 기쁨이라든가 감미라든가 가이 영혼에게 결핍되어 있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것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갖고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영의 본체적 교류가 조금도 증가하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이 영혼에게 새로 가져다 주는 모든 것은 이 영혼이 이미 갖고 있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혼이 자기 안에 갖고 있던 것은 새로 가져다 주는 것보다 위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쁨이나 쾌락의 원인이 될 것이 이 영혼에게 제공 될 적마다 그것이 외적 것이든 영적인 정신적 것이든 이 영혼은 당장 자기 자신 안에 이미 갖고 있는 부를 즐기기 위해 그편을 향한다. 그리고 새로 가져온 것보다 훨씬 뛰어난 기쁨과 즐거움을 그 가운데서 맛본다.
말하자면 이 영혼은 이 점에 관하여 하느님과 같은 특성을 다소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온갖 것 가운데서 즐기시는데 그것은 당신 자신 안에서 찾은 즐거움에는 견줄 것도 못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온갖 선의 뛰어난 최고의 선을 당신 안에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혼에게 새로 제공되는 온갖 기쁨이나 만족은 그 안에 머물기보다도 오히려 그가 자기 안에 갖고 있고 느끼는 행복 안에서 즐기도록 초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앞서 기록한 대로 이 본질적 행복이야말로 다른 온갖 기쁨이나 즐거움보다 뛰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13. 더구나 무엇인가 영혼에게 기쁨이나 만족을 줄 때 만일 이 영혼이 보다 높이 평가되는 다른 것이 나 보다 많은 즐거움을 주는 것을 갖고 있다면 당장 이 더욱 뛰어난 것을 생각하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이 우유적인 기쁨은 영적인 것이어도 또 그것이 영혼에게 새로운 것을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영혼이 이미 소유한 본질적 기쁨에 비교하면 너무나 작은 것이기에 이 영혼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사실 영혼이 일단 아주 성장한 이 완전한 변화 상태에 이르면 아직 거기까지 다다르지 못한 다른 영혼처럼 이 새로운 영적 은혜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미 새 즐거움을 받지 않는 이 영혼은 항상 새것을 받는다고 느낀다. 그 이유는 영혼이 즐기는 선은 늘 새롭기에 그것을 항상 새롭게 맛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혼은 새롭고 받지 않아도 늘 새로운 기쁨을 받듯이 생각된다.
14. 영혼이 끊임없이 즐기는 하느님의 포옹이 때로는 영혼 안에 일으키는 영광의 조명에 관해서 말하려할 때 그것을 조금이라도 알려 줄 수 있는 표현은 없음을 느낀다. 이 조명이란 하느님이 영혼 쪽으로 향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것으로 하느님은 영혼 안에 두신 부와 기쁨의 심연을 영혼에게 보여 주시어 즐겁게 해주시는 것이다. 그것은 흡사 태양이 대해를 눈부시게 내리 쬐어 깊은 곳의 움푹 패인데나 동굴까지도 비추어 주는 것과 비슷하다. 그 때 진주라든가 황금 등 그 밖의 귀금속 같은 매우 풍부한 광맥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영혼의 신랑이신 신적 태양도 그 신부에게로 향해 신부가 갖고 있는 보화를 공개하므로 천사들조차도 감탄한 나머지 아가에 기록된 대로 부르짖기를 “달처럼 어여쁘고 해처럼 눈부시고 새벽처럼 솟아오르고 군인처럼 위풍당당한 그가 대체 누구인가”( 6, 10)라고 이 조명이 아무리 뛰어난 것이라도 그것은 영혼의 부요에는 아무것도 보태지는 못한다. 그것은 다만 영혼이 이미 소유한 것을 드러내어 그것을 즐기게 할 뿐이다.
