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종실화-나는 왜 천주교로 개종하였는가?'
3. 인조교회(人造敎會)의 분열은 불가피
권영규
1929년 10월 8일생, 1952년 국립대구사범대학 영문학과 졸업
나는 중학교 재학 시에 기독교에 대하여 큰 흥미를 가져 그로부터 나오는 각종 출판물을 읽고 인생 문제 해결에는 기독교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가톨릭교에 대해서는 삐뚤어진 지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으며 무조건 비현실적인 케케묵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대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인 줄로만 알았다.
그리하여 사범대학 전문부 1학년 학생의 몸으로 아무 인도자 하나 없이 홀로 찾아 문을 두드린 곳이 대구 봉산동 성결교회였다.
그때는 프로테스탄트에 그렇게나 많은 교파가 있는 줄도 몰랐으며, 그저 열심히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배우고 해서 제법 열심분자가 되어 세례도 받고 떡과 포도주도 몇 번 얻어먹었다.
그리하여 아는 사람이 많아지고 동창생 중 많은 신자가 있어 YMCA를 조직하여 모임에는 한 번도 빠져본 예가 없었으며 설교도 더러 하였다. 교회에서는 유년 주일학교의 교사, 청년회 학생회의 한 멤버로서 있었으며, 그야말로 형제같이 다정하였다. 나의 뒤를 따라 어머니도 세례를 받았다.
차차 여러 교파가 있는 것을 알게 되고 교리 다툼도 듣게 되었다. 「기독교회사」를 읽고 많은 상식도 얻게 되었다. 왜 그렇게나 많은 교파가 있는지, 의혹은 날로 커지게 되었으며 목사의 설교 내용, 장로의 기도 내용에 대한 비판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까운 곳으로부터 멀리 칠성동, 비산동에 이르기까지, 장로교, 안식교, 구세군, 성공회에 이르는 모든 교파를 찾아가서는 관찰하며 혹은 교회 책임자에게 질문도 하였다. 그러나 마음의 의혹에 대한 아무런 해결도 얻을 수 없었다.
어느 수요일 밤 성경과 찬송가책을 가지고 가톨릭 교회당으로 찾아가 보았으나 거기에는 아무런 예배도 없었다. 이와 같이 하여 무조건적 열광기는 지나가고 비판기에 도달하였다.
대구 학생 YMCA는 처음 조직할 때는 몇 백 명의 남녀 학생들이 모였던 것이 몇 달 못 되어 몇 명의 간부 이외에는 도무지 나타나지 않았다. 왜 그렇게나 경솔하고 날뛰고 아는 척하고 떠드는, 그들의 허영에 견딜 수 없었던지……. 나에게는 생리적으로 맞지 않음을 느꼈다.
종종 모이는 기도회, 신자간의 가정방문은 사교적 요소가 대부분인 것 같았다. 밖으로는 장로교회가 파당을 지어 싸우는 것을 듣고 보고 하였으며, 안으로는 K목사와 장로들, 또는 전도부인간의 복잡한 문제와 그에 따르는 추방운동 등등, 여러 가지로 실망하였으나 교회 내에서는 오직 그리스도만 찾고 믿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학부(영문학과) 1년, 2년 때에 라틴어와 불어 시간에 지금은 효성 여자 대학장이신 전석재 신부님을 강사로 모시게 되어 가톨릭에 대하여 알아볼 기회를 얻었다. 반석 위에 세운 교회의 무류성과 성경 자유해석주의와의 차이를 알게 되었으며 프로테스탄트 분열의 불가피성은 명확하여졌다. 여러 좋은 서적 중에서도 「교부들의 신앙」은 특히 도움이 되었다.
계시에 의하지 않고 각기 자유로이 학설을 내세워 조직한 교회, 이에 있어서는 자기파의 헌법 또는 교리를 무시 내지 일소에 붙이는 대부분의 신자를 보았으며, 목사의 이동에 따라 신자들이 이리 저리 소속을 옮기는 것을 보았다. 신자의 감정을 흥분 도취케 하여 울릴 수 있는 복(?)도 많은 목사가 있는가 하면 몹시 입담이 좋지 못하여 신자들이 도망치는 가련(?)한 목사도 있었다.
아름다운 수사를 나열하려고 애쓰는 웅변적인 기도와, 남을 간접적으로 비방하는 또는 이기적인 기도도 있었다. 교회의 규정을 전연 무시하고 자유로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대부분의 인텔리 젊은 신자와, 이것을 극구 비난하는 열심한 청년도 보았다. 성경만 읽고 비판을 말고 무조건 믿기만 하라고 하면서도 열렬히 용감하게 싸우는 교리 다툼, 또는 세력 다툼도 보았다.
