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천주교로 개종하였는가?-개종실화

15. 세상에 이런 책도 있다니! - 감리교 김상묵

Skyblue fiat 2023. 11. 16. 21:48

'개종실화-나는 왜 천주교로 개종하였는가?'

 

 

15. 세상에 이런 책도 있다니!

 

감리교 김상묵

 

평안남도 안주에서 출생한 나는 아무런 종교도 믿지 않는 가정에서 자랐다. 그때 아버지는 해산물 도매상을 경영하던 때이므로 부유한 생활로 남달리 네 살 때 유치원에 입학한 것이 프로테스탄트 감리교회 유치부에 적을 두게 된 동기가 되었다.

말하자면 유치원은 감리교회 안에 있었던 관계로 유치원의 유아는 자연 입적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도 믿지는 않으면서도 종이 울리는 주일 아침엔 남달리 예쁜 옷과 구두를 신겨 아기 보는 처녀 등에 업혀 보내던 기억이 새롭다.

 

다섯 살 나던 겨울로 기억한다. 주일에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와 또 다른 유아 한 명이 목사 앞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개근상까지 탔다. 물론 그 당시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아들이라는 것과 쉬운 찬송가 몇 곡을 부를 수 있는 정도였다.

그 후 본시 믿지 않는 가정이라, 주일마다 재촉도 않고 무관심한 관계로 점점 교회에 나가는 일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간다고 하면 크리스마스나 특별한 날 이외에는 나가지 않게 되었다.

 

중학교는 영변숭덕학교와 서울 배재중학교인데, 두 학교가 모두 감리교 계통인고로 성경시간도 있었고, 또 성경도 열심히 읽기 시작했고 그야말로 열렬한 크리스찬 학생으로 평이 높았다. 특히 부흥대회 때는 새벽 기도회에도 빠지지 않고 새벽 종소리와 더불어 함박눈을 맞아가며 성경구절을 따로 외우던 기억도 새롭다.

배재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 일본대학 문과에 적을 둔 후로는 성경보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칸트의 비판론을, 특히 괴테 작품에 도취하기 시작해서 종교는 약한 자가 믿는 것이며, 도저히 젊은이는 가질 바가 아니라는 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 후 만주국 길림성 어느 수력발전소 직원으로 있다가 귀국하여 왜정 때 징용 관계로 교원 생활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6․25 사변이 발발한 그해 4월까지 교원생활을 하면서도 그야말로 방탕하고 타락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다만 교육자라는 점에서 크게 타락하지는 않았다 하나, 지금 생각만 하여도 나는 확실히 영원히 구령치 못할 함정 속에서 헤어나지 못할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은 것이다.

 

도리어 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인간 예수는 숭배하되 신으로서의 예수는 부인하고, 교인을 조소하며 약한 자라 불렀다. 그리고 어떠한 수단 방법으로나 오로지 쾌락만을 쟁취하고, 오직 힘에 의한 지상낙원의 건설을 생각했다.

또한 현실적 향락만이 인간의 최대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은 오직 최후를 의미하며 무에서 무로 귀결하는 것이 인생이라고까지 생각하던 회의주의자로서 죄악의 생활을 계속했던 것이다.

 

서울에서 6․25 사변을 맞았다. 빨갱이 치하 3개월간을 어두운 골방에서 숨어 지내며, 죽음의 공포에 떨며, 전쟁이 빚어낸 처참하고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고 체험함으로써 지금껏 망각했던 종교 사상이 내 가슴속에 싹트기 시작한 듯싶다.

다시금 중공 오랑캐의 침략으로 1․4 후퇴로 부산의 거리를 헤매었으며, 부득이 의지할 곳 없이 머나먼 남쪽고도인 제주도에 제5차 피난민으로, 조천리라는 면소재지에 머물게 되었다.

 

풍속 다르고 말 다른 외로운 곳에서 피난민 책임을 맡아, 그날그날 배급 쌀로 간신히 연명해 갔다. 조천(朝天)에는 프로테스탄트인 장로교, 감리교 두 교회가 있었는데 장로교는 그래도 이보식 목사를 중심으로 수십 명의 신자를 가졌으나, 감리교는 그야말로 명목뿐, 불과 5, 6명의 신자들을 담당 목사도 없이 이한라라는 60이 가까운 여인 권사 한 분이 간신히 유지해 나가던 때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과거 감리교의 유아세례를 받고 사실 부끄러우나 성경에도 통달하고 찬송가도 지도할 능력이 있다는 점에 크게 기대하고 매일같이 찾아와 교회에 나와 주기를 간청한다. 나는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내 양심에서 우러나기 전에는 못 나간다는 뜻을 말하고 굳이 이를 사양하였다.

