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종실화-나는 왜 천주교로 개종하였는가?'
9. ‘믿음으로만’은 캄플주사
전 복음교회 목사 서창제
1899년 7월 6일 출생, 1932년 - 49년 조선 기독교 복음교회 목사 봉직
개종의 동기 몇 가지
1. 루터의 ‘믿음으로만 구원 얻을 수 있다.’는 이단적 교설에 속아 헛된 평안을 누리던 나는, 자칫하면 지옥의 자식이 될 뻔했다. 이 헛된 평안이 무너지는 그날, 나는 진리의 기둥인 성교회에 달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죽은 믿음’의 헛된 평안 수십 년! 나는 정말 기막히게 어두운 자였다.
부산 피난 삼 년 동안에는 프로테스탄트 목사인 나였지만 소위 예배당에는 나가지 않았다. 왜 그랬는가? 암만해도 프로테스탄트의 에배는 천주께 드리는 예배라 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기껏해야 성서고전 강연회밖에는 될 수 없는 무엇이요, 가끔 특별 집회(소위 부흥회)를 연다 해도 그것은 한 종교적 말초신경흥분 수단에 지나지 못하는 무엇이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 : 한 마디로 그 전체의 뜻을 다 말함), 프로테스탄트의 예배는 제헌이 아니다. 제헌이 아니니까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은총의 능력이 실현될 리 만무하다. 그러니까 그들은 항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헛된 위안의 캄플주사(지속적인 효과가 없이 일시적인 효과만 있는 주사)로 그 연명책을 삼을 뿐이고 인본주의의 독으로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나 어찌 더 오래 거기에 머물 수 있을 소냐.
드디어 나는 주일마다 수영 20리를 걸어 부산진 천주교회의 문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성당 미사참례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미사 구경이지 미사참례는 아니었다.
바로 그때 성당에서 「교부들의 신앙」이란 책이 눈에 띄었다. 얼른 보기에 진리의 글인 듯 하여 버스도 타지 못하는 나의 홀쭉한 주머니를 털어 그 책을 샀다. 그것을 읽기도 하며 미사 구경을 하기도 하노라니까 차차 성교회의 진리가 어렴풋하게나마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952년 8월 15일, 이날 예수께서는 이 죄인 괴수인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드디어 장 요한 신부(부산 중앙 성당 주임신부님)의 손으로 나의 원죄, 본죄를 다 씻어 주셨다. 아! 이날이 바로 나의 천국입적의 날이다. 회령 임화길 신부를 만나 뵌 뒤 흘러 흘러 이십여 년, 비로소 나의 정신에 새 광명이 비치기 시작했다.
2. 성경의 주관적 해석이 프로테스탄트 세계를 소란케 한다. 따라서 분열에 분열을 거듭한다. 그 세계에는 권위의 단언명령이 없기 때문에 마지막엔 일 인 일 교파 상태에까지 이르고야 말 것이다. 항상 너도 나도 다 하느님의 직접 계시를 받았노라 날뛰니 대체 어느 것이 진짜 계시인지 알 수 있어야지? 알고 보면 그 소위 직접 계시란 거의 전부가 도깨비 계시일 것이다.
이 많은 직접 계시(?)를 받은 자들의 날뛰는 판국에서 나는 ‘양의 우리’ 밖의 양들과 함께 하염없이 헤맬 뿐이었다. 어떤 이처럼 직접 계시(?)도 받지 못한 나는 정말 불쌍한 존재였다. 바다에 떠다니는 지푸라기 같은 존재였다.
가끔 성경을 읽을 때의 감명 또는 감흥을 나에게의 직접계시로 삼고 거기에 내 영혼을 맡겨 보려 했으나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이고, 또 소속 교파의 감독을 영계의 권위로 떠받들어 보려고 마음을 다스려 보았으나 양심이 허락지 않음을 어쩔 수 없다.
신기루가 얼마든지 나타나 있는 영계의 망망대해 위에 조각배를 저어가는 나! 어느 길로 저어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나에게 있어서는 ‘보냄을 받은 이’의 ‘나를 따르라.’는 권위의 한마디 소리만이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그것이다. 그 소리를 나는 목마르게 기다렸다. 천주교회의 소리를 그 소리로 믿을까 어쩔까…….
슐라이에르마헤르(개신교 신학자)류(流)의 신프로테스탄티즘이냐, 가톨릭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절박한 대목에 이른다면 나는 가톨릭을 택하겠다는 프로테스탄트 대신학자 칼 발트의 술회의 말이 이 경우의 나로 하여금 천주교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한 바도 있었다.
