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천주교로 개종하였는가?-개종실화

18. 가톨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분전(奮戰) - MRA운동 지도자 조성지

Skyblue fiat 2023. 11. 16. 21:45

'개종실화-나는 왜 천주교로 개종하였는가?'

 

 

18. 가톨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분전(奮戰)

 

전 M․R․A 운동 지도자 조성지

1936년 일본 관서대학 영문과 졸업, 1937년 서울 배재 중학교 교사,

1945년 덕원 천주교 신학교 교수, 1949년 서울 대학교 농과대학 교수

 

 

머리말

1. 가톨릭 이전의 나

2. 누님의 개종

3. 아내의 불치의 병

4. 영혼의 공략전

5. 성모병원의 인상

6. 죽은 이를 위한 기도

7. 누를 수 없는 신앙의 불길

8. 어머니의 영세

9. 용과 호랑이

10. 영어(囹圄)

11. 사제관의 문을 두드리다

12. 영세를 향하여

 

 

머리말

 

1943년 여름에 나는 천주교의 영세를 하였다. 그 후에 여러 신부님들에게서 개종기를 쓰라는 권면을 여러 번 들었다. 나도 써야겠다는 의무감은 느꼈으나, 성격의 태만으로 기회를 얻지 못하고 지금까지 미루어 왔던 것이다.

방학 때마다 쓰려다가는 못 쓰고 있다가, 6․25 피난 때에는 경남 욕지도에 가 있었는데 그때 대략의 구상을 해 놓았다. 제목은 ‘전 프로테스탄트 교도에게 고함’이라고 하고, 부제로 ‘나의 신앙적 자서전’이라고 붙이고 싶었다.

 

내정(內定)으로는

제1부 프로테스탄트 시대

제2부 가톨릭에 돌아오기까지

제3부 가톨릭의 교리

제4부 가톨릭의 생활

의 4부로 갈라서 써 보려고 하였다.

 

이번에 수원 본당의 이 신부님에게서 윤 신부님이 개종 수기를 모아서 단행본을 만들려고 하시는데 나더러 개종기를 꼭 하나 써내 달라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쓴다는 승낙은 하였으나 또 그대로 며칠(이) 지나갔다. 그러다 갑자기 미국에 갈 일이 생겼는데 의외로 빨리 떠나게 될 것 같기에 떠나기 전에 이것만은 써 드리고 가겠다고 특별 결심을 하고, 밤에 자기 전의 시간과 아침에 밥 먹기 전의 시간을 이용하여 부랴부랴 쓴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전기 ‘나의 신앙적 자서전’의 제2부이다.

 

벌써 영세한 지도 10년 이상이 지나고 보니, 감격도 기억도 희미해진 것을 파내고 더듬어서 쓰노라고 하였다. 독자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를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고유명사나 용어 같은 것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쓰는 것을 사용한 것이 많다.

 

 

1. 가톨릭 이전의 나

 

‘나는 나면서부터 유다사람이라’고 한 것은 사도 바오로의 말이거니와 나는 나면서부터 감리교 신자였다. 감리교 신자의 가정에 태어나서 어렸을 때에는 주일학교를 충실하게 잘 다녔고, 자라서는 주일학교의 선생을 하였으며 교회 안에서는 소위 모범 청년이란 말을 들었다.

청년회와 찬양대에서 활약을 했고, 소학교는 교회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만은 일본인의 공립학교를 나왔으나, 대학도 일본에서 감리교의 미션 계통을 나왔다. 그러고 보니 어느 모로 보든지 나는 완전히 전형적인 감리교 신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 있을 동안에는 옥스퍼드 그룹 운동(현재 M․R․A 운동이라 함)에 관계해 가지고 귀국 후에도 이 운동의 지도자로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많은 학생들과 교회 내외의 청년들이 이 그룹운동을 통하여 생활이 변화되었다. 따라서 종교계에서 나의 영향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일요일과 수요일 예배에는 으레 각 교회로 초청을 받아서 설교를 다니게 되었다.

집에서도 청년들을 모아서 성경 연구를 하였는데, 청년들은 목사의 설교보다 오히려 내가 지도하는 성경 연구에서 기독교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노라고 증언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을 바꿔 정직하고 순결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서로 사랑하는 생활을 실천하게 되었다.

 

한번은 부흥 사경회(査經會 : 사경회는 성서공부를 통한 신앙심의 배양과 더불어 계몽적인 역할을 했으며 부흥 사경회로도 발전하여 개신교 부흥운동의 기틀이 되었다.)에서 한 사람이 목사에게 질문을 하였다.

“우리가 성경에 있는 대로 사도 시대의 생활을 그대로 할 수 있습니까?” 목사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그 정신을 배우고 거기에 따라 가도록 힘쓰는 것뿐이다.” 라고 적당하고도 무난한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은 다시 말하기를 “아니요. 성경 말씀대로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같이 그대로 생활하고 있는 사람을 나는 보았습니다. 현재 ○○학교에 있는 조 선생님은 성경 말씀대로, 말로만 아니라 실지로 생활을 하는 분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물론 옥스퍼드 그룹 운동의 4절대(절대 정직, 절대 순결, 절대 무사(無私), 절대 사랑)의 생활을 보고 하는 소리였다.

 

이리하여 목사들 중에서는 질투가 생기게 되었고, 심지어 어떤 목사는 교단에서 조 아무개는 이단이라고 공격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하신 말씀과 같이, 우리의 신앙과 생활이 목사의 그것을 초월하여 더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앞으로 정진하였다.

이같이 신앙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으며, 고도의 신앙을 가졌고, 목사 이상의 감화력이 있다고 하던 내가, 어째서 또 어떻게 가톨릭으로 전향하였는가?

다음 기록으로써 독자에게 만족할 만한 해결을 줄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으나, 이것은 내가 가톨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때부터 완전히 영세하기까지 8년 동안의 발자취를 기록한 꾸밈없는 고백이다.

 

 

2. 누님의 개종

 

1935년 여름이었다. 나는 졸업반이었기 때문에,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취직 운동을 하려고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하루는 출가하여 따로 사는 누님 집을 방문하였다. 방에 들어가니 우선 실내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달라져 있었다. 벽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고 천주교의 그림이 달려 있는 것이, 천주교의 냄새를 여지없이 풍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정오가 되니까 나를 보고는 구경이나 하라고 하며, 아이들을 데리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보고 한편으로 놀랐고 또 한편으로는 감탄하였다.

나는 혹시 음식점 같은 데 들어갔다가 사람들이 있는 데서 식사기도를 하는 것도 주저하는데, 이 누님은 이교도인 나를 옆에 놓고, 또 그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기색도 없이, 자기의 하고 싶은 것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을 볼 때, 나는 그저 ‘야! 강하구나!’ 하고 느낄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천주교로 개종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누님은 원래 소학교의 경력도 없는 사람이었으나, 소위 성경학원을 졸업한, 말하자면 전도부인의 자격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자격만 가진 것이 아니라 신앙의 열의가 대단해서 항상 독수리와 같이, 보다 더 높은 데를 지향하고 올라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려 하였고, 좀 더 높이 올라가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목사나 교회 자체가 주는 지도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이웃에 있는 천주교 신자인 한 부인을 알게 되었는데, 그 생활의 경건한 것이 이상하게도 주의를 끌었다. 지금까지는 사람으로서 쳐다볼 사람은 목사와 전도부인뿐이었는데, 목사나 전도부인은 말로만 거룩한 체하는 것이 이따금 비위가 거슬렸는데, 이 부인은 말은 그다지 잘 못하나 생활 그 자체가 진실하고 경건하였다.

 

그리하여 이 부인에게서 천주교의 이야기를 들어보았고, 이 부인을 따라서 천주교회를 구경하러 몇 번 나가 보았다. 몇 번 다녀보니 지금까지 천주교는 성모 마리아를 믿는 교요, 우상을 섬기는 교라고만 알았는데, 천주교에서도 하느님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리를 차차 연구해 보니까 지금까지 알지 못하였던 사실이 많이 드러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감리교의 신앙이 가장 정통적이요, 이것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예배당의 신앙은 단지 믿으면 된다는 막연한 신앙이었었다. 그러나 천주교의 여러 가지 교리와 규정은 구체적으로 되어 있고, 천주교의 신앙이란 어떻게 영혼과 육신이 그리스도와 합치될 수 있는 것이며, 이렇게만 한다면 반드시 구령하지 못할 리가 없겠다는 것을 알게 되자, 모든 체면 문제를 불구하고 천주교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이들과 남편도 차차 천주교에서 영세를 하고, 완전한 천주교의 신자 가정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일대 변화의 역사를 듣고 비판도, 비난도 하지 않았다. 자기의 신앙적인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만족을 얻지 못할 데를 떠나서, 만족할 만한 데를 찾아가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 신자가 만족을 얻지 못하고 다른 데로 전향하는 것은 그 본인이 나쁜 것이 아니라, 만족을 주지 못하는 교회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잘했다.’고 찬의를 표해 주었다.

나는 본래 자기의 교파를 고집하는 사상을 갖지 않은데다가, 일본에서 옥스퍼드 그룹에 관계하게 되자, 더욱이 초교파적 사상을 갖게 되었고, 프로테스탄트 사이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에도 차이를 두지 않으리만큼 관대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날 누님은 나에게도 천주교로 돌아오라고 권유하고 싶은 마음이 심중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원체 강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섣불리 건드리지 않고, 자기의 개종담을 이야기할 뿐, 나에게는 일언반구도 권유의 말을 하지 않은 채 서로 헤어지고 말았다.

 

 

3. 아내의 불치의 병

 

1937년, 내가 서울 배재중학교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이해 12월에 내 아내는 서울 명동에 있는 성모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해 8월에 아기를 조산하고 출혈이 심하여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고, 거기에 다른 병이 병발하여 4개월 만에 죽었다.

처음에는 병명도 몰라서 서울에 있는 유명한 의학박사는 다 불러다 뵈었다. 그래도 그저 특별한 병은 없고 감기라고만 하나, 매일 정기적으로 열은 오르고, 몸은 하루하루 기울어져 갔다. 나중에는 세브란스에 있는 이중철 박사가 치료보다도 병명을 찾기 위하여 입원을 시키라고 충고를 하였다. 병원에 입원시켜 놓고, 며칠 두고 자세히 진찰과 검사를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브란스에 입원을 시켰다. 입원한 지 사흘째 되는 날 학교로 전화가 왔다. 나는 곧 세브란스로 달려가 이 박사를 만났다. 이 박사는 내 얼굴을 정면으로 보기가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대단히 신중한 어조로 병의 정체는 알았는데 무슨 말을 하든지 놀라지 않겠는가 하는 것부터 따졌다. 나는 아직까지 무슨 병인지는 몰랐지만 죽을 것이라는 것은 이미 각오했으니, 무슨 말을 해도 좋다고 대답을 하였다.

병명은 속립결핵이라는 것인데, 이 병은 현대의 의학으로는 아직 치료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 병에 걸리면 대개 3개월 내지 6개월이면 죽는 것이니까, 이제는 집에 데려다 놓고 먹고 싶다는 것이나 먹이고 죽는 날이나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힘을 다하여 침착을 유지하였다.

 

의사는 환자에게는 자기가 말할 테니 같이 가자고 해서 같이 병실로 갔다. 환자는 의사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우리의 표정을 읽어 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무슨 언도가 내리는가 하고 초조한 얼굴로 의사의 말을 기다렸다. 의사는 환자 앞에 가서 “역시 별로 특별한 병은 없습니다. 안심하시고 댁에 가셔서 잘 안정하시고 치료하십시오. 무어 중한 병도 아닌데 병원에 입원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고 연극을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내 아내는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하게 좋아하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서있는 내 마음은 더 한층 아팠다. 가슴에서 무엇이 뭉클하고 올라오는 것 같았으나, 그렇다고 마음대로 표정에 나타낼 수도 없었다.

 

병원 식당에서 가벼운 식사를 한 접시 사 먹여 가지고, 차를 불러 태워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방에 들여다 눕혀 놓고, 옆에 앉아서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억제할 도리가 없었다.

아내는 내 손을 잡아당겨 꽉 쥐고 “울지 마세요. 나는 아까 의사가 말할 때 대강 눈치는 채었어요.” 이렇게 말하는 아내의 두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 내렸으나, 말하는 어조는 침착하였다. 죽음을 앞에 직면하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아내의 손을 꽉 쥔 채 기도를 올렸다.

