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종실화-나는 왜 천주교로 개종하였는가?'
1. 일두다체(一頭多體)는 불가능
전 마르타 신학교 3년생 유영복 크리스티나
1910년 출생, 1940년-1942년 원산 장로교 마르타 신학교 재학
1941년, 나는 함경남도 원산 명석동 ‘마르타 월손’ 여자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천진스러운 학생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믿고 있는 장로교가 진정한 종교라고 믿어 왔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처럼 교리를 중대시하여 반대자들을 사정없이 파문해 버리는 엄격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던들 오늘의 그리스도교 정신은 어떤 시대, 어떤 물결에 흘러갔을는지 그 흔적을 찾아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우리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 감사의 뜻을 표시해야 한다.
그 후 내 생각은 더욱 파고 들어간다.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가 되려면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야 하고, 그리스도의 뜻은 ‘하나’가 되라는 것인데 어떻게 해야 하나가 될까? 한 교파 안에서도 분쟁이 끊어지지 않는데 저 여러 교파가 하나로 일치할 수 있을까? 실현되지 못할 것 같다.
이 문제를 내놓고 다른 이들과 이야기해 보면 물론 누구든지 좋다고 말하지만, 그 실현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다들 말한다. 한 가지 가능한 것은 나 혼자서 진리를 보존해 왔다는 천주교로 들어가 ‘하나’가 되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그리스도의 뜻일까?
그 후 어느 날, 조 목사님이 교회사를 강의하였는데 내가 이상하게 들은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한 사람들을 용맹히 투쟁한 희생자라고 격찬하시면서 이런 사람들로 인하여 오늘의 교회가 있게 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내 생각은 또 여기에 머물러 파고들어 갔다. 이 목사님은 천주교회가 진리를 보전해 왔다는 사실만은 인정하셨고 또 나도 그 점을 인정하고 싶다. 그런데 진리를 보존한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한 사람들이라면 이들이 진리를 따른 사람들인가? 진리를 따르지 않은 사람들인가?
진리를 따랐다면 파문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파문을 당했다면 진리를 따르지 않은 사람들일 것인데, 어떻게 조 목사님은 이들을 ‘용맹히 투쟁한 희생자들’이라고 격찬하는가?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교회가 있게 되었다면, 이 오늘의 교회는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따랐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겨난 교회가 어찌 진리의 교회가 될 수 있으랴?
이 목사님의 ‘하느님 섭리’에 대한 말씀이 또 생각난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느님의 섭리가 없으면 될 수 없는데, 지금은 여러 교파가 생겨났은즉 이것도 하느님의 섭리로 되었다 하여 위로의 말씀을 하시고, 곧 뒤이어 ‘교회의 분열은 천만유감’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하느님의 섭리……. 참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을 교회가 파문하는 것도 섭리요, 진리를 믿지 않음으로 파문당하는 것도 다 같은 하느님의 섭리인가? 다 같은 섭리라면 옳고 그름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이렇게 나갈 수는 없다.
사회에는 각종 악행이 범람한다. 사람이 악을 행하고자 하면 나중에는 어떻게 되든지 간에 당장에는 그 악이 실제로 행해진다. 이것이 너무나 뚜렷한 현실이다. 그래 이것을 하느님의 섭리로 합리화, 합법화시킬 수 있을까? 절대로 안 된다.
파문 문제에 대해 천주교회사를 읽어보고 싶고, 또 천주교회의 교역자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들어보고 싶다. 천주교회는 근 이천 년의 역사를 가졌고, 무수한 학자들을 가졌다. 생겨난 지 얼마 안 되는 장로교보다 무엇으로든지 못하지는 않을 듯하다.
위에 말한 것은 내가 느낀 중대한 문제라 내 기억에 남아 있지만 이 외에도 내 머리를 복잡하게 한 문제가 적지 않았다. 무엇이냐 하면, 교실에 들어서는 교수의 의견이 다르고 목사와 목사의 해설이 다르다. 그것도 대단치 않은 문제에 대해 그렇다면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또 별 상관없겠지만, 내 생각에는 아까 말한 ‘하나’, ‘진리’, ‘파문’ 같은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각각 서로 다르다.
그래서 어떤 목사나 교수를 더 신임할 것인지, 더구나 학생으로서는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진리는 하나’라는데도 이 모양이면 진리가 없든지, 진리가 있다면 저분들도 진리를 아직 잡지 못한 것이 아닐까 의심된다.
