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시(새번역)/1권 복음준비

하사시 1권 p218~p229[35. 이집트로의 피난(2)~36. 이집트에서의 성가정]

Skyblue fiat 2024. 11. 13. 20:59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1권 복음준비  p218~p229

 

※ 통독한 뒤 마음에 세길 구절 1~2개를 나눕니다

 

35. 이집트로의 피난 (2)

1944. 2. 28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이 일련의 환시들도 이렇게 끝난다. 까다로운 박사들의 허락 하에 우리는 나의 도래에 선행했고, 동반했고, 뒤따랐던 장면들을 너에게 보여주었다. 그 광경들 자체를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가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충분히 알려져 있다. 비록 그것들이 항상 사람들이 하느님께 더 큰 찬미를 드리기 위하여 ―그래서 그것들은 용서받았다― 사실을 그대로 두었다면 대단히 아름다웠을 것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드는 그들의 사고방식의 결과로 세기들을 통하여 덧붙여진 요소들에 의하여 왜곡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사실들을 그 실재 안에서 보는 방식은 내 인성이나 마리아의 인성을 축소시키지 않고, 내 신성이나 아버지의 위엄이나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사랑을 모욕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내 어머니의 공로들과 나의 완전한 겸손이 밝게 빛나고, 영원하신 주님의 전능하신 다정하심도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너와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들로부터 유래하는 초자연적인 의미를 적용할 수 있게 해주고, 그것을 너희에게 삶의 규칙으로 주기 위하여 이 광경들을 너에게 보여주었다.

 

십계명은 율법이다. 그리고 내 복음은 율법을 너희에게 더 명백하게 밝혀주고, 따르기에 더 사랑스러운 것이 되게 하는 가르침이다. 율법과 내 가르침은 사람들을 성인들로 만들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실로 너희의 영혼들을 너무 많이 압도하는 너희의 인성에 너무 방해받아 내 길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넘어지거나 실망하여 멈춘다. 너희는 너희 자신들과 너희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에게 복음서의 예들을 인용하며 계속 말한다.

‘그러나 예수, 마리아, 요셉은(그리고 모든 성인들도) 우리와 같지 않으셨어요. 그분들은 강했어요. 그분들은 고통 중에도 금방 위로받으셨고, 그분들이 경험한 작은 고통 중에도 격정들을 느끼지 않으셨어요. 그분들은 이미 이 세상 밖의 존재들이었어요.’

작은 고통이라고! 그들은 격정들을 느끼지 않았다고!

고통은 우리의 충실한 벗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다양한 모든 형태들과 이름들을 가지고 있었다.

 

격정들… 너희를 오도하는 악덕들을 ‘격정들(passions)’이라고 부름으로써 잘못된 말을 쓰지 마라. 진실해져라. 그래서 그것들을 아예 ‘악덕들(vices)’이라고, 그것도 주요한 악덕들(capital vices)이라고 불러라. 이러한 그것들을 우리가 몰랐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눈과 귀가 있어서 보고 들을 수 있었고, 사탄은 활동 중인 그 악덕들의 더러움의 무더기와 함께 우리에게 보여주거나 그의 유혹들로 우리를 유혹하며 우리 앞과 우리 주위에서 그것들을 춤추게 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겠다고 확고하게 원했기 때문에 사탄의 추악함과 암시들이 그가 의도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사탄이 더 활동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가 우리의 육체들과 우리의 영혼들의 눈에 보여주는 진창의 어둠을 혐오했기에 하느님의 빛 속으로 더 피해 들어갔었다.

그러나 우리는 철학적 의미에서의 열정들(passions)을 우리 마음속에서 무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고향을 사랑했고, 그중에서도 우리의 작은 나자렛을 팔레스티나의 다른 모든 고을보다 더 사랑했다. 우리는 우리의 집과 친척들과 친구들을 좋아했다. 우리가 왜 그러지 말아야 했겠느냐? 하느님 외에는 아무것도 우리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감정들의 노예들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들은 우리의 좋은 친구들이었다.

 

내 어머니께서는 약 4년 후에 나자렛으로 돌아와 자기 집으로 들어갔을 때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그분의 ‘예’가 그녀의 태를 열어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였던 벽들에 입 맞추었다. 요셉은 그의 친척들과 더 수가 많아지고 더 나이든 자기의 조카들에게 기쁘게 인사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동향인들이 자기를 기억하고, 자기의 능력으로 인하여 일을 부탁하는 것을 보았을 때 기뻐했다. 나 자신도 우정에 감사했고, 유다의 배반으로 인하여 정신적인 십자가수난의 고통을 느꼈다. 왜 그러지 말아야 했겠느냐? 하지만 내 어머니도, 요셉도 그들의 가족과 친척들에 대한 사랑을 하느님의 뜻보다 앞세우지는 않았다.

