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에 관한 중세 독일의 민간 전승들
MARIA
● ● ● 스물두 번째 이야기● ● ●
성모님 성화와 어느 가난한 학자의 이야기
어느 학자의 사연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교에 다니며 열정적으로 많은 책을 읽었다. 성모님에 대한 신심도 남달랐다. 세상 것을 멀리하고 성모님을 공경하며 깨끗하게 살았다. 그는 성모님과 맺은 약속이 있었는데, 어디 에 있든지 매일 아침이면 성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성모송을 일곱 번 바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약속을 그때껏 단 하루도 깬 적이 없었다. 사실 그는 그 도시에서는 구걸하며 살아야 했다. 그가 공부하는 곳은 가족과 친지들이 사는 고향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래의 젊은이들이 으레 저지르기 마련인 죄는 단 한 번도 범하지 않았다. 그렇게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자애로우신 성모님께서 그를 궁핍한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셨다.
인근 마을의 성당 봉헌식이 있는 날이었다. 그날 사람들은 대사를 받기 위해 그리로 몰려갔다. 또한 성당 축성식은 가난한 학생들에게도 좋은 일이었는데, 마음껏 음식을 먹고 선물도 많이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성당 축성식 때 신자들에게 대사를 수여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옷과 재물을 나누어주는 것이 교회의 관습이었다.) 그다음 날, 날이 밝자 우리 주인공도 마을을 나와 새로 축성된 성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침 일찍 길을 떠나느라 아직 성모송을 바치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마음을 정결하게 지키려고 다른 학생들과 멀찍이 거리를 두면서 최대한 그들의 수다를 피했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성당을 향한 마을 사람들의 행렬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문득 그는 성모송을 바치지 않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지금까지 단 하루도 거른 적 없었던 습관을 오늘 처음으로 망가트렸다는 사실이 큰 충격이었다. 그는 오늘 자기가 크게 잘못했다는 생각에 슬퍼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슬픔이 깊어진 나머지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같은 기회가 자주 있지 않으니 꼭 가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그래서 그는 도중에 작은 경당이 나오면 거기 들어가서 성모송을 바치겠노라고 마음먹었다. 경당이 만일 닫혀있으면 점심도 먹지 않고 경당 앞에서 저녁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저녁기도 때는 반드시 경당 문을 열 것이고, 그러면 성모상 앞에서 마음껏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슬픔이 가시지는 않았다. 길을 걷는 동안 눈물이 계속해서 그의 눈을 가렸고 가슴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러다가 그는 어두컴컴한 숲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매우 장엄하고 아름다운 모습의 성모님 성화가 거기 있는 게 아닌가!
기이하게도 그 성화는 나무 그루터기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성화가 눈에 들어온 순간 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 좀 전까지의 아픔과 슬픔은 씻은 듯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느 화가가 깜빡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쁜 마음으로 성모님께 기도드렸다. 그러고는 행여 새들이 날아와서 더럽힐까 걱정된 나머지 주변의 예쁜 꽃과 풀을 꺾어 커다란 화환을 만든 다음 그것으로 성화를 덮었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길을 가려는데 또 다른 생각이 그를 붙잡았다. 이렇듯 아름답고 귀중한 성화에 덮개가 없어 궂은 날씨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성화 속의 성모님은 황금빛과 우아한 청동빛으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비라도 맞으면 전부 씻겨 내려갈 거야. 많은 공을 들여 그렸을텐데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기면 화가에게 얼마나 큰 아픔이 되겠는가." 그래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달랑 윗도리 하나랑 겉옷 하나가 그가 가진 전부였다. 솔직히 무언가를 더 가졌더라도 그리 대단한 것은 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는 가진 것 전부를 기꺼이 내놓았을 것이다. 더욱이 때는 더운 여름날이기도 했다. 그는 윗도리를 두 조각으로 찢어서 한 조각으로 성화를 감쌌다. 남은 한 조각은 그대로 입고 그 위에 겉옷을 둘렀다.
이제 정말로 자리를 뜨려는데 그 순간, 성화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화들짝 놀라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가, 무릎으로 성화 앞에 기어가서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여왕이시여, 방금 저를 부르신 게 맞습니까? 저를 다시 돌려세우시다니, 혹시 제가 한 일 중에 당신께 기쁨이 되지 못한 게 있었을까요?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성모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이 길로 즉시 마을 사제관으로 가거라. 사람들 한가운데에 주교가 식탁에 앉아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가서 내 안부와 함께 주교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그대가 나를 공경하는 딱 그만큼만 나도 그대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내일 너에게 사제서품을 주어야 한다고 일러라."
