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종실화-나는 왜 천주교로 개종하였는가?'
11. 성경을 더 연구하러
전 평양고등성경학교 졸업생 홍은순
1943년 3월 평양 여자 고등성경학교 졸업, 개성 감리교 동문내 교회 취무
1946년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 입회
개종한 지도 10년이 가까운 데다가 과거 25년간이나 신봉하던 교회를 참 진리로 인하여 떠나는 왔으나, 애착심은 너무나 굳고 두터워 이 마음을 물리치려고 애도 써왔고, 게다가 남다른 수도생활에 투신하고 보니 그날그날의 생활에 골몰하여 머리에 몇 가지나 남아 있는지 살펴보아야 알 지경이다.
개종 당시라면 어떤 사실이라든가 연월도 명백하였겠으나, 이제는 그나마도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 오로지 내가 찾은 이 길에 만족감은 깊어 가고 열교에 대한 정은 추호도 남음이 없는지라 글로써 발표한다는 것은 더군다나 어려운 줄로 생각된다. 그러나 한편 윤 신부님의 수차례에 걸친 권면을 거절하기 어려워 순명하는 맘으로 과거를 회상하며 적어 보려 한다.
나의 부친께서 현재까지 40년 가까이 감리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는 만큼 내가 감리교를 믿게 된 것은 태중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신앙이 독실한 아버지 슬하에서 종교 교육을 받아온 고로 천주의 존재와 천당 지옥에 관해서는 현재나 다름없는 관념을 가졌었다. 여러 열렬한 부흥 목사님들의 설교에 감화되어 밤을 낮 삼아 기도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에 가장 고민한 것은 죄악에 대한 문제였다. 통회를 해도 울어 보아도 마음에 안정과 위로가 없었던 것이다. 연보궤(헌금궤) 속에 남몰래 집어넣은 연보도 아무 평화를 갖다 주지 못하였다.
1943년 3월에 평양성경학교를 졸업하고 23세의 어린 나이로서 개성에 있는 조그마한 동문내 교회에 파송을 받아 전도를 하겠다고 첫발을 내디뎠다. 교회의 모든 신자들은 내게 대하여 도무지 성이 차 하지 않는다. 학교를 갓 졸업한 데다가 전도하기에는 너무나 어린 편이다.
한편 무섭기도 하였으나 자존심 때문에 담대하게도 목사님을 따라 가가호호 방문하여 남달리 해보겠다고 문 앞마다 서서 주소와 성명을 기입하며 풋열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장년층은 내 차지는 아니다. 청소년층과 유년층이 내 분야인데 사귀게 되어 정도 들었다.
그때가 바로 1944년 봄쯤이다. 비행기 헌납을 한다고 교회를 파는 중 동문내 교회 예배당도 한몫 끼어 교회와 주택을 빼앗기고 교회를 잃은 양떼들은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북부교회와 합하게 되었다. 일본제정 말기에 그 강압적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 얼마나 많은 교회당이 팔리고 종을 빼앗기고 하였는지 생각하면 지금도 입에 신물이 고인다.
그런데 본교회를 담당하셨던 신흥철 목사님께서는 다른 데로 이전하시고 나는 신자를 따라 북부교회로 같이 가서 특히 동문내 교회 구역만 심방하고 언제나 내게 맞갖은 청소년들을 맡아 보게끔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곳이라 어색하고 어려운 어른들 슬하에서 마음을 졸이며 지낼 뿐이었다.
청년들의 소청으로 토요일 밤이면 이성기라는 송도중학 5학년에 다니는 학생 집에서 성경 연구도 하고 기도도 하며 대개 밤이 늦으면 헤어졌다. 여기서 성경 해석을 맡은 나는 영감은 없고 다만 성경 주해자들의 말만 소개해 왔다.