또한 나는 말해야 할 때에는 유다인들의 미움이나 유다의 반감을 살 수 있는 말들을 결코 아끼지 않았다. 나는 약간의 돈이라면 충분히 그를 나에게, 구속자인 나에게가 아니라 부자인 나에게 복종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빵조각들을 많아지게 했는데, 만일 내가 원했다면 나는 돈도 많아지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에게 인간적인 만족들을 얻게 하려고 오지 않았다. 내가 불렀던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럴 생각이 나에게는 없었다. 나는 희생, 초탈, 순결한 생활, 겸손한 자리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만일 내가 그것이 누군가를 붙잡아두는 방법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정신적, 육체적 만족을 위하여 그에게 돈을 주었다면, 나는 어떤 종류의 스승이며 의인이었겠느냐?

 

자신들을 ‘작아지게’ 만드는 사람들은 내 나라에서 위대하다. 세상의 눈에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내 나라에서 다스리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들은 마귀들의 침대들을 위한 지푸라기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위대함은 하느님의 율법과 정반대(antithesis)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거의 항상 불법적으로 가장 좋은 자리들을 차지할 줄 알고, 그렇게 하는 사람들을 ‘위대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웃을 자기들이 딛고 올라갈 발판으로 삼아 올라가 그를 짓밟는다. 세상은 다스리기 위하여 개인들과 공동체들 모두를 피 흘리게 하여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죽일 줄 알고, 자리들과 나라들을 강탈하는 사람들을 ‘위대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세상은 종종 범죄자들을 ‘위대하다’고 말한다. 아니다. ‘위대함’은 죄악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착함, 정직, 사랑, 정의 안에 있다. 너희는 너희의 ‘위대한 사람들’이 너희에게 어떤 독 열매를 주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열매는 그들이 자신들 내부의 사악한 악마적인 정원에서 딴 것이다.

 

나는 그 마지막 환상에 대하여 말하고 싶을 뿐이고, 그래서 나머지는 생략하고 싶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것에 관한 진실을 듣기를 원치 않으므로 그것이 무익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환상은 마태오 복음에서 두 번 인용된 한 세부사항, 두 번 반복된 한 문장을 분명히 해준다.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His Mother)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해라’(마태 2,13),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마태 2,20) 그런데 너는 마리아가 자기 방에서 아기와 함께 그녀 혼자 있는 것을 보았다.

 

출산 후의 마리아의 동정성과 요셉의 순결은 자신들이 부패한 진흙이기 때문에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 빛처럼 순수하고 깨끗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 의하여 강하게 부정되어 왔다. 그들은 영혼들이 너무 부패하고, 정신들이 육체와 너무 간음하여, 자기들이 여자에게서 그녀의 육체가 아니라 영혼을 봄으로써 그녀를 존경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고, 자기들이 육체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인 것을 갈망하며 초자연적인 분위기에서 살도록 자기를 들어 올릴 수 없게 되어버린 불쌍한 사람들이다.

자, 나는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부인하는 그들에게, 나비들이 될 수 없는 그 벌레들에게, 자기 자신들의 육욕의 점액으로 뒤덮이고 한 송이 백합꽃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없는 그 파충류들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그들에게 마리아는 동정녀였고, 동정녀로 남아 있었으며, 그녀의 영혼(spirit)이 오로지 하느님의 영과만 결합하여 그분의 행위에 의하여 성부와 마리아의 외아들(the Only Begotten Son of the Father and of Mary)인 나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것과 정확히 똑같이 오로지 그녀의 영혼(soul)만이 요셉과 결혼했다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내 어머니이신 복되신 동정녀에 대한 애정 어린 존경으로 인하여 나중에 꾸며진 전통이 아니다. 이것은 진리이며, 초기부터 알려져 왔다.

 

마태오는 수세기 후에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마리아와 동시대인이었다. 마태오는 산골에서 자라 한담을 쉽게 믿는 보잘것없는 무식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너희가 요즘 세리라고 부르고, 우리가 그때 염세리라고 불렀던 세관의 사무원이었다. 그는 보고, 듣고, 이해할 줄 알았고, 진리와 오류를 분간할 줄 알았다. 마태오는 제삼자들이 말해준 사실들을 들은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의 스승과 진리에 대한 사랑에 추동되어 직접 마리아의 입으로부터 자기가 정보를 요청한 사람을 통하여 그 정보를 얻었다.

