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1권 복음준비 p250~p261
※ 통독한 뒤 마음에 세길 구절 1~2개를 나눕니다
41. 박사들과의 성전에서의 논쟁
1944. 1. 28.
나는 예수를 본다. 그는 청소년이다. 그는 내가 보기에 흰 아마포로 만들어진 튜닉을 입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발들까지 내려온다. 그는 그 위에 옅은 빨간색 장방형 천을 걸치고 있다. 그는 맨 머리이고 그의 긴 머리카락은 그의 귀들의 절반까지 내려오는데, 그것은 그가 더 어렸을 때 내가 보았던 것보다 더 짙은 빛깔이다. 그는 나이에 비해 키가 매우 큰 건장한 소년이지만, 얼굴은 아직 어리게 보인다.
그는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나를 향하여 그의 두 손을 내민다. 그러나 그의 미소는 그가 어른일 때 이미 내가 보는 것과 같은 친절하면서도 꽤나 근엄한 미소이다. 그는 혼자 있다. 지금 당장은 나는 다른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는 돌들이 흩어져 있는 오르락내리락하는 작은 길 위의 낮은 담에 기대 서 있다. 그 길 가운데에는 비가 올 때 작은 시내로 변하는 도랑이 있는데, 지금 그것은 날씨가 좋기 때문에 말라 있다.
나도 담으로 가까이 가서 예수처럼 주위와 아래를 둘러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는 일단의 집들을 본다. 어떤 집들은 높고, 어떤 집들은 낮은데, 그것들은 모든 방향을 향하여 지어져 있다. 그것들은 마치 칙칙한 땅에 뿌려져 있는 한 줌의 흰 조약돌처럼 보인다. 이것은 보잘것없지만 그럴듯한 비유이다. 큰 길들과 골목길들이 온통 흰 이 흰색 사이로 정맥들처럼 연결되어 있다. 나는 여기저기에서 담들로부터 돌출되어 있는 몇 그루의 나무들을 본다. 많은 나무들이 꽃피어 있고, 다른 나무들은 이미 새 잎들로 덮여 있다. 지금은 분명히 봄철이다.
내 왼쪽에는 성전의 거대한 구조물이 건물들, 탑들, 마당들, 회랑들로 뒤덮여 있는 일련의 세 개의 단들 위에 있다. 그 중앙에는 가장 높은 지극히 장중하고 화려한 건물이 그 둥근 돔들과 함께 솟아 있는데, 그것들은 마치 구리나 황금으로 덮여 있는 것처럼 햇빛에 반짝인다. 그 건물은 요새의 총안들 사이의 철부 벽처럼 총안이 설치된 성벽으로 온통 에워싸여 있다. 꽤 좁은 오르막길을 내려다보며 세워진 다른 탑들보다 더 높은 탑이 거대한 건물의 선명한 조망을 확보하고 있다. 그것은 엄숙한 보초병처럼 보인다.
예수는 그곳을 응시한 다음 돌아서서 그가 방금 전에 했던 것처럼 다시 한 번 등을 성벽에 기댄다. 그리고 그는 건물의 맞은편에 있는 작은 언덕을 바라본다. 그 밑에는 집들로 가득 차 있고 그 위는 민둥한 작은 언덕이다.
나는 한 도로가 그 너머에서 활 모양으로 끝나고, 그 너머에는 정사각형의 돌들이 헐겁고 고르지 못하게 깔려 있는 길밖에 없는 것을 본다. 그것들은 로마의 집정관 도로들의 돌들처럼 너무 크지는 않다. 그것들은 오히려 비아렛지오의 오래된 포장도로들의 고전적인 돌들과 비슷하다(나는 그것들 중 얼마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다. 참으로 거친 길이다.
예수의 얼굴이 몹시 심각해져서 나는 그의 슬픔의 원인을 찾으려고 애쓰며 작은 언덕을 보지만, 특별한 무언가를 보지 못한다. 그것은 헐벗은 작은 언덕일 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그러다가 나는 예수를 놓친다. 내가 뒤돌아보았을 때 그는 더 이상 거기 있지 않다. 그리고 나는 이 환상을 보면서 깜빡 잠들었다.