 

“하느님 아버지시여! 여기에 누워 있는 당신의 여종의 생명은 당신의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을 내신 것도 당신이요, 인간에게 병을 있게 한 것도 당신이요, 의학을 내신 것도 당신입니다. 현대의 의학으로는 불치의 병이라고 하나, 인간의 지혜가 끊어져 모자랄 때 당신의 지혜가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고치지 못하는 병을, 당신의 권능으로는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시거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 주시옵소서!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의 뜻대로 하실 게 아니라, 이 영혼을 꼭 데려가시는 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아무 불평도 없이 바치겠나이다.

사람이 세상에 오고가는 것이 다 당신의 뜻이거늘 이 생명이 죽든지 살든지 완전히 당신에게 맡기겠나이다. 그러나!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의 뜻이라면! 이 생명을 당신의 권능으로 살려 주시옵소서!”

 

나는 나의 일생에서 이보다 더 진정한 기도를 전에도 후에도 올려 본 적이 없다. 슬퍼해 보았댔자, 허둥지둥해 보았댔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신앙이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때에 하느님에게 의지하고 맡기고 사람으로서의 최선을 다하는 길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은 가벼웠고 아내도 안심하는 얼굴로 자기의 운명을 대하였다.

나는 이 사실을 고향인 원산에다 편지로 알렸다. 며칠 있다가 누님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 내용은 ‘덕원에 있는 천주교 수도원에 병원이 있는데, 거기 있는 독일 의사가 대단히 용해서 폐병을 많이 고쳤을 뿐만 아니라, 이 수도원 병원에만 데려다 놓으면 만일에 죽는다 하더라도, 그 영혼만은 꼭 구하게 될 것이니 하루속히 데리고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형님에게서도 ‘객지에서 혼자 고생하지 말고 환자를 데리고 내려오라.’는 편지가 왔다.

 

그러나 하루하루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병세라, 이때는 벌써 몸이 너무 약해져서 맘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었다.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사실로 내려가지 못한다고 편지를 했더니, 며칠 있다가 누님이 서울로 달려올라 왔다. 객지에서 혼자서 외롭게 고생하고 있는데, 누님이 올라와 준 것은 대단히 반가웠다.

그러나 현대의 의학으로는 고칠 도리가 없어, 의학박사가 백 명이 있어도 할 수가 없는데 제가 올라오면 어쩌려고 올라왔는가? 그러나 누님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사랑하는 동생의 아내의 영혼을 구하겠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이때부터 나에게 대한 가톨릭의 공세는 시작된 것이라 할 수가 있다.

 

 

4. 영혼의 공략전

 

그날 밤 나는 누님을 별실로 데리고 가서 지금까지의 경과를 대략 말하였다. 누님은 이야기를 다 듣고서는 그 이튿날 아침에 아무 말도 없이 시내에 좀 나갔다 온다고 하고는 나가 버렸다. 아침에 나간 사람이 하루 종일 들어오지를 않았다. 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촌사람이 처음으로 서울에 왔다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거리를 구경하며 사고 싶은 것을 사고 돌아다니고 있는 것인가? 앓는 사람을 보러 온 사람이 병자의 간호는 조금도 해주지 않고 자기의 볼일만 보며 돌아다니는 것이 괘씸한 생각까지 났다. 누님은 저녁에 해가 다 져서야 돌아왔다.

 

어디를 종일 가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앓는 이를 두고 종일 나가 있어서 미안하오. 그러나 동생! 사람의 영혼이 육신보다 더 중하지 않소? 이번 일만은 내 말을 들어주오. 원혜 엄마의 영혼 문제는 내게 맡겨 주오. 나는 오늘 천주교회에 가서 신부님과 수녀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원혜 엄마 이야기를 하고 그 영혼 구할 방법을 의논하고 왔소. 동생의 신앙이 좋고 원혜 엄마의 신앙이 좋은 것은 알지만 그래도 더 튼튼히 하기 위해서 죽기 전에 천주교의 세례를 받을 것을 허락하겠소? 죽을 사람이라도 세례를 받고 살아나는 수도 있소. 그러나 그런 것을 바란다는 것보다 육신이 이미 죽을 각오를 한 바이니 그 영혼이라도 안전히 구하자는 것이오.” 하고 변명 겸 설명을 하였다.

즉, 천주교회를 찾아가서 신부와 수녀를 만나서 앓는 이의 영혼 문제를 의논하고 왔다는 것이었다. 촌에서 서울에 처음 온 사람이, 더욱이나 여자의 몸으로, 북아현동에 있는 우리 집을 나와서 사람에게 묻고 물어서 명동에 있는 뽀족당을 찾아갔던 것이라나!

 

나는 내 자신은 천주교를 믿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으나, 본래 교파를 구별하거나 자기 교파를 특히 고집하지도 않는 생각이었고, 또 죽어서 영혼 구한다는 데야 반대할 필요가 있는가? 병에도 이롭다면 양약도 쓰고 한약도 쓰듯이, 영혼 문제에 있어서도 좋다는 방법이면 다 하는 것이 좋지, 특별히 반대할 필요도 없었다.

“본인에게 이야기해서 본인이 원한다면 나는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둘이서 병실에 들어가 본인에게 이런 말을 하였더니, 아내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승낙하였다. 그랬더니 그 이튿날 누님은 다시 나가서 수녀님을 모시고 왔다. 이날부터 수녀님은 거의 매일같이 와서 영혼의 준비를 시키는 모양이었다.

 

그것까지는 좋았으나 내 아내의 영혼을 점령한 누님은 이제는 공격의 총부리를 나에게로 돌리기 시작하였다. 밤마다 저녁을 먹으면 천주교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이론을 따지기로 한다면 내가 질 리가 없었다.

누님이 “예수님께서 교회를 단 하나만 세우셨으니까 어느 것이 참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인지 알아가지고 그 안으로 들어와야지 구령할 수 있다.”고 하면 나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당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성부의 뜻을 준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경 어디에 천주교에 들어가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였습니까? 천주교에 다니든지, 감리교에 다니든지, 주님의 뜻을 준행하느냐, 못하느냐가 문제될 것입니다. 누님! 제 걱정은 마십시오, 저는 제 방법으로 나가도 천당에 갈 길이 확실히 보이니 누님은 천주교회로 해서 가고 나는 내 길로 가서 우리 천당에 가서 만납시다.” 하고 말하였다.

 

이러한 토론을, 며칠 동안 저녁만 먹으면 둘이서 하는 것이었다. 누님은 몹시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싸워도 도저히 나를 설복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이 이상 이론 싸움을 하는 것은 무익한 일인 줄 알고는 단념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내가 권할 만큼 권했으니 내가 할 본분은 다했소. 이제 동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천주께서 하실 일이니까 나는 이 이상 말을 안 하겠소.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동생을 위하여 기도를 하겠소. 동생은 마음이 착하고 또 신앙이 좋으니까 천주께서 절대로 버리시지 않을 것이오. 언제든지 천주교회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나는 믿소.”

 

며칠 동안 동생을 천주교회로 전향시키려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상경한 첫째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밑질 것은 없었다. 불치의 병에 걸려서 세상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내 아내의 영혼을 구하려는 것이 그 첫째 목적이었으므로, 이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만반의 준비를 다 해 놓았으니, 자기의 상경한 목적은 달했다.

그러나 일이라는 것은 다 잘 되었다가도 조그마한 차이로 마지막에 가서 틀어지는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부탁을 하였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니 꼭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병세가 위험해서 임종하게 될 것 같으면 성모병원에 입원을 시키라.’는 것이었다.

내 생각에는 그것쯤이야 중요할 것도 없고 문제될 것도 없기 때문에 즉석에서 선뜻 승낙하였다. 이왕에 죽는 사람인데 아무 병원에 입원을 시키든지 나에게는 아무 영향도 없었다. 그러나 누님에게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무슨 중요한 뜻이 있는 것 같았다.

 

 

5. 성모병원의 인상

 

아내의 병세는 갑자기 악화되었다. 하루는 고통이 심해지고 금세 운명을 할 것 같이 보였다. 마침내 올 때가 온 모양이었다. 자동차를 불러서 태워가지고, 아니 태운다느니 보다는 실어가지고 누님의 부탁한 대로 성모병원에 데리고 갔다. 성모병원에 도착하니 다 죽어가는 병자임에도 불구하고 반가이 받아들였다.

보통 다른 병원 같으면 살아날 희망이 없이 죽어가는 사람은 안 받는 것이 예사이지만, 이 성모병원에서는 죽어가는 사람이라도 정성껏 받아들여 주었다. 아니 죽을 사람이기 때문에 더 반가이 받아주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조용한 입원실을 하나 마련해 주었고, 원장 박병래 씨가 조수 의사 한 분을 데리고 들어와서 극히 세밀한 진찰을 다시 한 번 하였다. 며칠 못 갈 것은 확실하였으나 아직 의식은 똑똑하였다. 수녀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더니 신부님을 모시고 들어왔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영세를 줄 준비를 하였다. 그 동안에 수녀가 여러 번 집에 내왕하면서 마음의 준비는 다 시켜 놓았던 터이라, 아무 때나 영세만 하면 되게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천주교에서 세례 주는 예절을 나는 처음 보았다. 촛불을 켜놓고 기름을 바르고 물로 씻고 하는 복잡한 예절이, 아마 10분은 걸린 것 같았다. ‘루치아’라는 이름을 하나 새로 받았다. 그리고는 나에게 모두 축하의 인사를 하였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축하를 한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하여튼 이제와 보니 이것이 다 누님이 다니면서 수녀님과 신부님에게 사전에 연락을 해놓았던 것이 분명하였고, 성모병원에 입원시키라던 이유도 알았다. 하여튼 이제 내 아내는 완전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입원한 지 이튿날, 환자는 뇌막염이 생겨서 의식이 없어졌다. 죽는 것은 이미 시간문제요, 의식이 없으니 고통도 느낄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의사들은 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치료해 주었다. 시간마다 척추에서 척수액을 뽑아내었다.

옆에서 보다가 오히려 미안해서 “이제 형세는 다 기울어졌고 죽는 것은 시간문제인데, 무엇하러 그렇게 치료를 해 주십니까? 그냥 내버려 두고 죽을 시간이나 기다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렸다.

그러나 의사는 “아닙니다. 사람의 생명은 천주께서 다스리십니다. 이제라도 천주께서 생명을 구해 주실지 누가 압니까? 우리 의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하고 역시 척수액을 뽑았다. 이런 의사의 태도는 성모병원에서만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고, 나는 이 말을 듣고 자연히 마음으로 머리를 숙였다.

 

간호사와 수녀들도 자주 번갈아 들어와 돌보아 주었다. 침대를 다시 보아 주고 침대보를 갈아 주고, 오래 누워 있어서 엉덩이 피부가 벗겨진 것을 보고는 “아이 가엾어라! 얼마나 아플까!” 하고 고무에다 바람을 넣은 둥그런 방석 같은 것을 가져다 받쳐 주었다.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의식이 없는 사람이 아픈 줄이나 알겠습니까?” 하고 나는 만류하였으나 “말은 못하지만 얼마나 아프겠어요?” 하고 자기의 몸이 아픈 듯한 표정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따금 침대의 이불을 들쳐 보면 더러운 것이 나와 있곤 하였다. 이것을 간호사가 보면 간호사가 꾸려가지고 나가고, 수녀님이 보면 수녀님이 꾸려가지고 나가곤 하였다. 자기의 친어머니라도 하기 어려운 일을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고 하는 그 모양은 참으로 성스러웠다.

 

드디어 임종의 날이 왔다. 입원한 지 나흘째가 되는 날 저녁이었다. 당직 의사의 말이, 암만해도 오늘밤을 넘기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서 임종을 하게 될 때에는, 신부님이 들어오시고 병원 안에 있는 직원으로서 손이 비어 있는 사람은 다 들어왔다.

당직 의사 두 분이 다 들어와서 침대 양쪽에 앉아서 양쪽 손목을 하나씩 쥐고 맥을 짚고 있었고, 수녀들, 간호사들도 많이 들어와서 앉을 데 있는 이는 앉고, 없는 이는 서 있었다. 신부님은 임종하는 이 머리맡에 앉아서 떠나려는 영혼에게 주의를 시켜 주셨다.

“루치아, 지금 당신의 영혼은 이 괴로움 많은 세상을 떠나서 예수님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마귀는 지금 최후로 당신의 영혼을 빼앗아 가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때야말로 예수 마리아를 단단히 붙잡아야 합니다. 자, 내가 하는 대로 받아 하세요. ‘예수 마리아여! 내 영혼을 구하소서!’”

루치아는 의식이 없는 것 같았는데, 이 말을 다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예수 마리아여! 내 영혼을 구하소서!’ 하고 몇 번 받아 외웠다. 몇 번 받아 외우고는 혀가 안 돌아가는지 의식을 잃었는지 잠잠하였다.

