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천주교로 개종하였는가?-개종실화

6. 신앙의 회의를 넘어서 - 서울 감리교 신학교생 김창수

Skyblue fiat 2023. 11. 20. 17:39

 

'개종실화-나는 왜 천주교로 개종하였는가?'

 

6. 신앙의 회의를 넘어서

 

전 서울 감리교신학교생 김창수

1926년 12월 8일 출생, 1946년 평양 성화신학교 입학(본과)

1949년 4월 광주 초월면 신양리 교회 시무

1950년 10월 천주교로 개종 

 

준희 양!

편지 정말 반가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양을 본 지도 어느새 두 해 가까웠군요. 평양을 떠난 지 여섯 해만에 뜻하지 않은 곳 부산에서 양을 만난 것은 2년 전 늦은 가을이었나 봅니다.

양은 그때 반갑게 인사를 하자마자 “선생님은 비겁해요. 무엇 때문에 개종을 하셨나요?” 첫마디로 이런 질문을 하였지요. “글쎄, 그야 물론 개종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지요.” 할 뿐 의미 있게 웃어 보이는 것으로 쏘아붙이는 물음에 답을 미루어 버렸던 것 같소.

 

오늘 이처럼 다시 개종의 동기를 말해 달라는 양의 편지를 받아들고 나는 긴 글로 답을 써보기로 작정하였소.

왜냐하면 양이 이것을 묻게 된 동기에 대해서 짐작되는 바가 있고 따라서 그것에 대하여 도움이 된다면 하는 의욕이 솟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종의 동기를 간단히 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듯싶습니다.

그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닌 수많은 원인들이 가로 세로 짜놓은 베틀 마냥 얽히고 설켰기 때문이고, 또 나에게는 그 모두가 하나도 뺄 수 없을 만큼 매우 중요한 동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동기를 공분모로 해서 하나로 표현해 본다면 나는 그것을 ‘신앙의 회의’라고 하겠습니다.

믿어오던 진리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되고 그것에 회의를 느끼자 그것을 풀어 밝히려고 애쓴 나머지 가톨릭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앞서 명백히 말해 두고 싶은 것은, 이 탐구에 있어서 나는 어디까지나 이성을 지침으로 삼아 왔다는 것이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나면서부터 알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만 사실 인간의 이성은 진리를 찾아 얻기까지는 만족을 못하는 것 같소.

 

내가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지금까지 진리라고 믿어온 것에 회의를 느끼고 참 진리를 찾아 헤맬 때에 우리는 차디찬 이성을 구사해야 하기 때문이요.

데카르트는 ‘나는 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고, 사르트르는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이처럼 지금까지 이성 활동의 왕좌를 차지해야 할 철학은 주관주의로 빠졌고 논리적이며 객관적이기 보다 옳고 그른 것의 판단을 주관 세계에만 두어 왔기 때문에 종교적 진리 역시 그 영향을 적지 않게 입은 것 같소.

 

준희 양!

그러므로 나는 이 글을 쓰면서 가령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옳고 그른 것을 말함에 있어서도 아전인수 격으로 할 마음은 조금도 없소.

오직 객관적 추리와 논증에만 충실하려고 하오.진리는 ‘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것은 진리다.’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진리,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객관적인 증명이 있을 때만 진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오.

‘진리!’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종교의 진리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진리를 가리키고 있지요.

 

개종의 동기가 신앙에 대한 회의라고 했습니다만 내가 신앙의 진리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게 된 것은 이미 평양 신양리 감리교회에서 양과 같이 주일학교 교사로 충실히 일하던 그 시절에 비롯된 것이오.

당시 나는 감리교 신학교 학생이었고, 따라서 내가 지향하는 것은 교역자가 되어서 진리를 전파하는 그것이었소.

 

나는 내가 속한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믿었고 그러기에 이 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고 믿었소.

준희 양도 잘 아시다시피 강관흥 목사님은 수천 권의 종교 서적이 비치되어 있는 서재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소. 나는 침식을 잊을 정도로 열심히 종교의 진리를 알아 내 것으로 삼기 위해 달음박질쳤던 것이오.