나는 마리아의 불가침성(inviolability)을 부인하는 그 사람들도 감히 그녀가 거짓말했다고 생각한다고 믿지는 않는다. 그녀에게 다른 자녀들이 있었다면, 나 자신의 친척들도 그녀가 거짓말한다고 반박했을 수 있다. 그런데 야고보, 유다, 시몬, 요셉은 마태오와 함께 제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마태오는 만일 두 가지 이상의 설명이 있었다면, 그것들을 쉽게 대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오는 ‘일어나 네 아내를 데리고’라고 말하지 않고,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라고 말한다. 그 전에 그는 ‘요셉과 약혼한 동정녀,’(마태1,18) ‘마리아의 남편 요셉(마태1,19)이라고 말한다.

 

순결을 부인하는 그 사람들은 마치 ‘아내’라고 말하는 것이 불명예인 것처럼, 이것은 유다인들에게 특유한 말투였다고 나에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순결을 부인하는 자들아, 그렇지 않다. 성경의 첫머리에서 우리는 ‘남자는 자기의 아내와 결합할 것이다’라는 말을 읽는다. 그녀는 결혼의 성적 완성의 순간까지는 ‘짝(companion)’이라고 불리고, 그 다음에는 여러 상황들과 여러 장들에서 ‘아내’라고 불린다.

그런데 이것들은 아담의 아들들의 아내들에 대하여 언급된 표현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라도 아브라함의 ‘아내’라고 불린다. ‘네 아내 사라’(창세2,24)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롯에게도 ‘네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창세19,15)라고 하였다. 룻기에 ‘마흘론의 아내 모압 여자’(룻1,4)라고 쓰여 있다. 사무엘 상권에는 ‘엘카나는 두 명의 아내들을 가지고 있었다’(1사무1,2)라는 말이 있고, 나아가 ‘그 다음에 엘카나가 자기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였다’(1사무1,19)는 말이 있고, 다시 ‘엘리는 엘카나와 그의 아내를 축복하였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열왕기에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가 다윗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아주었다’(1사무1,20)는 말이 있다.

그리고 너희는 교회가 너희가 결혼생활에서 거룩하게 지내도록 권고하기 위하여 너희의 결혼식 때 너희에게 노래하는 토비야의 푸른 책에서 무엇을 읽느냐? ‘그런데 토비야가 자기의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왔을 때…’ 그리고 ‘토비야는 자기의 아들과 아내와 함께 도망칠 수 있었다.’(토빗1,9, 20)

그리고 복음서에 즉 그리스도의 시대에, 고대어와 비교하여 현대어로 쓰던 시대에, 따라서 베껴 쓰는 데 있어서의 착오를 의심할 수 없었던 시기에 쓰인 마태오 복음 22장에 이런 말이 있다. ‘…첫째가 아내를 얻었다가 죽어 그의 아내를 아우에게 남겨주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10장에 ‘자기의 아내와 이혼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고, 루카는 네 번 계속해서 엘리사벳을 즈카르야의 아내라고 부르고, 8장에서는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라고 말한다.

 

이 이름은 주님의 길들을 걷는 사람들에게 금지된 단어가 아니었고, 하느님과 그분의 놀라운 업적을 언급할 때 말해서는 안 되고, 더구나 써서는 안 되는 불결한 단어가 아니었다는 것을 너희는 안다. 그러므로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이라는 천사의 말은 마리아는 아기의 친어머니였지만, 요셉의 아내는 아니었다는 것을 너희에게 증명해주는 것이다.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한 동정녀’로 영원히 남았다.

그리고 이것이 이 환상의 마지막 가르침이다. 이것은 마리아와 요셉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후광이다. 침범되지 않은 동정녀, 순결하고 의로운 남자. 이들은 두 송이의 백합꽃이었고, 나는 그들 가운데에서 오로지 순결의 향기만을 받으며 성장했다.

 

작은 요한아, 나는 너에게 자기의 집과 고향을 억지로 떠나게 된 마리아의 고통에 대하여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이 필요 없다. 너는 이해하고, 슬픔으로 죽도록 고통스러워한다.

네 고통을 나에게 다오. 나는 그것만을 원한다. 그것은 네가 나에게 줄 수 있는 다른 어떤 것보다 크다. 마리아야, 오늘은 금요일이다. 네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골고타에서의 내 고통과 마리아의 고통에 대하여 생각해라. 우리의 평화와 사랑이 너와 함께 머물러 있다.”

