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천주교로 개종하였는가?-개종실화

4. 사도 교회는 어디 있나? - 장로교 목사 이석락

Skyblue fiat 2023. 11. 20. 17:41

 

'개종실화-나는 왜 천주교로 개종하였는가?'

 

4. 사도 교회는 어디 있나?

 

이석락 아우구스티노

1895년 5월 2일 출생, 1929년 3월 23일 조선 예수교 장로회 목사 피임,

1932년-1935년 중국 봉천성 조선 기독교회 목사 피임,

1935년 9월 20일 중국 봉천성 남만 의과대학 이학박사 학위

 

1. 교파와 직책

나는 여덟 살(1902년) 때 예수교 장로파 교회에 입교하고 그 교회의 소학교, 대구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그 교회의 장로가 되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1929년)에 목사에 임명되어 대구 성경학교 교감과 경북 장로회 종교교육부 총무, 1930년에 장․감 연합교회 주일학교 연합회에 시무하였다. 그리고 1931년에 전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로 있다가 만주사변 전후에 중국 봉천성 조선기독교회에 여러 해 시무하고 그 후에 귀국하여 대구에서 사회사업(불량소년 감화원과 양로원)을 경영하던 중에 성교회로 돌아왔다.

 

2. 성교회를 적시

여덟 살 때에 프로테스탄트의 신자가 되고 열한 살에 대구에 오니 첫눈에 보이는 큰 감상은 아직 헐리지 않은 남대문과 현재 있는 대구 대성당의 건물이다. 약 51년 전에 천주교회를 알게 되어 그 인상이 깊이 박힌 것이다.

그러나 열교((裂敎 : 가톨릭에서 ‘개신교’를 일컬는 말로 갈라져 나간 교회라는 뜻)의 소학교, 중학교에서 천진하게 그 교리만 배웠고 거기서 전도사, 장로직을 가졌었는데 선교사, 목사, 장로들이 천주교회를 몹시 욕하고 더구나 사회에서는 서학쟁이라고 천시하는 말을 들어서 나의 천진성에 차츰 나쁜 인상을 갖게 되었다.

 

천주교인이라고는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한편의 비난 소리만 듣게 되어 나의 인상에 천주교회는 우상을 섬기고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거짓 예수교회요, 신부는 양대인(洋大人)이란 비인간적 인물로 알았다.

이러고 보니 천주교회를 형식적인 단체로만 알게 되어 그 교회에 사죄구령(赦罪救靈 : 죄의 용서와 영혼의 구원)할 도리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그 중에도 열교회(갈라진 교회) 지도자들은 천주교회의 비행을 선전한 것이다.

 

3. 동요되는 신앙

어릴 때 받은 열교 사상은 이십 세쯤 자리가 잡히다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되어 경주, 영천 지방의 교회 일을 맡아 삼사 년간 지내보니 평소에 바라보던 믿음과 교인들의 실생활과는 아주 딴판이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자신의 신덕도 화분이 햇볕에 쪼이니 시드는 것 같이 신앙의 뿌리가 흔들려 세속에로 기울어졌다.

그 후 다시 결심하고 신학교로 들어가 여러 해 동안 지내는 중 교회 목사, 장로들과 신학교 교수들의 신덕 생활을 보니 역시 특수성이 없고 나의 신앙보다 나은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교인들의 신앙은 점점 냉담해져 종교 부흥회를 열기도 하였다. 그 부흥회로 일어난 신앙 상태는 오래 가지 않고 그 교회의 이면에는 분쟁, 분열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런 교회를 어떻게 해야 바로잡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여러 교파 중에 어느 것이 참되고 완전한 교회인가 찾아보려는 마음이 생겼다. 열교파(갈라진 교회 교파) 중 감리교, 성결교, 안식교, 구세군, 침례교 등의 교회를 찾아가 실제로 보기도 하고 그런 교회 영도자들도 만나 협의했으나 그들은 말을 할 때면 항상 일컫기를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이구동성이었다.

나는 여기서 참된 교회는 초대에서 출발된 것을 알고 그러면 초대부터 그 교리, 그 정신, 그 전통, 그 규율, 그 전례를 엄숙히 지켜 내려온 교회는 어느 것인가? 출발의 요점을 취하게 되었다.