그러나 매일같이 찾아와 내 과거를 청산하고 다시 교인이 되기를 기도하고 심지어 눈물을 흘려 가며 권하는 데는 나도 더 사양할 수 없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사실을 고백하면 권사의 권고에 못 이겨 억지로 나가는 셈이다. 주일날 낮 예배는 제주읍에서 장로급 인물이 와서 하고, 밤 예배와 3일 예배는 이 권사가 보았다. 그러나 이 권사는 나이도 많고 안질이 심하여 저녁이면 전혀 성경을 낭독할 능력이 없어 나를 청하므로 수차 거절했으나 너무나 권하므로 마지못하여 대신 맡아보게 되었다.

 

그때 나는 성경 지식을 넓히기 위하여 밤을 새워가며 성경을 연구하는 한편, 정확한 찬송가 지도를 위하여 오르간을 찾아 동분서주하였다. 나는 다시 피난민을 이끌기 시작하여 5, 6명에 불과하던 신자는 4, 50명으로 늘었다.

이 권사는, 물론 내 힘은 아니었지만, 제주읍 목사에게 상신하여 입교식과 직분을 부여하려 하였다. 나는 양심적으로 명백히 내 마음을 돌리기 전에는 이를 거절한다고 했으며, 담배도 입에 대고 있음을 말하며 좀 더 시일을 달라고 말하였다.

그 당시 나는 사실 잠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였다.

 

‘너는 임시이긴 하나 진심으로 설교할 자격을 가졌는가?’

‘너는 남의 영혼을 양심적으로 구할 수 있는 믿음이 있느냐?’

‘너는 확실히 죄인이 아니냐?’

고민 끝에, 나는 발을 벗고라도 직분을 맡아 남을 위하여 노력해 보리라 생각하고, 새벽기도를 시작하여 입교식을 거행하려던 며칠 전 나는 후두결핵에 걸려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그 당시 명 목사가 정식으로 담당목사로 부임하였다. 명 목사와 이 권사는 내 병을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기도해 주었다. 나는 무척 감사했으나 믿음이 약한 탓으로 내 병은 점점 악화되어 불행히도 제주도의 특수한 풍토병인 열병에 걸려 생사를 헤매었다.

그 후 열병은 나았으나 후두결핵으로 음식을 먹지 못하는 관계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대소변을 누운 채 보며 3개월을 지났으나 통 일어나지 못하는 중병에 걸린 것이다.

 

죽음의 일보 직전! 그때 부산 적기 피난민 수용소에 계시는 어머님과 최후로 만나보고 죽으려고 결심하고 리어카에 실려, 남의 등에 업혀 부산 적기에 나오게 되었다. 경제가 허락지 않아 병원에 입원치료도 못하고 있던 중, 더구나 국민반 반장은 이런 위험한 환자를 여기 둘 수 없으니 곧 반에서 나가라는 추방 명령을 받아 하는 수 없이 동항 천주교회 뒤 언덕에 조그맣게 막을 치고 있게 되었다.

 

그때 어머니는 장로교 신자였기 때문에 함기홍 목사와 여러 직분을 맡은 여인들이 내 병을 위하여 기도하려 막을 방문하였다.

주일마다 천주교 성당에서 흘러나오는, 내 생전 처음 듣는 낯선 성가! 신부님의 강론을 나는 하나도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으며, 하얀 미사보를 쓴 여인! 성호를 긋고 묵묵히 장궤하고 기도하는 사람들!

 

흥미 있게 이를 엿보던 어느 날, 하루는 천주교의 골롬바 회장이라는 분이 찾아와 천주교를 믿을 것을 권해 주었다.

나는 그 당시 천주교란 서양사에서도 구교로 배웠고, 기실 진보 없는 교회, 형식을 존중하는 교회, 예수보다 인간 마리아를 더 숭배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교회로만 알았기 때문에 나는 그저 감리교 신자라고 말해 버렸다.

 

인간 사회에서 버림을 받고 의사들도 희망 없는 환자로 버림을 받은 나! 나는 기도에만 열중하였다. 때는 1952년 11월! 나는 다행히 살이 오르기 시작하여 29일 어머님 천막으로 내 발로 걸어 내려오게 된 그 이튿날!