 

그처럼 교회 사업에 몰두하는 한편, 신학에 대한 공부가 진척을 볼수록 그림자와 같이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의 회의, 그것이었소. 공부해 갈수록 내가 믿는 신조가 의심스러워지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이 과연 예수께서 계시한 진리인가, 하고 자주 반문하게 되었소.

 

준희 양!

이 회의는 다른 무엇보다도 교파의 분열에 대한 고민에서 온 것이었소. 모두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무엇 때문에 장로교니 감리교니 또는 성결교니 구세군이니 하고 갈라져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었소.

더구나 단순한 교파의 분열, 그 사실보다도 나를 고민에로 이끈 것은 각 교회마다 가르치는 교리가 서로 다르다는 그 점이었소. 모든 교회가 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가르친다고 하면서 그 가르치는 내용이 서로 다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소.

 

준희 양!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까닭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동양에도 공자, 석가의 유교, 불교가 있건만, 이러한 조상의 유산을 저버리면서까지 그리스도를 믿는 까닭은, 그리스도야말로 단순히 도를 닦거나 깨달은 종교적 천재가 아니라, 그분 자신이 신이기 때문이오. 또한 그분은 진리를 가르친 교사가 아니라 진리 자체이시기 때문이외다.

 

즉 사람이 아니고 신 자신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을 믿고,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진리요 생명이요 길이므로, 사람이 생각해 내거나 깨달은 진리가 아님은 물론이고, 결국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영원한 진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라고 하겠소.

그런데 그 그리스도의 진리를 가르친다는 각 교파마다의 교리를 살펴보면 제각기 다른 주장을 고집하는데, 그렇다면 그 차이는 왜 생기며 무슨 까닭인가……. 알고 보면 이것이 결국 싹터가는 회의의 시발이었소.

 

준희 양!

이 문제를 심각히 생각하게 된 것은 송창근 목사님의 실천신학 시간에 성찬과 세례에 대한 각 교파의 견해에 대한 강의를 듣고, 또 그 논쟁에 대한 문헌을 연구하고 성경의 말씀과 비교 연구한 뒤부터였소. 그때부터 더욱 뚜렷해진 회의와 고민, 그래서 나는 진리를 향해 길을 더듬어 달음박질하였던 것이었소.

 

준희 양!

당신도 아시다시피 모든 교파가 다 인정하는 성사는 세례와 성찬이지요. 세례와 성찬 그것에 대해서는 성경에 명백한 기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각 교파가 다른 견해를 가졌다는 데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어서 나는 그 논쟁에 휩쓸려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오.그러면 먼저 성찬 문제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겠소.

 

마르틴 루터나 멜란히톤은 ‘면병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의 몸이 계시다.’고 현존설을 지지하면서도, 전질변화(全質變化, 實體變化)가 아니라 몸과 면병이 하나가 되어 함께 있다는 실체공존설(實體共存說)을 주장했던 것이오.그런가 하면 츠빙글리, 에코람 파티우스, 카를슈타트, 풋체르는 상징설을 주장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츠빙글리는 ‘성찬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라고 강조했소.

 

즉, 그는 면병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영하는 데서 오는 은총 같은 것은 인정하려 들지도 않았소.다른 예로 칼빈의 견해는 또 다르지요. 그는 절대적인 예정설의 주장자였던 만큼 성체의 신조에 있어서도 그것과 관련해서 ‘면병 자체가 예수의 성체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천국에 가기로 예정된 사람에게 한해서만 예수의 성체를 영하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갖는다.’고 말하였소.

 

소위 종교 개혁의 시조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견해가 이처럼 달랐고 이 같은 차이가 날이 갈수록 새끼를 쳐서 현재 우리나라만 해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또는 침례교 그 밖의 수많은 교회가 각기 다른 신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양도 잘 아는 사실일 겁니다.

