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천주교로 개종하였는가?-개종실화

8. 진정한 종교와 권위의 필요 - 장로교 영수의 아들 김한규

Skyblue fiat 2023. 11. 20. 17:36

'개종실화-나는 왜 천주교로 개종하였는가?'

 

8. 진정한 종교와 권위의 필요

 

장로교 영수의 아들 김한규
1908년 4월 12일 출생

 

나는 지금 47세인데 장로교 영수(領袖 : 어떤 조직의 대표를 뜻하는 것으로, 한국 초대 장로교회에서 조직이 갖추어지기 이전에 사용된 명칭)의 아들이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구한 말년에 예수교(열교)를 믿기 시작하여 용인 아실리 장로교회 영수셨다. 우리 집이 기도처가 되어서 미국인 도마련 목사와 유흥렬 조사와 오근영 장로와 황희철 권사가 일 년에 몇 번씩 다녀갔다.


그때만 해도 마을 사람들의 비방이 심했다. 내가 8, 9살 때 마을 글방에 한문을 배우러 다녔는데 동무들이 ‘예수쟁이! 조상의 제사 안 지내는 놈!’ 하고 조롱하고 비방이 심하여 울기도 많이 하였는데 이런 단련을 받을수록 나의 신앙은 강철같이 굳세어갔다.

그런데 아버지의 소위 누님 되시는 고모 한 분이 계신데 용인 남곡리 구교 집으로 출가를 하셨다. 고모께서 가끔 친정에 오시면 아버지 보고 “열교를 하면 천당엘 못 가니 성교를 하라.”고 하시면 아버지는 고집을 세우고 불응하셨다.
나도 아버지를 따라 해야 옳다고 생각했으며 신구약성경을 보고 그대로만 믿으면 되는 줄로 알았다. 구교나 신교나 다 같은데 신교가 생겨서 전도를 하여 교인들이 늘면 그만큼 천당 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니 신교가 생긴 것이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열네 살에 양성 보통학교에 입학을 한 후로는 그곳 성결교회에 다녔는데 전도사는 손갑종 씨였다. 그 후 내가 스무 살 안쪽 시절이라고 기억된다. 그때 내가 동아일보를 애독하였는데 어느 날 신문을 보니까 ‘구세군에서 그들의 대장 뽀쓰 씨의 환영식을 서울 승동 예배당에서 열었는데 그 식 중에 영어로 기도를 올리는 것을 어느 구세군 병사가 조선말로 올리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그 병사를 구타한 까닭에 구세군 내부에 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 고정되고 통일된 기도문이 있었더라면 그러한 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을, 하고 한탄하였다.

그 후에 또 신문을 보니 ‘대구 어느 장로교 예배당에서 목사와 목사가 서로 싸우는 것을 경찰서 순사가 제지하였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목사와 목사가 서로 싸울 때는 그 위에 권위자가 있어서 교회의 권위로 제지를 해야 옳을 것인데 세속 경찰의 순사가 제지를 했다면, 장로교회의 최고 기관을 경찰서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 일이 있다.
그때 나는 나라에는 한 주권자만 있어야 하고 교회에도 한 권위자만 있어서 그 권위자에게는 신도들이 절대복종하여야 질서를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후에 나는 일본에 가서 이 년간 있었는데, 일본인 교회와 우리 한국인 교회에 틈나는 대로 나갔다. 내가 신호 일본인 교회에 나갔을 때의 일이다. 일본인 목사가 전도 강연을 하는 중에 사람이 죄를 짓는 제1원인이 되는 물건은 ‘여자와 술’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때 만일 그 목사의 어머니나 아내나 딸이 그 소리를 들었다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사람이 죄를 짓는 제1원인이 되는 물건을 그 목사 자신이 소유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이 죄를 짓는데 제1원인이 되는 물건을 없이 하려면 술은 미국에서 금주법을 실시한 것과 같이 할 수 있지만 여자는 온 세계 인구의 반 수 이상을 점령하였으니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 것인가? 나는 그때 그 목사의 설교가 경솔하다고 생각했다.

 

귀국한 후에는 평택 성결교회에 다니다가 가족들은 그대로 나가고 나 혼자만 용인 아실리 장로교회에 다녔다. 어느 주일날 나는 아실리 장로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고 집으로 오니 어머니께서는 평택 성결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고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평택 성결교회에 무슨 사고가 생겼는데 신도들이 모두 본부에서 잘못하는 것이라고 수선거리는 소리를 듣고 왔다고 하셨다.
나는 궁금하여 곧 평택으로 가서 내용을 알아보았더니 ‘김광원 전도사가 예배당 건축 문제로 교회 본부의 명령에 복종치 않고 임의로 처리했다고 김 전도사를 파면시키고 다른 전도사를 보냈는데 청년층 신자들이 김 전도사를 옹호하고 새로 온 전도사를 배척하기 위하여 새로 온 전도사의 멱살을 쥐고 동댕이쳤다는 것이다.’

전에 대구 장로교회에서 목사와 목사가 서로 싸우던 것과 같이 평택 성결교회에서도 전도사와 전도사가 편싸움을 한 것이다. 나는 즉시 김광원 씨를 찾아가서 성결교회 본부에 사과를 하고 절대복종하도록 권고하려 하였으나 그는 자기 과실을 뉘우칠 줄 모르고 교회 본부를 공격하기에만 신경이 예민해진 것이었다. 얼마동안 분쟁을 하다가 김광원 씨는 ‘하느님의 교회’라는 간판을 들고 분열해 나갔다.(지금은 나자렛 교회라고 붙였다.)