하루는 천주교회 건너편에 살던 양인형(송도중 5년생)이라는 학생이 찾아왔다. 이 학생은 풋열성으로 매일 아침 새벽 기도에 참례하였는데 꿈에도 생각한 일이 없는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교회사를 배울 때 천주교는 부패하였다고 배웠기에 이 천주교회에 대해서는 알아볼 마음도 전연 없었다.
그렇다고 천주교회가 싫어서도 아니었다. 천주교는 루터의 개혁 이후 그 존재가 아주 희미해진 것으로 여기고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아는 천주교 신자는 무지한 촌사람, 옹기장사, 방물장수들이었다. 그러므로 도대체 무심하였다.
평양에 있을 때 성모학교 앞을 자주 지나게 되었는데 지금 알고 보니 신부님과 수녀님들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몇 분씩 그 앞을 지나 학교로 들어가시고 또는 큰 거리에서도 만났었다. 그러나 그저 그런 사람들이거니 할 따름이었고 호기심도 일으켜 본 일이 없다.
며칠 후 양인형이란 학생이 또 찾아왔다.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말한 것은 대개 다음과 같다. 즉 금욕주의자들의 그릇된 행위를 책하였다.
손을 두고 쓰지 않아 마르게 한다든가, 못 가운데 기둥을 세우고 수십 년 동안 그 위에 올라 앉아 그렇게 함으로써 욕망을 누르는 것은 너무나 형식적이다. 육신을 누르는 것보다는 마음을 눌러야 범죄하지 않게 된다고 주장하여 설복시킨 일이 있다.
그 학생은 몇 번 왔다 갔다 하는 중 번민이 심한 모양이다. 갈팡질팡하며 어느 편이 옳은지 갈피를 못 잡겠다고 하며, 여기 오면 여기 말이 옳은 것 같고 저기 가면 저기 말이 옳은 것 같다는 것이다.
하루는 또 찾아와서 하는 말이, 천주교에는 로마에 교황청이 있는데 거기서는 일생동안 성경만 연구하는 홍의재상이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때 어쩐지 천주교 성경을 배우려는 충동을 받았다. 그 후 그 학생을 통하여 신부님께 승낙을 얻어 신구약합본을 들고 목사님의 눈을 피해가며 저녁 일찍이 성당으로 향하였다. 바로 그날이 1944년 9월 6일이었다.
성당은 동녘 꽤 높은 곳에 있는데 골목이 끔찍이나 바람이 차고 쓸쓸하다. 성당 바로 앞에는 어찌나 돌이 울퉁불퉁한지 천당 가는 길은 과연 어렵군, 하며 올라갔다. 성당 넓은 마당에 올라서 보니 의외로 큰 건물이다.
그때 나의 직감은 마치 공동묘지에 온 것 같았다. 성당으로부터 이상한 바람이 흘러내려 내 몸을 싸고 돈다. 이에 나는 큰일을 저질렀구나! 무엇하러 내가 여기까지 찾아왔던고? 하여튼 이왕 온 길이니 그냥 가기도 어색하고 하여 아랫집에 내려가셨다는 신부님을 기다려서 만났다.
즉시 성당으로 안내해 주신다. 들어서니 휑하고 캄캄해지며 몸을 움직이기가 싫어진다. 제대 앞으로 가까이 가시더니 전기를 켰다 껐다 하시며 무슨 자랑이나 하시듯 한다. 나중에 알아보니 성체불을 켜신 모양이다. 이때 나는 지옥에나 찾아 들어온 것 같이 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신부님 방으로 인도되었다. 이제는 좀 정신이 드는 듯하다. 이렇게 가기 시작하여 일주일에 세 번씩 방문하였다. 그러나 처음 목적한 성경 주해는 금일에 이르기까지 듣지도 못하였으나 구절구절을 따라 해석하는 것보다는 신부님 입으로 발하시는 교리만으로도 넉넉하였다.