부산 메리놀 수녀 병원에 어머님이 가서 왕진을 청했다. 그날 낮, 여의사 한 분과 사메리야 수녀님 외 또 한 명의 수녀님과 베르나르도 병원 회장님이 왕진을 오셨다. 나는 그날 처음 수녀님의 진실한 사랑에 접했으며, 베르나르도 회장님의 열정적인 구령 사업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수요일마다 수녀님이 오셔서 주사와 비타민을 주고 가셨으며, 금요일에는 틀림없이 베르나르도 회장님이 오시어 처음으로 나에게 「천주교 교리문답」을 주고 가셨다. (프로테스탄트에 직분을 둔 여인들도 틈이 있으면 찾아와 기도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좀처럼 교리문답을 외울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정기적으로 베르나르도 회장님이 찾아와 교리문답을 속히 배우라고 재촉을 받았으며, 어떤 때는 두 시간 이상이나 천주교와 프로테스탄트와의 차이,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 보아 프로테스탄트가 과연 열교라는 것을 말씀도 하시고 서로 토론도 하였다.

 

비로소 나는 천주교가 참 예수교라는 것을 알았으며,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나의 불만족한 생각을 솔직히 고백하고 교리문답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연옥이 있다는 사실과 7성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닌 게 아니라 좀 더 천주교에 대한 착실한 지식을 알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은 천주교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천주교로 개종함은 마치 후퇴를 의미한다고까지 말하였으며, 어머니도 목사의 체면상 주일날에 지팡이를 짚고라도 교회로 나가기를 애원하셨다. 나는 다시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교부들의 신앙」이라는 책을 손에 넣게 되어 읽는 중 나는 지금까지 없던 그 무엇이 벅차게 가슴을 울리고 말았다. 세상에 이런 책이 있었던가! 나는 약한 몸에, 남이 의아해 할지 모르나, 다섯 번 이상 읽는 동안 지금껏 맛보지 못한 기쁨을 느꼈다.

 

그 후부터 베르나르도 회장을 나의 구령의 사자로 반겨 맞았으므로, 나는 교리문답을 외우는 길이 영세를 받는 자격을 얻음을 알고 새벽이면 눈을 감고 외우며 일절 프로테스탄트파 교인과는 관계를 끊기로 결심하였다.

아! 구령의 날은 왔다! 일생 잊을 수 없는 1953년 12월 21일!

아침에 베르나르도 회장님이 오셔서 본명을 ‘요한’이라고, 문답을 처음부터 끝까지 마친 후 사메리야 수녀님의 안내로 현 초량교회 보좌인 정 신부님이 오셔서 베르나르도 회장님을 대부로, 나와 또 다른 소년이 우리 집에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나는 그날 끝없는 기쁨과 설움이 교착하여 신열까지 나도록 흥분했었다.

그 다음 주일날 나는 처음으로 동항 천주교회에 나가 이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받았다. 성사 후 땀으로 내의를 짜내도록 온몸이 젖었음을 느꼈다. 또한 장궤하고 성호를 그을 때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을 느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일찍이 어느 때 이런 참된 참회의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었던가! 또한 나 어느 때 이 엄숙하고 한마음 한뜻으로 예수님을 생각하며 머리를 숙이고 교우들과 나란히 앉아서 깊은 기도에 잠긴 때가 있었던가!

 

나는 일찍이 이런 숭고한 사랑을 느낀 적이 없었다. 솔직히 고백하면 개종 전 프로테스탄트 당시의 나의 가면적 종교 생활은, 아름다운 말을 즐비하게 나열한 기도와 설화와 군중 속에서 가장 성자인 양, 심각한 표정으로 만도 능히 열렬한 신자로 가장할 수 있었던 믿음은, 바리사이보다도 더욱 외식(外飾 : 겉치례)하는 믿음이었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귀정 후 나는 확실히 딴 사람이 되었다. 남을 사랑할 줄 알고 또 내 죄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며, 매일 조과, 만과, 삼종기도와 묵주기도를 진심으로 드리는 사람이 되었으며 그 후 동항 천주교회 여회장 서정희 수산나 여사와 베르나르도 회장의 적극적인 지도로 1954년 4월 17일 온 가족이, 즉 처는 마리아, 큰딸은 요안나, 작은딸은 말따로 이 신부님께 세례를 받았다.

온가족이 모여 앉아 성호를 그을 때마다, 나는 천주님의 은총을 감사히 여기며 베르나르도 회장과 수산나 여회장님께 온가족이 구령한 데 대하여 끝없이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특히 동항 천주교회는 본당이 되지 못하고 아직 성체도 모시지 못하였으나 나날이 늘어가는 교우들로, 주일 미사 때는 협소하여 불편을 느낀다. 하루 속히 본당이 되도록 기도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