 

열교회의 모체 교회는 어느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악평하는 천주교회이다. 신세계를 발견한 듯 금광을 찾은 느낌으로, 그 교회에 가면 거기는 오랜 옛적부터 내려온 교회라 전통이 있을 것이고 역사적 문헌이 보존되어 있을 것이고 참되고 거짓된 이단의 갈래를 보는 관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장로회 총회의 임명으로 13도 교회를 순행하는 기회에 심중에 품은 연구 재료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로 천주교회는

(1) 성직자의 생활이 성스럽고

(2) 전통적 교권으로 통솔되었고

(3) 인위적 선전이나 계책이 없이 성체성사를 엄숙히 매일 영함으로 생명의 양식을 먹게 된 것

(4) 천주의 대리자 신부 앞에, 즉 고해소에서 과오를 고백하고 사죄를 받는 것

(5)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온 미사성제에 참례함

(6) 예수가 세우신 사도 교회로부터 현재까지 그 정신과 그 교리를 엄숙히 지켜오는 교회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1) 신부, 수녀들의 동정 생활

(2) 찬송과 성경 없이 예배를 집행하는 미사성제의 내용

(3) 평신도의 활동 없이 교회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런 중에도 고해성사와 영성체 도리는 특히 나의 마음을 끌고 있었다.

 

4. 신앙 상 난제와 감응(感應 ; 어떤 느낌을 받아 마음이 따라 움직임)된 교리

열교회에서는 죄를 자복(自服 : 자백하여 복종함)하고 눈물을 흘리며 밤을 새우고 애통해 하나 이어 냉담해져 진실로 사죄의 방도가 막연하다. 왜냐? 부흥 후에 그들의 생활 상태는 곧 반복이 되어 길거리나 돌밭, 가시덤불에 뿌린 씨앗처럼 되었다.

천주께서 원래 교회를 그렇게 설립했을 리가 없으리라고 생각되어 평일에 반대하던 천주교로 가서 내용을 연구하게 되었다. 이 교회는 위에 말한 것처럼 진실하고 규율이 정연하며 전통이 서 있고 한 머리로 통솔되어 상통천주(上通天主) 하달교회(下達敎會)로서 일관됨을 감탄하였다.

 

이러한 교회의 원천에는 천주가 계신 것이 판연하고 그 원천에서 용출된 생명수를 전해 주는 수도관이 완비될 것이고 그 시냇가에 생명수를 마시는 교우들의 표양이야말로 성스러운 생활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5. 귀정(歸正 : 바른길로 돌아옴) 결심과 곤란

그렇게 진실하고 완전해 보이는 교회이지만 그 진리의 원천을 찾기는 어려웠다.

(1) 미사성제의 진행 내용과 제대 설치의 원리 원칙이 내게는 막연하고

(2) 조용하고 엄숙하여 좋으나 성경 해설이나 찬송가를 합창하거나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없어 무미건조한 것이며

(3) 교우들의 친절미가 없고 아무도 가르쳐 주는 이도 없이 퍽 냉정해 보이는 것

(4) 신부들도 사제관에만 늘 있고 교우 집을 심방치 않는 등이다.

처음에 그 성스럽고 완전한 교회로 보이던 감이 차차 약해졌다. 왜냐하면 열교회에서 보낸 삼십이 년 생활에는

(1) 주일에 가면 열렬하게 환영하고 인정스럽게 대한 것

(2) 그 교리를 잘 알아듣도록 설명하고 예증적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 는 것

(3) 교회에 들어가는 날부터 완전한 교인의 자격을 주어 자기 역량대 로 활동하는 것

(4) 주일이면 친목회처럼 하루 종일 교회에서 즐겁게 지낼 수 있다.

 

6. 고심극기의 경로

천주교회의 첫인상은 좋았으나 감정을 가진 인간인지라 인간적 대우란 것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천주교회를 열교와 비교하니 나의 심경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인간적 심신은 흔들려도 나의 속사람은 굳세게 용기를 내었다. 천주교회의 많은 교우들이 매일 아침마다 모이고 주일이나 특별한 날에도 무난히 모이는 것을 볼 때에는 그들이 무엇을 발견한 안목이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조선의 초대교회에 처음으로 피를 흘리어 교회를 설립한 많은 치명자가 난 것은 열교회에서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테르툴리아누스(Terthulianus, 155/160년 경 카르타고 출생)의 말씀 ‘순교자의 성혈은 성교회의 선종(善種)이라’고 함 같이 이런 순교자를 많이 낸 것이 참된 교회를 증거함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기적이 있겠는가?

여기에 있어서 나는 깊이 연구하고 그 성사를 찾으려고 결심하였다. 영세하기 십 년 전(1929년)부터 천주교회에 관심을 갖고 동경하던 차에 나의 결심이 더욱 굳어져 그 교리와 교회사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 열교회의 밟아온 길을 멈추고

(2) 천주교회의 교리책과 교회사와 그에 필요한 책들을 구해 읽었다.