 

그러기에 현재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면병 속에 그리스도가 계신다고 믿고 영하는 이도 있고,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한 의식이라고 생각하고 영하는 이도 있고, 면병 속에 예수님이 계시는 것은 아니나 계신다고 믿고 영하면 참 성체를 영한 것과 같은 은혜가 있다고 알고 영하는 이도 있소.또 어떤 이는 영하는 순간 예수님이 면병 안에 계시다가 없어져 버린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가 하면 그것은 하나의 미신행위요, 따라서 반그리스도적 행사라고 전적으로 부정하는 이도 있소.

 

준희 양! 신학교 당시부터 이 논쟁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나는 성체설 한 가지만 가지고도 이렇게 많은 이론이 있다는 것을 알자 원치 않는 회의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게 되었소.

루터의 말을 믿을 것인가, 칼빈의 뒤를 좇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나 자신이 성경을 읽고 내 판단대로 믿어 버릴 것인가? 그러나 당시 감리교회의 신학생이었던 나는 당연히 소속 교회의 신조대로 믿어야 했소.

 

양도 아시다시피 감리교회는 존 웨슬리가 시작한 교파지요. 시조 웨슬리는 칼빈의 절대예정설에 반하여 인간의 자유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했소. 물론 웨슬리는 두 성사, 즉 세례와 성찬을 인정은 하였으나 그 중 성찬은 기념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며 따라서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실재를 부정했소. 그러면서도 만일 정신적으로 그렇게 믿어진다면 그렇게 알고 영해도 좋다고 하였소.솔직히 말하면 웨슬리의 이 주장은 칼빈이나 루터의 주장보다도 논리상 더 빈약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소. 그가 만일 그리스도의 실재를 믿지 않았다면 그것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겠소.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른 말로 그렇게 믿고 영해도 좋다고 한 것은 결국 멋대로 생각하고 영하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소.

 

여기서 나는 드디어 루터, 칼빈, 츠빙글리, 웨슬리 등 그들의 가르침, 신조, 신학, 주장을 의심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의 설을 뒤이어 가르치는 교회들, 특히 그 중에서도 내가 믿어온 감리교회의 신조에 대하여 의심하게 되었던 것이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믿어야 했을까요? 물론 그리스도를 믿어야 했지요. 그러나 루터도 칼빈도 웨슬리도 역시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이었소. 더구나 당시 내가 알기에는 그들은 타락한 천주교회를 개혁했고, 천오백 년의 오랜 역사를 통하여 흐려놓았던 그리스도의 진리를 다시 찾은 복음의 새 발견자로만 알고 있었던 만큼, 그들에 대한 의혹이 싹이 트고 내가 속한 교회의 신조가 의심스러워지자 훌쩍 암중모색(暗中摸索 : 물건을 어둠 속에서 더듬어 찾는다는 뜻에서, 확실한 방법을 모르는 채 일의 실마리나 해결책을 찾으려고 애씀)의 길을 더듬었던 것이오.

 

준희 양! 너무 긴 설명에 지루하실지……. 그러나 성체의 도리 그것뿐이 아닙니다. 세례, 성경, 교회, 선행, 심지어는 신관(神觀), 기독관(基督觀)에 이르기까지 앞서 말한 성체의 예에 못지않게 루터, 칼빈, 멜란히톤, 웨슬리에서 칼바르트, 부르노에 이르기까지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구세군, 안식교, 침례교 등 그 밖에 내가 잘 아는 교파만 해도 약 오십여 개 교회의 주장이 서로 다르니,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가 없어 그야말로 옥석 ․ 진오(眞誤)의 구별이 모호하였소.나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소. 어느 것이 참 진리인가?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사고. 될 수 있는 한 교파의 선입견을 없애고 냉정한 입장에서 얽힌 문제들을 풀어 밝히고자 칼빈의 「기독교 강령」과 루터의 「기독교의 자유」 등, 그 외에도 몇 권의 주석 저서를 읽고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소.