…내가 이 환상의 기억을 간직한 채 잠에서 깨어났을 때 사람들 모두가 자고 있기 때문에 나는 기운과 평온을 약간 되찾은 다음, 내가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곳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여기 마당들, 샘들, 현관들, 집들이 있다. 집이라기보다는 정자들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집들보다는 정자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고대 유다인 복장을 한 많은 군중이 있는데, 그들은 몹시 시끄럽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는 예수가 바라보고 있었던 큰 건물 안에 내가 들어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나는 그곳을 둘러싸고 있는 총안이 있는 성벽과 보초를 서는 것 같은 탑과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장엄한 건물이 있고, 그 건물에 매우 아름답고 넓은 회랑들이 세워져 있으며, 거기 많은 사람들이 여러 활동들에 골몰하고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예루살렘 성전의 경내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길게 흘러내리는 옷을 입고 있는 바리사이들과 아마포 옷을 입고 그들의 다양한 겉옷 가슴 윗부분과 이마와 다른 부위 곳곳에 귀금속 판들을 달고 있는 사제들을 본다. 그 겉옷들은 매우 넓고 흰데, 그들은 값비싼 띠들로 허리를 졸라매고 있다. 그보다 장식물들을 더 적게 달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있고, 그들도 사제계급에 속한 사람들임이 틀림없는데, 그들은 보다 젊은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나는 그들이 율법의 박사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이 모든 인물들 가운데에서 길을 잃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왜 거기 있는지, 또는 내가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신학적인 논쟁을 막 시작한 일군의 박사들에게 다가가고, 많은 무리도 그렇게 한다.
‘박사들’ 가운데에는 가말리엘이라는 이름의 사람과 논쟁할 때 그를 지지하는, 거의 소경이 되다시피 한 다른 노인 한 사람이 이끄는 무리가 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내가 듣기에는 힐렐(Hillel)인데(나는 이름의 첫머리에서 기식음(氣息音)을 듣기 때문에 H자로 쓰고 있다), 그는 가말리엘의 선생이거나 친척인 것 같다. 왜냐하면 가말리엘이 그에게 친밀감과 동시에 존경을 표하며 그를 대하기 때문이다. 가말리엘의 무리는 더 관대한 반면, 더 수가 많은 다른 집단은 삼마이라는 사람이 이끄는 무리인데, 그들은 보수적이고, 복음서가 잘 나타내는 분개하는 불관용성이 현저하다.
가말리엘은 밀집해 있는 제자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메시아의 오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다니엘의 예언 위에 자기의 관측들을 세우며 메시아가 틀림없이 이미 태어났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예언에서 알려준 바 있는 성전재건의 칙령이 발령되었을 때부터 예언된 70주가 약 10년 전에 만료되었다는 것이다.
삼마이는 성전이 재건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의 노예상태가 심화된 것도 사실이고, 예언자들이 ‘평화의 왕’이라고 불렀던 그가 가져왔어야 할 평화는 세계에 존재한다고 보기에 아주 무리가 있고, 특히 예루살렘에는 더욱 거리가 있다고 말하며 가말리엘의 주장을 반박한다. 예루살렘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어떤 봉기라도 그들의 검들로 진압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로마의 군단들이 꽉 들어차 있는 안토니아 탑이 감히 성전 경내에까지 그 지배력을 행사할 정도로 당돌한 적에게 압제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꼬리 잡기 식의 반대들로 점철된 논쟁이 끝없이 이어진다. 모든 박사들이 자신들의 학식을 자랑하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반대자를 제압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청중들의 찬사를 얻으려고 자신들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그들의 의도들은 분명하다.
가까이 있는 신자들의 무리로부터 한 소년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말리엘 선생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군중과 박사들의 무리가 술렁이며 방해자를 찾는다. 그러나 그를 찾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숨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군중을 헤치고 나아가 ‘라삐들’의 무리로 다가간다. 나는 내 소년 예수를 알아본다. 그는 자신만만하고 솔직하다. 그리고 그의 눈들은 총명함으로 반짝인다.
“너는 누구냐?”
사람들이 그에게 묻는다.
“저는 율법이 규정하는 것을 행하려고 온 이스라엘의 아들입니다.”