신부님은 다시 귀에다 입을 대고 “이제 입으로 외우지 못하겠으면 내가 대신 외울 테니 생각을 예수 마리아에게서 떼지 말고 꼭 예수 마리아만 의지해야 합니다.” 하고 ‘예수 마리아! 예수 마리아!’ 하고 쉬지 않고 계속해서 외우고 있었다.

두 의사는 여전히 양쪽 손의 맥을 짚고 있었다. 방안에 있는 이들은 이야기 한 마디 없이 마른침만 삼키고 있었다. 얼마 후에 의사는 맥이 끊어진 것을 보고하였다. 아직도 가래는 끓고 가쁜 숨은 계속되었다. 신부님은 여전히 ‘예수 마리아!’를 외우고 있었다.

 

이 광경을 옆에서 보고 있는 나는 거의 무감각 상태로 어떤 비판이나 감탄도 할 여유도 없었다. 단지 아직 영혼이 떠나지 않았으니 내 아내는 아직 이 세상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가쁘게 쉬던 숨마저 끊어지고 말았다.

“이제 영혼은 떠났습니다.”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성당을 향해 돌아서 무릎을 꿇었다. 방안에 있던 이들도 일제히 같은 방향을 향해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소리를 내어 다 같이 기도를 올렸다.

 

일제히 외우는 기도문의 내용은 ‘이제 루치아의 영혼이 육신을 막 떠났으니 도중에서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게 천사들을 보내서 잘 호위하여 천주님 앞에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기도문을 모르니 옆에 서서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기도문의 말을 따라서 하지는 못하지만, 나도 마음만은 간절히 그들의 의향과 합하노라고 하였다. 이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은 엄숙, 경건, 진실 그것이었다. 천주를 눈앞에 대면하고 간절히 애원하는 표정이었다.

 

아! 아내는 죽었구나! 이제는 이 세상에는 없구나! 조금 전까지 숨이 붙어 있을 때에는 그래도 이 방안에 있겠거니 하였으나 이제는 정말로 죽었구나!

아내는 죽었다. 이것은 눈앞에 나타난 뚜렷한 사실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사실같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가슴이 갑갑하고 앞이 아뜩해지고 다리에 힘이 없어지는 것 같았으나, 이 실내의 장면이 너무나 엄숙하였기 때문에 슬픔이 침범할 여유가 없었다.

 

이같이 아내 루치아의 영혼은 성대한 환송 속에 천당을 향해서 훨훨 날아올라 갔을 것이다. 모르기는 하지만 세상에 이렇게 행복스러운 환경 속에서 세상을 떠나는 영혼도 그다지 많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병실을 나갈 때 황 베네딕다 수녀님은 내 앞에 오셔서 내가 당황하지 않고 끝까지 침착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감탄하였다. 그러고 나서는 “부인께서는 이제 천당에 가셨습니다. 선생님도 부인의 뒤를 따르셔야지요.” 하였다. 나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았고 또 아직은 내가 꼭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지만 그저 “예.” 하고 대답하였다.

 

나는 지금도 성모병원을 생각하면 그때 정성껏 수고해 주신 몇몇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이미 죽을 사람인 줄 알면서도 받아들여서 자세히 진찰을 다시 하고 끝까지 치료해 주던 원장 박병래 씨,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세례성사와 병자성사를 주고 임종을 시켜 주신, 키가 자그마한 노인 이 신부님, 당직 의사로 수고하시고 임종 때 침대 양쪽에 앉아서 맥이 끊어질 때까지 손목을 짚고 있던 최상선 씨와 또 한 분 의사(이분은 이름을 기억할 수가 없다), 어머니처럼 인자하게 돌보아 주시던 황 베네딕다 수녀님, 장례에 모든 일을 주선해 주시고 광나루 장지까지 같이 가셔서 희생적으로 일을 보아 주신 이근용 회장님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회장님은 장지에서 장례가 끝난 다음에 점심을 대접하려고 하였으나 한사코 거절하고 몇 사람의 교우하고 그냥 도망가듯이 돌아가 버렸다. 사람에게 대접을 받으면 천주께 받을 상급이 줄어들까봐 그러셨는지 천주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만이 목적인 듯싶었다.

‘너희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자선을 베풀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궁행하시는 분이었다. 밖에도 여러 간호사들과 수녀님들, 이런 분들은 나의 일생 동안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성모병원에 며칠 있는 동안에 가톨릭은 모든 사업의 근본 목적이 인간 구령이라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구원이라는 것을 내세우기는 하지만 교회 자체나, 부수 사회사업도 한 사람의 영혼을 안타깝게 구하겠다는 것보다는 사회적인 성과 내지는 통계적 숫자에 치중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서 가톨릭에서는 한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 전력을 기울인다는 데에 그 차이를 발견하였고, 따라서 성모병원에서도 병을 고치는 것은 물론이지만, 희망이 없어 보일 때는 때를 놓치지 않고 영혼을 구하려고 노력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환자가 권유를 듣고 세례를 받고 죽는다면 그 이상 기쁜 일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였다. 이야말로 한 마리의 잃었던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일 것이다. 이 같은 성모병원에서 받은 가톨릭에 대한 강력한 인상은 가톨릭에 대한 나의 관심을 증가시켰고, 그 후에 내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되는 데에 원동력이 되었다.

 

 

6. 죽은 이를 위한 기도

 

(1) 연미사 (레퀴엠)

누님은 죽은 이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니만큼 장례식도 천주교 예식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나는 다른 방안도 별로 없었고 특별히 반대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모든 문제를 누님에게 일임해 버렸다.

천주교의 장례식은 미사가 주요 부분이고, 미사는 새벽에 드리는 것이라 하여 고별식은 새벽 여섯 시로 정해졌다. 12월의 여섯 시면 물론 캄캄하였다. 그대로 부고는 보냈지만 이 같은 새벽에 손님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의외에도 배재중학교의 직원들과 우리 반 학생들이, 학기 시험 중임에도 불구하고 가득 와 주어서 친구들을 놀라게 하였다. 남자학교에서는 이런 일에 학생이 오는 일이 없다. 있다고 해도 반의 대표가 한두 사람 오는 법인데, 더욱이 겨울 새벽에 이렇게 다수의 학생들이 나왔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현상이라고 하며 나의 친구들은 감탄하였다.

 

나는 천주교의 미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성당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갔다. 바깥은 고요한 암흑에 싸였고, 성당 안은 넓고 높아서 나의 존재를 더 조그맣게 만들어 주었다. 성당 전면에는 검은 막을 둘러쳤고, 그 막에는 눈물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성당 중앙 바닥에는 관을 들여놓았는데, 그 관 위에는 흰 십자가를 크게 그린 검은 포장을 덮어 놓았고 그 주위에는 촛대가 쭉 서 있었다.

미사는 일 분도 에누리 없이 정각 여섯 시에 시작되었다. 제대에 촛불이 켜지고 신부가 검은 제의를 입고 제대 앞에 나와 서자, 뒤쪽의 이층 성가대석에서 소위 ‘레퀴엠’이 울려 나왔다.

때는 캄캄한 새벽이고 장엄한 성당 안에 눈물을 그린 검은 막을 벽에 둘러치고 관을 성당 중앙에 들여 놓았으니, 그 분위기만 해도 사람의 슬픈 감정을 자아내게 되어 있는데, 거기에다가 레퀴엠의 단조로우면서도 애상적인 멜로디가 마치 천상에서 들려오듯이 이층에서 울려 나와, 그러지 않아도 비애에 잠겨 있는 사람의 마음을 울려 주었다.

 

가톨릭에 그레고리안 성가라고 하는 특수한 음악이 있다는 것은 들어 왔으나 실제로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특히 ‘키리에 엘레이손’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데, 마치 천주께 매달려 애원하는 듯하였다.

연미사는 죽은 이를 위하여 드리는 제사이다. 죽은 이의 영혼은 대개 연옥에 가기 때문에 그 연옥에 간 영혼을 속히 천당에 올려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한다. 만일에 그 영혼이 연옥에 가지 않고 천당에 갈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경우에는 미사는 무효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공효(功效 : 공을 들인 보람이나 효과)는 연옥에 있는 다른 불쌍한 영혼이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나 일반 사회의 장례식이나 고별식에서는 의례 죽은 이의 생전 공적을 찬양한다든가, 마음이 착했으니 천당에 갔다고 하여 살아 있는 가족을 위로하는 것이 주요한 일이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이렇게 사람의 말을 좋게 한다는 것은 고려하지 않는 것 같았다. 순전히 망자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만이 전부였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연옥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고 따라서 죽은 이를 위한 기도는 하지를 않는다.

 

(2) 연도

연미사가 끝나니까 날은 밝아오기 시작하였다. 장지는 광나루에 있는 천주교 묘지로 정하고 조반 후에 이근용 회장님의 지휘 하에 교우들이 상여를 메고 그리로 모시게 되었다. 우리는 따로 가기로 하고 부근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동대문에서 자동차를 타고 묘지로 향하였다.

묘지에서도 여러 가지 경문을 보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연도라는 것을 하였는데, 나는 이 연도가 참 좋은 기도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처음에는 천주의 성삼위를 차례로 부르며 망자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를 하고, 다음에는 성모 마리아를 비롯해서 수많은 성인성녀의 이름을 모조리 불러가면서 망자를 위해서 천주께 전구해 달라고 하는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죽은 이를 위해서 기도를 하는데 이 이상 더 간절히, 더 주도면밀(周到綿密 : 주의(注意)가 두루 미쳐 자세하고 빈틈이 없음)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만큼만 하면 웬만큼 죄가 있더라도 천주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시고 연옥에 들어간 영혼을 천당으로 끌어올려 주실 것만 같았다.

 

(3) 추사이망(追思已亡)

천주교에서는 달마다 특별히 심신을 바치는 목표가 정해져 있는데 11월은 위령성월이라고 해서 연옥에 가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달이다. 11월 1일은 ‘모든 성인의 날’이고 11월 2일은 특히 ‘추사이망(위령의 날)’이라고 해서 묘지에 신부님까지 동원하여 예절을 행하고 모든 죽은 이를 위하여 공동으로 기도하는 관습이 있다.

나는 물론 이런 것을 알았을 리가 없지만, 이때가 가까워 오면 매년 성모병원 원장 박병래 씨한테서 편지가 왔다. 이런 사유를 설명하고 교우들과 같이 참묘하도록 권유하는 편지였다. 나는 따라가 보았다. 신자들이 많이 모였었다. 적어도 묘지에 가족이 묻힌 사람은 다 모이는 모양이었다.

공동으로 신부님께서 주례하는 예절을 행하고 나면, 개인별로 헤어져서 자기와 관련 있는 무덤 앞에 가서 연도를 올렸다. 자기의 기도를 다 올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무덤에 가서 같이 기도를 해 주었다. 모두가 아름다운 습관이다.

 

 

<묘지에서 생긴 이야기 한 토막>

 

나는 몇 사람의 신자들과 대원군 시대의 순교 이야기를 하다가 이 회장님 보고 “지금도 천주교 신자들은 순교를 할 기회가 있으면 할 수가 있을까요?” 하고 물어보았다. 이 회장은 서슴지 않고 “그럼, 하고말고요. 예수님을 위해서 치명하면 바로 천당으로 직행인데 그걸 안 해요?” 하고 마치 천당이 눈앞에 보이는 듯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대답하였다.

천주교의 교리에 의하면 천주를 사랑하는데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순교하면 연옥에도 안 들르고 직접 천당에 간다고 한다. 아! 얼마나 강한 신앙이며, 또 얼마나 구체적인 신앙인가!

 

나는 이러는 동안에 가톨릭은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 최대 유일한 목적이고, 또 사람은 가톨릭을 통하면 의심 없이 구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이 박히기 시작했고, 가톨릭 신자들의 생활을 볼 때에 그 생활이 부러웠다.

그리고 학교 직원실에서 이따금 누가 가톨릭에 대한 비난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것은 가톨릭의 내용을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요.” 하고 가톨릭의 내용을 아는 대로 설명하고 가톨릭을 변호하곤 하였다.

그래서 직원실에서는 내가 가톨릭 신자인줄 아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가톨릭의 생활은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교리 상으로는 내 이성이 긍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일이 되면 여전히 예배당으로 가서 예배를 보았다.

