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13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루이사 피카레타의 생애와 사명,제12장-교회의 미소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 ​루이사 피카레타의 생애와 사명 제12장 교회의 미소 1990년 10월 7일에 거행된 성 안니발레 디 프란치아 신부의 시복식은 루이사의 생애와 사명을 새로이 평가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기도 수도회 (로가찌오니스티 수도회)의 창설자인 이 신부를 모범 사제로 추앙하도록 결정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루이사의 삶과 저술에 최대의 경의를 표한 것이다. 성 안니발레는 루이사의 특별 고해 사제이며 그녀의 저술을 검열하는 역할을 하도록 트라니 교구 대주교의 임명을 받았으니, 그녀의 저술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일을 그보다 더 분명하게 위임받은 사제는 없었다. 이 임무 덕분에 그는 루이사를 경애한 베다 신부, 첸토 추기경, 성 비오 신부 및 다른 저명한 신부나 고위 성직자들과..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루이사 피카레타의 생애와 사명,제11장-죽음과 장례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루이사 피카레타의 생애와 사명 제11장 죽음과 장례 (루이사 피카레타: 1865년 4월 23일 이탈리아 코라토 출생 ~ 1947년 3월 4일 폐렴으로 사망 ) 전쟁의 종결이 코라토의 루이사에게는 이렇다 할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의심의 눈초리들이 이루는 구름이 아직 걷히지 않았으나 그녀는 사제와 평신도 친구들의 사랑 안에서 안전하게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맡긴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시련기에 놓인 루이사의 성덕을 높이 평가하는 사제들이 많았는데, 특히 ‘카푸친회’ 의 여러 사제들과 수사들은 아직 세상에 살아 있는 루이사를 성인으로 공경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트리쟈노의 카푸친회 공동체의 역사가인 다니엘 신부, 전(前) 카푸친회 장상 테렌치오 신부, 트리니타폴리 교구의 목자인 존 ..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루이사 피카레타의 생애와 사명,제10장 - 박 해 (2)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 ​루이사 피카레타의 생애와 사명 제10장 박 해 (2) 박해가 불폭풍처럼 일어난 이 시기에 루이사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비오 신부에게 조언을 청하는 편지를 썼다. 비오 신부는 산죠반니 로톤도의 ‘카푸친회’ 사제로서 일찍부터 오상을 받고 기적을 행하기도 했으며, 2000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회 역사상 오상을 받은 최초의 사제로 알려졌던 성인은 루이사의 편지를 받았을 무렵, 그 자신도 연전에 교회 내부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이미 맹렬한 박해를 겪었던 터였다. (그것은 1931년 6월부터 1933년 7월까지의 일이었다. 검사성성에 의해 개인적으로 미사를 올리는 것 외에는 사제로서의 모든 직권을 박탈당했던 것이다!) ※ 성 비오 신부는 루이사의 단죄 소..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제9장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제10장 - 박 해 (1)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루이사 피카레타의 생애와 사명  제10장 박 해 (1)    루이사에게 1928년부터 1938년까지의 십 년은 1928년 10월 7일에 ‘거룩한 열성의 딸 수도원’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에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특별한 사건이었다. 그 전에 딱 한 번 이런 예가 있었는데, 안니발레 신부가 수도원 밖의 한 사람을 초빙하여 그의 수도자들과 함께 살게 하면서 수도자들의 영성 생활을 향상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1987년의 일이었다.  ※ 코라토의 ‘거룩한 열성의 딸 수도원’의 공식 문서를 보면, 성 안니발레가, 기도 수도회 (로가찌오니스티 수도회) 총장으로 자신을 계승하도록 선정한 판탈레오 네 팔마 신부가 1927년 10월 7일에 개원한 수도원에 “하느님 뜻의 집” 이..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제9장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루이사 피카레타의 생애와 사명 제9장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루이사는 1926년 1월 30일 데 베네딕티스 신부의 돌연한 죽음으로 슬픔에 잠겼고, 그 심경을 이렇게 토로하였다.“고해 사제의 거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비통의 극에 달해 있었다. 다정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잦은 부재로 겪고 있는 나의 숱한 내적 고통들에다 이토록 괴로운 심적 타격 하나를 보태고자 하셨으니, 내 가련한 영혼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을 내게서 앗아가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뜻이 이루어 지소서 (Fiat! Voluntas Tua)! 이 ‘피앗’ 이 언제나 이루어지며 사랑과 흠숭을 받으소서! 