그의 당돌하고 솔직한 대답은 찬사를 받고, 그것은 그에게 찬성과 호감의 미소들을 얻어준다.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소년에게 흥미를 느낀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나자렛의 예수입니다.”
삼마이의 집단에서는 호감이 사라진다. 그러나 가말리엘은 더 친절하게 힐렐과 함께 대화를 계속한다. 가말리엘이 노인에게 공손하게 말한다.
“저 아이에게 무언가를 질문해보십시오.”
“너는 네 확신의 근거를 어디에 두느냐?”
힐렐이 묻는다(나는 지금 간결성과 명료성을 위하여 대답들의 앞에 이름들을 써놓겠다).
예수: “그것은 시간에 관하여 틀릴 수 없는 예언과 그것이 실현될 때 발생했던 표징들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카이사르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계와 팔레스티나는 그 70주가 지났을 때 카이사르가 그의 영토들에 호구조사를 명할 수 있을 정도로 평화로웠습니다. 만일 제국에 전쟁들이 있고, 팔레스티나에 반란들이 있었다면,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70주가 마감되었던 것처럼 성전의 완성으로부터 62주 더하기 1주라는 다른 기간도 끝나갑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기름 발라질 것이며, 그 예언의 나머지는 그를 원치 않았던 사람들에게 실현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의심하실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동방에서 온 현자들이 보았고, 유다의 베들레헴의 상공에서 머물렀던 별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야곱 이후 줄곧 예언들과 환상들이 베들레헴 출신인 다윗을 통하여 야곱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인 메시아의 탄생지로 정해진 곳으로 그곳을 가리킨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여러분은 발라암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야곱에게서 태어난 별이 뜰 것이다.’
순결과 믿음으로 인해서 눈들과 귀들이 열렸던 동방으로부터의 현자들은 그 별을 보고 ‘메시아’라는 그 별의 이름을 알아냈고, 그래서 그들은 세상 안으로 내려온 빛(the Light)에게 경배하려고 왔습니다.”
삼마이: (예수를 노려보며) “너는 그 별이 나타났을 때 베들레헴 에프라타에서 메시아가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이냐?”
예수: “그렇습니다.”
삼마이: “그럼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얘야, 너는 헤로데가 베들레헴과 그 인근에서 태어난 지 하루에서 2년의 나이에 이르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모든 아기들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네가 이토록 성서를 잘 아니 너는 ‘라마에서 한 목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기 자녀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고 있다’는 말도 알겠구나. 죽어가는 라헬의 눈물을 거두어들인 베들레헴의 계곡들과 산들은 눈물로 가득했고, 어머니들이 학살된 그들의 자녀들을 애도하며 다시 울었다. 그들 중에는 분명히 메시아의 어머니도 있었다.”
예수: “어르신, 당신은 틀리셨습니다. 라헬의 울음은 호산나로 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고통의 아들’을 낳았던 그 곳에서 새로운 라헬이 하늘 아버지의 벤야민, 그분의 오른편의 아들, 그의 왕권 아래 하느님의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을 가장 무서운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키게 되어 있는 아들을 세상에게 낳아주었기 때문입니다.”
삼마이: “만일 그가 죽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되겠느냐?”
예수: “당신은 엘리야에 관하여 읽어보지 못하셨습니까? 그는 불 수레에 태워져 옮겨졌습니다. 그런데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임마누엘이 그분의 백성의 메시아가 되도록 그를 구하실 수는 없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땅 위를 걸어 자신들의 땅을 향하여 가도록 모세 앞에서 바다를 가르셨던 그분께서 그분의 아들, 그분의 그리스도를 잔인한 사람에게서 구하도록 그분의 천사들을 보내실 수는 없으셨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그리스도는 살아 있고,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그의 시간이 오면, 그는 자기의 능력 안에서 자신을 드러낼 것입니다.”
내가 밑줄쳐놓은 이 말들을 할 때 예수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린다. 그의 눈들은 어느 때보다 더 빛나고, 그는 명령과 약속의 몸짓으로 마치 맹세하듯 오른팔을 앞으로 뻗은 다음 내린다. 그는 소년이지만, 어른처럼 엄숙하다.
힐렐: “얘야, 누가 너에게 이 말들을 가르쳐주었느냐?”