 

 

7. 누를 수 없는 신앙의 불길

 

나를 가톨릭으로 전향시키려다가 실패한 누님은 마지막으로 “나는 권하리만큼 권했으니까 이제는 내 힘으로는 이 이상 할 수가 없소. 나는 이제는 천주께만 기도하겠소.” 하고 단념할 적에 누님의 얼굴에서 몹시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누님의 태도는 단순히 종파를 위한 이론 투쟁을 즐겨서가 아니라, 충심으로 나의 구령 문제를 생각해서 진심으로 설명하노라고 한 것은 나도 이해하였다. 자기는 진정한 종교를 바로 찾았고 안전한 구령길을 바로 들어섰는데, 이러고 보니 아직도 이 길을 모르고 있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안타까웠다.

 

그 중에서도 이미 환갑을 넘고 벌써 여러 해째 신병으로 자리에 누워 계신 어머니, 이 어머니의 영혼을 생각할 때에는 자연히 마음에 조바심이 났다. 그러나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큰오빠는 예배당에서 중요한 간부요, 게다가 성격이 매우 엄해서 좀처럼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보통 다른 가정에서는 형제가 친구처럼 지내는 가정도 있고, 더욱이나 오빠와 누이동생 사이는 특히 다정한 집도 많지만 우리네 집안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큰형이 아버지 대신으로 집안을 다스렸기 때문에 우리 동생들에게는 아버지보다도 더 어렵고 무서웠다.

 

누님은 어떻게 하면 이 집안을 정복하여 바른 구령길로 인도할 수 있을까 하는 거룩한 야심을 품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공격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 큰형이 없는 틈을 타서 어머니와 형수하고는 틈틈이 이야기를 해보았더니 찬성은 하였으나 ‘우리 집 저 호랑이 때문에 좀 어렵다.’는 것이었다.

‘큰 오라버니만 돌아서면 온 집안이 한꺼번에 다 들어올 수가 있겠는데!’ 하고 누님은 속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큰형은 정면 공격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형수를 시켜서 측면 공격을 해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예상하였던 바와 같았다.

 

큰형은 노발대발하면서 ‘천주교는 우상을 섬기는 교요, 늙은이나 무식한 부녀자나 믿는 것이라.’고 하면서 야단을 쳤다. 뿐만 아니라 누님보고는 ‘너는 천주교가 좋아서 갔으면 너나 다녔지 왜 난데없이 다니며 남의 종교에까지 방해를 하느냐? 그러려면 아예 다시는 우리 집에 다니지도 마라.’ 하면서 야단을 하여서, 결국 누님은 친정집에도 못 다니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누님은 친정집에 정문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고 뒷문으로나 가만가만 출입을 하였다. 누님은 이럴수록 용기가 더 생겨서 일종의 순교정신을 느껴 가면서 더 열심히 다녔다. 그래서 어머니와 형수, 이 두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고야 말았다.

틈틈이 가만가만히 다니며 교리를 설명하고 성인성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공과(聖敎功課 : 1862년 목판으로 인쇄되어 1969년 「가톨릭기도서」가 나오기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기도서로 사용되던 책)책과 교리문답을 갖다 주어 비밀리에 교리공부와 신공(神功 : 기도와 선공(善功)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바치게 하고, 때로는 뒷문으로 수녀까지 드나들게 되었다.

 

이 눈치를 안 오라버니는 또 공과책과 천주교에 관한 서적을 몰수하여 찢어서 아궁이에 넣어버렸다.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는 큰형의 태도는 단순히 마음이 완악해서 종교를 박해하려고 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체면 문제가 더 컸었다.

그렇지 않아도 누이동생이 전향하였을 때 예배당에서, 그렇게 열심히 하던 사람이 천주교로 넘어갔다고 해서 목사와 전도부인, 그 밖에 특히 여자 간부들이 비난을 하던 차요, 그때만 해도 누이는 출가외인이라 자기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다는 변명이 다소 서는 것 같았으나, 이번에는 자기의 아내와 어머니까지 천주교로 또 넘어간다면 가장으로서의 위신이 없어진다는 심리가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기실 누님이 천주교로 전향하자 그 예배당에서는 큰 파문이 일어났다. 자기네들에게 아무 이해관계도 없건만, 또 공격할 만한 교리상의 논거도 없이 공연히 비난을 하였다. 변덕이 많다는 둥, 교를 믿으면 한 가지를 꾸준히 믿어야지 여기 저기 왔다 갔다 하면 못쓴다는 둥, 마귀 유혹에 빠졌다는 둥, 여러 가지 말이 많았다.

그래서 큰형은 어떻게 해서라도 어머니와 형수에게는 이 병균이 감염 못하도록 극력 방비를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강력히 탄압 정책을 썼던 것이다. 그러나 외부적 압력으로는 마음 속의 자유를 꺾을 수가 없었다. 이래도 안 듣고 저래도 안 들으니 큰형은 화가 날대로 났다. 그래서 나중에는 (형수에게) ‘남편의 말을 안 들으면 이혼을 한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즉, 하루는 예배당의 목사와 전도부인을 집에 불러다 놓고 이혼 재판을 열게 되었다.

 

“목사님은 신자들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니, 오늘은 목사님을 모시고 우리 가정의 신앙 문제를 해결하렵니다.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제 누이동생이 천주교로 넘어가 우리 집에 와서 자꾸 선전을 해서, 저의 처도 천주교로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제가 한사코 말려도 도무지 듣지를 않으니 한 집에 신앙이 두 가지가 있어 가지고는 어려우니 이혼을 하려고 합니다.”

어째서 오라고 했는지 알지도 못하고 왔다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니 목사도 입장이 곤란하였다. 이혼을 하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요, 그렇다고 해서 천주교로 넘어가게 내버려 두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요, 그저 “너무 흥분하실 것 없이 서로 잘 생각하셔서 적당히 해결을 하시지요.” 하고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형수는 이 꼴을 당하고 보니 집안 일이 창피하기도 하고 남편이 하는 짓이 우습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정사에 있어서 신앙 문제 이외의 일에는 남편에게 극히 공손히 순종하였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억압을 하였으나 마음 속의 신앙은 누를 수가 없었다. 누를 때는 눌리는 것 같지만 놓으면 고무공과 마찬가지로 다시 일어나고 하였다. 마음 속에서 타오르는 참 신앙의 불길은 끄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힘 있게 타오르는 것이다.

 

 

8. 어머니의 영세

 

나는 그 후에 개성의 송도중학교로 전근을 하였다. 어느날 아침에는 고향에서 전보가 왔는데 펼쳐보니 ‘모친별세’라는 내용이었다. 아무 때고 이때가 오리라고는 각오하고 있었지만, 막상 실지로 전문을 받아드니 앞이 아뜩해졌다. 나는 전보를 아내에게 주며 학교에 잠깐 다녀올 테니 고향에 내려갈 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급히 고향인 원산으로 내려갔다. 나는 어머니의 시체를 붙잡고 실컷 울었다. 나는 아버지가 어려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는 얼굴도 모른다. 부모라고는 어머니밖에 모른다. 더욱이나 나는 막내아들이기 때문에 특별히 사랑해 주시던 어머니였다.

어려서는 철이 없어서 어머니의 속도 태웠지만 자라서는 어머니에게 효도를 하겠다고 하였던 것이, 일본서 대학을 마치고 나와서는 취직하여 객지로만 나가 다니느라고 어머니를 따뜻이 모시지도 못하였다.

 

아! 나무가 가만히 있으려고 하여도 바람이 멎지 않고, 부모에게 효도를 하려고 하여도 부모가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는구나!

‘천주님의 은혜와 성모님의 은혜로 어머니께서는 영세, 견진, 병자성사를 다 받으시고 돌아가셨다.’는 것이 누님의 첫 보고였다. 그리고는 아주 좋아하였다. 슬픈 중에서도 기뻐하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는데 기뻐한다는 것은 천주교의 신자만이 가질 수 있는 심정일 것이다. 그 경과는 대략 이러하였다.

 

누님은 큰형 모르게 뒷문으로 가만가만히 자주 드나들면서, 어머니에게 중요한 교리를 다 가르쳐 드렸다. 이제는 영세를 하시도록 해야겠는데 그 기회를 얻는 것이 문제였다. 교리라고 해야 어머니는 원래 신심이 좋으신 대다가, 수족을 못 쓰시고 누워 계시니까 항상 성경을 읽으셨기 때문에 기독교의 근본 교리는 아시니 천주교의 차이점만 이해시켜 드리면 되는 것이었다.

이제 영세를 하시려면 신부님을 만나야 할 텐데, 몸을 움직이지 못하니까 신부님한테 갈 수는 없고 신부님이 오시지 않으며 안 될 판인데 큰형 모르게 신부님을 집으로 모셔 온다는 것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큰형이 어디 여행이라도 갔으며 하고 기다려 보아도 요새 따라 여행도 가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서 이제는 어머니를 큰형 집에서 모셔 내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였다. 어머니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결과 어머니를 다만 며칠 동안이라도 자기 집으로 와 계시도록 하자고 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어머니가 큰형더러 “요새는 어째 신경이 좀 약해졌는지 잠도 안 오고 낮에는 아이들이 어찌 떠드는지 도무지 눈도 붙일 수가 없다. 며칠 동안 딸네 집에 가서 약도 좀 달여 먹고 쉬다가 왔으면 좋겠다.”고 말을 하였다. 형은 배후의 비밀 계획은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라고 쉽게 승낙을 하였다.

그래서 ‘이제는 됐구나’ 하고 리어카에다가 어머니를 모시고 자기 집 아랫목에다 모셔놓으니, 오랫동안의 숙망을 달했던 차라 여간 기쁘지 않았다. 때를 미루지 않고 그날로 신부님을 모셔왔다.

신부님도(원산본당 탁 신부) 어머님에 대해서는 누님에게서 처음부터 일일이 보고를 듣고, 또 간접으로 지도해 왔기 때문에 그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영세할 기회가 온 것을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영세 예절을 행할 때에는 안전지대에 온지라 마음 놓고 소리를 내서 경문을 읽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덕원에서 주교님이 나오셔서 성당에서 견진성사를 주시게 되어, 리어카를 타고 가서 견진성사까지 받게 되었다 한다. 참으로 천주의 특별한 섭리인 모양이었다.

이래놓고 보니 이제는 완전한 천주교회의 지체가 되었다. 이제는 그렇게 바라던 성체를 영할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미사에는 몸이 부자유하기 때문에 참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님은 또다시 신부에게 가서 간청을 해가지고 성체를 모시고 와서 영해 주시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누님 집에 계시는 동안은 매일 신부님이 성체를 모시고 와서 영해 주셨다.

 

어머님 자신도 대단히 기뻐하셨다. 60여 년 한평생을 신앙생활을 해오노라고 했으나, 이제까지의 생활은 참교회의 문턱을 채 넘지 못한 듯했는데, 이제 진정한 교회인 천주교회, 즉 예수께서 창설하시고 베드로 이하의 사도로 전해 내려오는, 거룩하고 보편된 유일한 교회로 바로 찾아들어와 놓고 보니, 이제는 천당행의 크고도 안전한 방주에 몸을 실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예배당에 있을 때는 알지도 못하던 보화를 많이 발견하였다. 견진성사라는 것은 예배당에서는 알지도 못하였다. 성경에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내려가서 그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였다. 그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그들 가운데 아직 아무에게도 성령께서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사도 8,14-17) 하는 말씀이 있는데 이 성사를 천주교회에서는 여전히 전승하여 행하고 있는 것이다.

 

성체성사도 예배당에는 없다. 예배당에서는 소위 성만찬이라고 해서 일 년에 한 번 정도로 빵과 포도주를 먹는 일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이지 예수의 성체는 아니다. 그러나 천주교의 성체성사는 단순히 기념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빵과 포도주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성하신 후에 ‘너희는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하셨을 때, 참말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 것처럼, 미사성제 중 예수의 성체로 변한 것을 받아먹는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4.56) 하신 예수의 말씀대로 예수의 성체를 참말로 먹는 것이니 내 몸은 예수의 몸과 일체가 된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 세상을 떠날 날이 며칠 안 남았는데, 이같이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바른 양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고, 예수의 한 지체가 되었으니, 이제는 아무 때 죽어도 걱정이 없고 천당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고, 예수님 앞에 나가서 누릴 영광이 이미 몸에 느껴지는 것 같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 후에도 누님 집에 계시면서 밤이고 낮이고 마음대로 기도를 드릴 수가 있었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마음껏 즐길 수가 있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침에는 깨어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지난 밤에는 참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하늘에서 구름 사이에 하얀 노인이 나타나셔서 나를 반겨주시는 꿈을 꾸었는데, 암만 해도 이 세상을 떠날 꿈인 것 같으니, 오늘은 물을 데워서 몸을 깨끗이 씻고 병자성사를 받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반을 잡수신 후에 대야에다 더운 물을 떠다 드리고 일으켜 드렸더니, 앉아서 세수를 하시려고 의치를 뽑아서 씻으시더니 “얘, 어지럽다. 나를 좀 도로 눕혀 다오.” 하시면서 쓰러지려고 하시기에, 받아 눕혀 드리고 나서 암만해도 이상해서 사람을 시켜서 신부님을 모셔왔다.

