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뜻의 오늘

2016년 8월 1일 "저를 거짓의 길에서 멀리하시고,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

Skyblue fiat 2016. 8. 1. 17:45

 

 

2016년 8월 1일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1 월 (백)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기념 미사
① 예레 28,1-17
㉥ 마태 14,13-21.
또는
① 로마 8,1-4
㉥ 마태 5,13-19.
기념 시간 전례

 

1 월요일 (백)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알폰소 성인은 1696년 이탈리아 나폴리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신심이 두터웠던 그는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사제의 길을 선택하였다. 1726년 사제품을 받은 알폰소는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를 설립하고, 올바른 그리스도인 생활을 위한 설교와 저술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는 나폴리 근처에 있는 고티의 교구장 주교로 활동하다가 다시 수도회로 돌아가 1787년에 선종하였다. 윤리 신학의 대가로 존경받던 알폰소 주교를 1839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입당송 에제 34,11.23-2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내 양 떼를 찾아서, 그들을 먹일 목자를 세우리라. 나 주님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의 교회에 언제나 새로운 덕행의 모범을 보여 주시니, 영혼들을 사랑하는 복된 알폰소 주교의 열정을 본받아, 저희도 마침내 하늘 나라에서 그가 받은 상급을 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백성을 거짓에 의지하게 하는 하난야 예언자와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설전을 벌이고,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하난야가 죽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다(복음).

 

제1독서 <하난야, 주님께서 당신을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백성을 거짓에 의지하게 하였소.>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8,1-17
1 유다 임금 치드키야의 통치 초기 제사년 다섯째 달에, 기브온 출신의 예언자이며 아쭈르의 아들인 하난야가 주님의 집에서 사제들과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에게 말하였다.
2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바빌론 임금의 멍에를 부수기로 하였다. 3 두 해 안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이곳에서 가져가 바빌론으로 옮겨 놓은 주님의 집 모든 기물을, 내가 이곳에 다시 돌려 놓겠다.
4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다 임금 여호야킴의 아들 여콘야와 유다의 모든 유배자를 이 자리에 다시 데려다 놓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정녕 바빌론 임금의 멍에를 부수겠다.’”
5 그러자 예레미야 예언자가 사제들과, 주님의 집 안에 서 있는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난야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6 예레미야 예언자가 말하였다. “아무렴, 주님께서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소! 주님께서 당신이 예언한 말을 실현시키시어, 주님의 집 모든 기물과 모든 유배자를 바빌론에서 이곳으로 옮겨 주시기를 바라오.
7 그러나 이제 내가 당신의 귀와 온 백성의 귀에 전하는 이 말씀을 들어 보시오.

8 예로부터, 나와 당신에 앞서 활동한 예언자들은 많은 나라와 큰 왕국들에게 전쟁과 재앙과 흑사병이 닥치리라고 예언하였소. 9 평화를 예언하는 예언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가 참으로 주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드러나는 것이오.”
10 그러자 하난야 예언자가 예레미야 예언자의 목에서 멍에를 벗겨 내어 부수었다. 11 그러고 나서 하난야는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두 해 안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멍에를 모든 민족들의 목에서 벗겨 이와 같이 부수겠다.’”
그러자 예레미야 예언자는 자기 길을 떠났다. 12 하난야 예언자가 예레미야 예언자의 목에서 멍에를 벗겨 부순 뒤에, 주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내렸다.
13 “가서 하난야에게 말하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무 멍에를 부수고, 오히려 그 대신에 쇠 멍에를 만들었다.′ 14 참으로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 모든 민족들의 목에 쇠 멍에를 씌우고,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길 것이다. 나는 들짐승까지도 그에게 넘겨주었다.′’”
15 예레미야 예언자가 하난야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하난야, 잘 들으시오. 주님께서 당신을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이 백성을 거짓에 의지하게 하였소. 16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오. ‘내가 너를 땅 위에서 치워 버리리니, 올해에 네가 죽을 것이다. 너는 주님을 거슬러 거역하는 말을 하였다.’”
17 하난야 예언자는 그해 일곱째 달에 죽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9(118),29.43.79.80.95.102(◎ 68ㄴ 참조)
◎ 주님,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저를 거짓의 길에서 멀리하시고,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
○ 당신 법규에 희망을 두오니, 진리의 말씀을 제 입에서 결코 거두지 마소서. ◎
○ 당신을 경외하는 이, 당신 법을 아는 이 모두 저에게 돌아오게 하소서. ◎
○ 당신 법령 안에서 제 마음 흠 없게 하소서. 제가 부끄럽지 않으리이다. ◎
○ 악인들이 저를 없애려 노리지만, 저는 당신 법을 마음에 새기나이다. ◎
○ 당신이 저를 가르치셨기에, 당신 법규에서 벗어나지 않았나이다. ◎