예수: “하느님의 성령입니다. 저는 사람인 선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제 입술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힐렐: “얘야, 내가 너를 잘 볼 수 있고, 내 희망이 네 믿음에 의하여 살아나고, 내 영혼이 네 빛으로 비추어지도록 우리 가까이로 오너라.”
그렇게 하여 그들은 예수를 가말리엘과 힐렐 사이에 있는 높은 스툴에 앉히고, 읽고 설명하도록 그에게 두루마리들을 가져다준다. 이것은 적절한 시험이다. 군중이 몰려와 그것을 듣는다.
예수는 앳된 목소리로 읽는다.
“‘내 백성아, 위로받아라. 예루살렘의 노예생활이 끝났으니 그의 마음에 말하고, 그를 위로해주어라… 한 목소리가 광야에서 외친다. 주의 길을 준비해라… 그러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다…”
삼마이: “나자렛 아이야, 거봐라! 여기서는 끝난 노예상태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과 같은 노예생활을 한 적이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거기 선구자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그가 어디 있느냐? 너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고 있다.”
예수: “제가 당신께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선구자의 경고는 다른 누구보다 더 당신께 말해져야 합니다. 당신과 당신 같은 사람들에게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주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실 것이고, 하느님의 말씀도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열함, 교만, 오류가 당신이 보고 듣는 것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마이: “네가 어떻게 감히 한 선생에게 그렇게 말한단 말이냐?”
예수: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저는 심지어 제가 죽더라도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제 위에는 주님의 이익들이 있고, 제가 진리의 아들이니만큼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라삐님, 예언자가 말하고 제가 말하고 있는 노예상태는 당신이 생각하시는 노예상태가 아니고, 충성(royalty)도 당신이 생각하시는 충성이 아닙니다.
반대로 메시아의 공로들에 의하여 사람은 그를 하느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악(Evil)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표징은 모든 멍에에서 해방되고 영원한 왕국에 복종하는 모든 영혼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오, 다윗의 가문이여, 모든 민족들이 너에게서 태어나고, 온 세상을 뒤덮고 하늘까지 이르는 나무로 자라날 순 앞에 그들의 머리를 숙일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와 땅 위에서 모든 입들이 그의 이름을 찬미할 것이고, 하느님께 기름 바름 받은 사람, 평화의 왕, 지도자, 자기 자신을 줌으로써 실망하고 굶주리는 모든 영혼을 기쁨과 양식으로 채워줄 그 앞에, 하늘과 땅 사이에 동맹을 맺을 거룩한 자 앞에서 그 무릎을 꿇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을 이집트 밖으로 이끄셨을 때 여전히 그들을 종들로 취급하시면서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맺으셨던 것과 같은 언약이 아니라 구속주의 공로들에 의하여 사람들의 영혼 안으로 다시 한 번 주입된 은총과 함께 천상의 부성(heavenly paternity)을 주입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구세주를 통하여 모든 착한 사람들이 주님을 알게 될 것이고 하느님의 성소가 더 이상 무너지지도 파괴되지도 않을 것이다.”
삼마이: “애야!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지 마라! 다니엘을 기억해라. 그는 그리스도가 죽은 다음 성전과 성도가 먼 곳으로부터 올 한 민족과 지도자에 의하여 파괴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너는 하느님의 성소가 더 이상 파괴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구나! 예언자들을 존중해라!”
예수: “제가 당신께 엄숙히 말씀드립니다만, 예언자들 위에 누군가가 있는데, 당신은 그를 알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도 알지 못하시고, 나중에도 알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제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당신께 말씀드립니다. 진짜 성소는 죽음에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것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처럼 영원한 생명으로 일어날 것이고, 세상 끝에는 하늘에서 살 것입니다.”
힐렐: “아이야, 내 말을 들어라. 하까이는 말한다. ‘민족들이 바라는 이가 올 것이다… 그때에는 이 집의 영광이 클 것이고, 이 마지막 집의 영광은 전의 성전의 영광보다 클 것이다.’ 아마도 그는 네가 말하고 있는 성소를 언급하는가보구나?”
