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파이어 푸른빛의 남자(The Man in Sapphire Blue )- 자비/비전 1
힐데가르트는 이 조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아주 고요한 빛 속에서 푸른빛 옷을 입은 남자가 섬광으로 타오르고 있다.”1 우리는 이 만다라에서 평화와 힘이 넘치는 체험을 한다. 푸른색은 그 푸른빛 남자의 손길이 그런 것처럼 자비가 치유와 원조의 손길을 널리 펼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손길은 정형화된 순종처럼 수직적이고 수축적인 것이 아니라 확장적이다. 그의 둘레에는 에너지 장(Energy field)이 에워싸고 있다. 그는 분명 육체 안에 영혼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 안에 육체”를 지니고 있다. 힐데가르트와 후대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영혼의 에너지가 더 큰 실체로 변하는 에너지 배분 방식으로 설명한다. 이 남자의 머리에 난 구멍을 눈여겨보면 강력한 치유의 에너지가 그로부터 벗어나 타인에게로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비전에 대해 어떤 아메리카 원주민은 오직 하나의 입구와 출구가 있는 성스러운 원을 상기하게 된다고 한다. 황금빛으로 된 원의 내부처럼 벽걸이용 융단은 그에게 뜨게질 바구니와 서남부의 인디언 의식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주의 집은 찬미를 받으며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된다.
힐데가르트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성삼위를 표현한다. “성부는 밝음이다. 이 밝음은 빛을 퍼져나가게 하며 퍼져나가는 빛 속에 불을 담고 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를 이루고 있다.” 이 비전 안에서 힐데가르트는 창조주를 ‘생생한 빛’으로, 성자를 ‘빛의 퍼져나감’으로, 성령을 ‘불’로 생각한다. 그녀는 성령의 불이 모든 사물을 하나로 묶어준다고 한다. “성령은 밖으로 흘러 나와 영원과 평등을 하나로 묶어준다. 이는 개체들을 묶어 하나의 다발로 만드는 것과 같다. 만약 개체들이 하나로 묶이지 않는다면 다발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것은 별개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2 이 그림에서 금빛과 은빛의 원은 밧줄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동인도에 가는 밧줄과 실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우주론을 설명하는 오랜 전통이 있다고 한다. “밧줄과 실은 <모든 생명체 즉 우주와 인간의 일치>를 이루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원초적인 이미지는 우주의 구조와 인간의 특정한 정황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밧줄과 실의 이미지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나름의 본성에 따라 최상의 원리에 의해 구성되고 투영되며 생성되는 것을 나타낸다. 즉 때가 되면 모든 존재는 자신의 거푸집을 짜고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3
힐데가르트도 ‘우주의 거푸집’을 여러 번 거론하고 있다. 따라서 그녀의 황금빛 밧줄은 창조와 인류, 모든 존재와 신성의 상관관계를 말한다. 그녀는 빛과 빛의 퍼져나감과 불의 삼위일체에 대해 그리고 성령의 불을 통해 하나가 되는 원리에 대해 설명한다. 힐데가르트는 지혜와 자비를 동일시한다. 왜냐하면 지혜에 반하는 어리석음이란 “모성적 자비가 부족한 것이며, 자비가 부족하면 누구나 메말라 죽어가기 때문이다.”4 그러기에 힐데가르트는 물을 상징하는 푸른색을 선택했다. 푸른색은 자비로 충만한 우주의 지배적인 색조이다.