 


36. 이집트에서의 성가정

1944. 1. 25. (자정에)

 

성가정의 감미로운 환상. 이곳은 이집트이다. 나는 사막과 피라미드를 보기에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새하얀 작은 단층집 하나를 본다. 극빈자들의 초라한 집이다. 벽들은 겨우 초벽 칠을 하고나서 한 번만 회칠한 상태이다. 이 작은 집에는 두 개만 있는 방들로 들어가는 두 개의 문들이 있는데, 나는 지금 당장은 그리로 들어가지 않는다. 작은 집은 사질토의 작은 땅 가운데에 세워져 있고, 땅바닥에 고정된 갈대들의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는데, 이것은 도둑들을 막기에는 아주 약한 울타리다. 이것은 고양이들이나 떠돌이 개들을 막는 데나 소용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부의 그림자도 없다는 것이 분명히 보이는 곳에서 누가 무언가를 훔칠 것을 생각하겠는가?

 

갈대 울타리로 둘러싸인 작은 땅 뙈기는 비록 토양은 메마르고 보잘것없지만, 참을성 있게 작은 정원으로 가꾸어져 있다. 울타리가 더 두꺼워 보이고 덜 듬성듬성해 보이도록 그 울타리에는 메 덩굴 같은 덩굴식물을 가꿔 올려놓았고 한 쪽 편에는 꽃이 만발한 재스민 한 그루와 흔한 장미나무들을 여러 그루 모아 심어놓았다.

텃밭 가운데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키 큰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는 햇볕이 내리쬐는 땅과 작은 집에 약간의 그늘을 만들어준다. 그 밑의 텃밭에는 보잘것없는 채소들이 보인다. 흰 빛깔과 검은 빛깔이 섞인 작은 염소 한 마리가 이 나무에 매여 있는데, 이놈은 땅 위에 던져진 몇 개의 나뭇가지들의 잎들을 뜯어먹은 다음에 되새김질하고 있다.

 

그리고 근처의 땅에 펼쳐져 있는 매트 위에 아기 예수가 있다. 나는 그가 두 살 혹은 기껏해야 두 살 반쯤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어린 양들이나 작은 말들처럼 보이는 조각된 작은 나무들과 그의 금발머리보다는 덜 말려 있는 대팻밥들을 가지고 놀고 있다. 그는 포동포동한 자기의 양손으로 자기의 작은 짐승들의 목에 나무 목걸이들을 걸려고 애쓰고 있다.

그는 조용하게 미소 짓고 있다. 매우 아름답다. 그의 작은 머리는 아주 숱이 많은 금발의 작은 컬들의 무더기이고, 그의 피부는 깨끗하고 약간 불그레하며, 그의 눈들은 생동감 있고 밝은데 군청색이다. 물론 표정은 다르지만, 나는 내 예수의 눈들의 색깔을 알아본다. 그것은 두개의 아름다운 짙은 색 사파이어들이다.

그는 긴 흰 옷을 입고 있는데, 그것은 분명히 소매가 짧은 그의 튜닉이다. 지금 그는 발에 아무것도 신고 있지 않다. 그의 작은 샌들들은 매트 위에 있는데, 그것들 역시 아기의 장난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는 자기의 작은 짐승들을 매트 위에 놓은 다음에 마치 한 쪽의 샌들이 작은 마차라도 되는 듯이 끈으로 그것을 쭉 끈다.

샌들은 매우 소박하다. 바닥과 두 개의 끈들로 만들어진 것인데, 그 중 하나는 코에 달려있고, 하나는 바닥의 뒤축에 달려 있다. 코에 달려 있는 가죽 끈은 어느 지점까지 와서는 두 개로 갈라진다. 그래서 한쪽 끈은 뒤축에서 오는 끈의 구멍으로 들어가 돌아간 다음에 다른 끈과 연결되어 발목에서 원형을 만든다.

 

약간 떨어진 곳 나무 그늘에 마리아가 앉아 있다. 그녀는 촌스러운 베틀에서 옷감을 짜며 아기를 살피고 있다. 나는 그녀의 날씬한 흰 손들이 날실 사이로 북을 던지며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고, 베틀의 페달을 움직이는 샌들 신은 그녀의 한 발을 본다. 그녀는 아욱꽃 빛의 붉은 보랏빛 웃옷을 입고 있다. 그녀는 머리에 아무것도 쓰고 있지 않아서 나는 그녀의 머리채가 두 개의 소박한 땋은 머리들로 갈라져 그녀의 목덜미에 모여 있는 것을 본다. 그녀의 옷소매들은 길고 꽤나 좁은 편이다. 그녀는 자기의 미모와 얼굴의 지극히 상냥한 표정 외에 다른 장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녀의 얼굴, 머리, 눈들, 얼굴의 형태 모두가 항상 내가 그녀에게서 보는 모습이다. 그녀는 지금 매우 젊어 보이는데, 스무 살쯤인 것 같다.

