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신비한 도성
MISTICA CIUDAD DE DIOS
VIDA DE LA VIRGEN MARIA
가경자 아그레다의 마리아
Maria de Jesus de Agreda
제 5 장
예수님께서 안나와 가야파 앞에 끌려가시다
예수님은 꽁꽁 묶여 겟세마니 동산에서부터 대사제 안나스의 관저까지 끌려 다닙니다. 유다는 자신의 선생은 마법을 사용하여 간단하게 밧줄을 풀고 빠져나올 수 있다고 병사들과 종들에게 일러줍니다. 루치펠과 그 패거리들은 몰래 주님에 대해 무례함을 끝까지 행사하도록 꼬드깁니다.
사람들은 루치펠의 악의에 기꺼이 가담합니다. 전능하신 분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들의 창조주의 인성(人性)에 분노를 터트립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목에 무거운 쇠사슬을 걸고 허리에 돌립니다. 사슬의 양끝에는 동그란 모양의 철이 붙여져 있고 이 동그란 모양의 철은 창조주의 수갑으로 채웁니다.
따라서 양손은 뒤로 꼭 묶입니다. 이 사슬은 대사제 안나스의 관저 지하 감옥의 뚜껑을 열 때 사용되던 것입니다. 손을 묶었는데도 아직도 성이 안찬 사람들은 튼튼한 밧줄로 주님의 목에 걸어 가슴부위에서 교차시켜 뒤로 커다란 매듭을 만들고 두 끝을 앞으로 가져가 사람들이 주님을 여기저기서 마음대로 쭉 잡아당기게 합니다. 또 다른 밧줄로 주님의 팔에 감고 허리를 꽉 묶어 양끝을 뒤로 가져와 뒤쪽으로 주님을 강하게 끌어당기도록 합니다.
구세주는 적을 전멸 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감추고 구원이 더욱 열매 맺도록 루치펠과 지옥의 군대세력이 조장한 불신(不信)의 격노를 터트리는 대로 두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안나스 앞에 끌어냈을 때에는 이미 사형죄인으로 건넨 것입니다. 사형죄인은 이처럼 묶는 것이 당시의 습관이었기 때문에 주님의 사형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성을 모독한 사제 안나스는 큰 방의 집정관 의자에 몸을 젖히고 거만한 채로 있었습니다.
안나스 옆에는 루치펠과 많은 악마들이 와 있습니다.
거만한 태도로 이 대사제는 주님에게 주님의 제자들과 가르침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주님의 대답을 끌어내어 주님을 사기꾼으로 몰아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겸손하고 확실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말하고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치고 아무것도 비밀로 하지 않았다. 내 말을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시오. 사람들은 내 말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영원하신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으로서 주님은 말씀하시고 가르침의 명예를 지켰습니다. 대사제의 종의 한 사람이 손을 들면서 뛰어와 주님의 흠숭 받아야 할 얼굴을 때리고 외칩니다.
“대사제에게 뭐라고 말하는 거야” 주님은 그 종을 위해 기도하고 다른 쪽 뺨도 맞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그 이상의 욕을 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쁜 가르침을 가르쳤다면 그 증거를 대시오. 좋은 가르침을 가르쳤다면 왜 나를 때리는 것입니까.” 주님의 목소리는 하늘을 진동하게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안나스의 관저에 도착하였는데 얼굴을 아는 요한만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한참 뒤에 베드로도 들어갔습니다.
관저 재판소 사이로 연결되는 기둥 밑에 두 사람은 서 있었습니다. 추웠기 때문에 베드로가 장작불 옆에 오자 여종은 베드로의 슬픈 얼굴을 눈여겨보고 그 옆으로 와서 베드로가 주님의 제자인 것을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 죄인의 제자가 아닌가?” 베드로는 매우 당황하며 창피하기도 하고 두려워하며 말했습니다. “나는 제자가 아니다” 슬금슬금 도망쳤습니다. 주님이 가야파의 관저로 끌려가실 때 베드로도 따라갔으며 거기서 두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베드로의 부인은 주님에게 있어 매 맞는 것보다 더 괴로웠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위해 영원하신 아버지께 기도하고 세 번째의 부인 후에도 베드로를 용서해주시도록 성모님의 중개도 부탁드렸습니다. 처음부터 보고 계신 성모님은 사랑, 감사, 흠숭, 존경과 예배에 몰두하고 계셨으며 베드로의 잘못에 울며 슬퍼하고 주님이 베드로를 과실에서 일으켜 세워주시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기도를 계속합니다.