힐데가르트는 이 만다라를 성 삼위일체로 이해하여 “하나의 빛, 세 위격, 하나의 하느님”이라 선포한다.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이미지를 둥근 원으로 표현하는 것은 힐데가르트에게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고대의 전통에서 여성적인 종교는 신성을 원으로 또는 활동적인 원 즉 나선으로 표현한다. 힐데가르트는 어느 책에선가 “바퀴를 보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함을 자아내는 신성은 바퀴와 원과 전체성이 상징하는 것처럼 전지적(全知的)이며 전능(全能)하다. 신성은 이해될 수도 분리될 수도 없으며 시작도 끝도 없다. 원이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포용하듯이 신성도 모든 것을 포용한다.“5라고 썼다. 원으로 상징되는 하느님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모성적인 이미지이다. 라틴어와 독일어에서 여성형을 취하는 신성(Godhead)이란 단어는 신성을 표현하는 모든 이름을 포용한다. 여기서 원의 이미지와 같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하느님의 권능과 친근함을 찬양하려 한다. 힐데가르트는 친근함에 대해 “하느님이 당신을 껴안는다. 당신은 하느님의 신비스런 팔 안에 안겨있다.”6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권능은 추상적이거나 복수를 위한 권능이 아니라 모성적이며 애정 가득하고 대자대비한 권능이다. 그 권능은 자비로 충만되어 우리의 삶이나 우주에서 결코 배제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이 원을 분리하거나 배척하거나 한계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7
힐데가르트는 지혜와 자비를 동일한 것으로 본다. 언젠가 그녀는 잘츠부르그(Salzburg)의 대주교에게 모든 일이 지혜의 샘에 깊이 잠겨들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왜냐하면 지혜는 사랑과 같아서 모든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고 스스로 수많은 지류를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인격화된 지혜는 ‘나 홀로 창공을 둥글게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지혜로워지고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그대의 마음에 자비가 흘러 넘쳐 타인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깨끗이 치유해줄 때 사랑은 그대에게 다가설 것이다. 그대가 선의의 마음과 신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순박하며 정직한 사람들을 대할 때 사랑은 애정어린 우정으로 그대와 결합할 것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우주의 자비와 인간의 자비가 어떻게 하나로 결합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지혜는 사람을 위해 천상에 속한 것과 지상에 속한 것을 하나로 묶어준다. 그러니 그대는 병든 이의 상처를 간호하고 치유해줘야 하며 순수함과 정의로움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대의 마음은 타인과 하나된 기쁨을 누릴 것이다.”8 힐데가르트에게 있어 자비는 실천적이어서 우주와 고통받는 인간의 육체를 하나로 묶어준다. 자비는 정화시키고 지탱해주며 찬미를 바치게 한다. 힐데가르트는 프레데릭 바르바로사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자비의 통치자이며 최고 심판관이신 분을 본받으라.”9고 권고하였다.
힐데가르트의 영성과 창조 중심의 전통에서 하느님과 우주와 인류의 궁극적인 능력은 바로 자비이다. 힐데가르트의 뒤를 이은 에크하르트는 140년 뒤에 “여러분은 하느님을 사랑이라 또는 선(善)이라 부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 가장 적합한 이름은 <자비>입니다.”10라고 말했다. 힐데가르트는 신적인 자비의 능력을 우리 자신과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신성이 인류를 향해 있기에 우리 모두는 신적인 자비를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비가 인간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적고 있다. “나의 내면은 자비로 넘쳐 흐르고 있다. 그러니 금이나 돈이나 귀금속 또는 진주를 받는 때면 나는 생필품이 부족하여 흐느끼는 가난한 이들의 눈망울을 외면할 수 없다.”11 그녀는 자비의 중재에 대해 아주 적극적이다. 타인의 고통과 타인과의 관계 심지어 타인에 대한 찬미에서 우리를 떼어놓는 것은 바로 자기 만족이며 안락함이다. 힐데가르트에게 있어 자비는 우리와 모든 창조물이 맺고 있는 관계를 내포하며 우리의 세계관을 구성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자비를 있는 그대로 또는 상호연관성을 지닌 것으로 보고 있는가? 아니면 이를 소유와 인식의 관계처럼 이분법적으로 보고 있는가? “나는 ...과 <관계을 맺고 있다.”>가 아니라 “나는 ...<을 소유한다.>”라고 생각하는가? 힐데가르트가 “인류는 자비 가득한 신뢰의 눈으로 창조와 창조주를 바라본다. 인류가 살아있는 모든 것 안에서 인식할 수 있는 존재는 바로 하느님이다.”라는 말을 했을 때 그녀는 모든 창조물을 통해 신뢰와 존경과 자비가 넘친 존재를 찬양하는 것이다.12 따라서 그녀에게 있어 모든 창조는 곧 신의 현현이며 신적 계시의 근원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자비가득한 신뢰”의 눈으로 창조를 바라볼 때만 가능하다.