무의식적으로 가난한 가정을 차별, 무시하는 전도부인 또는 신자 그룹도 있었다. 허영에 도취하여 남 앞에 날뛰며 잘난 척하는 젊은이들 특히 학생들, 또는 오직 음악 감상과 사교를 위한 교회 출입에 대하여 비난도 해 보았다.
정치적으로 놀며 종교를 정치에 이용하려 하고, 또는 그의 도구로 사용하려 하여 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꼬박꼬박 아첨하는 인텔리 지도자도 보았다. 이러한 요소가 프로테스탄트에 염증을 낼 원인이 되었지만, 문제는 그것보다도 근본적인 것에 있었다.
계시에 의한 완전한 종교, 확고한 신념으로 목숨을 바쳐가며 의탁할 수 있는 주님이 직접 세운 절대적 종교,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안전한 반석 위에 세운 종교, 고요하며 허영이 없는 하나요, 거룩하고 공번(보편)되고 종도(사도)로 좇아 내려온 교회로 찾아낸 것이 가톨릭 교회였다.
그리하여 삼 년간의 처녀 신앙을 팽개치고 1949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영세 입교하였으며 이듬해 크리스마스 때는 어머님이 영세 입교하였다.
프로테스탄트에서 얻은 편견으로 이해하기 힘든 교리도 있었다. 특히 성모님께 대한 공경 또는 기구(祈求 : 원하는 바가 실현되도록 빌고 바람. ‘기도’의 옛 용어.)의 강조, 성상 및 그 앞에서의 기구와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차차 교리에 대한 지식이 늘어감에 따라 아무런 모순도 없을 뿐 아니라 「교부들의 신앙」을 읽어 지당하고 완전한 해답을 얻었다.
마음을 끄는 교리는 너무나 많았다. 교회의 지일성(至一性), 지성성(至聖性), 지공성(至公性), 종도(사도)전래성(宗徒傳來性), 영속성(永續性), 무류성(無謬性) 및 일곱 가지 성사와 같은 교리를 프로테스탄트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신비스러울 정도로 마음이 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귀정에 따라 여러 가지 곤란이 수반되었다. 첫째 너무나 쓸쓸하고도 외로운 몸이 되었다. 청년회의 청년들, 집사, 장로들이 찾아와서는 예배당에 안 나오는 이유를 캐며 가톨릭에 대한 피상적이고 무식한 논리를 펴기도 하고, 온갖 비난욕설을 폭주하는 이도 있었으나 그러한 유치한 이론에 쩔쩔매는 나도 아니었다.
또 어떤 이들은 ‘아무 교회에서라도 믿음만 철저히 가지라’고 하면서 ‘진심으로 섭섭함을 금치 못하겠다.’고 하였고, 심지어는 붙들고 우는 이도 있었다.
학교의 모든 친구들도 이상하게 보았다. 몇 해 동안 묶인 인정은 차마 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유년부 주일학교의 지극히 사랑하던 귀여운 아동들을 생각할 때는 정말 가슴이 터지는 듯하였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아는 사람이라고는 거의 없다시피 하였고 프로테스탄트에서와 같이 곧 사귀어 지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퍽 냉정한 것 같았고 그리하여 퍽 쓸쓸한 고독을 맛보았다. 더구나 어머니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가정환경으로 인해 너무나 외로웠다. 그러나 진리를 얻은 마음의 평화는 비길 곳이 없었다.
원죄와 모든 본죄를 깨끗이 씻고 중생의 몸이 되어 정말 감개무량하였다. 신앙을 위해서는 모든 인정 관계도 어찌 할 바가 없었다. 그러나 모든 프로테스탄트 동창생들과는 지금도 여전히 정답게 지내고 있다.
그러나 귀정(歸正 : 바른길로 돌아옴) 후에 나의 신앙심은 확고해졌으며 언제나 죽을 수 있는 몸이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형제들이 만일 가톨릭이 무엇인지 알기만 한다면 개종할 이가 얼마나 많아질 것인가!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편견된 거짓교육을 받아 가톨릭을 오해하고 있으며 냉정한 판단과 이지적인 연구에 의한 아무런 탐구도 없이 일시적인 감상적 흥분에 넘쳐 또는 어떤 심적 고집작용에 의하여 전연 알지도 못하는 가톨릭에 반대하는 배타주의를 걷고 있는데 이런 태도를 버리라고 권고하고 싶다.
천박하고 편파적인 역사지식으로 생명 문제, 인생 문제를 그렇게나 쉽사리 속단하여 적당주의로 고집을 피운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사소한 지엽, 말엽적인 문제를 그것조차 몰이해와 무식과 과대평가로 경솔하게 백안시함은 자기의 무지를 스스로 폭로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계시에 의하지 않은 종교, 즉 주관주의, 성경 자유해석주의의 결과가 오늘날 얼마나 많은 분열과 반목을 일으켜 왔는가? 그러나 이것을 막을 방도는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 분열은 그들이 타고난 바로 그들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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