 

복음 환호송 마태 4,4
◎ 알렐루야.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 알렐루야.

 

복음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3-21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13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15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16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17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19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20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예물 기도
주님, 복된 알폰소가 자신을 거룩한 예물로 바치며, 이 신비를 거행하게 하셨으니, 저희 마음도 성령의 불로 타오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요한 15,16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하느님, 복된 알폰소가 신자들에게 성체를 나누어 주며, 그 위대한 신비를 충실히 가르치게 하셨으니, 저희가 천상 잔치에 자주 참여하여 끝없이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이에 머물지 않고 허기진 군중에게 빵을 나누어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육신적 아픔, 배고픔까지 모두 해결해 주시기 때문이지요.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셨다는 점입니다. 측은한 마음이 드셨기에 병자들을 고쳐 주고, 배고픈 군중을 한곳에 모이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제자들은 군중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서 먹도록 했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주라고 이르셨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런 관심과 배려가 있으셨기에 빵을 모두 배불리 먹게 된 것이 아닙니까?
우리 사회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 깊어가고, 나눔을 실천하기를 꺼립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공동체는 가진 것을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아픔마저도 함께 나누는 공동체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으셨기에 모든 이가 빵을 배불리 먹은 사랑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지요.
이웃과의 관계에서 매사에 깊은 관심을 두는 것이 사랑의 기적을 만드는 출발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길가의 돌이 보석으로 변하는 식의 기적을 바라기보다는 가진 것을 이웃에게 내어 주는 나눔의 기적에 동참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처럼, 힘든 처지에 놓인 이웃을 늘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136. 빵을 많아지게 하신 첫 번째 기적|그리스도의 시 둘째 해

 

135. 한 율법학자와 말씀하시면서 - 생명***|그리스도의 시 둘째 해

 

 

“시몬아, 침착해라! 우리는 벌써 여러날 동안 조용히 있었다.

그뿐 아니라, 내가 추구하던 목적을 부분적으로는 달성하였다.

그것은 너희들을 가르치고 위로하고, 또 너희들을 진정시켜서

너희와 가파르나움의 바리사이파사람들 사이에 모욕과 충돌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이제는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자.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상주기 위해서. 그리고 이 사랑까지도 우리에게 위안이 되지 않느냐?

우리는 미움에서 오는 것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사랑이 있다. 그러니까 기쁨이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갑자기 잔잔해지는 바람과 같이 진정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얼굴에

분명히 나타나는 소원을 가지고 당신을 기다리는 병자들의 무리가 있는 곳으로 가셔서

병든 어린 자식을 당신께 내미는 율법학자에게 대해서까지도 친절하시고 인내하시며

하나씩 차례로 고쳐 주신다. 그 율법학자가 예수께 이렇게 말한다.

”보십시오. 선생님께서는 도망하시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미움과 사랑은 선생님을 찾아내는 재간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아가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랑이 선생님을 찾아냈습니다.

이제부터는 너무나 많은 사람에게 선생님께서 아가의 신랑과 같으셔서,

마치 아미나답의 순찰대와 사두이륜전차(四頭二輪戰車)들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남편을 찾아 가는 술라미 여인과 같이 선생님께로 옵니다!”

 

“당신은 왜 그런 말을 하시오? 왜?”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선생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선생님께 오는 것은 위험합니다.

로마가 선생님을 감시하고 성전이 선생님을 미워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여보시오, 왜 나를 시험하시오?

당신의 말은 내 대답을 로마와 성전에 보고하기 위한 함정이오.

나는 당신 아들을 고쳐 주면서 당신에게 함정을 파지 않았는데 …”

부드러운 나무람을 듣고 율법학자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며 고백한다.