힐데가르트가 이 만다라에서 아주 열정적으로 설명한 삼위일체론은 신적 자비가 세상에 들어오는 입구와 같다. 힐데가르트의 그리스도론은 “푸른빛의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통해 명확해지고 풍부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자비의 현현이다. 인간으로 변모된 하느님의 자비는 인성을 통해 특별한 빛을 내뿜는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하느님의 모성적 사랑이 인류에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자비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가 “자궁”13이란 단어와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는 것을 상기할 때 힐데가르트가 자비를 모성적 사랑으로 규정하는 것은 전통에 충실한 것이다. 이 그림에서 삼위일체의 모든 에너지는 만다라의 중앙에 있는 푸른빛 남자의 영향력과 치유력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힐데가르트는 삼위일체를 만다라로 표현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녀는 우리가 어떻게 신성을 갖출 수 있는지, 어떻게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지 알려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실현될 수 있을까? 그것은 이것이 만다라의 본질이며 힐데가르트가 의식적으로 이 만다라의 형식을 빌어 성삼위를 표현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동양의 만다라 전문가인 투치 교수는 우리는 단지 만다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변화된다고 한다. 만다라는 “본질적인 형태로 환원된 세상의 기하학적인 투영”이다. 성서와 예언가의 전통에 따라 만다라를 표현하는 힐데가르트에게 세상의 본질적인 형태는 신적 자비의 에너지를 의미한다. 이 본질적인 형태와 연결되는 것은 곧 하느님을 다시 발견하는 것이며 자신과 타인을 위한 치유와 구원을 발견하는 것이다. 투치는 “신비가가 자신을 이러한 본질적인 형태의 중심과 동일시할 때 스스로 변모되어 사명의 완수를 위한 첫 번째 조건을 결정짓게 된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힐데가르트는 자비를 성공의 첫 번째 조건으로 삼으라고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푸른빛의 남자” 즉 그리스도를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주를 위한 에너지의 근원으로 받아들여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 변모된다. 투치는 “만다라를 운용하는 사람은 더이상 우주의 중심으로 되돌아가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정신의 체험에서 만족을 찾지 못한 그는 분산되지 않고 집중된 의식의 일치를 발견하기 위해 그리고 사물의 이상적인 원리를 자신 안에 회복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정신의 집중 상태를 열망하게 된다. 그래서 만다라는 더 이상 우주의 구도가 아니라 정신과 우주의 구도가 된다. 이는 일(一)에서 다(多)로의 분산과 다(多)에서 일(一) 곧 동양의 요가 사상이 우리의 존재 깊은 곳에서 다시 한 번 빛을 발하게 만드는 전체적인 절대 의식에로 재통합되는 구도이다.”14라고 말한다. 힐데가르트는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인격 즉 자비가 빛을 발하게 하라고 권고한다. 그녀가 우리에게 찾으라고 권하는 인격적 일치란 움츠러든 명상의 행위가 아니라 사물의 이상적인 원리로서 인격화된 자비 안에서의 권위있는 명령을 말한다. 그리고 힐데가르트에게는 치유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조명(illumination)은 빛나는 자비를 의미하기에, “하느님의 은총인 자비는 인간을 해와 같이 빛나게 만들 것이다.”15라고 힐데가르트는 선포한다.