이런 때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 앞에 나타나시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말씀하신다면 모든 의견은 즉시 일치되고 모든 교파는 단번에 통일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께서 이 사람을 신임하라고 누구를 내세우셨으면 좋겠다.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이 내가 가르친 교리를 가르칠 것이라고 보장하신다면 나는 모든 분분한 의견과 의견 해설과 해설을 물리쳐 버리고 그분에게는 절대복종하며 신임하겠다. 이처럼 나는 교회 권위의 필요를 느꼈다.
언젠가 미국 여자인 전도부인이 우리 학교에 와서 강연을 하였다. 그 이름은 잊었지만 상당히 유명한 분으로서, 자기는 자기의 죄를 사람에게 고백하고 나서는 큰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였다.
그 후 어떤 유명한 캐나다인 목사가 우리 학교에 와서 신학생 부흥회를 지도한 일이 있다. 그때 그는 조용한 방에 있고 학생들은 하나씩 들어가 자기의 죄과를 고백하고서 개인지도를 받으라고 하였는데, 많은 학생들이 그렇게 했지만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다만, 내가 그때 깊이 느낀 것은 어떤 때는 천주교회의 고해제도를 맹렬히 비방하고, 어떤 때는 그 고해제도를 채용함은 큰 모순이라는 것이었다. 자기 죄과를 고백함이 유익하다면 천주교회의 고해제도도 있음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신학교 기숙사에서 친구들끼리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였다. 평북 선천읍에서 온 양성담이라는 학생이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너희가 무엇이든지 청하면 내가 주겠다.’고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청하겠소?” 하고 물었다.
“옛날 솔로몬 왕은 지혜를 구하였지만 나는 ‘예수님을 주십시오.’ 하고 청하겠소.” 하고 내가 대답했더니 여러 친구들도 다 같이 그렇다면서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무엇 부족할 것이 있을까 하였다. 과연 예수님을 모시고 있다면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다함께 받을 것이니 이 얼마나 거룩한 생활인가! 현세에서부터 천국 생활이 시작될 것이 아닌가.
어느 날 동무들과 함께 구경차 명석동 천주교회 성당에 가 보았다. 엄숙하고 신성하여 보인다. 다음날 아침 나는 또 성당에 갔다. 성당 안에는 사람들이 꽤 많이 모였지만 조용하다. 제단을 향하여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있다. 제단에는 신부가 무슨 이상한 옷을 입고 섰는데, 무엇을 하는 것인지 몰라 나는 그저 어리둥절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난 다음 신부가 무엇을 들고 신자석을 향하여 돌아섰는데 신부의 손에 들린 그 무엇이 찬란한 광채를 발한다. 무슨 금속 그릇에 어떤 광선이 반사되는 것인가 하고 정신을 차려 보아도 그런 건 아니었다.
신부의 가슴에도 동그란 광휘(光輝)가 빛난다. 이윽고 신부가 내려와 난간에 일렬로 무릎 꿇은 남녀 신자들의 입에 무엇을 넣어준다. 그 남녀 신자들은 조용히 일어나 절하고서는 양편 갓길로 머리를 숙이고 합장한 채 차례차례 나오는데 그들의 가슴에도 둥근 광휘가 빛난다. 다만 신부 가슴의 그것보다 몇 배 작을 뿐이다.
나는 내가 잘못보지 않았나 하고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창문, 천장, 벽을 모두 살폈으나 다른 데서 들어오는 광선의 반사는 아니었다. 내 눈이 흐려졌나 하고서 손수건을 침에 적셔 눈을 닦고 나서 보아도 그들 가슴에 둥근 광휘는 뚜렷하다.
나는 이상히 생각하면서 끝까지 있어 보았다. 얼마 후 성당에서 나올 때 보니 그들의 광휘는 없어졌다. 다른 이들의 얼굴 표정은 아무렇지 않은 것을 보면 나 혼자만 이 광경을 본 것 같다. 나는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고 그 중 한 사람에게 신부 앞에 가서 무엇을 입에 받았느냐고 물었다.