"오, 여왕이시여, 제가 당신의 인사를 전하면서 그런 말을 하면 저는 주교님께 굉장히 무례한 사람이 됩니다. 적어도 저를 미친 사람으로 보거나 농담하는 줄로 들을 것이고 그러면 저는 웃음거리가 됩니다. 게다가 주교님은 내일 누군가를 사제서품 줄 시간도 여유도 없습니다. 저 또한 사제의 길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습니다. 저는 솔직히 미사가 어떻게 봉헌되는지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너는 많이 배웠고 이미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다. 그리고 서품받기에도 지금이 시기상 적절하다. 잘 들어라, 주교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내가 알려주겠다. 너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면 된다. 사실 그는 주교직을 받은 날 마음속으로 내게 서약했었다. 매일 성모송을 오십 번 바침으로써 나를 공경하겠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물어보아라. 스스로 약속한 것을 지금도 잘 지키고 있는지, 아니, 과연 나를 생각이나 하고 있는지 말이다. 혹시 내 앞에서 그런 결심을 했다는 것조차 까먹은 것 아니냐고 말이다. 네가 이렇게 말하면 그는 네 말을 들을 것이다."
그 학자는 성모님의 말씀을 듣고 땅에 엎드려 절을 한 다음 일어나 길을 떠났다. 잠시 후 그가 힐끗 뒤돌아보았는데, 아니, 놀랍게도 나무 그루터기에 놓여 있던 성모님 성화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게 아닌가! 기도하고 걸으면서 그는 어느새 마을에 도착했다. 그는 마을에 들어가서도 먼저 경당을 찾아가 한동안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드렸다. 그런 다음, 그 마을을 방문 중인 주교를 만나기 위해 본당 사제관을 찾아갔다. 경비병들은 야박하게도 사제관 주변에서 구걸하는 사람들과 노숙하는 이들을 쫓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주인공은 성모님에게서 분부 받은 일이 있었으므로 어떻게든 들어가서 주교를 만날 생각이었다.
그도 볼품없는 행색을 하고 있었으므로 여러 번 두들겨 맞아야 했다. 문 앞에서 머뭇거리고만 있어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다. 그는 경비병에게 맞아가면서 겨우 사제관 안뜰로 들어갔다. 주교는 기사들과 영주들과 여 러 사제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잠시 기회를 엿보다가 주교 앞으로 나아 가서, 한마디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사람들의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주교는 그를 흥을 돋우기 위해 온 광대로 생각했다. 이윽고 그 젊은 학자가 주교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교님,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하늘의 여왕이신 성모님께서 주교님께 친히 안부 인사를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주교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 만큼만 평화를 빌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광대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귀 기울여 듣소."
“주교님, 주교님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조금만 더 말씀드릴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 실은 성모님께서 주교님께 전하라고 제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분부하신 바에 따르면, 주교님은 내일 저에게 사제서품을 주셔야 합니다."
"흠, 그대가 지금 사제직에 걸맞은 옷을 입고 있기나 한가?"
주교는 점잖으면서도 조롱하며 말했다. "그런 식의 말로 우리 성직자들을 모욕하는 것은 그만두게. 무례한 말을 계속 지껄인다면 큰 불행이 닥칠 것이야. 경고하는데, 나는 사람들을 시켜 그대에게 몽둥이질을 시킬 수도 있어. 내게 웃음을 주고 분위기를 띄우고 싶다면 다른 방식으로 해주었으면 좋겠네. 그러니 마리아는 빼고 다른 것으로 부탁하네. 마리아 이야기를 해서 재미있을 건 없으니까.” "성모님에 관해서는 물론 주교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성모님을 끌어들인 건 농담하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니까요. 하지만 제가 한마디만 더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성모님께서 정말로 저를 오늘 주교님 앞에 보내셨다는 것을 납득시켜 드리겠습니다."
“굉장히 의심스럽지만, 정녕 그대가 그렇게 원하면 내 한번 들어보겠네. 무슨 증거를 가지고 왔나? 어디 한번 나를 설득해보게.”
"성모님께서 주교님께 이렇게 말씀하십니 다. '네가 주교직을 받은 첫날에 무엇을 결심했는지 아직 기억하느냐? 그때 너는 뜨거운 열정과 눈물로 마음속으로 내게 이렇게 서약했다. 나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매일 성모송 을 오십 번 바치겠다고 말이다. 이것은 너와 나 우리 둘만의 비밀, 네가 자발적으로 약속한 것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느냐?' 이어서 성모님께서는 주교님이 이 약속을 저버리셨고 그래서 크게 상처받으셨다고 덧붙이셨습니다.”
그 학자의 말을 듣고 주교는 너무 놀랐다. 주교는 먹던 음식을 내려놓고서 돌처럼 굳어버린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큰 슬픔에 잠긴 주교는 이윽고 식탁에서 일어나 성당으로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물론 그는 우리 주인공이 전한 서약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성모님과 마음속으로 약속한 것이고 어느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기에 이 비밀을 다른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잠시 후 주교는 그 학자를 가까이 불렀다. 물론 주교의 태도는 좀 전과 달랐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하게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 마을에 오는 도중 성모님이 따로 숲 속으로 이끄셨다는 것을 숲속에서 보았던 성 화와 관련해서 있었던 일을 낱낱이 설명했다.