투치는 힐데가르트가 이 만다라를 통해 자신과 우리 안에서 완성하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한다. 투치는 이콘(Icon)이나 만다라와 상호관계 속에 있는 사람은 “생명의 원리와 신성의 씨앗과 신비로운 본질을 자신의 중심으로 삼는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타올라 밖으로 흩어지는 빛을 어렴풋이나마 직관하고, 자신의 인격을 그 빛 안에 집중시킨다. 그러면서 그의 인격은 그 빛 주위에서 서서히 완성되어 간다.”16고 말한다. 이 비전에서 힐데가르트는 신성의 씨앗의 실체 즉 신성의 신비스런 본질을 구성하는 삶의 원리로서의 자비를 확장하고 있다. 에크하르트는 신성의 씨앗이 우리 안에 거주하는 방법과 이 씨앗이 하느님을 향해 발전해가는 방법에 대해 찬사를 보내며 힐데가르트는 이 씨앗을 자비라 이름짓는다. 따라서 우리는 만다라를 바라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만다라 자체가 되어야 하며 만다라를 이끌고 가야 한다. 그럼으로써 만다라는 실천적인 자비가 끝없이 확장되는 나선의 소용돌이속으로 우리를 이끌고 들어갈 것이다. 힐데가르트의 말 속에는 “하나의 빛, 하나의 하느님”만이 있으나 우리는 신의 손으로서 신의 자비를 수행하도록 운명지워진 신의 아들딸이다. 에크하르트는 “하느님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자비가 가장 먼저 꽃을 피운다.”17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의 근본을 이루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비, 운명, 일치, 전체성, 치유력 그리고 구원인 것이다. 자비는 온 우주에 넘쳐 흐르고 있다. 힐데가르트는 이 자비가 우리로부터 넘쳐 흐르게 함으로써 최초의 에너지 즉 치유와 찬미와 빛나는 불의 에너지가 세상에 다시 흐르게 하라고 한다.
성삼위를 만다라로 표현하면서 힐데가르트는 신성과 그리스도는 외부에 있지 않으며, 세상이 절실히 염원하는 신성의 빛과 자비도 외부에 있지 않다고 가르친다. 이들은 하느님과 우주의본질인 자비에 집중할수 있는 우리의 능력만큼 우리 가까이에 있다.18
18 역자주; 잉그리트 리델박사는 그녀의 저서 Farben(색)에서 힐데가르트의 파랑색의 이 비전을 이렇게 해석한다. “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던 중세시대에 파란색으로 나타나는 모든 사람은 ”천상적 지식을 지닌 진리에 결속된 사람“의 특징을 갖는다. 그들의 보석은 천상의 힘을 투명하게 비추는 사파이어이다. 하늘을 통해 작용하는 것은 파랑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항상 푸른 망토를 걸친 모습의 마리아는 하늘의 여왕이자 보호 망토 마돈나로 묘사된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인상적인 것은 12세기의 위대한 신비주의자이자 대 수도원장이었던 힐데가르트가 본 비전이다 리델 박사는 자신의 저서의 표지그림으로 이 비전을 선택했다. 참 재미있는 해석은 사파이어 색의 인간형상은 그리스도자신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 형상은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그리스도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적인 얼굴모습을 지닌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차라리” 그녀안의 그리스도“,힐데가르트 수녀 내면의 그리스도상 혹은 사람안에 있는 신의 모상 즉, 신비스런 ” 자아“의 환영을 신과 관련된 사파이어 색의 이 형상에서 추측해 볼 수 있지 않을까하고 말한다. 그렇게 볼 때 그 형상은 융이 말했듯이, 또한 소설 ”말리나“의 꿈 이야기에 나오는 파란 돌이 자아상징이듯이, 가장 내면적 본질의 핵심인 ”자아“ 즉 불교적으로 표현한다면 진아( 眞我)를 상징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Ingrid Riedel, Farben,Kreuz Verlag Stuttgart,1983,pp.6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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