(이상 내가 본 바는 나의 체험이다. 다른 이들이 이것을 인정하든지 말든지 그것은 그들의 자유이다. 그 후 내가 가톨릭으로 전향한 다음 필요에 의하여 몇몇 신부님들께 말했지만 별로 관심을 갖지 않으시는 게 오히려 고맙다. 다만 모든 주요한 사실은 그대로 쓰라는 분부를 따라, 나의 중요한 동기가 된 이 체험을 빼놓을 수 없어서 그대로 쓸 뿐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 빵 형상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체로 계시다는, 가톨릭의 성체(聖體)도리를 들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성만찬 때 ‘이는 내 몸이다.’(마태 26,26) 하신 말씀과 요한 6,48-56과 1코린 2,23-29의 말씀이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친다. 나는 다 알아들었다. 한 줄기 진리의 광선이 내 가슴속을 쏘는 듯 했다.
가톨릭이 성경의 말씀을 솔직하게 그대로 알아듣는다. 진리는 과연 가톨릭에 있다. 저처럼 예수님을 가슴 속에 모시는 이들은 얼마나 행복하고 거룩할까? 장로교를 회상하니 이 점이 캄캄하다. 나도 예수님을 가슴에 모시자면 아무래도 천주교를 믿어야겠다.
시일이 지날수록 내 마음은 천주교로 쏠리는 동시에 장로교에 그대로 눌러 있는 것이 불안스럽다. 그렇다고 경솔하게 결정지을 수도 없다. 알아볼 것을 끝까지 알아보고서 귀추를 정하기로 했다. 나는 하느님의 총광(寵光 - 은총을 입은 영광)을 빌면서 용기를 내어 천주교회 신부를 찾아보고 교리상 토론을 여러 번 하였다. 그는 명석동 천주교회 독일인 탁 신부였다.
“성경에는 무슨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명하셨는데(탈출 20,2) 천주교회에서는 무슨 형상을 그렇게 많이 만들어 성당에 세웁니까?”
“성경의 그 말씀은 그런 형상을 만들어 신으로 공경하면 안 된다는 조건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다른 성경에는 천사의 형상을 만들라(탈출 25,18), 구리뱀을 만들라(민수 21,8) 명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상을 만들어 모시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앞에서 어떻게 허리를 굽혀 공경을 드린단 말입니까?”
“성경에는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필리 2,10) 하셨는데, 예수의 성상 앞에 무릎을 꿇는 것도 마찬가지 아니겠소? 그때 그 공경은 성상을 만든 재료에게 가는 것이 아니고 그 성상이 표시하는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 사진을 들고서 ‘참 잘생겼다’고 칭찬한다면 당신 마음이 좋겠소, 나쁘겠소? 그 찬사는 종잇장이 받는 게요, 당신이 받는 게요?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 사진에 침을 탁 뱉고 내던진다면 당신 마음이 어떻겠소? 이 경우에 모욕은 그 종잇장이 당한 것이오, 당신이 당한 것이오?”
“성모 마리아도 사람인데 왜 천주의 성모라고 부르는지요?”
“성모 마리아도 물론 사람이지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천주이시니, 천주의 모친이라고 부르지요. 당신은 영혼과 육신으로 된 사람이오. 당신 어머니는 당신 육신을 낳았을 뿐이지 당신 영혼까지 낳아 주었거나 창조하여 주었거나 하지는 못하지 않았소?”
“물론 그렇지요.”
“그럼 사람들이 당신 어머니를 부를 때 그냥 ‘영복이 어머니’ 하고 부릅니까, ‘영복이 육신의 어머니’ 하고 부릅니까?”
“그렇지만 성모를 공경하는 건 불법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공경의 성질은 다르지만 황제를 공경하는 이면 그 황제의 어머니, 즉 황태후 폐하를 적당한 예의로 공경함은 당연하지요.”
“그렇지만 무슨 은혜를 달라고 마리아에게 청하는 건 예수님께 실례가 아닙니까?”
“아닙니다. 영복이도 직접 아버지께 청할 것을 먼저 어머니께 청하여, 아버지께 잘 말씀하여 허락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조르는 수가 있지요? 그건 당신이 아버지께 실례를 하는 겁니까? 뿐만 아니라 인격 높고 신앙 깊은 훌륭한 목사님이 어떤 신자의 가정을 방문하면 자기 집안을 위하여 기도를 청하고 그 기도하는 동안 당신들은 조용히 그리고 위안을 느끼지 않소? 그렇다면 천국에 있는 성인, 성녀, 천사, 성모 마리아께 우리 자신이나 우리 집안을 위하여 전구하여 주시기를 청함이 어찌 당연치 않겠소?”