(3) 주교, 신부, 회장, 교우들에게 의문점을 질문하여 풀고

(4) 성사도리를 해득(解得 : 뜻을 깨쳐 앎)했다.

 

7. 인가성세(引家聖洗)

고해성사를 확실히 깨달은 뒤에는 과거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지은 죄를 모두 깨끗이 씻어버리기 위하여 영세 받을 준비를 하였다. 왜 두 번 세례를 받아야겠는가? 열교에서 받은 세례는 성총을 이루어 주는 것이 없었다.

 

(1) 상존 성총 (상존 은총, 생명의 은총이라고 하며 세례를 통하여 주시는 은총인데, 이 은총으로 우리는 거룩하게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2) 성사 성총 (성사를 통하여 주시는 은총)

 

이 두 가지의 은총을 받기에 요긴한 도리가 없는 까닭이다. 나는 즐겁게 세례성사 받을 준비를 하였다. 「교리문답」 책에서 먼저 십이단 교리(가톨릭 주요 기도문)를 전부 외운 후에는 마음 속에 새싹이 트기 시작하자 곧 계속하여 삼백이십 문답을 전부 외우고(전에는 교리를 배울 때 문답으로 이루어진 교리문답을 모두 외워야 했음) 그 후 반 년 간이나 매일 삼백이십 문답을 외워 새 힘을 얻어 아침마다 미사성제에 열심히 참례하였다. 1939년 4월 8일에 가족 다섯 명(처, 아들 셋)이 같이 세례를 받고 5월 28일 성령강림대축일에 문 주교에게 우리 부부는 다시 견진성사를 받았다.

 

8. 귀정 후 변화

대구시 계산동 대성당에서 영세하기 전부터 대구시에서 고아원과 양로원을 경영하였다. 천주교회에서 영세를 받음으로써 천주의 아들 된 것을 너무 감사하여 자선사업(고아, 양로원)을 열심히 경영했는데 수녀원에서 두 수녀가 와서 협력하였다.

영세 후에는 과거 생활의 모든 죄악을 씻어 사죄함을 받아 다시 어린아이가 된 것이다. 성경 말씀대로 나는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영세 후

(1) 열교에서 받은 복잡한 정신이 단순해지고 열교에서 얻은 허영심과 영예욕을 버리고 예수의 성심과 성모의 성심을 본받아 겸손해졌고

(2) 전일에 허공을 차던 헛된 노력과 활동이 멈추어지고 조용한 골방 생활에서 기도함으로써 영신의 새 힘을 쌓기로 하였다.

(3) 이제부터는 내가 비록 이 교회에서 냉담할지언정 열교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4) 나의 소유욕이란 것이 완화되어서 나의 가진 것은 다 천주께 받은 것이라 생각되어 청빈한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5) 남을 지도하는 영도자의 자리를 사양하고 말석을 차지하여 협력하려 한다.

 

9. 열교의 친우들에게

나의종교 생활 53년을 생각해 보면 열교회에서 37년을 보냈고 천주성교회에서 16년을 보냈다. 열교회의 생활이 반평생 이상인즉 화초의 꽃봉오리같이 인생의 청춘기를 거의 거기서 보냈다. 나는 거기서 최고의 지위에 올라 존경을 받았지만 나의 신덕은 파선되었다.

오늘 열교에 계신 사랑하는 여러 친구들이 걷는 길은 나도 걸었었고 여러분이 앉은 자리는 나도 앉았었고 여러분이 하는 설교는 나도 하여 대환영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그 교회에서 나는 사회 교육이나 종교 교육에서나 논설로써도 남에게 지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지낸 것은 예수교 서회(書會)나 기타 출판사에서 발행된 문헌이 증거한다.

 

저술한 책자가 60여 종, 정기간행물의 책임자로서 발행된 잡지도 10여 종이며, 그 외 종교 교육의 교과서 등도 상당히 편찬했던 것이다. 또한 성경학교, 고등성경학교, 주일학교 연합회 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 책임자 등으로 내게 교육받은 이들이 지금 여러분의 목사와 전도사들이 되고 교회 교역자가 된 이들이 많다.