15. 마지막으로 “뜬 눈으로 새는 밤이 두려움들이여”는 이미 이 영혼에까지는 다다르지 못한다. 영혼은 엄청나게 비추어지고 굳세어져서 하느님 안에 안전하게 쉬고 있으므로 마귀는 이미 그 어둠으로 이 영혼을 어둡게 하고 그 공포로 두렵게 하고 그 공격으로 그를 동요하게 할 수는 없다. 이제 그 누구도 그에게 와 닿을 수도 없고 괴롭힐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만들어진 일체의 것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안에 깊숙이 들어가 이 지상의 조건과 상태가 허용되는 한 완전한 평화를 향유하고 순수한 풍미를 맛보고 완전한 기쁨을 즐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혼에게는 현자의 다음 말이 해당된다. “마음이 편하면 하루 하루가 잔치 기분이다.”(잠언 15, 15) 향연에서 사람은 온갖 요리의 맛과 모든 음악의 상쾌함을 맛본다. 이와 같이 신랑의 가슴 안에 갖고 계신 향연에서 영혼은 온갖 기쁨을 즐기고 온갖 맛을 맛본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말한 것 또 온갖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영혼이 이 다행한 상태에서 실제로 체험하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 적은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말하듯이 온갖 감각은 초월한 하느님의 평화 안에 들어가게 되면 모든 감각은 그것을 표현할 힘이 모자라서 다만 묵묵할 따름이다. 이제 둘째 (21) 노래를 보기로 하자.
달콤한 칠현금과
<시레나>의 노래로 너희게 맹서하노니
16. 가락도 아름다운 칠현금이란 이 경지에서 신랑이 스스로 영혼 안에 부어주시는 상쾌함을 뜻한다는 것은 이미 설명했다. 이로서 신랑은 앞서 말한 영혼의 고민을 전부 정지시켰다. 칠현금의 가락을 듣는 이에게 기분 좋은 즐거움으로 채워 주시고 사람을 이에 심취되고 황홀하여 불쾌나 고민을 잊을 만큼이고 또한 이 신적 상쾌함은 너무도 힘차게 영혼을 사로 잡기에 어떠한 고뇌도 이미 영혼에게 와 닿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시구의 뜻은 다음과 같다.
내가 이 영혼을 채워주는 상쾌함이 영혼에게서 불쾌함을 모두 정지시키듯이 또한 인어의 노래란 영혼이 갖게된 상태적 행복을 상징함도 이미 말했다. 신랑은 이 행복을 인어의 노래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사람의 말에 따르면 인어들의 노래는 참으로 달콤하고 상쾌하므로 그것을 듣는 자는 그만 넋을 잃고 사랑에 불타고 열중되어 다른 일체를 잊을 정도이다. 마찬가지로 이 일치의 기쁨은 영혼을 온통 몰입케 하고 쉬어주고 넋을 잃게 하여 앞서 말한 저 온갖 고뇌, 혼란을 잊게 한다. 그것이 다음 시구의 뜻이다.
너희들 분노를 가라앉히고
17. “분노”란 앞서 기록한 영혼의 모든 능력의 무질서한 움직임이나 격정에서 오는 혼란이나 고뇌를 말한다. 분노는 영혼의 평화를 혼란케하는 격정이고 평화의 한계에서 영혼을 끌어낸다. 마찬가지로 모든 어지러운 격정은 영혼에게 외닿으면 평화의 한계 내적 고요에서 이것을 끌어내어 혼란 가운데 빠뜨린다. 그 때문에 신랑은 말한다.
벽에단 손도 대지 말거라
18. 이 벽이란 평화의 울타리, 영혼을 둘러싸고 보호하는 덕과 완덕의 성곽이다. 영혼은 앞서 말한 신랑이 꽃 가운데 향연을 베푸는 동산, 벽에 둘러싸여 신랑이 자신을 위해서만 간직한 동산이다. 그 때문에 신랑 자신이 아가에서 신부를 가리켜 닫혀진 동산이라 부른다. 곧 “내 누이동생은 닫혀진 동산이다.”라고 여기서는 이 동산의 울타리나 벽에도 손대지 말라고 청하고 있다.
한껏 편안히 새 색시가 잠자게
19. 이것은 말하자면 신부가 자기 애인에게서 맛보는 쉼과 감미를 더욱 자유로이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뜻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신부를 위해서는 이미 닫혀진 문이 아니고 자기가 원할 때 또 원하는 대로 이 달콤한 사랑의 잠에 몸을 맡길 수 있음을 안다. 이 일을 신랑은 아가에서 다음 말로 밝힌다. “예루살렘의 처녀들아 스스로 내 ‘사랑’이 일어나기까지는 구태여 흔들지도 깨우지도 말아다오”(3, 5)
http://blog.naver.com/starlite03/30034005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