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종실화-나는 왜 천주교로 개종하였는가?'
12. 눈을 빼고 손을 끊으라!
전 감리교 총이사 고 정춘수옹의 미망인 임눌이 데레사
내가 천주교로 개종한 것은 망부 정춘수의 뜻 깊은 권고의 말을 이해하고 천주교로 전향하는 그의 뒤를 나 역시 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춘수의 일생을 잠깐 회고할 필요가 있다.
정춘수는 1873년 2월 11일 청주군 가덕면 두산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이름 높던 학자 임고산 선생의 제자로, 학문과 도덕이 탁월하여 부근 주민의 존경을 받고 있었는데, 이런 아버지의 교훈을 받아가며 정춘수는 사서오경을 배웠다.
구한국 말년 국정은 날로 어지러워지고 외국의 세력은 물밀듯 들어와 국가의 장래가 크게 염려되므로 청년 정춘수는 구국운동에 헌신할 마음으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하여 유럽으로 향할 뜻을 세우고 집을 떠났으니, 그것이 1898년 8월 추석, 그가 26세 때의 일이었다.
원산 어떤 여관에 들어 노독을 풀려고 며칠 쉬는 동안, 그 여관 주인을 알게 되었는데 이 주인은 근엄한 장로교 신자로서 언행이 존경할 만하였다. 정춘수는 이 여관 주인으로부터 천주의 존재, 사후의 상선벌악, 강생구속 등 진귀한 이야기를 난생 처음 들었다.
밤을 새워 가면서 신약성경을 통독하였고 알아듣기 어려운 문제는 주인에게 물어보았다. 그때 오십여 세 되어 보이는 노인은 이 청년을 자기 조카나 되는 듯 친절히 지도하였다.
신약성경을 재독, 삼독한 정춘수는 한학에서 ‘미지생 언지사(未知生 焉知死 :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는 제자의 물음에 공자가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하고 답변한 것을 말함)’ 이상을 알지 못하였고, ‘삼강오륜’으로써 자기와 이해관계에 있는 자에 대한 의무만 배웠을 뿐인데, ‘사후상벌’과 ‘애인여기(愛人如己 : 남을 자기 몸처럼 사랑함)’뿐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할 것’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보고서 광명을 알아보기 시작하였고, 구국운동도 이런 종교적 토대 위에 전개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여행을 중단하고 원산 감리교회를 찾아가 미국인 목사로부터 여러 가지 교리를 연구한 다음 드디어 세례를 받고 목사의 후의로 교회 사무에 보조협력을 하고 있게 되었다.
나는 그때 감리교회에서 운영하는 원산 배화여학교 교원으로 있었는데 목사의 권고로 정춘수와 결혼하였다.
그 후 목사의 추천으로 정춘수는 서울 정동 성경학원을 졸업하고 전도사로 임명되어 북한 산촌을 두루 다니며 복음 전파에 헌신하였는데 한학에 해박하고 기독교 신앙에 철저하여 언행일치한 청년 전도사는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그가 전도사로 성공한 후 미국인 목사의 추천으로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것은 1912년, 40세 때였고 다음 해에는 목사로 임명되어 개성, 원산, 춘천, 평양, 서울 동대문, 수표교, 종교, 자교 등 각지 교회 목사를 역임하여 36년 동안 활동하였다.
그 동안 기미운동의 기회에 조선독립운동 제창 지도자 33인 중 한 사람이 되어 동부조선의 선전 총책임을 맡아 활약하다가 피착 투옥되어 6년 징역의 언도를 받고 복역하던 중 감형되어 3년 복역 후 출옥하였고 그 후 다시 배일(排日)이란 죄명으로 투옥, 2년의 옥중 고통을 감내하였다.
정 목사는 한때 전국 교역자와 신도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므로 1935년 6월 전국 감리교 총이사 선거 때 총이사로 당선되었고, 임기 4년이 지난 다음에도 그 공적이 크다 하여 다시 총이사로 재선되었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총독부 정치가 기독교를 얼마나 압박하였는지는 독자들의 기억에 생생히 살아 있을 것이다. 그때 서울 시내 모든 예배당을 폐쇄할 것, 예배당을 팔아서 국가에 헌금하라는 지독한 요구가 나왔다.