예수: “선생님, 그렇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당신의 정직성은 당신을 빛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께 말씀드리는데, 그리스도의 희생이 완수될 때 당신은 평화를 가지시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사악함이 없는 이스라엘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가말리엘: “예수야, 나에게 말해다오. 우리가 어떻게 예언자들이 말하는 평화를 바랄 수 있겠느냐? 만일 전쟁에 의하여 이 백성에게 파멸이 올 것이라면 말이다. 말해라. 그래서 나도 비추어다오.”
예수: “선생님, 당신은 그리스도의 탄생의 밤에 거기 있었던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천사들이 ‘착한 뜻을 가진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노래했다는 것을요. 그러나 이 백성은 착한 뜻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화를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이 백성은 그가 인간적인 권력을 지닌 왕이기를 바라고 있는데, 그들은 그들의 왕, 의인,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가 인간적인 권력을 가진 왕이기를 바라는데, 그는 영혼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가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그리스도는 전차들과 말들로 적을 무찌르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창조된 사람의 마음을 지옥에 가두기 위하여 애쓰는 영혼의 원수들과 싸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에게 기대하고 있는 승리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아, 너의 왕은 ‘암나귀와 나귀새끼’를 타고 올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의인들과 이방인들을 데리고 올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나귀새끼가 그에게 더 충실할 것이고, 그래서 그놈은 암나귀보다 앞서 그를 따를 것이고, 진리와 생명의 길들 안에서 자라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악한 뜻으로 인하여 자신의 평화를 잃을 것이고, 여러 세기 동안 고통당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그들의 왕을 고통당하게 하고, 이사야가 말하는 대로 그를 고통의 왕으로 만들 것입니다.”
삼마이: “나자렛 녀석아, 네 입에서는 젖비린내가 나고, 그와 동시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 나온다. 나에게 말해라. 선구자는 어디 있느냐? 언제 우리가 선구자를 가졌느냐?”
예수: “그는 있습니다. 말라키가 말하지 않습니까? ‘보라, 내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하게 하기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낸다. 그러면 너희가 말하고 있는 주님, 너희가 고대하고 있는 언약의 천사가 홀연히 자기의 성전으로 들어오리라.’
그러므로 선구자는 그리스도에 바로 앞서 옵니다. 그리스도가 와 있는 것처럼 그는 이미 와 있습니다. 만일 주님을 위하여 길들을 준비하는 그와 그리스도 사이에 여러 해의 간격이 있다면, 모든 길들이 다시 막히고 꼬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시고, 선구자가 단 한 시간만 주인보다 앞서도록 미리 결정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이 선구자를 보실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전도가 시작되고 있구나’ 하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가 이 길을 올 때 그는 많은 눈들을 뜨게 하고, 많은 귀들을 듣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당신이나 당신과 같은 사람들의 눈들과 귀들을 열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당신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그를 죽일 테니까요.
그러나 구속주가 이 성전보다 더 높고, 지성소에 들어 있는 장막보다 더 높고, 케루빔이 떠받치고 있는 영광보다 더 높은 그의 옥좌와 그의 제단에 앉을 때 하느님을 죽인 자들에 대한 저주와 이방인들을 위한 생명이 그의 수천수만의 상처들에서 흘러나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 그것을 모르시는 선생님, 제가 되풀이하거니와 그는 인간의 왕국의 왕이 아니라 영적인 왕국의 왕이며, 그의 신민들은 그를 위하여 영혼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배우고, 요나처럼 한번 태어난 다음 다른 나라들에서(on other shores), 즉 인류에게 참 생명을 줄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어나는 영적 재탄생(spiritual regeneration)을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배울 사람들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마이와 그의 추종자들: “이 나자렛 녀석은 사탄이다!”
힐렐과 그와 추종자들: “아니오. 이 아이는 하느님의 예언자요. 얘야, 나와 함께 있어라. 이 늙은이는 내가 아는 것을 너에게 부어주겠다. 그러면 너는 하느님의 백성의 스승이 될 것이다.”
예수 : “제가 진실로 당신께 말씀드립니다만, 만일 당신과 같은 분이 많다면,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제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하늘로부터의 목소리들이 저에게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시간이 오기까지 고독 중에서 그것들을 모아야 합니다.