 

그것은 즉, 루터나 칼빈은 어떤 설을 내세울 때 모두 성경을 증거로 삼았고, 또 자기가 가르치는 성경의 해석은 성령의 인도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자기의 해석이 진리라고 확신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왜 서로 다른 주장이 생기게 되는가, 결국 성령께서 성경 구절을 깨닫게 할 때 한 사람에게는 A라고 하고 또 한 사람에게는 B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점을 나는 의심하였소.

 

다시 성체의 예로 돌아갑니다만, ‘이는 내 살이니’, ‘이는 내 몸이니’ 하는 말을 진리 자체이신 성령께서 칼빈에게는 ‘그것은 몸도 피도 아니다. 다만 기념하라는 상징이다.’라고 깨닫게 하시고, 루터에게는 ‘그 속에는 포도주와 면병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이 계시다.’ 라고 깨닫게 하시고, 또 다른 이에게는 ‘그렇게 꼭 믿으면 은혜를 받는다.’고 했을 것인가?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진리가 하나지 왜 여러 개이겠습니까? 5에다 6을 합하면 답이 11이지 8도 9도 또는 20도 아닐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주장이 서로 다른 것은 그들이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계시를 그대로 믿지 않고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 믿기 때문에, 바꿔 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계시 그것 자체보다 자기의 생각을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소.

 

준희 양! 이러한 확신을 얻게 된 것은 내가 시골 조그마한 교회를 맡아서 약 일 년 동안 목회 생활을 하면서 성경도 읽고 그들의 주장과도 비교한 끝에 얻은 결론이었소.

그러면 내가 왜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가? 그것은 그들이 가르친 그리스도의 진리와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계시를 비교할 때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을 발견했던 까닭이오. 그것을 나는 성찬의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들의 교훈을 비교해 보기로 합니다.

 

준희 양!그리스도는 돌아가시기 일 년 전에 먼저 성체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을 행하시고, 또 그 조금 전에 카나의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여 천주만이 행하실 수 있는 기적을 행하여 자신의 전능을 보이신 다음, 신중히 성체에 대한 말씀을 하셨던 것이오.요한 복음 6장 25절에서 72절까지를 잘 읽어주시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필요한 빵이 있음을 말하였고,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고 하셨소.

 

유다인들이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그리스도를 사람으로만 알고 천주인 줄 몰랐던 탓으로 그들이 논쟁하고 있을 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고 명백히 선언하셨소.즉(1) 영생을 얻기 위하여 빵을 먹어야 한다는 것(2) 그 빵은 그리스도 자신의 살과 피라는 것(3) 그것은 참으로 먹고 마셔야 할 양식이며(4) 그리스도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조건으로 그리스도는 선언하셨소. 이 명백한 선언에 걸려 넘어진 많은 사람들이 믿을 수 없노라고 물러갔건만 예수께서는 자기 말을 취소하거나 정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신 말씀에 대하여 끝내 믿기를 요구하셨던 것이오.

 

이같이 미리 약속하시고 또 예비 교훈을 주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전날 밤 열두 사도를 데리고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축연을 베풀었던 것이 아닙니까?예수께서 면병을 들고 축성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맨 처음 성체를 영하게 하셨소. 마태오 복음 26장 26절에서 29절까지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오.

그때 예수께서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하시고 또 잔을 드시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하셨소.이와 꼭 같은 뚜렷한 기록이 마르코 복음 14장 22절 이하, 루카 복음 22장 19절과 20절 이하, 코린토 전서 11장 23절 등에 기록되어 있어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오. 반석보다 강한 성경에 증언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한 종교개혁자들의 개인 자유 해석은 시인될 여지조차 없는 것이 아니오?

 

앞서 말한 루터나 칼빈, 웨슬리, 그들의 성체관은 명백한 이 그리스도의 말씀과는 조금도 상통할 수 없는 견해요. 따라서 그것은 그들의 개인적인 해석에서 오는 편견에 불과한 것이오.이것의 명백한 논증자로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나와 다른 것을 가르친다면 저주를 받으라.’고 자신만만하게 그리스도의 진리를 선포한 사도 바오로입니다. 그는 코린토 전서 11장 27절에서 ‘그러므로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라 하고 또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 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라고 이처럼 엄하게 성체를 영할 때 취해야 할 태도를 말하였소.