총이사는 관계 교역자들과 협의한 결과 예배당 하나만이라도 팔아서 헌금하지 않고서는 가혹한 처단을 면할 길이 없을 것으로 합의되어 그대로 실행한 일이 있었으니, 이것은 망부가 단독으로 한 것도 아니었고, 또 그 당시에는 달리 모면할 도리가 없었던 것은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국 모든 예배당에 ‘신붕(神棚 : 집안에 신령을 모시는 곳)’을 설치하라는 무서운 강요를 받았다. 만일 그대로 한다면 이 무슨 꼴이 되겠는가! 그래서 관계 교역자들과 의논한 결과 예배당 하나에만 신붕을 설치하고 그것을 연무관 비슷하게 내놓기로 협의되었고 또 그렇게 실천함으로써 모든 예배당에 신붕 설치를 그만두어도 좋게 되었으니, 그때에는 이것이 가장 지혜로운 조처라 하여 칭찬하는 이가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불행을 막기 위하여 작은 불행을 받아들이는 이런 지혜로운 조처도 시대와 한경이 바뀌면 선의를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트집 잡을 손잡이로 제공될 수 있는 것이다.
8․15 해방의 뒤를 따라 조국이 독립되면서 제1에 헌법, 제2에 정부조직법, 제3에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제정되었으니 이것이 소위 반민법이었다. 일본 제정에 아부하여 자기 민족에 큰 해를 끼친 명실(名實 :겉으로 드러난 이름과 속에 감추어진 실상) 그대로의 악질 친일분자에게 제재 수단을 내리는 것은 민족의 공의가 요구하는 당연한 조처임은 누구든지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만, 그 법의 적용 여하에 있어서는 공산당 프락치들에게 반공 인사들을 얽어맬 기회도 주고, 남을 누르고 자기만 출세하려는 야심가들과 사사로운 혐의로 원수 갚을 마음을 가졌거나 자기 당파의 세력을 든든히 세우려는 당파심의 지배를 받는 이들에게는 이를 그대로 넘겨 버리기에는 아까운 기회도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치, 경제, 교육, 종교 각 분야의 많은 유능한 인사들이 이 반민법에 걸려 고생하고 나온 것은 독자들이 지금도 잘 기억하는 바이다. 33인 중 한 사람이요, 감리교 전도의 공로자요, 두 번이나 총이사로 당선되었던 정춘수 목사를 그대로 둔다면 그 앞길이 어떻게 열릴 것인지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다.
해방 후 내습한 각계각층 혼란의 회오리 바람을 따라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분쟁 분열의 물결이 출렁대던 그 판국을 정춘수 목사가 무사히 지내기를 바라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이 반민법으로 인하여 정춘수 목사도 2개월 동안 옥중 생활을 하였고 나중에는 이렇다 할 ‘죄목’이 없으므로 무죄 석방되었다. 내 남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정춘수 목사가 친일파이고 반민족적 행위를 하였다면 일본 제정시대 모든 방면 지도급에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 중 친일파 아니었던 사람은 누구이며 반민족적 행위를 아니한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한 감방에 갇혀 있던 이들 중 아침, 저녁으로 기도드리던 사람이 둘 있었다. 하나는 정춘수 목사이고 하나는, 그 후 역시 무죄 석방된 천주교 신자 조원환 선생이었다. 두 분은 서로 그 종교에 대하여 약간 이야기하였고 그 후 조 선생은 정춘수 목사에게 「교부들의 신앙」이란 책을 주었다.
조 선생은 자기 할 일을 한다는 의미에서 그 책을 주었을 뿐, 정 목사의 개종을 꿈에라도 바라지 못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무심코 얼마 지난 다음 조 선생은 자기 집을 찾아온 정 목사를 발견하고 놀랐다. 정 목사는 찾아온 뜻을 말했다.
「교부들의 신앙」을 거듭 읽어 보고 생각한즉 천주교 하나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오직 하나인 참 종교인 것, 이를 신봉치 않고서는 영혼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깨닫고 자기도 천주교로 귀정할 것을 결심하고 이를 발표하러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두 분은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한다.