땅은 그런 사람을 소유할 자격이 없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벌하시려고 그를 천국으로 데려가셨나 보다...나는 ..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제 6장 숨은 생활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제 6 장 숨은 생활 18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이탈리아와 유럽 전역이 사회적 분쟁에 휘말려 있었으므로, 교황 레오 13세는 성직자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헌신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 무렵 시칠리아 섬의 메시나 시에서 안니발레 디 프란치아 신부가 가난한 이들과 근로자와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라는 교황의 부름에 온몸으로 응답하였다. 나중에 루이사의 생애와 사명 전파에 주된 역할을 하게 된 이 젊은 사제는 70년대와 80년대에 “사람이 짐승처럼 비참하게 살고 있는, 세상에서 버림 받은 구역” 인 메시나의 빈민굴에서, 가난한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성 안니발레는 자신의 양 떼에게 종교 교육을 시키며 성사들을 집전해 주고, ..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제 5장 하느님 뜻 안의 일상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루이사 피카레타의 생애와 사명제 5 장하느님 뜻 안의 일상   1889년부터 루이사의 일상은 규칙적인 리듬으로 반복되었다. 그녀는 밤낮으로 예수님과 결합하여 반영구적으로 고통을 받는 상태로 있었고, 이를 일컬어 “나의 일상적인 상태” 곧 “여느 때와 같은 상태” 라고 하였다. 자정이나 밤 한 시경이 되면 몸이 돌같이 굳고 숨이 멎으며 영혼이 몸과 분리되었으니, 이때 부터 새벽 여섯 시까지 그녀의 몸은 납덩이처럼 무거운 부동 상태로 누워 있는 반면, 영혼은 예수님과 함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예수님의 인도로 천국과 지옥과 연옥을 방문했으며, 예수님과 성모님의 생애 중 수 없이 많은 광경을 목격했고, 세상 여러 곳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영혼들을 위..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 제 4 장 은총 중의 은총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루이사 피카레타의 생애와 사명제 4 장은총 중의 은총  1889년 9월 8일 이전 약 일 년 동안 루이사 피카레타는 갈바리아산 정상을 향해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고해 사제 데 베네딕티스 신부로부터 산 제물의 상태로 들어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날부터 그녀는 침상에서만 지냈다. 낮 동안은 기도하고 고통을 받으며 바느질을 하고, 밤에는 시체 같은 상태가 된 채 인류의 죄로 인한 고통을 받는 생활이었다. 그녀가 침상에 붙박여 있게 된 첫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의 사랑아, 너를 이 상태에 두고자 한 것은 내가 더 거침없이 네게로 와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함이다. 사실, 나는 우선 너를 외부 세계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하였고, 다음은 사람들과 관련을 맺을 수 있는 기회..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제 3장 산 제물이 된 영혼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루이사 피카레타의 생애와 사명제 3 장 산 제물이 된 영혼  사탄이 루이사 피카레타와 전면전을 벌이고 있었던 시기, 곧 1878년부터 1881년에 걸쳐 이탈리아는 민중 소요 사태에 휩싸여 있었다. 이 시기가 끝나갈 무렵 루이사 피카레타는 새롭고도 더욱 심한 고통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1881년에 루이사의 부모는 몹시 쇠약해진 그녀를 쉬게 하려고 토레 디스페라토 농장에 데려갔는데, 여기에서 지내던 중 일어났던 일을 그녀는 이렇게 회상하였다. “시골에서 지내던 어느 날, 마귀들이 최종적인 유혹을 하려고 들었는데, 어찌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 힘이란 힘이 다 빠져 버려 실신할 지경이었다. 실상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나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고 거의 죽게 되었다. 그때, 수없이 많은 ..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제 2장 그리스도의 부르심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제 2 장그리스도의 부르심 1870년대는 루이사 피카레타의 영성 생활에 새봄이 찾아온 시기였다. 적어도 일 년 동안 코라토의 대성당에서 교리 수업을 받으며 첫영성체 준비를 했는데, 여덟 살 때 교리 문답 성적이 우수해서 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자 본당 사제인 필립포 푸리 오 신부는 견진 성사도 함께 받도록 권하였다. 루이사는 아홉 번째 생일이며 세례 기념일이기도 한 1874년 ‘사백(卸白) 주일’ (곧 부활 제12주일)에, 거룩한 영성체로 예수님을 받아 모셨고, 또한 트라니-나자렛 대교구 대주교가 집전한 견진 성사로 성령의 인장을 받았다. 이 견진 성사와 성체 성사의 은총이 루이사의 영성 생활에 새로운 장(章)을 연 것이다. 여전히 무섬증과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기도하며 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