안나스 관저에서 가야파 관저로 주님을 끌고 돌면서 지옥의 영들과 무자비한 인간들은 주님께 모든 잔혹한 짓을 합니다. 대사제들과 종들이 함성중에 주님이 입장하시는 것을 보고 웃으며 나뒹굽니다. 주님은 그들 손안에 있어 도망치거나 숨을 수도 없습니다. 대사제 가아파는 생명의 창조주를 질투와 증오보다 죽여 버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높은 단의 옥좌에 몸을 젖히고 거만하게 앉아 있는 대사제 주변에는 안나스의 관저에서부터 따라온 루치펠과 부하 악마들이 모두 모여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인들이 피에 굶주린 이리처럼 부드러운 하느님의 어린양을 둘러싸고 흥분해있습니다. 그들은 매수한 증인을 불러내어 주님에 대한 증언을 말하게 했습니다(마태 26,59).
거짓 증인들은 고발과 증언을 주장합니다만 서로 말이 맞지 않거나 주님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들의 중상모략과 비방에 대해 그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침묵에 참을 수 없게 된 가야파가 일어나 말했습니다. “너를 고발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대해 왜 답하지 않는가?” 주님은 가야파에 대해서도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가야파도 다른 무리도 주님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주님의 대답을 악용하여 주님을 덫에 걸어 갈릴레아인인 주님의 재판을 더욱 그럴듯하게 보여 주님의 사형을 정당화 하도록 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겸손한 침묵은 가야파를 매우 화나게 했습니다. 대사제들을 선동하는 루치펠은 주님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봅니다. 용이나 뱀으로 불리는 루치펠은 주님을 조바심 나게 하여 말하게 하고 주님이 진정한 하느님인지 어떤지를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때문에 루치펠은 가야파를 격노의 끝으로 몰아 몹시 거드름을 피우며 질문하게 합니다.
“살아있는 하느님에 의해 너에게 명령한다. 네가 그리스도, 축복받은 자, 하느님의 아들인지 어떤지를 말하라.” 이 질문은 가장 깊은 어리석은 행위이며 두려워해야할 신성모독입니다. 주님에 대한 의심은 정확한 일치와 정의에 근거로 전혀 다른 방법으로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하느님이라는 말이 신성을 모독하는 자의 입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마음속으로 하느님을 숭배하고 하느님의 이름을 공경하기에 대답하십니다. “너의 말과 같다. 나는 그리스도이며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는 볼 것이다(마태 26,64).
이 대답이 자신의 의문에 대한 답인 것을 대사제는 생각지도 않고 분노하여 다시 한 번 일어나서 하느님의 명예를 지키는 열심함을 나타내는 연기로서 자신의 제의를 찢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이놈은 신성을 모독했다. 또 다른 증인이 필요할까! 보라, 지금 당신들은 모독하는 말을 들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마태 26,65)”
대사제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드님인 확실한 사실을 부정했습니다.
자신의 직권에 의해 이 위대한 진리의 지혜를 선언을 하지 않은 대사제야말로 신성을 모독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정부 고관들과 고위성직자들의 언동에 의해 일반인은 선동되어 큰소리로 외칩니다.
“이자를 사형에 처하라(마태 26,66), 죽여라, 죽여라” 악마의 분노에 움직여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장 온화한 주님을 덮쳤습니다. 얼굴을 때리고 발로차고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목을 손으로 때립니다.
이 모든 짓은 범죄자 중에서도 가장 비천하고 가장 악한 자에 대해 하는 짓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의 모든 모욕과 비난과 경멸을 성모님은 보시고 체험하게 됩니다. 동시에 몸의 같은 곳에 같은 고통과 상처가 생긴 것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에 의한 것입니다. 인간 생리학의 원칙에 의하면 성모님의 엄청난 슬픔과 걱정은 치명적이었습니다만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 도움 받아 아드님과 함께 고통을 받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구원의 주님이신 아드님의 성심(聖心)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것도 성모님뿐입니다. 하느님이신 주님이 자신의 인성(人性)에 있어서 수난 받았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깊은 동정을 받고 있습니다.
이전에 산 위에서의 가르침으로 약속하신 대로입니다.