어느 순간 그녀는 일어나 아기에게로 가서 몸을 숙이고 다시 샌들을 신기고 정성스럽게 끈을 매준다. 그 다음에 그녀는 그를 토닥여주고, 그의 작은 머리와 아름다운 눈들에 입 맞춘다. 아기는 재잘거리고, 그녀는 대답한다. 그러나 나는 그 말들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 다음에 그녀는 자기의 베틀로 돌아가 짜진 옷감과 날실을 천으로 덮고, 자기가 앉아 있던 스툴을 집어 들고 그것을 집으로 가져간다. 그녀가 아기를 혼자 남겨두었을 때 그는 자기의 엄마를 귀찮게 하지 않고 눈으로 그녀를 따라간다.

 

분명히 그녀의 작업이 끝났다. 지금은 거의 석양이다. 사실 메마른 모래 위로 해가 지고 있고, 거대한 불이 먼 피라미드 뒤로 하늘 전체를 침공한다.

마리아는 돌아와 예수의 손을 잡고 매트에서 일어나게 한다. 아기는 아무런 저항 없이 복종한다. 자기의 엄마가 그의 장난감들과 매트를 집어 들고 그것을 집안으로 가져가는 동안에 그는 잘생긴 작은 두 다리로 아장아장 걸어 작은 염소에게로 가서 그놈의 목을 자기의 양팔로 감싼다. 작은 염소는 울면서 머리를 예수의 어깨에 비빈다.

 

마리아가 돌아온다. 그녀는 지금 머리에 긴 베일을 쓰고 있고, 한 손에 암포라를 들고 있다. 그녀는 예수의 손을 잡고 함께 걷기 시작하여 작은 집 주위를 돌아 집의 다른 편으로 간다.

나는 그 우아한 광경을 감상하며 따라간다. 마리아는 아기의 걸음에 자기의 걸음을 맞추고, 아기는 엄마 곁에서 아장아장 걷는다. 나는 아이들의 발걸음에 특유한 우아함으로 그의 장밋빛 발꿈치들이 오솔길의 모래 위에서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본다. 나는 그의 작은 옷이 그의 발들까지 내려오지 않고, 종아리 중간까지만 내려오는 것을 본다. 그것은 대단히 깨끗하고 소박하며, 작은 흰 끈으로 그의 허리에 꽉 졸라매져 있다.

 

나는 집의 정면에서 촌스러운 사립문으로 산울타리가 끊어져 있는 것을 본다. 마리아는 그것을 열고 도로로 나간다. 이것은 읍내나 마을의 끝에 있는 초라한 도로인데,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이 집과 이 집처럼 초라한 식물들이 거의 없는 텃밭들이 딸린 다른 집들이 모여 있는 사질토의 들에서 끝난다.

나는 아무도 보지 못한다. 마리아는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들 쪽이 아니라 마을 중심 쪽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그녀는 몇 십 미터 위에 있는 연못인지, 우물인지가 있는 곳을 향하여 간다. 그 위로는 몇 그루의 종려나무들이 그늘진 원형을 이루고 있고, 그 너머의 땅에 약간의 초록빛 식물들이 있다.

 

나는 길을 걸어오고 있는 한 남자를 본다. 그는 그리 키가 크지는 않지만, 체격은 건장하다. 나는 요셉을 알아본다. 그는 빙그레 웃고 있다. 그는 내가 낙원의 환상에서 그를 보았을 때보다 더 젊어 보인다. 그는 많아야 마흔 살쯤 되어 보인다. 그의 모발과 수염은 숱이 많고 검으며, 그의 피부는 꽤나 그을려 있고, 그의 눈들은 검다. 그것은 정직하고 유쾌한 얼굴, 신뢰를 불러일으키는 얼굴이다.

그가 예수와 마리아를 보자 빨리 걷는다. 그는 자기의 왼쪽 어깨에 일종의 톱과 일종의 대패를 메고 있고 손에는 다른 연장들을 들고 있는데, 그것들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연장들과 똑같지는 않지만 거의 비슷하다. 아마도 그는 누군가의 집에서 일한 다음 돌아오고 있다. 그는 적갈색과 암갈색의 중간색의 옷을 입고 있는데, 그것은 아주 길지는 않고―그것은 그의 발목들보다 훨씬 위까지 내려온다―양 소매는 짧다. 나는 그가 허리에 가죽벨트를 매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노동자의 작업복이다. 그는 그의 발목들에 묶여 있는 샌들을 신고 있다.