내가 알기로 정 목사는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며 곰곰이 생각하기를 적어도 세 번은 하였다. 그 전에도 우리 내외는 신교 각 파의 끊임없는 분쟁, 알력에 크나큰 비애를 느낄 때마다, 우리가 큰집이라고 생각하던 천주교회의 국경, 민족, 세기를 초월한 부동의 통일성을 보고서 은근히 매력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교회는 천주교일 것이라고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편 우리 가족, 일가친척, 친우들이 전부 감리교인이고 또 정춘수는 전국 감리교회의 신임과 존경을 받아오던 원로 목사이던 만큼 이런 모든 것을 끊고서라도 천주교로 넘어가야만 된다는 절박성을 깨닫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망부가 「교부들의 신앙」을 읽으면서 재삼 생각하고 나서는 천주교로 개종할 필요가 있다고 내게 역설하였다. 나는 처음에 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그렇잖아도 반대 측에서는 악선전을 계속하고 있는데 만일 천주교로 개종한다면 이것은 타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것이다. 예배당 매각, 신붕 문제 같은 것은 감리교 측에서도 그 내용을 자세히 아는 이가 다 이해하고 있는데 만일 천주교로 개종한 뚜렷한 사실을 모두 알게 된다면 그때 가서는 부분적이 아니라 전체적 비난의 폭풍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럴 필요가 어디 있을까?
둘째, 그때 우리는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서울시 성동구 금호동 381번지 조용한 곳에 두 늙은이만 살고 있었고 2층은 기도 전용실로 만들어 때때로 그 방에 들어가 기도드리면서 그날그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처럼 깨끗하고 거룩한 생활로 여생을 끝낸다면 우리 영혼을 구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어찌 예수께서 우리를 버리시랴?
셋째, 만일 교회 없이 이렇게 지냄이 좋지 않다면 우리 가족이며 일가친척들과 우리를 신임하는 교역자와 신자들을 모아서 따로 교파를 세워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안 하는 일도 아니다. 우리 한국 안에 수십 교파가 있고 세계적으로는 수백 교파들도 그 출발이 모두 이렇지 않았던가.
위에 말한 대로 실행하는 것은 프로테스탄트의 원리에 조금이라도 저촉될 바 없고, 따라서 그대로 나갈지라도 영혼을 구하지 못할 위험은 조금도 없다. 우리가 감리교에서 쫓겨나가 발붙일 곳이 없으므로 마침내 천주교로 들어갔다는 악선전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는 이상 논리에도 명백히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로 들어가야만 된다고 내게 역설한 망부의 논거는 무엇이었던가? 그는 내게 그 책을 주어 읽기를 권하면서 자기의 소감을 전부 말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둘도 아닌 꼭 하나만 세우셨다는 것, 당신을 믿는 이들이 마치 당신과 성부가 하나인 것처럼 둘이 아닌 ‘하나’로 남아 있으란 것이 최후 기도의 유언인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뜻이라는 것, 그러니까 교파가 여러 가지로 분열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다만 하나뿐인 교회는 바로 천주교회인 것, 이 천주교회는 맺고 풀고 하는 직권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았다는 것, 그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설정하신 7성사를 보존하고 있다는 것, 당신이 이 교회를 통해서만 영혼을 구하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인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천주교회를 신봉치 않고 제 마음 내키는 대로 예수를 믿어서는 구령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과연 그 책을 읽어가며 생각하니 성서상 역사상의 그 논증은 조그만 빈틈도 허용치 않도록 명백한 것이었다. 그러니 낸들 어찌 주저하랴. 그래서 나도 장부를 따라 천주교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였던 것이다.
천주교회의 교리서적을 더욱 탐독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춘 다음 1949년 11월 제2주일에 망부는 여러 친지를 불러 모아놓고 우리는 천주교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는 것, 그 이유는 무엇이라는 것을 미리 선포하였다.