그들이 나를 볼 때마다 애석하게 여기어 ‘돌아오세요, 모교회로 돌아오세요, 천주교회에서 선생님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신부가 되겠어요, 수사가 되겠어요?’ 이같이 간청하고 있다. ‘옛날에 밟아오던 길을 밟아 우리들을 지도해 주세요.’ 애원한다. 그럴 때 나는 인정상으로 동정적 회포가 없지 않다. 이 세상만이라면 그들과 같은 보조를 따른다고 해도 내게 행복이겠다.

 

왜냐?

(1) 각 방면에서 내가 수십 년간 쌓은 경험에서 대환영을 받을 것이고

(2) 교회의 후원으로 사회적 지반도 잡을 것이고

(3) 경제적 토대도 충실해질 것이고

(4) 자녀의 교육이나 출세에도 무난히 성공해지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내가 천주성교회로 개종한 것은 진주 장수가 자기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값진 진주를 사는 것 같이 나는 열교회의 많은 친구, 정신, 곳간의 보배, 지위, 경제 등을 다 던져 버리고 값진 보배를 구했고, 어려운 산길을 걸을 때 선한 사마리아인이 나를 도와서 나의 생명을 구하였다.

그 여관에서 한숨 자고 나니 나는 헐벗고 외로운 몸이나 거기에는 수호천사, 본명주보성인, 성모 마리아께서 나를 위하여 나의 생명을 위하여 붙들어 주고, 예수께서 걸으신 성로를 밟아 가게 되었으니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기로 고심극기하고 있다.

 

10. 개종 후 애조해 주신 성교회 교우 여러분들에게

성교회로 개종한 지가 우금 16년이고 동기로 된 지가 26년이나 된다. 내가 성교회에 와서 영세하고 있으나 교우 중 일부에서는 오해하는 친구도 있었다.

(1) 열교회에서 어떤 과오를 범하고 왔나

(2) 성교회에 와서 어떤 야망으로 지위를 얻으려고 왔나

(3) 성교회 교우로 가장하여 내적 조사를 하여 제2의 루터가 되려하나 는 평도 내 귀에 전달되었다.

이런 말 저런 말이 있어도 나는 내 귀를 막고 주님 대전에 조배하고 과거를 통회한다. 예수님과 성모님이 나의 속마음을 아시니 나는 만족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성교회 교우들이 나를 대하는 것이 부드럽지 않고, 나도 또한 자유롭지 않아 고독해져서 16년간 침묵으로 사는 생활 이었다.

 

오늘날에는 첫째로 주교와 신부님들이 나를 이해하시고, 성교회의 학자들이 나를 알아주시고 회장님들이 손을 잡아 주시어 나도 맘껏 기뻐 활기를 띠고 있다. 6.25 사변 전에 서울 명동 계성여자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겸하여 국립박물관에서 인류학회 일을 하였다. 6.25 사변이 일어나던 해 12월에 고향 대구로 와서 경북고등학교, 대구 공업고등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며 경북대학교 법정대학의 인류학 강사로 겸임하던 중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대구 계산동성당의 서봉길 주임신부님의 명령으로 본년 4월부터 대성당 전교사로 일하면서 학교는 강사로 있게 되었다.

26년 전후, 즉 성교회로 돌아오게 된 것은 예수님의 비적(비상한 기적)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나를 성교회로 인도해 주신 은인들에게 감사하는 바이다. 일본, 중국, 영국, 미국의 성교회의 서간물, 대구성당의 권 신부님, 김 바르톨로메오 신부님(현 전주교구장), 미카엘 수녀님, 한윤화 야고보 씨, 대구 문 주교님, 정 부주교님, 서울교구 노 주교님, 서울 장면 요한 선생, 강영조 바오로 전교회장님, 그 외 여러 회장들과 교우 여러분들이다.

 

내가 열교회(갈라진 교회)에서 돌아온 후에 느낀 것과 또는 오늘이라도 교우들에게 더욱 성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몇 마디 말씀을 어리석게 올리고자 한다.

 

(1) 교리 연구에 충실하자.

- 영세 때 배운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더욱 깊이 들어가자. 예수께서 그물을 깊은 곳으로 던지라 하셨다. 우리는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지식이 부족하다. 영세할 때 배운 지식은 극히 적은 것이다. 그래서 냉담할 염려가 많다.

 

(2) 전교에 열중하자.

- 우리의 신조는 천만 년이라도 불변하겠지만 전교 방침은 바오로 사도 말씀같이 그 지역과 시대를 따라 적절한 방침을 취해야 한다.

 

(3) 겸비(謙卑 : 자기의 몸을 겸손하게 낮춤)한 자리에서 열정적으로 남을 인도하자. (종종 듣는바 오래된 교우들은 독선적이라고 평한다.)

