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신비한 도성

5서/ 제 5 장 성모님 아드님을 성부께 희생으로 바치심. 예수 나자렛을 떠나다(하느님의 신비한 도성)

Skyblue fiat 2017. 3. 17. 00:46

 

하느님의 신비한 도성

​MISTICA CIUDAD DE DIOS 

VIDA DE LA VIRGEN MARIA

 

가경자 아그레다의 마리아 

Maria de Jesus de Agreda

 

 

5

성모님 아드님을 성부께 희생으로 바치심. 예수 나자렛을 떠나다

  

 

 

 

우리의 위대한 여왕인 성모님의 하느님 아드님에 대한 사랑은 성모님의 감정과 행동을 측량할 표준의 척도입니다. 이 표준은 인간도 천사도 측량할 수 없습니다. 일단 설명을 하자면 성모님은 예수를 영원하신 아버지의 아드님을 하느님으로서 사랑했습니다.

아드님은 성모님의 효성스런 아들이고 가장 큰 은혜자이기도 했습니다. 아드님은 성모님을 모든 피조물보다 가장 높으시고 하느님의 보물을 주시고 피조물을 지배하는 권리도 주셨습니다.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도 주시지 않은 이 은혜에 대해서는 성모님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지순, 겸손, 신심 깊고 주의 깊고 쉬지 않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주님의 사랑의 학교에서 주님이신 선생을 본받았습니다.

성모님은 정의의 태양인 주님의 빛을 받아 빛나는 만월(滿月)같습니다. 성모님은 모든 피조물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태양의 빛에 의해 완전히 변모되셨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되돌려 드리는 것으로서 성모님의 모든 사랑과 희망을 하느님께 내어드렸습니다. 영원하신 아버지가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도록 명령을 하셨던(창세 22,2)것처럼 아드님을 희생으로서 바치는 것입니다. 그 희생의 때가 가까워 오는 것을 성모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때 아드님은 서른 살이 되었기 때문에 아드님이 인류의 대속을 하는 때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성모님은 환시에 싸여 거룩한 삼위일체 앞에 불려간 것같이 생각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씀이 있었습니다.

마리아, 나의 딸이여, 정배여, 나에게 너의 외아들을 희생으로서 봉헌하라.” 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이 전해지고 지극히 거룩하신 아드님의 수난과 임종에 의한 인류구원의 명령과 구세주의 설교와 공생활 중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보였습니다.

이 지식이 성모님의 영혼 안에서 갱신되고 완성이 되면 순종, 겸손,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 아드님이 괴로워하시는 것에 대한 연민과 잔잔한 슬픔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결코 당황하지 않는 고결한 마음으로 성모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에게 대답했습니다.

영원하신 주님, 무한한 지혜와 선()이신 전능하신 하느님, 모든 것은 당신의 자비와 선()의 덕분으로 존재합니다. 당신은 모든 것에 불멸하신 주님이십니다. 아드님을 희생으로서 건네도록 명령하시는 것은 어떠한 것입니까? 영원하신 아버지시여, 아드님은 당신의 것입니다.

영원하신 아드님을 낳고 영원히 소유하고 계십니다. 저의 태안에서 저의 피로 인간으로서 아드님의 모습을 만들고 제가 아드님에게 젖을 먹이고 엄마로서 역할을 다 했다 하더라도 아드님의 거룩한 인간성 또한 당신의 것입니다. 제 존재의 모든 것과 제가 아드님에게 드린 것 또한 당신께로부터 받았습니다.

당신의 것이 아닌 것을 제가 당신에게 바칠 수 있겠습니까? 지극히 높으신 주님이시여, 장대하고 자비하신 당신은 피조물에게 무한한 보물을 아주 많이 주셨으므로 당신의 독생자를 당신에게 돌려드리는 것을 당신은 원하고 계십니다.

아드님은 저의 덕()중의 덕(), 저의 영혼의 생명, 저의 기쁨의 전부이십니다. 아드님은 진가를 아는 단 한 사람인 당신의 아드님을 당신께 돌려드리는 것은 아름다운 희생이 됩니다만 아드님을 잔혹한 적의 손에 넘기고 피조물이 귀중한 생명을 노리는 것은 엄마인 저로서는 아주 큰 희생입니다.

그러나 저의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이 뜻대로 행하시도록, 인류에게 하느님 아드님의 자유가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이름이 모든 피조물에게 알려지고 흠숭 받으실 수 있도록. 저의 태안에서 태어나신 아드님을 봉헌하고 당신의 변함이 없는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아드님이 아담의 자식들의 과실에 의한 죄와 벌을 속죄하도록.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가 예언한 것이 아드님의 죽음에 의해 성취되시도록 기도드립니다.”