 

그것을 막 먹고 마신 죄로 ‘여러분 가운데에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 많고, 또 이미 죽은 이들도 적지 않은 것입니다.’라고 하셔서 벌 받은 사람이 있음을 말했던 것이오.만일 칼빈이 말한 대로 천국에 가도록 예정된 사람이 영할 때만 주의 살을 먹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나는 것이며, 웨슬리와 같이 단순히 십자가상 죽음의 기념일 뿐 예수님의 살과 피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빵과 포도주쯤 먹었다고 천주 앞에 죄 될 것은 무엇이며 벌 받을 것이 무엇이겠소?

 

준희 양! 이리하여 나는 참 목적이 구령(救靈 : 신앙으로 영혼을 구원함)이라면 그들의 주장이 어떠하든, 교회가 무어라고 가르치든 그 모든 것을 배격하고 오로지 명백한 성경의 기록대로 믿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소.이 길이야말로 참된 복음주의가 걸어야 할 길이며 진리에 충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도리라고 믿었소. 따라서 성경대로 믿고 설교하고 실천하는 것만이 참다운 기독교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확신하였던 것이오.

 

준희 양! 그 외에도 그들이나 혹은 각 교파의 이설을 성경과 비교해 가면서 오류를 증명해 내려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것을 다 들어 보일 수는 없는 일이고 오직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의 결론만을 내릴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겠습니다.

즉, 제 아무리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자칭하더라도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과 다른 것을 가르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참교회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고, 따라서 내가 속한 감리교는 물론 장로교, 성결교 등 각 교파가 참다운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소.

 

준희 양! 내 말이 너무 지독스러운 속단이라고 나무라지 마시고 끝까지 냉정한 이성에게 호소하여 참고 들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사실 내가 지금 참교회가 아니라고 지적하는 바로 그 교회는 내게 있는 온갖 젊은 정열을 송두리째 바쳐온 교회요, 거기서 나는 사랑을 깨닫고 선을 배우고 은혜를 입었소.

 

이 글을 써 가면서 잊을 뻔 했던 갖가지 아름다운 추억이 새로워지자 한번 상처를 입은 마음이라서 헤어날 수 없는 괴로움을 어찌할 수 없소. 그러나 나는 압니다. 이성은 감정을 지배하여야 하고 진리는 오류를 이겨야 하며 그리스도의 말씀은 사람의 말을 침묵케 한다는 것을!

 

준희 양! 나는 모든 문제들을 더욱 철저하게 알기 위하여 성경과 개혁자들, 특히 마르틴 루터의 견해를 대조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소. 연구가 깊어질수록 루터의 견해야말로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과는 거리가 먼 점을 여러 가지로 알아내게 되었소. 무슨 재간으로 일일이 실례를 들어 설명을 하겠소만 결국은 종교적 개인주의에서 오는 성경의 자유 해석이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준희 양! 이런 때에 또 하나의 자극을 받게 된 것은 죽음을 앞에 둔 그리스도의 기도, 그것이었소.요한 복음 17장을 자세히 읽어 주시오. 바야흐로 때는 오고 악당들이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하여 흉계를 꾸밀 무렵, 그리스도는 이미 사랑하는 제자들을 이단과 사교와 민족적인 압제 속에, 너무나 강한 악의 세력에 덮여 아직도 나약한 채로인 제자들과의 이별을 준비하시는 주님이시었기에 당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제자들의 장래를 위하여 피땀 속에서 기도하셨을 그 모습!

착하신 예수께서 염려하신 것은 무엇보다도 당신의 복음을 듣고 믿게 된 그들의 내일이 염려되었던 것이오. 그러기에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11절) 이처럼 간곡히 기도하셨소. 이어 그들의 구원과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는 박해에서 보호해 주시기를 원하시고 또 거룩하게 되기를 기도하셨소.