그때 저는 제 입술과 제 피로 예루살렘에게 말하겠습니다. 그러면 제 운명은 예루살렘에게 돌로 맞아죽고 살해당한 예언자들의 운명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명 위에는 주 하느님께서 계시는데, 저는 저 자신을 충실한 종으로서 저 자신을 복종시켜 그분의 영광의 스툴로 만들고, 그분께서 세상을 그리스도의 발판을 만드시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제 시간에 저를 기다리십시오. 이 돌들은 제 목소리를 다시 들을 것이고, 제 마지막 말을 듣고 떨 것입니다. 그 목소리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으로 인하여 그분을 믿을 사람들은 복됩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 왕국을 줄 터인데, 여러분의 이기심은 그것이 인간의 왕국일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지만, 사실은 천상의 왕국(heavenly one)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말합니다. ‘주님, 당신의 종이 당신의 뜻을 행하려고 여기 왔습니다. 저는 그것을 완수하기를 열망하오니, 그것이 완수되게 해주십시오.’”
여기서 놀란 박사들 가운데에서 영적인 정열로 불타는 얼굴을 하늘을 향하여 쳐들고 양팔을 뻗은 채 똑바로 서 있는 예수의 환상이 끝난다.
(지금은 29일 새벽 3시 30분이다.)
1944년 1. 29.
저는 여기 당신에게 두 가지 말씀드릴 것을 가지고 있는데, 당신은 분명히 그것들에 관심을 가지실 것입니다. 저는 잠에서 깨자마자 그것들을 쓰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그러나 더 긴급한 일이 있기 때문에 저는 그것들을 나중에 쓰겠습니다. (중략)
제가 처음에 당신께 말씀드리려던 것은 이것입니다. 오늘 당신은 제가 어떻게 힐렐, 가말리엘, 삼마이의 이름을 알 수 있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것은 제가 ‘제 2의 목소리’라고 부르는 목소리입니다. 그것은 저에게 이것들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구술하는 예수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보다 훨씬 더 작게 들리는 목소리입니다. 제가 당신께 이미 말씀드렸지만 되풀이하여 말씀드리자면, 이것들은 제 영적인 청각이 그것을 마치 인간의 목소리들과 똑같은 것으로 지각하는 목소리들입니다. 저는 마치 누군가가 아주 가까이에서 저에게 말하는 것처럼 친절하거나 분개한 목소리들로, 강하거나 약한 목소리들로, 유쾌하거나 슬픈 목소리들로 저는 그것들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 ‘제2의 목소리’는 제 영 안에서 말하는 빛, 직관과도 같은 것입니다. 제 영 ‘안에서(in)’이지 제 영‘에게(to)’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암시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 노인 옆에서 몹시 열렬하게 논쟁하고 있는 저명인사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토론하고 있는 파당들의 무리에게 다가가고 있을 때, 이 내적인 ‘무언가’가 저에게 ‘가말리엘-힐렐’이라고 말했습니다. 먼저 가말리엘, 그 다음에 힐렐입니다. 저는 그것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들이 누구인지 궁금해 하고 있는 동안에 그 내적 관찰자(the internal monitor)는 마침 가말리엘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바로 그 순간에 그 불쾌한 제3의 인물을 저에게 가리켰습니다. 이렇게 하여 저는 바리사이의 모습을 가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내적 관찰자는 제가 우주의 멸망 후의 우주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저에게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환상들을 볼 때 이런 일은 매우 자주 있습니다. 이해가 필요하지만 저 혼자서는 깨달을 수 없는 어떤 세부사항들을 저에게 깨닫게 해주는 것은 이 내적 관찰자입니다. 저는 제가 잘 설명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기 때문에 저는 이만 끝내겠습니다.
1944. 2. 22.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작은 요한아, 인내해라. 이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너의 영적 지도신부를 기쁘게 하고 작품을 완성하기 위하여 이 다른 이야기를 다루자. 나는 이 일을 재의 수요일인 내일로 미루기를 원한다. 나는 네가 이 일을 완수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나는 너도 나와 함께 고통당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뒤로, 한참 뒤로 돌아가자. 내가 열두 살 소년이었을 때 논쟁하고 있었던 성전으로 돌아가자. 아니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성전으로 가는 길들로 돌아가자.