 

이 희생은 천지 창조 이후 세상의 끝에 이를 때까지 가장 효과가 있는 유일한 최대의 희생입니다. 성모님의 희생은 아드님의 희생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 있어서 아드님의 생명은 자신의 생명보다도 소중했습니다. 성모님의 아드님에 대한 사랑의 깊이는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향한 사랑의 척도로서 측량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니고데모에게 하느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인간들에게 보내시어 하느님을 믿는 자는 누구나 멸망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3,16).

우리들의 구원도 마찬가지로 성모님의 덕분입니다. 성모님이 우리들을 매우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아드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성모님의 뜻은 영원하신 아버지의 뜻과 일치합니다. 성모님의 희생에 대한 보답으로 거룩하신 삼위일체는 슬픔의 성모님을 위로하시며 영원하신 아버지의 뜻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그 때문에 성모님은 하느님의 환시에 싸여 하느님을 직감적으로 보았습니다. 사람이 되신 말씀의 대업을 이해하고 대업이 하느님이 되신 것을 보고 기뻐하며 자신의 아드님을 아버지께 바치고 약속을 다시 한 번 새롭게 했습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굳은 인내를 가지고 아드님의 공동구속자와 협조자가 되도록 하느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이 환시에 의해 성모님은 아드님과 이별의 준비를 했습니다. 아드님은 세례를 받고 그리고 광야에 가서 단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드님은 성모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 나는 당신에게서 나서 인간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태안에서 인간인 종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젖을 먹이고 나를 기르고 고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보통 의미의 아들 이상으로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내가 영원하신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것에 동의해 주십시오.

 

어머니의 곁을 떠나 구속 사업을 시작하는 때가 왔습니다. 휴식은 끝나고 아담의 자식들을 구하기 위해 고통 받는 때가 온 것입니다. 어머니의 도움을 얻어 아버지의 대업을 성취하고 싶습니다.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준비할 때 어머니는 나의 반려, 협조자가 되도록 되었습니다. 내가 지금 헤어져도 나의 축복과 보호는 어머니에게 남아있습니다. 나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의 도움과 동반을 부탁드립니다.” 이때 두 분은 크게 울었습니다. 주님이신 아드님은 팔을 성모님의 목에 감고 두 분 다 고통과 인내의 큰 인물로서의 위엄과 기질을 준비했습니다. 성모님은 아드님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대답했습니다.

 

나의 주님이신 영원하신 하느님, 당신은 틀림없이 나의 아들입니다. 당신은 사랑이 충만하고, 나는 그것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내가 도울 수 있다면 또는 내가 당신을 위해 몇 번이라도 몇 번이라도 죽는 것이 가능하다면 나의 생명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나의 뜻이 아니라 영원하신 아버지의 뜻이 성취되도록. 그것을 위해서 나의 의지를 희생으로 드립니다. 나의 희생을 제발 받아주십시오.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에 내가 같이 할 수 없는 것만큼 나에게 있어 괴로운 것은 없습니다.” 성모님은 아드님에게 여행에 필요한 음료를 건네주고 싶었습니다만 아드님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성가족의 볼품없는 집의 출구에서 성모님은 다시 한 번 무릎을 꿇고 아드님의 축복을 받고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드님은 요르단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헤매는 양을 찾아서 어깨에 메고 영원한 생명으로 데리고 가기 위함입니다.

 

그때, 우리 주님은 서른 살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의 스승인 하느님은 세상의 구원을 위한 행보를 서둘러 고통의 시간을 짧게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구세주가 받을 수난과 십자가에 의해 우리에게 행복을 주신 것은 주님의 한없는 사랑과 선()에 의한 우리들의 행복을 소중하게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모후의 말씀

 

나의 딸이여, 아드님의 수난과 십자가에는 대단한 가치가 있고 십자가의 길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가치가 있는 것을 나는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나 자신도 아드님을 따라 아드님의 슬픔과 고통 전부를 함께 받을 수 있도록 아드님에게 허락을 구하고 받았습니다.

이 고통의 기간 하느님이 언제나 주시는 기쁨을 거두어 주시도록 부탁하고 그렇게 받았습니다. 아드님은 나를 마음으로 사랑하고 계셨기 때문에 나의 이 부탁은 아드님의 희망이기도 했습니다. 기쁨이 없어지자 아드님은 남남처럼 대하시며 나를 카나의 혼인 잔치와 십자가형 때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중에 거의 모두는 자기희생과 십자가를 향한 참 진리의 길을 싫어하고 무서워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참된 최고의 축복을 잃어버립니다. 수난은 죄로부터의 회복을 위한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에 괴로움을 피하는 한은 회복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고통과 슬픔에 의해 죄의 그림자는 감소하고, 정욕은 부서지고 자랑과 교만은 낮아지며 감각은 조절 되어 악을 행한 경향이 없어지게 됩니다.

자유의지는 이성에 의해 틀 속에 들어가게 되고 정욕에 몸을 맡기는 일은 없게 되겠죠. 하느님의 자애는 고통 받고 슬퍼하는 사람들 위에 내려집니다. 이 고통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과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은 어리석거나 제 정신이 아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