 

다시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21절) 또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22절) 하고 믿는 무리의 일치를 원하여 세 번씩이나 간청하셨소.하나……!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사회 곧 교회는 모든 인위적인 이론을 다 제쳐 놓고라도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사소한 교파를 제외하고서도 꽤 큰 교파만 팔백여 개나 되는 오늘의 이 현상이 과연 그리스도의 뜻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요? 물론 그리스도는 팔백은커녕 팔십의 십분의 일인 여덟 교회도 원치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 되기를 원하셨고 그러기에 그것이 수난 전날의 간곡한 기도가 아니었습니까?이방인의 사도 성 바오로는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1코린 12,27. 콜로 1,18. 에페 1, 22. 4,12)‘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그렇습니다. 틀림없이 교회는 한 몸이지요. 이 몸은 하나이나 지체가 많다는 바오로의 말을 인용하여 신교신학에서는 교회 지체설로 프로테스탄트의 분열상을 합리화하려는 이론을 나는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아전인수 격의 이론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교회는 몸이기 때문에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요, 그 밑의 오장육부 즉 전문적인 기능을 맡은 부분이 제각기 역할을 다하는 것으로, 하나의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신교신학에서는 이것을 장로교니 감리교니 성결교니 하는 교파들이 몸 중의 팔, 다리 혹은 손, 발, 심장, 폐, 위장 등 저마다의 역할을 맡아 함으로써 한 생명을 유지하듯이, 각 교파가 그러한 지체의 역할을 하여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하나의 몸을 이루어 주께서 맡긴 사명을 다한다는 것이라고 하였소.그러나 다른 반증을 내세울 것도 없이 좀 더 바오로의 말씀을 읽어보면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고, 또 머리가 두 발에게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습니다.’(21-22절) 한 말에 비추어 보거나 그 밑에 기술된 것을 보더라도 신교의 분열을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서로 다른 신조와 윤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닙니까.

 

다리는 말하기를 ‘세례는 믿는 표로 하는 형식이니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고, 손은 ‘세례란 하라니까 해도 좋기는 하지만 전혀 필요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할 때, 그 팔과 다리가 한 몸이라면 그것은 하나의 넌센스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때 성 바오로의 서간은 나의 훌륭한 스승이 되었고 진리에의 안내자였소. 나는 갈라티아서 주석을 공부하다가 무엇보다도 감동적인 성 바오로의 말씀을 읽고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얻은 듯 기뻤소.‘우리는 물론이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갈라 1,8-9)이 말을 살펴보면 복음이란 하나밖에 있을 수 없음을 알 수 있소. 그리스도가 가르쳤고 사도들이 생명을 저버리고 지켜온 복음……!많은 교파 중에 어느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 참 진리를 그대로 옳게 가르치고 있는가, 나는 이 문제를 생각했던 것이오.준희 양! 앞서 루터나 칼빈, 웨슬리 등 그들의 주장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일 수 없다는 것은 이야기해 온 바요.그렇다면 오늘까지 그리스도의 진리를 온전히 보존해 올 뿐 아니라 시대사조나 개인의 오류를 초월하여 절대적인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교회는 과연 어느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소.

 

나는 가능한 한 장로교나 성결교, 혹은 구세군, 안식교, 그 밖의 각 교파의 교리를 비교 연구해 보았소만 그 모든 것이 성경에 기록된 신앙 고백과 일치되는 - 형식면이 아니라 본질면에 있어서 - 교회를 발견하지 못했소.그러고 보면 진리와 인간의 오류가 뒤섞여 있는 것은, 인위적으로 조직된 지상의 교회로서는 면할 수 없는 것이런가? 이렇게 생각도 해보았으나, 그것만으로 신앙에의 회의나 마음의 불안이 꺼질 수는 없었소.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회의와 불안 속에서 계속되는 탐구는 또 하나의 신념을 갖게 하였소. 그것은 어떠한 교회이든지 간에 만일 그것이 그리스도의 참 교회라면 확고부동의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일 것이며 따라서 사람들의 개인적인 의견에 좌우되지 않고 교회의 권위로써 지배되는 교회라야 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소.