“그렇지만 천주교회에는 무슨 형식을 그처럼 많이 쓰는 겁니까?”
“천주교 성당을 예배당과 혼동하지 마십시오. 예배당은 찬송가 부르고 설교를 듣고 할 뿐이니 예식이 필요치 않소. 천주교 성당에는 성체성사에 실체로 예수님께서 계시고, 또 성체를 이루어 말라키의 예언대로 천주께 제사를 드리지요.(말라 1,10) 제사치고 예식 없는 제사가 어디 있습니까? 구약 시대 제사는 그 예식을 천주께서 가르쳐 주셨지요.(레위기) 당신은 어디 소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였는지요? 당신이 운동장에서 테니스를 치고 있을 때 학교 사환아이가 갖다 주는 졸업장을 받아들고서 그대로 뛰어 돌아왔습니까? 아니면 육 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계속하여 온 학업을 마친다 하여 교장 이하 전직원, 학생이 강당에 모여 옷깃을 바르게 하고서 졸업식을 거행하는 중에 그 졸업장을 받았습니까?”
위에 말한 것은 몇 가지에 불과하지만 나는 여러 번 찾아가 무수한 질문을 하였고, 갈 때나 올 때나 지지 않겠다고 기를 써 보았다. 그러나 신부는 자기 아는 대로 냉정히 말할 뿐 그런 기색은 없었다. 속세를 떠난 듯 경건한 그의 생활을 보고는 대번 머리가 숙여짐을 어찌할 수 없었다.
언젠가 한 번은 토론할 때 신부가 ‘예수께서 친히 세우신 천주교회를 따르지 않으면 영혼을 구할 수 없다.’ 하기에, 나는 직접 예수님을 믿으면 그만이지 교회가 무슨 필요 있느냐고 힘 있게 들이댔다. 그랬더니 신부는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잘 생각하여 보십시오!’ 하고 미소로써 대답하고는 겸손한 침묵을 지킨다.
오늘은 내가 이겼다고 어깨가 으쓱해서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 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신부의 말이 옳다. 예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 그것을 가르칠 책임을 교회에 주신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2코린 5,20),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태 28,19),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그런데 만일 그때 신부가 자기 태도를 그처럼 늦추지 않고 나를 또 꼼짝 못하게 눌러 무안하게 했다면, 나는 다시 그를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신부의 온화한 태도가 나를 다시 불렀다.
천주교회에 대한 나의 오해는 이렇게 한 겹 두 겹 전부 풀렸다. 천주교가 이처럼 오직 하나뿐인 진정한 그리스도교임을 알고 난 다음 나는 거기로 넘어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어느 날 교장실에 들어가 나는 천주교로 들어가겠다는 것, 따라서 이 신학교에서 나갈 것을 말씀드렸더니, 조 교장은 ‘직접 하느님을 공경하는 신교보다도 신부보고 하느님께 기도해 달라는 천주교가 좋을 게 무엇이냐?’고 만류하셨다.
천주교를 아주 모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무서운 선입견을 박아주는 이런 말씀이 벌써 내게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반발을 일으켰다. 나는 천주교의 교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천주교 신자들도 직접 하느님을 공경하고, 장로교 예배당에서도 목사님이 성경을 해석하여 신도들에게 들려주며 혼자 큰 목소리로 기도를 올린다. 이것은 하느님과 신자들 사이에 목사가 끼어드는 것이 아닌가? 그처럼 서로 오해할 것은 아니다.
기숙사 동무들도 내 짐을 빼앗아 감추면서 만류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가톨릭 신학을 연구해 보았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서로 맞지 않는 점, 모순되는 점이 이따금 사람을 괴롭히는데 가톨릭 신학은 체계가 정확하게 서있음은 물론, 그 안의 조화는 실로 아름답다. 진리를 토대로 한 연고이다.
내가 예전 마르타 신학교 시절을 회상하면 그때 내 머리는 가톨릭에 대한 캄캄한 오해로 가득 찼었다. 그것을 나는 사실로 알고 있었으니 우스운 일이다. 그런데 지금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천주교에 대해 바로 그런 캄캄한 오해를 갖고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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