그때 나는 루터 당시에도 이와 같이 된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성경 말씀에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라.’ 하셨는데 제자를 보고 그 스승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부패해 가는 신교 각 파를 어떻게든지 개혁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 후 일 년이 지나서 나는 내 아우의 혼처를 구하기 위하여 각지 예배당을 찾아다녔다. 다녀본 결과 뜻밖에 신자들이 대개 다 딸을 외인에게 출가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도 여전히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깊이 생각해 보았다. 자식을 마귀의 종에게 내어주고도 천당 가기를 바랄까? 또 마귀의 종에게로 시집을 가는 그 본인들은 무엇을 믿고 교회에 다녔던가? 내 머리에는 큰 번민이 일어났다. 그리고 내 자신을 의심하여 내 자신을 신중히 검토해 보았다.

 

어느덧 내 눈앞에는 찬란한 광채가 나타났다. 아차! 내가 아직까지 헛수고를 하였구나, 내가 길을 잘못 들었구나, 지금 내가 있는 이 교회는 예수께서 세우신 베드로 사도의 교회가 아니로구나! 내가 양의 옷을 입은 이리에게 속았구나! 지금 내 자신도 마귀의 종이로구나! 나는 원수가 뿌린 가라지의 한 톨이로구나!
이와 같이 내 자신을 발견한 그때, 나의 흥분된 심경은 형언키 어렵다.

 

나는 여러 해 동안에 고모님과 내종형님과 만날 때마다 구교가 옳거니 신교가 옳거니 하고 토론을 하여 왔는데, 그렇게 하는 중에 구교가 베드로 사도로부터 오늘날까지 계통을 밟아서 내려온 것과 통일된 기도문과 고해제도와 성모의 평생 동정 교리와 성직자의 독신 생활 제도와 혼배 규칙 등을 잘 알게 되었다.
또한 미사성제도 보고 구교인 가정도 많이 살펴보고 구교가 성경 진리에 맞는다는 것을 차차 깨닫게 되었으나, 이미 걷던 길을 돌리기가 어려워서 주저주저하다가 이번 기회에 확실히 깨닫고 개종할 것을 결심하였다. 나는 이제부터 고집을 버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해야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삼십 년간 자라난 예배당과 정든 형제자매를 이별할 생각을 하니 섭섭하기도 하려니와 여러 가지 환경으로 곤란이 막심하였다. 그러나 나는 천주를 공경하고 내 영혼을 구하려면 육신사정을 돌보아서는 안 되겠다고 용기를 냈다.


내종형님께서 「루터실전」을 주시기에 보았더니, 김광원 씨가 성결교회 본부를 반역하고 나간 것과 같이 루터도 천주교회를 즉 로마 교황을 반역하고 갈려나간 것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성경을 위역하였다 하기에, 곧 남곡리 성당 박 신부님을 찾아가서 「사사성경」(四史聖經 : 1910년 간행된 한글번역 4복음서로 역주가 있음)을 사고 천주교의 교리를 자세히 듣고 보니 신교파 사람들에게서 듣던 바와는 딴판으로 참된 진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즉시 예비하기 시작하여 일 년 후인 31세 되던 해 4월, 부활대축일에 서정리 모 신부님한테 영세를 받았는데 본명은 ‘바오로’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열교사상이 뇌수에 젖어서 개종하기를 싫어하셨다. 그러나 자손이 된 도리로 부모의 영혼이 멸망하는 데로 가는 것을 버려둘 수 있을까? 그러므로 정성을 다하여 권면을 했더니 임종 시에 대세를 받고 돌아가셨다.
지금 노모 슬하에 아우네 식구까지 십여 명이 다 천주의 자녀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다마스쿠스로 가는 사울을 부르심 같이 무수한 열교인 중에서 특별히 죄인을 먼저 불러주신 것을 무한히 감사한다.

 

그러나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30년간 같이 자라난 신교파 사람들이다. 저들은 아직까지도 어두운 밤길을 걸으면서도 깨닫지 못한다. 나는 그들을 만나면 자주 천주교의 진리를 증거하였더니 그들은 도리어 나를 보고 “사람이 한번 정했으면 끝까지 그 길로 가지 않고 왔다갔다한다.”고 조롱한다.
어떤 목사님은 “그런 소리 할테면 오지도 말라.”고 화를 냈다. 그러나 고향과 친정 같은 예배당과 반생을 같이 지낸 정든 형제자매는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놓지 않고 바른 길을 찾도록 힘써 보려 한다.


“여보시오, 신교파의 형제자매들이여! 너무 고집을 세우지 말고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해 보시오! 우리나라가 두 갈래로만 갈렸어도 나라가 약해지고 이와 같이 불행하거든, 교회가 삼, 사백 갈래로 갈려 있으니 그런 불행이 또 어디 있습니까? 적국의 침략을 받지 않으려면 나라가 반드시 통일하여야 하고, 마귀 권세와 싸워 이기려면 교회가 반드시 통일하여야 합니다.
포도가 줄기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함 같이 모든 교파가 다 원줄기에 붙어 있지 않으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모든 열교파가 다 원줄기인 천주교회로 돌아오면 탕자가 부모를 찾아 돌아옴 같이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더 반가이 맞아들일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통일되면 이북의 형제자매와 손을 맞잡고 애국가를 같이 부르며 한마음 한뜻으로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화목하게 살 것이며, 우리 교회가 통일되면 한 우리 되고 한 목자 되어 다윗 성왕께서 읊으심같이 ‘보라,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가, 형제들이 함께 사는 것이!’(시편 133,1) 이 노래를 같이 부르며 세계 모든 민족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천주를 찬양하며 기뻐 용약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톨릭 교우들은 파티마의 성모께서 하신 말씀을 준행하기에 힘쓰기 바라며 신교파 사람들에게 천주교의 진리를 연구할 만한 서적을 보여주고 미사성제도 보여주고 오직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잘 인도하면 그들도 반드시 바른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1954년 9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