- 남을 구원하기 위하여 나를 버리고 남에게 친절하고 속에서 끓는 애덕의 열정을 표현하자. 내가 성교회로 와서 이상하게 느낀 것은 고적(孤寂 : 외롭고 쓸쓸함)이다. 교우들이 담담하고 접촉이 없고 또한 거만해 보였다. 오늘날도 예비 교우들이 그런 말을 종종 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친절히 영접하고 지도하고 가르쳐 주자.

 

(4) 협동하자.

- 우리나라의 전교가 백오십 년 이전이지만 아직 우리는 전교를 위한 교단 운동이 없다. 경향잡지가 1037호가 나왔지만 옛날 모습이고 교우 모든 가정에서 받아 읽으라는 한국주교회의의 결정이 있지만 그 실현은 막연한 듯하고 신학교, 수사원 등도 아직 우리 교우들의 힘으로 협력함이 크게 부족하고 각 성당에는 신부님을 도와 드리는 전교회장이 별로 없다. 언제 한국 외국전교회가 설립되겠는가?

 

(5) 교회 사업의 헌금 열의가 없다.

- 교무금이나 주일 헌금은 매우 무성의하다. 내가 열교회에서 보던 것과 비교하면 십분의 일에 불과하다. 우리의 주교와 신부님들은 교우들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교회 내에서는 헌금에 대한 말씀이 일절 없고 교우들이 자발적으로 각성함도 없기에 매우 부진하다.

옛 교회의 법규를 본다면 빈손으로는 성당에 못 가고 정성껏 예물을 가지고 천주 대전에 나아가게 되어 있다. 우리 교우들의 생활이 빈곤하게 된 원인의 하나는 천주께 성의를 드리지 못한 탓이다.

말라키 예언서는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러고 나서 나를 시험해 보아라.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내가 하늘의 창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 붓지 않나 보아라.’(말라 3,10) 하고 말한다.

 

(6) 주일과 파공일(육체노동을 금하고 미사에 참례해야 하는 대축일과 주일)을 충실히 지키자.

- 이는 천주 십계 중에 천륜에 대한 중한 계명이다.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을 범하면 죽였다. 오늘날 파공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경제 상태가 어려운 것이 한 원인이고 둘째로 우리나라 교회의 선대 어른들보다 신덕이 약해졌기 때문인 듯하다.

주일 미사성제만 참례하면 주일을 다 지킨 줄로 안다. 그것은 오해이다. 하루 종일 지내야 한다. 첫째로 미사성제, 교리반에 출석, 전교, 병자 방문, 교리책들을 구하여 영적 수련을 해야 한다. 신부님께 부득이한 사정으로 관면을 받는데, 조그마한 구실로 관면 받음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이 계명을 범하는 것이다.(예전에는 파공일인 주일날 일해야 하는 사람은 사제의 관면을 받았음.)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 제7일에 쉬신 천주를 모범할 뿐 아니라 이날은 천주의 성일(聖日)이다. 이날에는 천주의 성업 곧 성교회에 영신의 선업에 참가하는 용사가 되자. 우리 생활이 윤택치 못한 원인도 여기서 생긴다.

 

(7) 미사성제에 경문과 성가를 합창하자.

- 비오 10세 교황께서 전 세계 교회에 모든 교우에게 권유하시기를 미사 성가를 합창하라고 하셨다. 성가대 창미사를 제외하고는 충분히 배워서 미사경문과 성가를 함께 부르게 하자. 제대 가까운 앞자리에 매일 몇 교우가 높은 소리로 미사경을 읽는 것보다 여러 교우들을 가르쳐 주어 함께 기쁘게 부르자.

성교회에 개종한 후 오늘까지 미사성제 때에 그 방식이 협동되지 못하여 여러 교우들이 함께 즐겁게 하는 것이 되지 못하였다. 이것은 하루속히 방식을 바꿔주기를 바란다.

어떤 교우들은 미사성제 내용을 몰라서 그 시간이 지루하여 오기는 늦게 오고 끝나기 전에 일찍 가는 이가 종종 있다.(1960년 대 중반까지는 라틴어로 미사를 봉헌하였기에 미사경문에 대한 이해나 화답 부분에 대한 신자들의 참여가 미흡했음.)

미사성제에서 신덕의 열성과 전교의 애덕이 발해져야 할 것이다. 천주께서는 모든 교우들의 합심으로 성령과 성가나 경문을 창하는 것을 더욱 즐겨 들으신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의 서간 교훈이다. (콜로 3,16. 에페 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