첫 번에 내 마음을 움직인 것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은 전에도 읽고 배우고 하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이 말씀은 내 마음에 새로운 맛을 주어 과연 천주교는 개혁될 수 없다는 신념이 들어 마음 속 깊이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자기가 신봉하는 종교에 대한 애착심과 고집으로 인하여 좀처럼 항복 아닌 항복을 할 마음도 없고 일부러 완강한 태도를 취하고 반박할 재료를 부지런히 장만하여 제공했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이리하여 성체성사에 관해서도 요한복음 6장의 말씀과 최후만찬 때의 말씀을 연결하여 주시니 안 믿을 수 없었고, 속죄권에 대해서도 잘 이해시켜 주셨다.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미사성제 예식이다. 잘 보려고 해도 형식 같고 외식(外飾 : 겉치례)만 같았다. 게다가 불교 분위기가 들고 신부님은 중과 흡사했다.
진교(眞敎)이므로 승복은 하였으나 실제 형식이라든가 성상에 절하고 친구(親口 : 숭경의 대상에 대하여 존경과 복종을 나타내려고 입을 맞춤)하는 것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또 미사 예물 받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 선입견이 한 가지 두 가지 소멸되어 드디어 1944년 11월 26일 개종할 뜻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한편 아버지께 알리지 않을 수 없어 의견을 상서하였더니 회답에 “네 아버지가 감리교회에서 목회를 수십 년 했고 이제는 늙었다. 네 잔뼈도 온전히 이교 품에서 굵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하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아버지 말대로 마음을 돌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와서는 고백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천주교가 아니면 영혼구령이 크게 문제되므로 꼭 갈 수밖에 없다.”고 말씀을 올렸다. 그 회답에 “늙은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고 젊은 신부의 감언이설에 유혹되어 가려 하니 마음대로 가 보아라. 그러나 이제부터 너는 내 딸이 아니요, 나는 네 아비가 아니다.” 이런 내용이 실려 있었다.
한번 결심한 끝이라 1944년 12월 말일까지 교회 일을 그만두기로 사표를 내놓고 차마 체면상 시내에는 있을 수 없을 것 같아 약 30리 떨어진 상도면 어느 학교로 가려고 운동을 하였다. 이것을 아신 신부님께서는 “시내에 있어야 교리도 더 연구할 수 있고 하니 성당 학교로 오라.”고 하신다. 이윽고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시내에 있기로 하였다.
1945년 1월이다. 아직까지는 조용히 하려고 두 교회를 분주히 다녔다. 그러나 소문이 안 날 수 있나! 하루는 북부교회 이 목사님과 정 목사님과 김삼달 장로님 세 분이 오셔서 “무엇 때문에 우리 교회를 배척하고 천주교회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천주교가 진교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가르치는 도리는 반박할 여지가 없이 모두가 옳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에도 학사, 박사가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그들이 당신만큼 몰라서 아니 가는 줄 아느냐?”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 감리교가 옳다는 영적인 표적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는 허락하시는가?” 묻기에 아니하신다고 대답하였더니 그것이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영적인 표적이라고 하며 “부모를 거역하는 것이 어찌 진리에 합당할 수 있는가?” 한다.
그래서 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모세를 간택하시고 천주교를 세우시기 위하여 당신 아들을 친히 파견하셨거늘 하물며 당신이 세우신 교회는 영원히 지옥문이 쳐 이기지 못하리라고 까지 하신 말씀을 하시고도 그 교회를 부패하게 버려두시고 또 부패할 것을 영원히 없어지지 않겠다고 거짓말을 하시고, 또 이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일꾼으로 루터를 쓰실 수가 있겠는가? 이러니 어찌 영적인 표적이 내게 필요치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들은 상심하여 돌아가며 “이제는 할 수 없으니 당장 우리 교회에 나오지 마시오. 우리 교회에서는 이제는 끊어져 나간 줄 아시오.” 하고 울부짖었다.
나는 이제 용기를 얻어 그날부터 한 번도 예배당에 간 일이 없게 되었다. 한번은 길에서 이 목사님을 만났다. 가슴을 손에 대고 너무나 분하다고 역정을 냈다. 그래서 나는 그 다음부터는 만날 기회를 피했다.