신부님이 오셔서 병자성사를 주신 후에 곧 큰형 댁에 아이들을 시켜서 어머니가 위급하시다고 했더니, 큰형이 달려와서 어머니를 업고서 집으로 모시고 갔다. 집에 가서 얼마 있다가 그날로 임종을 하셨다는 것이다. 아! 얼마나 순조롭고 행복스러운 임종이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예배당에서는 목사, 전도부인을 위시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머니는 천주교의 영세를 하고 견진성사를 받고 병자성사까지 받고 돌아가셨으니, 이보다 더 완전한 천주교회의 신자가 또 어디 있으랴?

그러나 큰형은 이러한 사실을 전연 알 리가 없고, 또 알았다가는 큰일 날 일이니, 섣불리 장례식을 천주교의 예식으로 하겠다는 말을, 누님은 할 수가 없었고 또 할 필요도 없었다. 시체의 장례식이야 아무 식으로 하든지 이미 그 육신을 떠난 영혼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도 없는 것이 아니랴?

 

그렇게 걱정하던 어머니! 자기가 모시고 있지 못하고 오라버님 댁에 따로 떨어져 계시니, 갑자기 돌아가셔서 영세도 못하고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나 하고, 항상 걱정하던 어머니가 영세만 아니라 필요한 성사를 다 받고 돌아가셨으니 이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시체는 예배당에 맡기고 누님은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이 모여서 연도를 드렸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는 성당에 가서 돌아가신 어머니 안나의 영혼을 위하여 연미사를 드렸다. 이상이 대략 어머니의 영세와 임종에 대하여 누님에게서 들은 내용이었다.

 

 

9. 용과 호랑이

 

내가 방학 때마다 집에 내려가면 누님은 으레 나를 붙잡고 그 동안에 좀 생각해 보았느냐고 묻곤 하였다. 그리고는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성경의 이런 말씀은 무슨 뜻인 줄 아느냐는 등의 여러 가지 질문을 하여 내 생각의 오류를 깨우쳐 주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론으로 해서는 내가 질 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나는 무식해서 학술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소. 동생은 공부를 많이 했으니까 학술적으로 설명을 해야지 잘 알아들을 게요. 그러니 한번 신부님과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았으면 좋겠소. 신부님은 철학도 신학도 많이 공부하셨으니까 반드시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해주실 게요.” 하면서 언제 한번 신부님을 소개해 줄 테니 같이 가지는 것이었다.

 

“누님의 소원이 정 그러시다면 내가 한번 가서 신부님을 만나 보지요.”

이러한 이야기가 원인이 되어 나는 누님의 안내로 원산 천주교회의 사제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아마 누님은 미리 신부님에게 자기 동생 이러이러한 사람을 데리고 오겠다고 연락을 해 두었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때 만난 신부님은 덕원 신학교를 갓 졸업하고 원산 천주교회에 보좌 신부로 와 있는 한국인 신부로서, 그 후에는 북한 성진에 가서 전도하시며 많은 성과를 거두고, 해방 후에는 북한에 남아 계시다가 결국 공산군에게 잡혀 순교하신 이 베드로 신부님이었다.

 

신부님은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하였다. 응접실에 들어가서 나는 신부님과 마주 앉았다. 하나는 천주교회의 신자를 지도하는 성직자요, 하나는 당시 전 세계적 부흥운동인 옥스퍼드 그룹 운동의 지도자이다. 마치 용과 호랑이가 승부를 결하려고 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평소부터 가톨릭 신자의 생활이 경건하다는 것을 인정하여 왔고, 또 그 경건한 생활의 기초는 고해와 영성체, 이 두 가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고해와 성체에 대하여 가톨릭 신자가 믿는 교리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 수긍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자연히 이 두 가지에 대해서 벌어졌다.

 

나는 밀떡이 밀떡대로 있는 것을 왜 예수의 몸이라고 하느냐고 물었다. 그것을 먹을 때에 밀떡은 밀떡이지만 마치 예수의 살을 먹는 것처럼 생각하고 먹으면 그만이 아니냐? 성경에도 예수께서 나를 기념하기 위해서 이 예를 행하라고 했으니, 어디까지나 기념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지 예수의 참살이 된다는 것은 비과학적이요, 미신에 가까운 것이라고 나는 공격을 하였다.

신부님은 정말 신학교에서 배운 철학을 막 풀어 놓았다. 물질의 본체가 어떠니, 실체가 어떠니 하고 어려운 철학적 술어를 나열해 가면서 힘써 설명을 하노라고 하였다. 성체 교리도 일종의 현의(玄義)인 만큼 신앙으로 이해되는 것이지 단순히 이론으로만은 이해될 리가 없었다.

 

그 다음에는 고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대죄, 소죄의 이야기가 나오고 보속의 이야기가 나왔다. 신부는 대죄, 소죄를 설명하는데 같은 도적질을 하여도 가난한 사람의 돈 백 원을 훔치는 것하고, 부자 사람의 돈 일 전을 훔치는 것하고는 정도가 다르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이다. 나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죄라는 것은 우리의 양심과 하느님과의 관계인데, 일 전을 훔치고라도 하느님 앞에 큰 죄를 졌다고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며 통회를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는 대죄이지 소죄가 될 수 없다. 종교상의 죄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양심에 관한 문제이지, 사회적인 죄와 마찬가지로 외형적인 물질의 다과로 규정할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일장의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보속이라는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우리가 고해를 하면 천주께서는 그 죄를 사해 주시지만, 그 죄로 인해서 천주의 마음을 상해 드린 것을 풀어 드리기 위해서 무슨 고행이나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답변을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거의 분개하였다. 그것은 하느님의 무한히 인자하신 사랑을 깎아 내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느님은 그렇게 인색하신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졌더라도 진심으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눈물을 흘린다면, 하느님께서는 무조건 다 용서해 주시지, 그래 용서해 주시고 나서 너는 그 대신 그 벌로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 하고 요구하시는 그러한 하느님이 아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양쪽에 강도가 같이 못 박히지 않았는가? 그 한 사람은 예수를 희롱하여 말하기를 ‘네가 참말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너도 십자가에서 내려가고 우리도 구해 보라.’고 하였으나, 한 사람은 ‘아니다. 우리야 죄가 있으니 이러한 형벌을 받아도 마땅하지만 이분이야 무슨 죄가 있느냐?’고 하면서 오히려 자기의 죄를 통회하였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즉석에서 그 죄를 용서하시고,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이러한 강도야말로 보속을 하려면 참 많이 해야 하겠는데, 지금 죽는 순간에 언제 무슨 보속을 할 틈이 있는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무조건하고 오늘부터 낙원에 들어간다고 확실히 약속하셨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이지 천주는 그렇게 인색하신 천주가 아니라고 오히려 계몽을 하고 나서 나는 더 이상 이야기하기가 싫었다.

 

물론 철학이나 신학은 나보다 많이 배웠겠지만, 신학교를 갓 나온 젊은 신부의 서투른 이론을 가지고는 나의 이성을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결국 이 용호의 싸움은 무승부로 결렬되고 말았다.

사제관 걸어 나오면서도 나는 마음 속으로, 가톨릭의 교리는 내 머리로서 납득이 안 되지만 가톨릭 신자들의 생활은 확실히 경건한 것이 사실이다. 암만해도 신앙생활을 하려면 가톨릭이 좋기는 좋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내려왔다.

누님은 나를 신부하고 면담시켜 주면, 자기의 힘으로 이해시키지 못한 것을 문제없이 이해시켜서, 내가 대번에 항복을 할 줄 알았던 것이 이렇게 결렬이 되고 보니 그 심정은 대단히 답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것은 심정에 관한 문제이지 두뇌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사도 바오로의 예를 보라. 기독교를 강력히 박해하던 사도 바오로,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예수를 만나 뵙고는 그 돌덩이 같이 굳은 마음이 물렁물렁하게 된 것이다. 사도 바오로의 마음을 이렇게 만든 것은 결코 이론의 힘이 아니었다.

 

 

10. 영어(囹圄 : 감옥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

 

1942년에 소위 ‘성서조선(聖書朝鮮)’ 사건이라는 것이 있었다.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는 일본의 우찌무라의 교훈을 받드는 소위 무교회주의자들이 발간하는 기관지인데, 당시 양정중학교의 교사 김교신 씨가 주필이었고, 평북 오산중학교의 함석헌 씨 등이 주요한 지도자였다.

잡지의 사명은 그 이름이 말하는 바와 같이, 죽어가는 민족성을 성서의 힘으로밖에는 다시 살릴 길이 없다고 하는 신앙운동인 동시에 민족운동이었다.

 

이 사람들은 본래부터 경찰 당국의 주목을 받아온 것이지만, 특히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민족운동 혐의로 모조리 검거를 당하게 되었다. 나는 무교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이상한 연유로 이 잡지에 얼마 동안 투고를 한 일이 있어 동 잡지의 간부처럼 되어서 휩쓸려 잡혀 들어갔었다.

나와 무교회주의와의 관계는 전기 ‘나의 신앙적 자서전’의 제1편인 ‘프로테스탄트 시대’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고 다만 어떻게 성조지(聖朝誌) 사건에 관련되었는지 그 경위만 간단히 말해 두고자 한다.

1936년에 개성 호수돈여고(好壽敦女高)에 가 있을 때 동료로서 유달영이라는 분이 있었다. 이분이 이 잡지 주필인 김교신 씨의 중학 수제자로서, 중학교 시절 담임선생인 김교신 씨의 감화로 무교회주의를 알게 되었고 열렬한 무교회주의 신봉자였다.

이 유 선생에게서 나는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구경하게 되었고, 매년 겨울에는 그들의 동절기 집회 혹은 성서집회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동절기 집회라는 것은 무교회주의자들이 일 년 동안 각지에서 기관지인 <성서조선>으로만 연락을 하고 있다가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한 곳에 모여 합숙하며 성서를 연구하며 무교회적인 훈련을 하는 곳이었다.

 

유 선생의 권유로 한번은 이 동절기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나는 그 당시 옥스퍼드 그룹 운동에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파에 대해서는 초월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교회에 대해서 고집도 없을 뿐더러 남의 교파를 나쁘다고 하지도 않았다. 무교회주의가 내 비위에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유 선생과의 우의와 또 김교신 씨와 함석헌 씨의 인격을 접해 보고 싶은 생각으로 이 동절기 집회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이 집회에서 내가 옥스퍼드 그룹 운동의 지도자라는 것을 알고, 그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해서 한 시간 동안 이 운동의 윤곽만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의외로 모두들 대단히 관심을 가지고 옥스퍼드 그룹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다고 하는 여론이 있어났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옥스퍼드 그룹에 관한 책인 「죄인만을 위하여」를 번역해서 매월 <성서조선>에 연재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성서조선> 사건이 일어나게 되어, 간부들과 독자들을 잡아들이는 판에 잡지에 매월 투고를 했으니까, 나도 휩쓸려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 경찰이 <성서조선>을 친 이유는 종교를 간판으로 내세우고 민족운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하기야 성서를 통하여 민족정신을 썩지 않게 하자는 것이니, 민족운동이야 무서운 민족운동이기도 하였다.

 

1942년 여름이었다. 중요한 간부와 독자를 전면적으로 검속(檢束 : 예전에, 공공의 안전을 해롭게 하거나 죄를 지을 염려가 있는 사람을 경찰에서 잠시 가두던 일)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김교신 씨는 내가 있던 송도중학에 있었는데, 제1차로 검거되고 뒤이어 호수돈여고의 유달영 씨 등이 검거되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이거니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며칠이 지나도 데리러 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마 빼놓았나보다 하고 학생 4, 50명을 데리고 동해안의 송전으로 캠프를 떠났다. 송전에서 한 십 일간 해수욕을 하고 나서 고성 해금강을 보고, 온정리에 와서 외금강을 보고, 내일은 비로봉을 넘어 내금강으로 해서 집으로 가려고, 영양관인가 하는 일본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막 잠이 들려는데 형사 둘이 와서 “잠깐 무엇을 물어볼 것이 있으니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미리 각오하였던 것이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고 짐을 다 가지고 따라갔더니 그날 밤으로 자동차에 태워서 고성 본서로 데려갔다. 학생들도 같이 데리고 갔으나 학생들은 여관에 묵게 하고 나는 유치장으로 들어갔다.