 

마리아는 미소 짓고, 아기는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엄마에게 잡히지 않은 한손을 내민다. 세 사람이 만나자 요셉은 몸을 숙여 아기에게 과일 한 개를 주는데, 그 모양과 빛깔로 볼 때 나는 그것이 사과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에 그가 자기의 양팔을 내밀자 아기는 자기의 엄마를 떠나 요셉의 팔에 안겨 자기의 작은 머리를 요셉의 어깨의 오목한 곳으로 숙인다. 요셉은 아기에게 입 맞추고 아기의 입맞춤을 받는다. 우아한 애정이 넘쳐흐르는 광경이다.

나는 마리아가 서둘러 요셉의 연장들을 받아 그가 아기를 안아줄 수 있도록 했다는 말을 잊을 뻔했다.

그 다음에 예수의 키 높이에 맞추느라 쪼그리고 앉았던 요셉이 일어나 왼손으로 연장들을 들고, 오른팔로 어린 예수를 자기의 튼튼한 가슴에 꼭 껴안는다. 마리아가 자기의 암포라에 물을 채우기 위하여 우물로 가는 동안에 그는 집을 향하여 간다.

집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 다음에 요셉은 아기를 땅에 내려놓고, 마리아의 베틀을 들어 안으로 들여놓고, 염소젖을 짠다. 예수는 이 모든 활동들, 특히 집 한 쪽의 작은 헛간에 작은 염소를 가두는 것을 주의 깊게 바라본다.

 

지금은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열기로 인하여 떨리는 것처럼 보이는 모래 위에서 황혼의 붉은 빛이 보랏빛으로 변하고 있는 것을 본다. 피라미드는 더 어둡게 보인다.

요셉이 집안으로, 방안으로 들어가는데, 그 방은 그의 작업장, 부엌, 식당 겸용임이 틀림없다. 다른 방은 분명히 침실인데, 나는 그 방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낮은 화덕에서 불이 타고 있다. 이 방에는 목수의 작업대, 작은 탁자, 몇 개의 스툴들, 몇 점의 연장들, 두 개의 기름등잔들과 몇 개의 주방기구들이 얹혀 있는 몇 개의 선반들이 있다. 매우 큰 질서와 청결함이 여기 있다. 이곳은 아주 가난한 처소이지만, 아주 깨끗하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다. 예수의 인간생활에 관한 모든 환상들에서 나는 예수와 마리아께서는 요셉과 요한과 마찬가지로 그분들의 복장과 신체 모두가 항상 단정하고 깨끗하다는 것을 보아왔다. 그분들은 수수하고 소박한 옷을 입고 있지만, 그것들은 아주 깨끗하여 신사숙녀처럼 품위 있어 보인다.

 

빨리 땅거미가 지는 동안에 마리아는 암포라를 가지고 돌아와 문을 닫는다. 방은 요셉이 불을 켜서 자기의 작업대 위에 올려놓은 등불로 밝혀져 있다. 마리아가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동안에 그는 몇 개의 작은 판자들 위에서 작업을 시작한다. 등불이 방안을 밝히고 있다. 예수는 자기의 작은 손들을 작업대에 기댄 채 작은 머리를 들고 요셉이 하고 있는 일을 지켜보고 있다.

 

그들은 기도드리고 나서 식탁에 둘러앉는다. 그들은 분명히 십자 성호를 긋지는 않지만 기도드린다. 요셉이 기도드리고, 마리아가 응답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다. 그것은 틀림없이 시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해진다.

그 다음에 그들은 식탁에 앉는다. 램프는 지금 식탁 위에 놓여 있다. 마리아는 예수를 자기의 무릎 위에 앉히고 염소젖을 먹인다. 그녀는 둥그스름한 빵에서 잘라 낸 작은 빵조각들을 양젖에 담근다. 빵 덩어리는 껍질도, 속도 아주 검은데, 그것은 호밀이나 보리로 만들어진 것 같다. 그 색깔로 판단하건대 그것은 분명히 다량의 밀기울을 함유하고 있다. 요셉은 빵과 치즈를, 한조각의 작은 치즈와 많은 빵을 먹는다.

그 다음에 마리아는 예수를 자기 옆의 작은 스툴에 앉힌다. 그리고 익힌 야채들을 가져와―그것들은 요즘 우리가 그렇게 하듯 삶아서 양념한 것 같다―요셉이 먹은 다음에 자기도 먹는다. 예수는 기쁘게 자기의 사과를 갉아먹으며 작은 흰 치아들을 드러내며 웃고 있다. 그들의 저녁식사는 몇 개의 올리브들이나 대추야자들로 끝난다. 그것들은 올리브들 치고는 빛깔이 너무 연하고, 대추야자들이라면 너무 딱딱하여 나는 그것들을 정확하게 분간할 수 없다. 포도주는 없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저녁식사다.

그러나 이 방안에는 아주 큰 평화가 있다. 나는 지극히 호화로운 왕궁에서도 이토록 큰 평화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얼마나 큰 조화로움이 있는가!