 

준희 양! 성경의 개인 해석을 주장하는 모든 교회는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계시와는 다른 것을 주장하고 따라서 참 진리를 어긴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 모든 교회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었소.

 

사실 이러한 기성교회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지성적인 프로테스탄트 신자 속에도 수없이 많다는 것은 양도 아실 것입니다. 이 부인 못 할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를 느끼는 동시에 그 이유로 구명해 낼 의욕이 솟았던 것이오. 많은 형제들의 자기 교파에 대한 불신임적 태도의 발로는 아마 나 자신의 회의 경로와 유사하리라고 생각하오.

 

도대체 그리스도의 참 교회는 어느 것인가? 시골에 파묻혀 조그마한 교회의 목회를 돌보면서 나는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소. 그러다가 이 문제 해결에 있어서 암시를 받은 것은 신약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도들의 신앙고백이었소.양도 잘 알겠지만 소위 무교회주의. 이것은 필경 기성교회의 분열과 쟁투에 고민하는 이들이 그리로 길을 돌린 모양입니다만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을 너무나 뚜렷한 사실이고 보니 나로서는 교회를 부정할 수는 없었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70인의 제자를 택하셨고, 그 중의 열두 제자를 사도로 삼으시고(마르 3,13, 루카 6,12, 마태 17,1, 요한 6,68-71), 베드로를 으뜸으로 교회를 세우시고(마태 16,16-19) 만민에게 가르칠 권리를 주셨고(마태 28,19)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대신할 권한을 위촉했던 것이오.(마태 28,16)‘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8-19)이 기록은 무엇보다도 참 교회를 찾아 헤매는 넋에 큰 광명이 되었소. 왜냐하면 참 교회라면 그리스도께서 맡긴 진리를 가르쳐야 할 것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같은 권위 밑에 가르쳐져야만 할 것이오.양도 아시다시피 장로교회에서는 목회할 목사를 택하는 권리가 그 회원인 신자에게 있지요. 그것은 확실히 민주주의적인 방법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예수께서 한 번도 신자가 자신들을 다스릴 교역자(敎役者 : 개신교에서, 목사·전도사 등 교역에 종사하는 사람의 총칭)를 선택하라는 말을 하신 일이 없을 뿐더러, 더구나 그리스도의 진리는 내려오는 것이지 아래서부터 올라가는 것이 아니요.

 

그러기에 나는 그리스도의 참 교회는 권위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소. 그 교회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와 같이 ‘나를 따르라.’고 하지 ‘내 말을 들어보고 진리 같으면 따르라.’는 교회는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냈소.그렇다면 권위있는 교회란 어느 것일까? 물론 성경의 자유해석을 말하는 교회일 수는 없지요. 그 이유는 만일 교회의 목사가 이것은 A이다 라고 해석했을 경우 신자가 이것을 B라고 주장할 만하다는 자유해석이 그 원칙이 되어 있는 이상 B라는 해석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으며 따라서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할 수는 물론 없지요.

 

사실 루터나 칼빈의 역사적 연구를 하게 될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성경의 자유해석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자기네와 달리 성경을 해석할 때에는 이단 사설로 공격하였다는 것이고, 칼빈은 심지어 자기의 견해와 달리 주장하는 자를 사형에 처한 일까지 있었소. 정말 몸서리쳐지는, 자가당착 모순이 빚어내는 비극이 아닐 수 없소.너무 길어진 것 같습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만 이밖에도 여러 원인들이, 하나도 소홀히 여길 수 없이 많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얻은 한 가지 결론은, 그리스도의 진리도 예수께서 가르친 것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는 교회야말로 참다운 교회라는 그것이었소.이것을 깨닫자 나는 목회 생활을 중지해 버렸소. 자신이 속하고 있는 교회의 신조가 오류라는 것을 알고서야 더 이상 무엇을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나마 정들었던 교회도 남겨 두고 탐구의 길을 떠났던 것이오.