이 소식이 퍼지면서 여러 가지 반향을 일으켰다. 아무런 의견 발표 없이 묵묵히 생각하는 이들, 정춘수는 이제 망령이 들었느니 미쳤느니 하고 떠드는 이들, 어찌 우상숭배교, 마리아만 숭배하는 천주교로 넘어가느냐고 비난하는 이들, 총이사(기독교조선감리회 총대표)로 있던 이가 천주교로 전향하면 우리 감리교는 망하라는 말이냐고 공격하는 이들, 총이사로 있다가 만년에 천주교회 신자로 내려앉을 게 무엇이냐고 불평하는 이들, 옛정에 못 이겨 울며불며 무조건 만류하는 이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우리가 벌써 예측하였고 각오한 바였다. 고향을 떠나는 데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끝까지 우리에게 동정하고 우리를 변호하며 위로하고 아껴 주던 형제자매들까지 이제 우리는 떠나 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낯선 타향에 외로운 신세가 되어야 한다. 우리 비록 늙었을망정 어찌 가슴속에 인정이 없으며 한숨과 눈물이 없으랴…….
그러나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참뜻을 따르는 것이요, 또 우리의 영혼을 구하는 단 하나인 길인 바에야 토지전답, 가산집물(家産什物 : 집안의 재산과 살림 도구들) 고향, 친척친우, 형제자매, 아내, 장부, 아버지, 어머니, 오른쪽 눈, 오른손까지 전부를 끊어버려야(마태 5,29-30)되지 않느냐! 성경은 이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음이 명백하지 않은가!
다음 주일 명동 대성당에 들어가 천주대전에서 우리는 거룩하고 엄숙한 귀정식을 노 주교 입회하에 행하였다. 이제 우리는 천당 현관까지 들어섰다. 티끌 같은 늙은 생명만 끝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잘것없는 우리 영혼을 받아들이실 것이니 여기에는 일말의 불안이나 의혹도 없다. 우리 가슴은 날아갈 듯 가볍다.
6․25 사변을 그럭저럭 지내고 1․4 후퇴 때, 두 늙은이는 길을 나서서 연일 걸었다. 정춘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묵주알을 넘겨 묵주기도를 드리면서 걸었다. 이렇게 청원군 족손 정인환 집까지 갔는데, 거기서 더 남하하려 했으나 간절히 만류하므로 그 집에 머물렀다.
그해 가을 정춘수 영감은 병석에 누웠고, 청주 김 신부님을 청하여 갖은 성사를 다 받고서 조용히 임종을 기다렸다. 그때 내가 옆에 앉아서 그를 크게 중상모략하던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가면서 이들을 모두 용서해 주자고 하였더니 그는 이미 천주대전에서 벌써 용서해 주었지만 지금도 역시 용서한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이따금 ‘예수 마리아’를 부르다가 79세를 일기로 쇠진한 숨을 거두었으니 때는 1951년 10월 27일이었다.
그가 길을 걸으면서 묵주기도를 드리고 임종에 가까워서는 부근 천주교 신부를 청하여 요긴한 성사를 받고 자기의 모든 적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예수 마리아’를 부르다가 임종한 사실은, 그가 진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죽었음을 입증하는 것이고 동시에 무슨 감정의 지배로 감리교를 떠나 천주교에 전향한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동네에 있는 동안, 그리고 특히 망부의 장례 때 물심양면으로 우리를 도와주신 부근 모든 주민과 관공서원들에게 감사해 마지않는다. 망부가 생존 당시 언제나 기독교의 통일을 부르짖었고 천주교로 귀정한 다음에는 종종 다음과 같이 내게 말했다.
“가톨릭에는 「교부들의 신앙」 같은 좋은 책이 있는데 왜 이것을 널리 선전하지 않는가? 프로테스탄트 신자로서 공정한 태도로 이 책을 읽어 연구한다면 우리처럼 가톨릭으로 전향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 책을 읽어보고서도 그대로 과거를 고집한다면 거기에는 세속 체면, 물질적 유익, 교만한 마음 등 불순물의 작용이 있을 것이다.”
망부의 이 말은 가톨릭 측에서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나 다 같이 음미해 볼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때 그 책이 입수되지 않았던들 아마 우리는 그 기도실 속에서 기도 생활만 계속했든지, 동지들을 모아 교회를 따로 건설했든지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원거리에 앉아서 오고가는 풍문만 듣고서 천주교를 판단하지 말고 그 속에 파고들어가 알아본 다음에만 판단을 내릴 것이다.
우리 부부는 감리교 안에서 늙었다. 만년에만 천주교를 몸소 알아보았다. 알아보고서 천주교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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