그의 말을 듣고서 주교는 성모상 앞으로 가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주교는 그의 말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고, 성모님께서 명하신 것을 기쁜 마음으로 행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다음 날 학자는 정말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예식 중에 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성모님의 총애를 받는 젊은 사제여, 천상 모후께서 그대를 나에게 보내셨다는 것을 진실로 알게 되었으니 안심하시게. 이제 그대가 이어서 미사를 집전해주었으면 하네." 그러자 젊은 사제는 이렇게 대답했다.
“원래 사제직을 맡기 전에 그에 합당한 교육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에게는 갑자기 일어난 일이어서 사제 직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필요한 것들을 먼저 배우고 나중에 준비가 되었을 때 하면 어떨까요? 지금은 경본을 그저 책 읽듯이 읽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는 안 되네. 자네는 지금 당장 낭송 을 할 줄 알아야 하네. 그대를 지금의 이 자리까지 인도해주신 분께서 즉시 은총을 내려주시고 찬미가를 부를 수 있도록 해주실 걸세."
“알겠습니다. 그럼, 하늘의 여왕이시여, 저에게 은총을 내려주십시오."
그리하여 참회예절이 끝나고 새 사제가 "기뻐하소서, 거룩하신 어머니 Salve santa parens"를 낭송하자, 그 찬미가는 매우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모두에게 울려 퍼졌다. 신자들이 화답하여 찬미가를 낭송했고 새 사제는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새 사제가 "기뻐하소서, 거룩하신 어머니”하며 첫 구절을 떼자 갑자기 아리따운 여인들이 열을 지어 제대 앞으로 걸어 나오는 게 아닌가! 그 광경은 새 사제와 주교의 눈에만 보였다. 처녀들의 무리 한가운데에는 면류관을 쓰고 금실과 은실로 화려한 자수가 놓인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 있었는데, 그 위용이나 자태로 볼 때 여왕이 분명했다. 기다란 망토를 어깨에 고정시키고 있는 브로치는 별과 같이 빛났다. 여왕은 매우 아름다운 동시에 강한 빛을 발산하고 있어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여왕은 경건하게 제대 앞으로 나와서 여러 개의 꽃다발을 봉헌했다. 그 꽃다발은 우리 주인공이 전날 숲속에서 만들었던 바로 그것이었다. 새 사제도 여왕이 바친 화환이 자기가 만들었던 것임을 당장 알아보았다. 주교도 그것을 보며 크게 기뻐하였다. 학자는 자기가 어떤 꽃다발을 엮어서 성모님께 바쳤는지까지 상세하게 주교에게 설명했기에, 주교도 여왕이 봉헌한 꽃다발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처녀들의 무리는 물러갔다가 성찬전례가 시작되기 전 봉헌예식 때 다시 제대 앞으로 줄을 지어 나왔다. 여왕처럼 보였던 그 가장 아름다운 여인도 함께 나왔는데, 손에 두 조각으로 찢어진 웃옷을 들고 있었다. 그것도 역시 전날 우리 주인공이 성모님 성화를 비에 젖지 않게 하려고 둘렀던 그의 옷이었다.
여인은 젊은이의 웃옷을 제대 앞에 내려놓고, 그 앞에 고개 숙여 절하였다. 그리고 처녀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 장면도 주교와 새 사제의 눈에만 보였다. 새 사제는 매우 자연 스럽게 미사 경문을 낭송했다.
이윽고 새 사제가 축성된 성체를 들어 신자들에게 보여준 다음 제대 위에 내려놓고 양손을 높이 들었을 때, 옆에 있던 주교는 또 다른 기적을 보게 되었다.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새 사제가 그 순간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성모님께서 그의 영혼을 데려가신 것이 틀림없었다. 단 하루 사제로서 미사를 봉헌하고 생을 마감한 그 젊은 학자에 대해서는 현장 증인이었던 주교를 통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이들마다 크게 경탄하며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고 주교와 사제단은 함께 찬미 노래를 부르며 이 젊은 사제에게 성대한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한다.
그러니 명심해야겠다! 하느님의 어머니를 공경하는 이에게 어떠한 상급이 주어지는지를! 그 젊은 학자가 언제 어디서든 성모님 앞에 마음을 깨끗이 하려 애쓰며 성모송을 외웠다는 사실을! 하느님께서는 믿음에는 반드시 은총으로 보답해 주신다. 굳건한 믿음과 더불어 성모님께 대한 사랑을 꼭 간직하기를! 하늘의 여왕님은 찬미받으소서!
박규희 옮김
(마리아지 2022년 1• 2월호 통권 231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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