 

서울에 올라온 것이 준희 양을 만났던 때부터 약 2년 전이었는데, 나는 끝내 그리스도의 참 교회를 찾아야만 했소.

어느 날 저녁, 별 생각 없이 숙소 근처인 혜화동 로터리를 넘어 옛 성터를 거닐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소. 황혼이 짙을 무렵이라서 맑게 개었던 하루의 마지막 장식으로 딸기 빛 같이 붉게 물든 서쪽 하늘은 문자 그대로 황홀경이었소. 때마침 눈앞에 높이 솟은 종각으로부터 ‘뎅~ 뎅~ 뎅~’ 울려온 종소리는 찬란한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있던 내 가슴을 쳤소. 그것은 바로 혜화동 천주교회였소.천주교회…, 구교…, 독재적인 교회…, 부패한 교회…,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으나 언젠가 교회사에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웠다는 것을 빙자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주창한다는 강의를 회상하였소.

 

천주교회…, 구교…, 보수적인 교회…, 권위를 주장하는 교회…, 도대체 저 교회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을까?그 길로 나는 혜화동 성당을 찾았소. 이날부터 김남수 신부와의 토론이 시작되었소. 나는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여 공격의 화살을 던져 가며 밤늦게까지 토론하고 돌아와서는 다시 재료를 긁어모아 이튿날이면 신부님을 찾곤 하였소. 놀란 것은 내가 가졌던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인식이 김 신부님이 말씀하시는 사실과는 엄청나게 다른 그 점이었소.

 

준희 양! 나는 여기서 토론의 내용을 일일이 적지는 않으렵니다. 어쨌든 논쟁을 해가는 동안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비교 연구를 시작하였소. 이리하여 나는 가톨릭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천주교 연구에 몰두하게 되고 이이서 성당에도 나가게 되었던 것이라오.개종! 이 개종의 결심을 하게 된 동기! 그것은 바로 내가 지녀온 의혹을 가톨릭 교회가 풀어 주었고, 이래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가톨릭은 내 이성이 끝까지 납득할 수 있도록 명백한 논거로 속 시원히 제시해 주었던 것이오.진리를 알아듣기 위하여 창조자가 주신 나의 이성은 가톨릭의 소리, 아니 가톨릭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안심하게 되었고, 따라서 불안과 동요는 사라지고 말았소.남은 것은 개종의 결단이었소. 마지막 결심을 해야 할 단계에 이르자 강 목사님을 비롯한 여러 목사님들, 동창생 교회에서 사귄 많은 벗들의 모습이 눈에 어려 퍽이나 나를 괴롭혔소. 분에 넘치는 아낌을 받아온 마음의 고향! 온갖 젊은 정열을 바쳐온 옛집! 그곳을 이단이라고 불러 성서에 손을 얹고 가톨릭에 입교할 것을 맹세해야 한다는 것은, 느낄 줄 아는 인간으로서는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소.

 

어쩔 수 없이 멀어져야 할 정든 선배와 친구들! 내 정성을 다하였기에 아름답게 보이는 많은 추억들!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쏜살같이 다가올 비난을 각오하면서도, 그래도 나는 가톨릭의 품에 안겨야만 했소. 정을 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못내 괴로웠지만 안타까이 찾아 헤매던 진리가 나를 붙들어주는 기꺼움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컸소.

 

준희 양! 더듬어온 발자취의 극소부분을 적어 보았소.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책을 읽어달라는 부탁입니다. 「교부들의 신앙」 이 책을 읽어 보시면 무엇 때문에 개종하지 않을 수 없었던가를 뚜렷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나는 준희 양에게 개종하라고 권하는 것은 아니요. 그러나 가톨릭이 되건 안 되건 간에 한번 연구해 보라는 청은 서슴지 않고 합니다. 그 결과가 무익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으니까요.

만일 양이 「교부들의 신앙」을 읽는다면 나에게 개종의 동기를 묻게 된 양의 동기에 답할 충분한 풀이가 그 속에 반드시 있으리라고 믿소.생명이요 길이요 진리 자체이신 주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