“행복할 것이다. 고난과 고통을 참는 자, 나를 본받아 기뻐하고 사람들의 마음과 선의의 나라를 소유할 것이다. 행복할 것이다.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는 자, 이해와 생명의 빵을 받고 영원한 기쁨과 행복의 열매를 수확할 것이다.” “행복할 것이다. 의와 진리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 은총과 영광과 나라에서 너의 요구를 훨씬 뛰어넘는 만족을 나는 줄 것이다. 행복할 것이다. 용서와 사랑으로 나를 본받고 공경하며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자애 깊은 자여 너를 위해 아버지의 자애가 함께 하시길 나, 마음으로 기도드린다.
행복할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자, 육욕을 십자가에 매달기 때문에 너는 평화를 얻을 것이며 나의 신성(神性)을 나타내고 나를 닮은 자가 되어 내가 생명에 관여하는 것에 함께 함을 나, 약속한다. 행복할 것이다. 평화를 바라는 자, 자신의 권리를 타인에게 양도하고 악의 있는 사람들에게 반대하지 않고 성실과 정숙의 마음을 가지기 때문에 너를 내가 아들로 맞아들인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는 내가 천국을 상속하는 행복한 자가 되리, 나와 함께 영원히 살리라.
기뻐하라. 가난한 자, 위로 받을 것이다. 작은 자들, 이세상의 미움 받는 자여, 영광을 받을 것이다. 속셈을 가지고 속이는 바빌론의 거만함과 화려함을 싫어하고 허영을 버려라. 고난의 불과 물속을 빠져 나와 나에게로 오라. 나는 빛과 진리이며 영원한 안식과 행복에로 너를 인도하리.”
주님이 심한 짓을 당한 것으로 인해 이 대사제들과 성직자들의 분노는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한 밤중이 지나고 있기 때문에 이 악인들은 구세주가 밤중에 도망가지 않도록 확실하게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밧줄로 묶인 채인 주님을 가장 대담한 도둑과 범죄자들을 위한 지하 감옥에 가두고 열쇠를 걸었습니다. 거기에는 빛도 들어가지 않고, 불결하고 악취가 나며 몇 년간이나 더러운 채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모후의 말씀
나의 딸이여, 잘 들으십시오. 영원하신 아버지는 이 세상을 쓸어버리고자 생각하실 정도로 화가나 계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면서 따르지 않는 교회의 자녀들을 엄중하게 벌할 생각입니다. 아버지의 노여움을 달래드리고 벌을 늦추는 것은 나의 중재와 내가 아버지에게 바치는 아드님의 공덕, 이 두 가지 밖에는 없습니다.
다윗의 말처럼(시편 69,21), 슬픔이 되시는 주님을 위로하는 자는 소수입니다. 완고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심판 날에 자신들이 주님에 대해, 나에 대해, 자신에 대해 비인간적이고 잔혹하다는 것을 슬퍼할테죠. 인류를 영원하신 아버지에게 화해시키고 아버지의 은총을 다시 받게 하기 위해 주님이 어느 정도 고통 받으셨는지 잘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의 피 값으로 되산 자 그리고 내가 어머니의 태안에서 잉태 때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의 구령을 위해 구한 모든 것을 잊어버리든가 또는 파괴하고 망가뜨려버리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울고 괴로워하십시오.
주님의 거룩한 교회 안에 신심 깊은 것처럼 보이고 주님을 비난하는 위선과 신성을 모독하는 사제들을 따르는 많은 신자들이 있는 것을 슬퍼하십시오. 자만한 자와 부자가 존경 받고 탐욕과 허영이 번성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신앙은 저지당하고 많은 가톨릭 신자에게 있어서 신앙은 활발하지 못하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죄를 생각하고 수난 때와 전 생애동안 내가 한 것을 당신도 속죄하기를 나는 원합니다. 사람들의 신성 모독을 속죄하기 위해 나는 주님께 빌었습니다. 사람들의 비방에 대해 나는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불신앙에 대해 나는 신덕(信德)을 실행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약함 때문에 쓰러진다면 자신의 과실을 한탄하고 바로 나의 중재를 청하십시오. 보통의 과실의 대상으로부터 고난을 참고 어떤 괴로움도 기뻐하고 받아들이십시오. 괴로움, 병, 타인으로부터의 괴롭힘, 육욕이라든가 이 모두가 보이든 안 보이든 적으로부터의 공격일지 모릅니다.
이제부터의 괴로움으로 모든 신앙을 희망과 고결한 감정에 의해 참고 인내하십시오. 참으면 빛을 보고 진리를 깨닫고 보이는 사물로부터 마음을 해탈시켜 주님께 향하게 합니다. 주님은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오셔서 함께 괴로워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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