 

강원도 경찰부에서 경기도 경찰부의 부탁을 받아, 잡아넣어 두라는 지시가 와서 소위 보호검속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고성서에서는 내가 무슨 죄인인지 알지도 못하였다. 2, 3일 후에 개성서에서 형사 두 명이 데리러 왔다. 여행 도중에 객지에서 잡혀 있다가 개성서에서 왔다니, 나를 잡으러 온 사람들이긴 하지만 하여튼 반가웠다.

개성까지 오는 도중에는 환담도 하고 잘 왔으나 개성역에 점점 가까이 오니 마음이 답답해졌다. 시간은 밤 열한 시나 되었는데 이놈들은 내려서 자기 집으로 가겠지만, 나는 집이 있으면서도 집에서는 온지도 모르게 유치장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답답하였다.

 

개성서에 들어가 형사들은 당직 주임에게 보고를 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나가면서 나보고 인사를 하는 말이 “마음 놓고 들어가 잘 있으라.”고 어색한 말을 하였는데 유치장에 들어가 잘 있으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유치장에 들어가 보니, 당시 송도중학의 교감으로 있던 김종흡 씨도 들어와 있었고, 다른 아는 친구들도 여럿이 들어와 있었다. 장소는 반갑지 않은 데이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개성서에서 약 1개월 있는 동안에 같은 지방인 관계도 있고 해서 무사히 해 주려고 조서를 잘 만들었으나, 도 경찰부에서는 다른 사람은 다 내보내도 나하고 김종흡 씨는 인텔리라고 해서, 자기들이 다시 조사해 보겠다고 올려 보내라고 하므로, 둘은 다시 도 경찰부로 옮기게 되었다.

도 경찰부 유치장에를 와 보니, 거기는 김교신 씨를 비롯해서 중요한 인사들이 다 모여 있었다. 도 경찰부에서 1개월여 있었는데 이 동안에 나는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다. 밤에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자리에 누워서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만일 여기서 고문을 당하다가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순교를 한 것이 될까? 내가 종교를 믿지 않는다면 이런 데 들어올 리가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 믿는다고 해서 잡아온 것은 아니다. ‘너 예수를 믿으면 죽인다.’고 하면 순교자의 면류관을 쓸 수 있겠지만, 놈들의 이유는 민족운동이라는 것이니 이것으로 죽는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 될까?

 

또 나는 생각해 보았다.

나는 과연 지금의 신앙으로 순교를 할 수가 있을까? 교회의 목사들은 대개가 시국에 아부하여 설교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는 시국강연식의 내용이 많다. 그렇게 진리의 수호자이어야 할 교회가 시국만 따라가다가는 나중에는 순교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런 교회에 속해 있는 내가 순교할 자신이 있는가? 이렇게 냉정히 반성해 볼 때 나는 순교할 기회가 온다 할지라도 순교할 힘이 있을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은 현대에도 순교를 할 수 있다고 하던 이근용 회장의 말이 생각났고, 대원군 박해 때에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의 피를 흘린 사실이 생각났다. 가톨릭 신자는 무엇 때문에 생명을 내놓을 수 있는가?

거기에는 자기의 생명과 바꿀 만한 무엇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이같이 유치장이라고 하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나는 종교에 대해서, 자기 신앙에 대해서 심각한 묵상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는 순교까지 할 수 있게 될 만한 신앙을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해 10월 하순에 나는 석방이 되었다. 나와서 나는 가톨릭에 대한 서적을 읽기 시작하였다. 특히 순교사를 읽었다. 한국의 순교사를 읽어보고 일본의 기리시단(切支丹) 순교사도 읽어 보았다. 모두 자기의 생명을 초개와 같이 가볍게 여기고 용감하게 치명을 하였다.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순교라는 것은 인간의 이상으로 되는 것도 아니요, 용감하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인성을 초월한 초자연적 힘이 도와주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가톨릭에는 그러한 힘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하루는 예배당에 가서 뒷자리에 앉아서 나는 이러한 생각을 해 보았다. 만약에 지금 어떠한 천재지변으로 인해서 여기에 있는 사람이 일시에 갑자기 다 죽는다면 이 중에서 몇 사람이나 천당에 갈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예배당에 있는 사람들을 휘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한 사람씩 검토해 보았다.

열심하다고 하는 노인들, 전도부인, 교회의 간부들을 한 사람씩 보면서 이 사람은? 하고 생각해 본다. 그러나 어쩐지 자신 있게 이 사람이면 틀림없이 천당에 갈 수 있겠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나중에 강대상(講臺床 :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대)위에 있는 목사를 바라보았다. 목사는 어떨까? 그러나 목사는 더욱이나 틀렸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러면 나는 무엇 때문에 예배당에를 계속해 다녀야 하는가? 아직까지의 타성으로인가? 체면 때문인가? 그러나 체면으로 구령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생명이다.

 

11. 사제관의 문을 두드리다

유치장을 갔다 와서부터 나는 종교에 대해서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남들은 나를 보고 신앙이 좋다고 한다. 청년들은 목사보다도 나를 찾아와서 종교를 토의하고 성경을 연구한다. 그러나 나 자신의 마음 속은 불안하였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해 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내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서 가톨리시즘과 프로테스탄티즘을 비교 연구해 보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개성에 있는 천주교회를 찾아가서 사제관의 문을 두드렸다. 신부님에게 처음으로 인사를 하고 가톨릭에 대해서 연구를 해보려고 왔으니 잘 지도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더니, 대단히 반갑게 맞아들였다. 방(방유룡 네오) 신부님이었다. 이제부터 방 신부님과의 씨름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날부터 매일같이 사제관을 방문하였다. 밤에는 물론 낮에도 시간만 있으면 갔다. 저녁을 먹으면 으레 사제관으로 갔고, 가면 의례히 자정 전에는 돌아오는 일이 드물었다.

 

신부에게 종교 문제를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 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종교에 반대되는 사상을 가진 사람, 또는 프로테스탄트 이론을 가진 사람이 단순히 이론 투쟁을 위해서 찾아오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진리를 알아보기 위해서 찾아오는 사람이다.

전자인 경우에는 신부들은 대개 상대를 하지 않고 그냥 돌려 보내고, 후자인 경우에는 모든 시간과 수고를 아끼지 않고 대해준다. 방 신부님은 내가 매일 밤 찾아가서 밤늦도록 이야기를 하여도 조금도 괴로워하거나 싫어하는 표시를 안 하셨다.

 

나는 그때까지, 천주교의 신부들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미사를 드린다는 사실과, 매일 시간 반 내지 두 시간이나 걸리는 ‘브레뷔아리움’(Breviarium : 모든 사제들이 매일 바쳐야 하는 기도서인 ‘성무일도서(聖務日禱書)’의 라틴어 말)이라고 하는 경문을 의무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어떤 때는 밤 한 시나 두 시까지 있다가 가는 수도 있었다.

그런 날은 반드시 영향이 있어 피곤했을 것이 틀림없는데, 도무지 그런 기색이 없이 그날 밤이 되면 여전히 반갑게 대해 주셨다. 오히려 어떤 때는 밤이 늦어서 내가 먼저 가려고 하면, 신부님이 오히려 붙잡고 조금 더 이야기하자고 만류하는 수도 있었다. 묻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이나 문제가 심각한 문제이니 만큼, 피차에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신부님도 나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재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예배당에서도 지도자 측에 속하였고, 옥스퍼드 그룹의 지도자였고, 또는 집에서도 청년들의 성경연구를 지도하였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지식은 신부님에게 못지않았다. 무슨 복음(혹은 무슨 서간) 몇 장 몇 절에 이런 말이 있는데 하고 성경 구절을 끄집어내는 데는 신부님도 못 당하였다.

그러면 신부님은 의례히 커다란 라틴어 성경책을 갖다가 책상 위에 펴놓고 어학적으로 뜻을 해석하시면서 설명을 하셨다. 나는 영어 선생인고로 라틴어를 풀어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신부님에게는 편하였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겨울방학이 되어 신학생이 하나 와 있었다. 그 신학생이란 지금 윤(尹炳熙 바오로) 신부가 신학교 중등과 학생이었을 때인데, 방학이면 개성에 내려와서 신부님 옆에서 지도를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어떤 날 낮에 신부님 방에 본당 회장과 이 신학생과 몇 사람이 모여서 트럼프인가 화토인가를 하고 있었다.

나하고 신부님하고는 옆에 앉아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다가 결국에는 또 교리 문제로 들어갔다. 신부님은 또 커다란 라틴어 성경책을 가지고 오게 되었고 심각한 토론이 벌어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우리의 대화가 자기네의 흥을 깨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불유쾌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참 있더니 이 사람들도 어느새 트럼프장을 다 놓고, 우리를 향해 앉아서 우리 두 사람의 이론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나중에 신학생의 말이 “오늘은 참 산 교리 공부를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교리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신학교에서 매일 같이 배우는 것이 그 이야기인데, 방학에 와서 오늘은 좀 재미있게 놀려고 했는데, 또 그런 이야기를 꺼내서 처음에는 좀 싫었으나, 차차 듣자니 신학교의 교리 시간에는 도저히 듣지 못할 실천적 교리였습니다. 그야말로 산 교리 시간이었습니다.” 하고 오히려 좋아하였다.

 

라틴어 성경책을 가운데 놓고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신부님은 자연히 라틴어의 단어 설명도 하게 되고 격의 변화도 설명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나는 이 바람에 라틴어의 지식도 다소나마 부산물로 얻게 되었다. 영어는 라틴어를 어원으로 한 것이 많기 때문에 비슷한 말이 나올 때에는 나는 거기에 해당하는 영어를 가르쳐 드리고 해서, 나는 라틴어를 배우고 신부님은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소위 대동아 전쟁이라고 해서 ‘미영격멸’의 슬로건을 내세울 때니까, 영어는 사실상 시세가 없었다. 그러나 신부님은 나보고 “아니오. 조금만 기다리시오. 이번 전쟁에는 일본이 꼭 집니다.” 하시고 벽에 붙여 놓은 세계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어 가면서 “지금 일본이 여기까지 먹으려고 하는데 조그마한 뱃대기에 이게 다 들어가야 먹지? 이제 미국이 꼭 이깁니다. 그때가 되면 조 선생이 일어설 때가 있소.” 하고서 자신 있게 예언을 하시였다.

“신부님, 괜히 붙잡혀 가십니다.” 하고 내가 웃으면, “아니야, 조 선생 같은 사람이나 들어가지 내가 왜 들어가?” 하시고 아무도 없는 뒤를 한번 돌아다보는 것이었다. 교리 싸움을 하다가도 이따금 이런 이야기도 하는 것이었다.

 

나는 10월부터 사제관에 다니기 시작해서 그해 겨우내 다니고, 이듬해 부활까지 거의 매일 다녔다. 눈이 와도 갔고 추운 날도 갔다. 그러나 좀처럼 ‘이제는 다 알았다’ 하는 자신이 서지 않았다. 아무 종교도 가지지 않고 「교리문답」이나 배운다면 한 달 안으로 다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한 가지 교파에 속하여 있는 사람이 그것을 버리고 다른 데로 옮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손에 무엇을 쥐고 있을 때, 더 좋은 것을 주어도 손에 쥔 것을 놓지 못해서 못 받는 것과 같았다. 30여 년 동안 신교의 공기를 호흡하여 온 머리를 바꾸어 넣는 것은 힘이 들었다.

 

어떤 때는 밤중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혼자서 ‘내가 무식하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천국도리를 공부하는 데는 지식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 같았다. 집에 와서 성경을 다시 들춰 보고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 드립니다.’(마태 11,25) 하신 말씀을 읽어 보고 ‘아! 지혜로운 자여, 화 있을진저!’ 하고 속으로 외쳤다.

종교는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그저 믿는 데 오히려 신앙의 귀한 점이 있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의 상처를 만져 보지 않고는 믿지 않으려고 한 토마스에게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하신 예수의 말씀이 생각났다.

그러면 기독교를 전연 모르는 사람도 아니면서, 모르는 것이 무에 그리 많아서 근 1년이나 사제관에 다니면서 연구를 하였나? 신교의 교육을 받아온 사람이 가톨릭의 교리를 이해하는데 난관으로 되어 있는 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그 중에도 크고 중요한 문제는 다음의 몇 가지일 것이다.

 

(1) 신부의 사죄권

인간의 죄는 하느님께서만 사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죄를 사할 수가 있는가!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이것이 바리사이 교인들이 예수께 대해서 한 말이다.