권위에의 복종 행위 없이는 영계, 물계의 혼란은 정리되지 못할 것이다. 실상 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그 데모크라시적(민주주의적) 꼬락서니에 대한 염증 때문에 현기증을 일으킬 지경이었던 것이다. 천주의 전권을 신인(信認)한다면야 교회의 데모크라시란 어불성설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때다! 교황에게의 절대 반대자였던 나는 교황 성하에게의 절대복종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교황성하만이 땅 위에선 천주의 대리자시오, 베드로의 반석이기 때문이다. 베드로 이래 이천 년 동안 줄곧 한 교회로 걸어온 참교회인 천주교회 계시 진리의 권위에 영혼을 철저히 맡겨놓은 나는 비로소 하늘 평안을 맛보게 되었다.
3. ‘하느님이 내 죄를 사했을 것이다.’ 하는 주관적 위안은 암만해도 한심한 것이다. 이런 거품 같은 ‘소위 믿음’으로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십 수 년 전 프로테스탄트 교직 몇 어른과 함께 덕원수도원을 구경한 나는 천주교회의 고해성사를 훌륭한 제도라고 찬양한 바 있다.
그때 일행 중 한 분은 나의 이 말을 못내 비웃었다. 나는 다만 낮은 소리로 “사람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당장 내 앞에 앉은 하느님의 대리자에게 나아가 죄를 고해버려야 시원할 것 같소. 하느님에게 직접 고해하지 않고 사람에게 한다 하여 비웃는 이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는 내 영혼의 솔직한 경험이요.” 하는 의미의 말을 그에게 했다.
그러나 결단성이 부족한 나는 명랑치 못한 걸음을 걸으면서도 얼른 발을 돌려 고해성사의 천주교회에 돌아오지는 못했다. 객관적 권위의 사죄 선언을 듣지 못했으니 어찌 내 영혼이 명랑해질 수 있었겠는가? 구름 덮인 골짜기를 수십 년 무거운 영혼으로 허덕이던 나는 고해성사를 베푸는 천주교회의 품안에 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영세 후 하루는 윤 신부(부산 천주교회 도서관의) 앞에 고해한 다음, 그의 사죄 선언과 함께 그의 “평안히 가시오.” 하시는 말씀을 들은 나는 하늘이 열리는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4. 연옥 교리에서 크나큰 위안을 찾게 된 나는, 연령을 위하여 뜨겁게 기도하는 성교회에 귀정치 않고 어디로 갈 것이냐!
내가 당장 죽는다면 천국 가기엔 암만해도 자신이 없고, 그렇지만 천주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는 써온 나를 설마 지옥에야 보내시랴. 그러나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자라면 갈 데는 지옥밖에 없잖은가?
이거 정말 야단났다! 이를 어쩌나!! 가끔 지옥의 악령이 큰 입을 벌리고 덤벼든다. 보라! 이런 영혼 상태의 나에게 있어서 연옥 교리가 그 얼마나 고마웠겠는가? 이 연옥 교리에 대한 성경의 근거도 뚜렷이 있으니 더욱 마음 든든하다.
5. 프로테스탄트의 공산주의관은 퍽 모호하다. 심지어 어떤 프로테스탄트파는 공산주의와 타협하기조차 하는 꼬락서니이다. 어두운 그들은 공산주의와 공산적 경제 체제를 혼동하는 듯하다.
그 후자는 혹시 용인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전자는 바로 20세기 형 악령이 아닌가? 그이들의 이 태도에 분개한 나는 비오 12세 교황 성하의 십자군 동원령에 귀가 솔깃하여 근래 성하의 산하에 서게 되었다.
6. 성교회의 품안에 돌아와 보니 성교회 경영의 모든 문화면 사업이 모두 없어진다 해도 다만 미사성제와 성체성사만 있으면 성교회는 비록 수소탄의 폭풍이 불어와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줄 굳게 믿는다.
저 슐라이에르마헤르류의 계시관 위에 세운 소위 기독교회는 ‘모래 위에 세운 집’이어서 때가 이르면 죄다 몰락될 것이다. 지금 팔, 구백 교파로 분열되어 매일 옥신각신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박테리아처럼 그침 없이 분열되는 프로테스탄트를 어찌 구령의 기관이라 이를 수 있겠는가? 보라! 사태가 이러하니 해마다 백만여 명의 프로테스탄트가 천주교회로 개종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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