 

오늘 밤 예수께서는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이 광경을 설명하시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환상의 선물로 나를 가르치셨을 뿐인데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분께서는 항상 그리고 변함없이 찬미 받으시기를.

 

1944. 1. 26.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보는 것들이 너와 다른 사람들에 교훈을 준다. 그것은 겸손, 체념 그리고 훌륭한 조화의 교훈이다.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들, 특히 이 고통스러운 시대의 그리스도인 가정들에게 본보기로 주는 교훈이다.

 

너는 한 초라한 집을 보았다. 그런데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그것이 외국에 있는 초라한 집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단지 자기들이 기도하고 성찬례에서 나를 받아먹기 때문에 꽤나 착한 가톨릭 신자들이라고 생각하며 번영하고 행복하고 물질적으로 편한 생활, 최소한의 고통도 받지 않는 생활을 바란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의 필요들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필요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나를 받아먹는다. 왜냐하면 극소수의 기도하는 사람들만이 이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요셉과 마리아는 참 하느님인 나를 그들의 아들로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고향에서도 가난하여 변변찮은 만족조차 누리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에서는 알려져 있었고 적어도 ‘그들 자신의’ 작은 집 한 채는 거기 있었기 때문에 많은 문제들에 주거문제는 그들의 많은 문제들에 걱정거리를 더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거기서는 그들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일거리를 얻고 그들의 생활의 필요들을 채우는 것이 더 쉬웠을 것이다.

그들은 나를 데리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하여 도망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다른 기후, 갈릴래아의 유쾌한 농촌에 비하여 몹시 쓸쓸한 다른 나라, 다른 언어, 다른 풍습, 그들을 알지 못하고, 대체로 피난민들과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신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아야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은 집의 편리하고 소중한 가구들과 거기서 가지고 있었던 소박하면서도 필요한 물건들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거기서는 그렇게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었는데, 여기 그들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고 보니 그것들이 마치 부잣집들을 아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사치품들처럼 매우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들은 고향과 자신들의 집에 대한 향수를 느꼈고, 거기 남겨두고 온 보잘것없는 물건들, 아마 아무도 포도나무들과 무화과나무들, 그리고 다른 유용한 식물들을 돌보아주지 않을 작은 텃밭에 대하여 염려했다.

또한 그들은 매일 음식, 옷, 불, 그리고 자기들이 먹는 음식과 같은 것을 먹일 수 없는 어린 나를 위하여 음식을 마련해야 한다. 게다가 향수로 인하여,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인하여, 그리고 특히 처음에는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 일을 시켜달라는 청을 들어주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의 신뢰의 결여로 인하여 그들은 마음속으로 슬퍼한다.

 

그렇지만 너 자신도 보았다시피 그 집에는 평온함, 미소들, 화합이 배어 있고, 상호 일치하여 그것을 더 아름답게 하려고 애쓰고, 메마른 작은 텃밭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자기들이 떠나온 집처럼 더 안락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그들은 한 가지 생각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 땅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나에게 덜 적대적이고 덜 불유쾌한 땅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것은 여러 모로 나타나는 신자들과 부모로서의 사랑이다. 그들이 가외로 많은 시간 일하여 사온 염소로부터 남은 나무 조각들로 조각한 작은 장난감들과 자기들의 한 입 음식까지 희생하면서 나만을 위하여 사온 과일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오, 내 사랑하는 지상의 아버지, 당신께서는 하느님, 가장 높은 하늘들에 계시는 아버지 하느님, 땅 위에서 구세주가 된 아들 하느님께 얼마나 사랑받으셨습니까!

 

그 집에는 성급함, 무뚝뚝함, 우울한 얼굴들이 없으며, 서로에 대한 어떤 비난도 없고, 그들에게 물질적인 부유함을 베풀어주지 않으시는 하느님에 대한 티끌만큼의 원망도 없다. 요셉은 자기의 불편의 원인이라고 마리아를 비난하지 않고, 그녀는 요셉이 더 많은 세속적인 재물을 버는 데 무능하다고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를 거룩하게 사랑한다. 그뿐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 자신의 편안함이 아니라 상대 배우자의 편안함을 염려한다. 참다운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다. 그리고 참다운 사랑은 항상 순결하다. 비록 순결함에 있어 이 동정 부부의 사랑만큼 순결에 있어 완전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사랑과 결합한 순결은 다른 성덕들의 다발을 산출하며, 따라서 순결하게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은 완전하게 된다.