예수께서 이런 말을 들으셨는데, 하물며 신부가 어떻게 죄를 사하는가? 하느님 외에는 죄를 사할 수 없다. 따라서 고해라는 것도 문제가 된다. 하느님께 나가 눈물을 흘리고 죄를 통회할 때에 하느님께서 사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히 성부께 구하면 된다. ‘너희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6)

 

(2) 의식

종교는 사람의 마음이 하느님과 교통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의식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3) 교황의 무류성(無謬性)

교황도 사람인데 틀리지 않을 수가 있는가?

 

(4) 성체

밀떡은 밀떡이지 그것이 왜 예수의 살이냐? 단지 예수의 살과 피를 기념하면서 빵과 포도주를 먹으면 되지 않는가?

 

(5) 성모 마리아 공경

우리는 온전히 예수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사람인 마리아를 공경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6) 교회 밖에는 구령이 없다

반드시 천주교를 통해서만 구령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편협한 생각이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천주교에 있든 감리교에 있든 성부의 뜻을 준행하는 자만이 구령할 것이다.

 

(7) 고행이냐? 믿음이냐?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 우리는 고행이나 선행의 대가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무한하신 공로로 값없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8) 성모의 평생 동정설

요셉과 결혼 생활을 하였으며 한 지붕 밑에서 살았는데 어떻게 동정을 지킬 수가 있었을까? ‘아내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마태 1,25) 하였으니, 맏아들을 낳은 후에는 동침한 것이 아니냐?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마태 12,46-47) 하였으니, 예수의 동생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

(위에 열거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해결은 ‘나의 신앙적 자서전’의 제3편 ‘가톨릭의 교리’에서 상설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그리고 「교부들의 신앙」에 자세히 논증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데, 최후에 가서 끝까지 만족할 만한 해결은 얻지 못한 것이 이 성모의 평생 동정 문제였다. 신부님도 ‘성모의 평생 동정이신 것은 성교회의 움직일 수 없는 교리이고 확실한 사실이지만, 오늘은 조 선생이 만족하도록 증명할 수 없으니 나도 좀 연구해 가지고 다음 기회에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해 주겠노라.’고 하셔서 좀 기다리기로 하였다.

방 신부님은 솔직한 분이었다. 나는 전에도 신부를 몇 사람 만난 일이 있었지만 이 방 신부님이야말로 우리 같은 사람을 지도하는 데는 아주 적당한 분이었다. 방 신부님은 결코 이론으로 나를 이기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어떤 때는 천주교의 결점, 또는 신부님들의 결점, 심지어는 방 신부님 자신의 결점을 들어 공격을 하는 수도 있었다.

 

이런 때는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예, 사실입니다. 그런 점은 우리도 고쳐야 할 점입니다.” 하고 솔직히 인정하는 데는 더 말할 여지가 없었다. 좀 변명을 해야지 공격할 맛이 있겠는데, 오히려 반응이 너무 약해서 공격하는 쪽이 힘이 푹 꺾이는 것 같았다.

사람을 낚는 어부는 역시 잉어를 낚는 기술도 아는 모양이었다. 잉어를 낚을 때는 잉어가 힘 있게 도망갈 때에는 줄을 늦추어 주었다가 힘이 빠진 것 같으면 다시 잡아당기고, 또 야단을 치면 다시 늦추어 주었다가 다시 당기어 점점 가까이 해 가지고, 나중에는 산대를 밑에 넣어서 떠서 잡는다고 한다. 방 신부님은 확실히 이렇게 줄을 늦추어 줄 줄 아는 신부였다.

 

그해 겨울에 나는 원산에 갈 일이 있었다. 원산에 가면 덕원신학교에 훌륭한 독일인 교수들이 있기 때문에, 채 해결하지 못한 점을 물어보리라고 생각하고 원산 천주교회 사제관을 찾아가서 신학교의 교리 신학 교수를 만날 길을 물어 보았다. 마침 그날 덕원에서 교리신학 교수인 신학박사 안 신부님(Dr. Joseph Schleicher)이 나와 있었기 때문에 쉽게 만날 수가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자기 소개를 간단히 하고, 우선 성모의 평생 동정설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였다. 그랬더니 역시 박사는 박사였다. 희랍어 원어의 뜻과 그 번역된 경위와 그때의 유다 사람들의 풍속 습관 등을 즉석에서 설명하여 채 풀리지 못하였던 의문이 봄날에 눈 녹듯이 풀어져 버렸다.

 

안 신부님은 그 후에 시국적 필요에 의하여 일본에 일어를 연구하러 가셨다. 한 일 년 후에 안 신부님이 일본서 나오신 후에, 나는 다시 한 번 만나게 되었다. 나도 이미 영세를 한 후라 내가 영세했다는 이야기를 하면 반가워하시리라 생각하고 가서 인사를 하였다.

나는 신부를 알아보았지만 신부님은 사람을 많이 만나기 때문에 나를 알아보지 못하려니 했더니, 신부님은 나를 보시더니 먼저 반가워하시면서 다짜고짜 “이제는 의심이 풀렸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신부라는 사람들이 사람을 잘 기억하는 데에 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활이 가까워 왔다. 방 신부님은 이번 부활에는 영세를 하라고 재촉을 하셨다. 그러나 나는 좀더 공부를 해서 하겠다고 대답을 하였더니 다른 사람들은 교리를 잘 배우지 못하고, 자꾸 영세를 하겠다고 해서 걱정인데 그렇게 잘 알면서도 더 있다가 받겠다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조 선생은 이제는 더 배울 게 없습니다. 신부나 마찬가집니다. 품(品)은 안 받았으니 신부가 아니지, 말하자면 품 안 받은 신부입니다.” 하고 추켜 주기도 하였다. 지금쯤 와서는 다소 칭찬을 해 주어도 괜찮으리라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나는 가족도 준비를 시켜서, 가족이 같이 영세를 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여(女)전교회장을 우리 집으로 파견을 해서 내 처에게도 영세 준비를 시키게 되었고, 이리하여 영세의 시기는 차차 익어가고 있었다.

 

 

12. 영세를 향하여

 

(1) 먼저 생활부터

사제관에 다니기 시작한 때부터 나의 마음은 실상 천주교 신자가 되어 있었다. 천주교의 내용을 알아보아서 좋으면 개종을 하고, 나쁘면 포기한다는 태도가 아니라, 천주교가 좋은 것은 확실한데 교리상으로 이해되지 못하는 점을 이해시켜 이성적으로 신앙의 기초를 합리화시키려는 것뿐이었다.

1935년 여름 누님의 개종을 본 이후, 1942년 사제관의 문을 두드리게 된 때까지, 약 8년간 지나오는 동안에 성모병원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고, 유치장에서 명상을 할 기회를 가졌고, 유치장에서 나와서 천주교의 순교사를 읽고 나서는 아무래도 천주교라야 되겠다는 마음의 태도는 이미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는 것은, 내가 깊이 연구를 하지 않아서 그 내용을 모르기 때문일 게다. 2천년 동안 위대한 전통을 간직해 내려왔고, 세계적으로 통일된 위대한 조직을 가지고 있는 가톨릭은, 교리적으로도 완전한 체계가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수박을 겉으로만 핥지 말고 깨뜨려서 속을 먹어 보리라. 사제관의 문을 두드릴 때, 나는 적어도 이런 마음의 태도가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몇 번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신부님은 이러한 내 마음의 태도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영세는 하지 않더라도 지금부터 천주교 신자의 생활을 실천하는 것이 좋다고 권면하였다.

즉 주일이면 미사에 참례할 것과 보통날에도 성당에 오면 사제관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성당에 들어가서 제대 위 감실에 계신 예수님께 조배할 것, 또 갈 때에도 성당에 들어가서 인사를 하고 갈 것과 아침과 저녁에 기도를 드릴 것 등을 가르쳐 주셨다.

그렇게 생활부터 해 나가면 천주께서 성우(聖佑 ;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를 내려주셔서 이해하기 힘든 도리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대로 실행하였다. 그 다음에 왔을 때는 먼저 성당에 들어가서 성수를 찍어 가지고 무릎을 꿇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고 정성스럽게 생전 처음으로 성호를 그어 보았다. 그랬더니 이상하게도 천주교 신자가 된 것 같이 느껴졌다.

 

그 다음 주일에는 처음으로 미사에 참례해 보았다. 성당문을 들어서 보니 미사는 시작되지 않았으나 신자들이 가득 앉아 있었다. 개성의 성당은 출입구가 옆으로 있기 때문에 들어서면 사람들의 얼굴을 보게 되어 있다. 나는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서 좀 어색하였다. 그래서 성호도 긋지 못하고 그냥 맨 뒤에 가서 앉아 버렸다.

그러나 성호를 못 그은 것이 후회되었다. 그 다음 주일에는 성당으로 오면서 단단히 결심을 하였다. ‘오늘은 성당에 들어가서 꼭 성호를 그으리라.’ 하고, 그러나 이번에도 실패하였다. 성당에 들어가서 성수 그릇을 바라보고 찍을까 말까 하고 망설이기 시작하면, 벌써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며 ‘저 사람이 누구야?’ 혹은 ‘저 사람이 예배당에서 개종하는 사람이래!’ 하는 것 같아서 또 성호를 못 긋고 그냥 맨 뒤에 가서 앉았다.

몇 주일 후에 나중에는 단단히 결심을 하고 뭇사람이 보는 앞에서(사실은 아무도 보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지만) 용감히 성호를 그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흥분하였다.

 

(2) 가톨릭의 성가

교리를 배우고 가르치고 하는 동안에 서로 인간적으로도 이해가 깊어갔다. 내가 음악을 한다는 것도 알게 되고 합창 지휘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영세는 안 했지만 성가대를 지도하게 되었다. 나는 예배당에서도 찬양대를 지도해 왔지만 가톨릭의 성가대에서는 색다른 맛을 느꼈다.

그것은 대개가 라틴어로 되어 있다는 점도 있겠지만, 음악보다도 내용에 중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즉 미사 순서에 따라서 각 부분에 해당하는 기도문을 노래로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가톨릭의 성가는 음악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기도이다. 그리고 예배당의 찬양대는 좌석이 앞에 있는데 천주교의 성가대는 뒤에 있는 것도 좋았다.

기리에, 글로리아, 그레도, 쌍투스, 아뉴스데이 같은 성가를, 음악보다 먼저 라틴어 가사를 신부님에게 배웠다. 그리고 그레고리안 악보 보는 법도 배웠다. 그러고 보니 나의 음악 세계가 한층 더 넓어졌다. 이전에는 ‘아베 마리아’라던가 ‘아뉴스 데이’ 같은 노래를 음악으로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제 가톨릭의 생활을 알고 보니 이러한 노래도 한층 더 깊게 맛을 이해하게 되었다.

 

음악만 아니라 서양의 문학이나 미술도 가톨릭의 이해가 없이는 완전한 이해는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전에는 밀레의 만종 같은 것도 보통 사랑의 신성, 노동의 신성, 종교의 신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들어 왔는데 가톨릭의 생활을 알고 보니 멀리 성당에서 삼종소리가 들려오니까 일하던 것을 정지하고 안젤루스(Angelus)의 기도(삼종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통쾌하였다.

이러한 가톨릭과 문화면에 관해서는 ‘나의 신앙적 자서전’의 제4편 ‘가톨릭의 생활’에서 좀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다시 성가대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미 가톨릭 신앙에 젖은 대원들은, 늘 하는 것이니까 아무 신선미도 느끼지 않고 그냥 예사롭게 하지만, 나는 성가 하나하나가 모두 감명을 주었다. 연습을 시킬 때에도 눈을 감고 곡조를 들으며 가사의 뜻을 명상하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사 때에 뒤에서 제대를 바라보고 성가를 부를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이따금 가슴이 뭉클해지거나, 눈두덩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영세를 안 했기 때문에 완전한 가톨릭 신자가 아니다. 따라서 어딘지 모르게 손님 같은 기분이 있었다. 아! 이제는 하루 속히 영세를 해야겠다.

 

(3) 영세의 길로 가까이

한번은 연안에서 어떤 교우의 결혼식이 있어서 신부님이 출장을 가시게 되었다. 날더러 같이 가자고 해서 이왕이면 성가대에서 몇 명 추려 가지고 가서 미사에 성가까지 해주면 더 좋겠다고 의논이 되어, 성가대원 4, 5명과 본당 회장이 같이 가게 되었다. 성가대원으로서는 정예분자를 추리노라고 성당 부속학교 교사 윤 데레사(현재 복자회 수녀원 원장), 당시 방학으로 와 있던 신학생 윤 바오로(현재 윤병희 신부), 그 밖에 2, 3명이었다.