너는 남자들과 여자들의 무리들이 함께 모였을 때 내가 요셉과 함께 있지 않는 것을 마리아가 깨달았을 때의 그녀의 고통을 보아라.
그녀는 자기의 남편을 비난하지 않는다. 모든 여자가 자기의 남편을 비난했을 것이다. 너희는 그보다 훨씬 못한 일을 가지고도 남자가 여전히 가장이라는 것을 잊고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의 얼굴에 나타나는 고통은 어떤 쓰라린 비난보다 더 요셉의 마음을 찌른다. 그녀는 극적인 감정폭발들을 연출하지 않는다. 너희는 너희가 주목받고 동정받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보다 훨씬 못한 일을 가지고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억제된 고통은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녀는 깜짝 놀라 몸을 떨고, 얼굴이 창백해지고, 두 눈을 크게 뜬다. 그래서 그녀는 어떤 눈물과 통곡의 분출보다 더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더 이상 피곤하지도, 시장하지도 않다. 여행은 긴 것이었고, 그녀는 그토록 여러 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것, 그녀가 준비하고 있는 잠자리, 분배되려 하는 음식도 다 버려둔다. 그리고 그녀는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지금은 밤이라 어둡지만, 그것은 상관없다. 모든 걸음이 그녀를 예루살렘으로 되돌려놓는다. 그녀는 대상들과 순례자들을 멈춰 세우고 그들에게 물어본다. 요셉은 그녀를 따라가며 그녀를 도와준다. 하룻길을 걸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다음 시내에서 샅샅이 찾아 헤맨다.
그녀의 예수는 어디, 도대체 어디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 하느님의 섭리에 의하여 그녀는 많은 시간 동안에 어디서 나를 찾아야 할지 모를 것이다. 어린이를 성전에서 찾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어린이가 대관절 성전에서 무엇을 하고 있겠느냐 말이다. 기껏해야 만일 그가 시내에서 길을 잃어 그의 작은 발걸음들이 그를 그리로 되돌아오게 했다면, 그는 자기의 엄마를 부르며 울어 사람들과 사제들의 주의를 끌었을 것이고, 그들은 대문들에 게시판들을 달아 부모를 찾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게시판은 없었다. 시내에 있는 그 누구도 이 아이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잘생겼다고? 금발이라고? 체격이 건장하다고? 그런 아이들은 아주 많다! 그것은 누군가가 ‘나는 그 애를 보았습니다. 그 애는 여기나 저기 있었습니다’ 하고 말할 수 있기에는 너무 부족한 정보였다.
그러다가 미래의 다른 3일간의 고통의 상징인 사흘 후에 마리아는 기진맥진하여 성전으로 들어가 마당들과 홀들을 돌아다닌다. 아무것도 없다. 가엾은 엄마인 그녀는 어린이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달려간다. 심지어 어린양들의 우는 소리도 그녀에게는 울며 자기를 찾고 있는 자기의 아들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예수는 울고 있지 않다. 그는 가르치고 있다. 갑자기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장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말한다. ‘이 돌들이 떨 것입니다…’
그녀는 군중 사이로 길을 내려고 애쓰다가, 많은 노력 끝에 마침내 성공한다. 박사들 가운데 서서 양팔을 벌리고 있는 그녀의 아들이 있다.
마리아는 신중한 동정녀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걱정이 신중함을 이긴다. 그것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태풍이다. 그녀는 자기의 아들에게로 달려가 그를 껴안아 의자에서 들어 올려 바닥에 내려놓으며 외친다. ‘오! 너는 왜 우리에게 이렇게 했느냐? 우리는 사흘 동안 너를 찾아 헤매고 있다. 얘야, 네 엄마는 걱정으로 죽을 뻔했다. 네 아버지도 지칠 대로 지치셨다. 예수야, 왜 그랬느냐?’
너희는 아는 그(He Who knows)에게 ‘왜’라고 묻지 말아야 한다. 그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말이다. 너희는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왜’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따르느냐고 묻지 말아야 한다. 나는 지혜였고, 그래서 나는 알았다. 나는 한 사명에 ‘부름 받았고,’ 그래서 나는 그것을 성취하고 있었다. 땅의 아버지와 어머니 위에 하느님, 하느님 아버지가 계신다. 그분의 이익들은 우리의 이익들 위에 있고, 그분의 애정들은 다른 모든 애정보다 우월하다. 그래서 나는 내 어머니에게 말한다.