마리아와 요셉의 사랑은 완전했다. 따라서 그것은 다른 모든 성덕들 특히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대한 유인이 되었다. 비록 그분의 거룩한 뜻이 육체와 마음에는 고통스러워도 이 두 성인들의 육체와 마음 위에서 영혼은 더 활기차고 더 강했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그분의 영원한 아들의 보호자로 선택된 데 대하여 감사하며 매시간 주님을 찬미하였다.

 

그들은 그 집에서 기도했다. 오늘날 너희는 너희 가정들에서 너무 적게 기도한다. 해가 뜨고 질 때, 너희가 일을 시작할 때, 식탁에 앉을 때 너희는 너희에게 새 날을 보게 하시고, 살아서 새 밤을 맞이하게 하시며, 너희의 일에 강복하시어 너희의 인간생활에 필요한 음식, 불, 옷, 집을 마련할 수 있게 해주신 주님을 생각하지 않는다. 선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무엇이든 ‘좋다.’ 설사 그것이 초라하고 빈약하다 해도 사랑은, 너희로 하여금 영원하신 조물주를 너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보게 하는 사랑은 그것에 맛과 풍성함을 부여한다.

 

그 집에서는 검소했다. 설사 돈이 충분히 있었다 해도 그랬을 것이다. 그들은 살기 위하여 먹었다. 그들은 음식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적은 음식밖에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만일 자신들이 절제한다면 많은 사람들의 굶주림의 고통이 완화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몸에 탈이 날 정도로 음식을 먹고 비싼 음식으로 재물을 낭비하는 폭식가들의 탐욕과 식도락가들의 변덕들을 가지고 자신들의 탐욕을 만족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 집에서 그들은 노동을 사랑한다. 그래서 그들은 설사 자기들이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 해도 노동을 사랑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일함으로써 하느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움직이지 않는 바위들처럼 게으른 사람들을 질긴 담쟁이처럼 꽉 쥐고 숨 막히게 하는 악덕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잘 일하고 하나의 일과 다음 일 사이에 휴식을 즐길 때 음식은 맛있고, 휴식은 평화롭고, 마음은 기쁘다. 노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집들과 정신들에는 다양한 악덕들이 생기지 않는다. 악덕들이 없기 때문에 사랑, 존중, 서로에 대한 존경이 자라나고, 순결한 분위기 속에서 다정한 자녀들이 자라나 그들이 미래의 성가정들의 기원이 된다.

 

그 집에서는 겸손이 지배한다. 오만한 자들을 위한 겸손의 큰 교훈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마리아는 교만해지고 자기의 배우자에게 숭배 받을 수천가지의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여자들이 단지 자기들이 자기들의 남편들보다 약간 더 교육받았다거나, 더 지체 높은 집안 출신이라거나, 더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교만하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고 정배이지만, 그녀는 자기의 배우자를 섬기고, 섬김 받기를 바라지 않으며, 그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하다.

요셉은 육화하신 말씀과 영원하신 성령의 정배를 보호자의 임무를 하느님에게서 받을 자격이 있다고 그분께 인정된 가장이다. 그런데도 그는 마리아에게 일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애쓰고, 그녀에게 노동의 부담을 덜어주고 그녀를 피로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집안의 가장 궂은일들을 돌보며, 가능한 한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 집을 더 안락하게 하고 작은 정원을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자기가 할 수 있을 때마다 최선을 다한다.

 

그 집에서는 초자연적, 도덕적, 물질적 질서가 존중된다.

하느님께서는 최고의 가장이시므로 그분께 공경과 사랑을 드린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질서이다.

요셉은 가장이므로 (마리아는)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에게 복종한다. 이것은 도덕적 질서이다.

집은 옷과 가구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선물이다.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의 섭리가 드러난다. 양들에게 털을 주시고, 새들에게는 깃털을, 풀밭에는 풀을, 가축들에게는 건초를, 새들에게는 낟알들과 가지들을 주시며 골짜기의 백합의 옷을 짜주시는 하느님의 섭리가 말이다. 집, 옷들, 가구들을 주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찬미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것들을 받고, 주님의 선물들로 그것들을 존중하고 돌보며, 그것들이 초라하다 하여 싫어하지 않고, 하느님의 섭리를 남용하여 그것들을 오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물질적인 질서이다.

 

너는 그들이 나자렛의 방언으로 주고받은 말들과 기도의 말들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네가 본 것들은 큰 교훈이다. 하느님에 대한 많은 일들과 내 어머니와 아버지였던 거룩한 부부가 결코 실패하지 않았던 일들에서 실패하여 지금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너희는 이 교훈을 묵상해라.

그리고 너는 어린 예수의 작은 걸음마들을 생각하고 미소 지으며 그를 기억하고, 기뻐해라. 머지않아 너는 그가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때 그것은 눈물의 환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