 

해주 가는 간편 철도를 타고 가는데 차내는 좁고 손님은 많아서 대단히 고통스러웠다. 나는 좌석에 앉아 있었으나, 어떤 할머니가 바로 옆에서 고생을 하시기에 젊은 놈이 앉아서 가기가 민망스러워서 자리를 양보해 드리고, 그 대신 나는 끝까지 서서 가게 되었다.

기차를 내려서 신학생 윤 바오로의 말이 “선생님, 오늘 공로를 많이 세우셨습니다.” 한다. 나는 이 말이 불쾌하게 들렸다. 선행은 그 자체가 선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그것이 공로가 된다거나 무슨 상을 바라고 한다거나 하는 것은 너무나 이기주의가 아니냐? 그래서 토론이 또 벌어졌다.

 

결론은 같은 선행이라도 천주를 생각하고 하는 것이 더욱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본래 성질이 착한 사람이 자기 본성에 의해서 하는 것과, 본성은 그다지 착하지 못하지만 자기의 본성을 초월해서 천주를 위하는 마음으로 선행을 하는 것과는 그 가치가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밤에 길을 물었을 때, 그곳까지 같이 가서 집을 가르쳐 주는 것은 착한 일이다. 이런 때에 자기가 그곳까지 갈 일이 있거나 산보를 하고 싶어서 가는 수도 있고, 혹은 갈일도 없고 가고 싶지도 않지만 그 사람이 그냥은 길을 못 찾을 것 같아서 일부러 같이 가 준다면, 그 길손은 어느 쪽이 더 고맙겠는가? 그러므로 자기의 본성으로는 하기 싫은 것이라도 천주를 위해서 한다면, 천주께서는 그것을 더 기뻐하시며 그것이 더 공로가 된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 혼배성사와 미사가 끝난 후에 윤 데레사에게 나는 물었다.

“성체를 받아 먹을 때 꼭 그것이 예수의 성체인 줄 알고 받아 먹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물질은 밀가루 떡이지만,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기억하며 예수의 살을 먹는 것과 같은 생각으로 먹어도 되지 않습니까?”

“성체와 같다는 생각으로 먹는 것보다는 성체로 믿고 먹는 것이 더 좋지 않습니까?”

이론도 없는 단순한 말이지만 이야말로 신앙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가톨릭 교리의 중요한 것은 대개 해결이 되었지만, 이따금 부스러기 문제도 이같이 정리가 되어 영세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4) 기도하는 소녀

나는 낮에도 종종 성당에 오면, 신부님 방에 들어가기 전에 성당 안에 들어가 간단한 기도를 올린다. 대개는 나 하나밖에 없는 빈 성당인데, 하루는 여자석(전에는 성당에 여자석과 남자석이 구분되어 있었음)에 한 소녀가 하얀 미사보를 머리에 쓰고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합장하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두 손에는 묵주가 드리워 있었다.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 이 얼마나 순결하고 경건한 자태인가! 순결한 소녀의 이 엄숙하고도 경건한 모습! 이것은 한 폭의 그림이다. 밀레의 종교화보다도 산 그림이다. 종교는 참으로 예술이다.

 

(5) 영성체를 동경하는 마음

주일이면 미사에 참례해서 2층에 올라가 성가를 부른다. 앞을 향해서 신부님의 미사드리는 동작을 바라본다. 신자들은 모두 제대로 향해서 앉아 있다가 신부님의 동작을 따라 무릎을 꿇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한다. 그 중에도 부인네들이 모두 머리에 흰 미사보를 쓰고 앉아 있는 것이 눈으로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성당 안의 광경으로서 또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신자들의 태도의 경건 엄숙한 것이다. 미사 때에는 물론 미사가 시작하기 전에라도, 일단 성당 안에 들어와서는 일절 사담이 없다. 아는 사람이라도 인사도 안 한다.

 

예배당에서는 예배 중에도 사담을 하는 수가 있고, 더욱이나 예배 시작하기 전에는 장사 얘기, 정치 얘기, 김서방 얘기, 이서방 얘기, 별 잡담을 다 하다가, 목사가 강단에 올라가 ‘자! 이제는 조용히 하고 예배 시작합시다.’ 하고서 시작하는데 성당에서는 들어가면서 성호를 긋고 제대를 향해서 앉으면 옆에 누가 와서 앉든지 상관도 안 한다.

 

그러나 매주일 보아도 항상 큰 감명을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영성체하는 광경이다. 제대상의 제물인 예수를 천주께 제헌한 후에, 그 제물인 예수의 성체를 나누어 먹는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성당 가운데 통로로 남녀가 두 줄로 합장을 하고 서서 천천히 제대를 향해 걸어 나간다. 성체를 배령한 사람은 좌우로 갈라져서 제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무죄한 영혼들이 성체를, 즉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맘에 모시려고, 예수를 맞으러 앞으로 걸어 나가는 모습! 얼마나 성스러운 광경인가! 특히 흰 미사보를 머리에서 어깨 위로 내려 드리우고 죽 서서 나가는 여자들의 뒷모습은 말할 수 없이 성스러웠다.

 

나도 이제 영세를 하면 예수님의 성체를 받아 모실 수가 있겠지. 내가 처음으로 성체를 영하게 될 때 나의 심경은 어떨까? 지금은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는 제대이지만, 그때는 제대 앞으로 바싹 나가서 무릎을 꿇고 성체를 받아 모시게 된다면, 나는 그때는 꼭 울 것만 같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6)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도에게

이제 나에게 종교는 개념의 세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이 되었다. 현대의 지식인으로서 천당이니 지옥이니 말하는 것은 비과학적이요, 종교를 천당 가기 위해서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게 들릴지도 모른다.

현대에 있어서는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것은 서양 문명을 이해하는 사람의 대명사처럼 생각하는 정도의 하이칼라적인 크리스찬이 많다. 그러나 나는 이런 정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었다.

 

사람은 조만간에 죽을 것이고, 죽은 후에는 불사불멸의 영혼이, 천당을 가거나 지옥을 가거나 또는 연옥을 가거나 해야지, 아무 데도 안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뱃속에 든 아기가 기일이 차면 아기나 어머니의 의사에 상관없이 세상에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객관적인 사실이다.

 

이제 가톨릭은 나에게 천당 가는 길을 확실히 가르쳐 주었다. 가톨릭 교회는 천당행의 커다란 배이다. 일엽편주(一葉片舟)가 아니라, 아무리 심한 풍랑이 있더라도 끄덕도 안 하는 크고도 안전한 배이다. 이 배를 타고 선장의 지시대로만 따라가면, 힘 안 들이고 자연히 나중에는 목적지에 가게 되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도 천당에 못 가는 것은 아니다. 착한 영혼, 이것만이 천주를 섬기는 똑바른 길인 줄 알고 천주를 열심히 사랑한다면 그 개인의 신앙의 힘으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노력으로 가는 것이지 교회의 지도로써 가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노력으로 가는 것이니 만큼 힘이 든다. 프로테스탄트로서 천당을 향해 가는 노력은 마치 일엽편주를 타고 가거나 혹은 헤엄을 쳐서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가톨릭의 교리를 직접 연구해 보기 전에는, 결함이 많이 있는 것 같고 공격할 점이 많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안에 직접 뛰어 들어가서 연구해 보면 전에 말로만 듣고 생각하던 것과는 내용이 전연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이전에 가톨릭에 대해서 오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은 가톨릭에 대해서 똑같은 오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에게 권고하고 싶다.

‘가톨릭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편견 없이 연구해 보라.’고.

 

어떤 사람은 가톨릭이 좋은 줄은 알지만 지금까지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맺어진 인연, 목사나 간부들에 대한 체면을 못 끊어서 못 돌아서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정직하게 영혼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어찌 체면 문제만을 생각하고 있을 수가 있으리오? 이렇게 체면을 붙잡고 정말 요긴한 것을 붙잡지 못하는 것은, 마치 소는 잃고 고삐만 붙잡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확실히 구령길을 알고 나니, 이제는 영세하는 것이 조급한 생각이 났다. 밤이 되어서 자리에 누울 때는 ‘이제 하루를 또 무사히 살았는데, 만일 오늘밤에 자다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 영세도 하기 전에 죽으면 어떻게 하나?’ 이러한 생각이 나서 ‘주여! 나를 오늘날까지 보호해 주신 것처럼 오늘밤도 보호해 주시어 무사히 자고 내일의 새날을 보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영세의 은혜를 하루 속히 내려 주옵소서!’ 하고 기도를 하였다.

 

(7) 최후의 승리

8월 15일은 가톨릭 교회에서 성모께서 승천하신 것을 기념하는 큰 축일이다. 성모께서 원죄 없이 모태에 배이신 것을 기념하는 무염시태 (無染始胎)축일인 12월 8일에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고, 성모께서 승천하신 날에 일본이 항복을 하고, 한국이 해방이 되었다는 것은 우연한 일치라면 그만이지만 가톨릭 측에서는 성모께서 한국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증거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한국 땅을 순교의 피로 물들인 약 1만 명의 치명자들의 영혼이 천국에서 끊임없이 한국을 위해서 기도하여 주신 결과인지도 모른다.

1943년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 이 날에 영세를 하도록 신부님과 약속이 되었다. 그러나 완전한 신자가 되어서 이 축일을 지내게 하기 위해서 영세는 대개 그 전날 하게 된다. 그리고 영세를 하려면 찰고(擦考 : 새로 세례를 받을 예비 신자에게 영세를 받을 준비가 다 되어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하는 일)를 해야 한다. 즉 영세할 자격이 있는지 교리에 대한 지식을 시험하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시험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근 일 년 동안이나 시험해 보았으니 이보다 더 상세하고 엄격한 시험이 또 어디 있으랴? 뿐만 아니라 일 년 동안이나 신부님하고 마주앉아 교리 싸움을 해오는 동안에 두 사람은 친밀한 친구가 되어 버린 이때에, 시험을 하는 것이나 시험을 받는 것이나 피차에 어색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찰고를 받기로 하였다. 나는 예외의 취급을 받고 싶지가 않았다. 지금까지 영세는 안 했더라도 모든 생활을 천주교 신자와 똑같이 하노라고 해 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똑 같은 과정을 밟고 싶었다. 또 이것은 나의 겸덕을 위해서도 필요하였다. 남들이 영세하기 전에 찰고를 한다면 나도 영세하기 전에 찰고를 해야 한다.

 

8월 13일 저녁을 먹고 우리 부부는 소위 영세찰고를 받기 위해서 성당에 갔다. 어린 아이들까지 전 가족이 일제히 영세를 하려고 하였으나, 때마침 큰 아이들 둘은 원산 큰댁에 가 있었고, 세 살 난 셋째 딸만 같이 하게 되었다. 더운 여름날 밤이었다. 시험관과 두 수험생은 종각 밑 시원한 돌층계에 걸터앉아, 모기를 날리며 찰고를 하였다. 찰고는 통과되었다.

 

이제는 본명(세례명)을 정하는 것과 대부 대모를 정하는 것이 남았다. 나는 전교를 좋아한다고 해서, 일본까지 전교를 오셨던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로 정해 주시고, 내 처는 성모 마리아의 어렸을 적부터 동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가실 때 그 얼굴에 땀과 먼지와 침과 피가 흘러 있음을 보고, 용감하게 병정들을 헤치고 들어가서 예수님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 드린 ‘베로니카’로 정해 주시고, 어린애는 대모인 윤 데레사의 청으로 ‘데레사’로 정해 주셨다.

그리고 나의 대부는 본당 회장인 한상중 씨, 내 처의 대모는 신부님의 누님이신 방순경 선생님, 어린애의 대모는 윤 데레사 선생이 되어 주셨다.

그 이튿날 8월 14일 저녁에 수십 명의 영세자와 같이 감격의 영세를 받았다. 영세 예절이 끝난 다음 모두들 와서 축하의 인사를 해 주었다. 아! 이제는 완전히 그리스도의 몸인 천주교회의 한 지체가 되었다. 오늘이야말로 오랫동안 싸워 오다가 모든 장애와 교리의 난문제와 모든 난관을 정복하고, 최후의 승리를 얻은 날이다. 1935년 여름에 누님의 개종을 보고 자극을 받은 때부터 만 8년 만에 획득한 승리이다.

나는 천당에서 기뻐해 주실 영혼들을 생각해 보았다. 나의 어머니 안나가 기뻐해 주실 것이요, 나의 전처 루치아가 기뻐해 줄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내가 영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기뻐해 줄 사람은 누구보다도 원산에 있는 나의 누님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