나는 박사들의 모후인 마리아에 대한 가르침으로 박사들에 대한 가르침을 마친다. 그래서 그녀는 그 가르침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녀가 겸손하게 순종하는 내 손을 잡을 때 태양은 다시 그녀의 마음속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말들은 그녀의 정신 안에 깊이 뿌리내렸다. 내가 아직 땅 위에 있을 21년 동안 많은 햇빛들과 많은 구름들이 하늘에 모일 것이다. 그리고 큰 기쁨들과 많은 눈물들이 남은 21년 동안 그녀의 마음속에서 교차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다시 묻지 않을 것이다. ‘내 아들아, 너는 왜 우리에게 이렇게 했느냐?’
오, 무례한 인간들아, 이 교훈을 배워라.
작은 요한아, 나는 환상을 보여주고 설명해주었다. 왜냐하면 너는 그 이상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하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라. 나는 이 책이 다음과 같이 만들어지기를 원한다.
첫 번째 고통: 성전에의 봉헌.
두 번째 고통: 이집트에서의 체류.
세 번째 고통: 성전에서 잃어버린 예수.
네 번째 고통: 성 요셉의 죽음.
다섯 번째 고통: 나자렛으로부터의 내 출발. 그 다음에 1944. 2. 10. 자의 구술.
여섯 번째 고통: 2. 13. 자 환상의 묘사(4가지 요점들: 회당, 나자렛의 집, 회당에서의 예수의 설교, 나자렛으로부터의 피신 후의 그의 어머니와의 대화).
일곱 번째 고통: 2. 14. 자 환상. 그 다음에 2. 16. 자 구술.
여덟 번째 고통: 파스카의 성만찬.
아홉 번째 고통: 수난, 1943. 2. 11. 자 환상과 그것에 2. 18. 자 환상을 연결시킴.
열 번째 고통: 예수의 장례(2. 19.) 그 다음에 2. 21. 자 환상과 구술. 2. 22. 자 환상과 구술 중 장사와 관계되는 부분. 성전에서 예수를 찾은 것에 관한 다른 구술은 셋째 슬픔 중 제 자리에 넣을 것.
첫째, 신부(the Father)는 그 자신과 너를 위한 통상의 책을 만들고, 너는 단 하나의 실수도 없도록 교정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원하는 사본들을 만들 것이다. 물론 각 환상에는 그에 수반하는 구술이 이어져야 한다. 그는 모든 것을 부활절에 맞추기를 원했다. 나는 그것을 부활절의 준비로서 원했고, 그래서 나는 그것을 오늘 너에게 건네주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은 이미 사순절의 첫날인 재의 수요일 오후 4시 30분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아, 일에 착수해라. 그러면 너희는 복될 것이다. 그리고 단순한 마음과 믿음으로 이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복될 것이다. 신부가 오늘 원했던 그 불은 그들 안에서 타오를 것이다. 세상은 그 잔인성에 있어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너무 부패했다. 그러나 그들은 위로받을 것이고, 하느님에 대한 목마름을 느낄 것이고, 성덕에 대한 충동이 그들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낄 것이다.
작은 요한아. 평안히 가거라. 너의 예수는 너에게 감사하고 너를 축복한다.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시(새번역) > 1권 복음준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사시 1권 p261~p272 [42. 성 요셉의 죽음~43. 사생활의 결론] (0) | 2024.11.19 |
---|---|
하사시 1권 p241~p250 [39. 예수의 성인례를 위한 준비와 나자렛에서의 출발 ~40. 예수의 성인례를 위한 성전에서의 시험] (9) | 2024.11.15 |
하사시 1권 p229~p241 [37. 예수의 최초의 노동학습~38. 예수와 유다와 야고보의 선생 마리아] (3) | 2024.11.14 |
하사시 1권 p218~p229[35. 이집트로의 피난(2)~36. 이집트에서의 성가정] (5) | 2024.11.13 |
하사시 1권 p207~p218[34. 현자들의 경배(2)~35. 이집트로의 피난(1)] (3) | 2024.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