1945년 4월 1일 부활주일에 영세하였다. 영세한 후 힘들었던 것은 매일 조만과를 바치는 것이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도만이 참 기도 같았다. 만들어 놓은 기도문을 읽고 앉았다는 것이 처음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여하튼 가톨릭 신앙은 장구한 세월을 두고 항구히 노력함으로써만 신앙이 생기고 신덕의 행위로 옮겨 몇 해 지낸 후에는 꿋꿋한 신덕의 소유자가 되어 웬만한 유혹에는 꿈쩍도 않는, 그야말로 반석 같은 처지에 이르게 됨을 깨달았다.
또 한 가지 개종 당시 내 마음을 움직인 것은 노아가 탄 배와 다른 이들이 탄 배에 대한 비유이다. 배를 타기는 모두 탔지만 노아가 탄 배(천주교를 상징한다)는 구함을 받고 그 외의 배(여러 프로테스탄트를 상징한다)는 모두 파선되었다. 바로 이 점이다.
이에 힘을 얻은 나로서는 부모와 형제의 영혼 문제를 더욱 생각하게 되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될 수 있는 대로 그들과 만날 기회를 만들고 또 편지 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열교 신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세속에 약 일 년 동안 있는 사이에 부지런히 쫓아다녀 10여 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자신이 가톨릭 신자가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지 참으로 형언키 어렵다. 나만 홀로 이 보배를 발견한 듯 문득 감격이 넘쳐흐름을 맛볼 때가 많다. 처음 1~2년 사이에는 흔들릴 뻔한 때도 있었으나 이는 어려서부터 젖은 관습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처음 개종한 이들에게는 그 배후에 든든한 지도자가 있어 얼마동안 붙들어 줌이 가장 적절하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입교 영세하면 이것으로 일은 다 마친 것으로 여겨 내버려두니 얼마나 큰 고통 중에 그 어려운 고비를 넘어 오는지 남들은 모를 것이다.
또한 신입교우로서 골치를 앓는 것은 형식이 복잡하여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고, 따라서 재미를 붙이기 어렵다. 친절히 지도해 주는 이는 적고 수수방관하는 태도 때문에 한번 찾아왔던 외인들은 그대로 가는 슬픈 일이 많다. 과연 열교도들의 맹렬한 활동은 본받을 만한 것이다.
그들의 열성을 볼 때마다 - 아무런 효과도 없는 일에 일생을 희생하는 이들을 볼 때 - 가엾은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더구나 범죄 후 고통당하는 영혼이라든지, 죄에 관하여도 한계를 모르고 고민하는 영혼에게 고해성사의 그 기쁨과 평화를 같이 나누고 싶다.
내가 열교에 있을 때는 영웅열사의 어머니는 공경하면서도 성모님께 대해서는 추호도 아무 느낌이 없이 있었다. 개종 후 성모님 공경에 힘쓰려 하나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아 내 본명에 ‘마리아’를 덧붙였다. 이렇게 해가 바뀌는 동안에 천주성총을 입었음인지 성모님의 부르심인지 이제 와서는 ‘성모님을 모르고 그저 살다가 죽었다면 어찌할 뻔했나’ 하고 생각만 하여도 소름이 끼친다.
그리고 예수께서 당신 어머님을 통하여 모든 것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내가 아직까지 예수를 헛믿었다고도 생각된다. 성모님께 대해서 무심한 신교 모든 신자들이여! 우리는 성모님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님께로 갈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무시함으로써 성모님을 섭섭하게 해드린 것을 기워갚기 위하여 아직 살아 있음을 천만다행으로 알아 그 품안으로 달아드십시오. 인자하신 성모님은 이제라도 돌아만 오면 두 손을 마주 들고 당신 품에 끌어당기실 것입니다. 그 품에 안기고 보면 안전한 구령의 궤도는 눈앞에 전개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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