”선생님께서는 정말 사람들의 마음을 보신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정말 성인이시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사실 저는 다른 사람들이 넣어 준 효모(酵母)가 제 안에서 괴고 있는 동안에 왔었습니다….”

 

"그런데 그 효모는 발효에 적당한 온도를 당신에게서 얻었던 것이지요.”

“예, 그렇습니다.…그러나 이제는 제가 효모없이,

아니 그보다도 새로운 효모를 가지고 돌아갑니다.”

“나도 압니다. 그리고 나는 원한을 품지 않소.

자기 자신의 의지로 죄중에 있는 사람도 많고, 남의 의지로 죄중에 있는 사람도 많소.

정의로우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는데 쓰실 척도가 다를 것입니다.

율법학자인 당신은 의로운 사람이 되시오.

그리고 이후로는 사람들이 당신을 타락시킨 것과 같이 타락시키지 마시오.

세상이 당신에게 압력을 가할 때에는 죽음에서 구해진 당신 아들이라는 살아 있는 은총을 들여다보고,
거기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하시오.”

“선생님께 감사하겠습니다.”

하느님께요. 어떤 영광과 어떤 찬미도 하느님께 드려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메시아이니, 내가 제일 먼저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내가 제일 먼저 하느님께 순종합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공경하고 섬김으로써 스스로 품격을 떨어뜨리지 않고,

죄를 섬김으로써 품위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말씀을 잘 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항상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모든 사람에게. 내가 안나나 가믈리엘에게 말하거나 시골길에서

문둥병자 거지에게 말하거나 똑같은 말이오.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이오.”

“그러면 말씀하십시오. 저희들은 모두가 선생님의 말씀 하나 아니면

선생님의 은총 하나를 애원하기 위해서 여기 왔으니까요.”

 “그들의 신념을 성실하게 지키는 사람들에 대해서

내가 선입관을 가졌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말하겠소.”

“제가 가지고 있던 선입관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성실했습니다.

선생님께 반대하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솔직하오. 그 때문에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이해할 자격이 있소.

그러나 당신의 신념이 아직 죽지는 않았소. 내가 분명히 그렇게 말하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태운 개밀속(屬)과 같소. 표면상으로는 그것이 부수어진 것

같고, 또 사실에 있어서 심한 습격을 받아 약해지기는 했소. 그러나 뿌리는 살았고,

땅이 뿌리에 영양을 주고, 이슬이 뿌리들에게 줄기를 내도록 이끌고,

줄기들은 새잎을 돋아나게 하도록 이룹니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감시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다시 개밀 속에 침범을 당하게 되오. 이스라엘의 목숨은 끈질겨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죽어야 합니까? 이스라엘 잡초입니까?”

“이스라엘은 다시 살아나가기 위해서 죽어야 하오.”

“영혼의 전생(轉生: 영혼이 한 육체에서 다른 육체로 옮아가서 산다고 하는 것)말씀입니까?”

영적인 변화 말이오. 전생은 어떤 종류의 것도 없소.”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유견(?見)을 가지고 있소.”

“그리이스 문화가 이 믿음도 우리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학자들은 이 믿음들을 즐기고, 매우 고상한 양식처럼 이것들을 영광으로 여깁니다.”

“613개의 부차적인 계율 중의 하나를 소홀히 하는데 대하여

저주를 외치는 사람들로서는 터무니없는 모순이오.”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미워하는 것을 본받는 데에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나를 미워하니 나를 본받으시오. 그것이 당신들에게는 더 나을 거요.”

 

율법학자는 예수의 이 엉뚱한 말을 듣고 억지로 미소를 짓는 체 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입을 딱 벌리고 듣고 있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두 사람의 말을 되풀이 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끼리 이야기입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영혼의 전생(轉生)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오류요. 내가 이미 말했소.”

 

“존재하는 것은 파괴될 수가 없기 때문에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에게서 오고,

죽은 자들은 산 자들에게서 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연 영원한 것은 파괴되지 않소.

그러나 당신 생각에는 조물주께서 당신에 대하여 한계가 있는지 말해 보시오.”

“아닙니다, 선생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조물주를 작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바로 말했소. 그렇다면 영이 일정한 수효 밖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조물주께서 영의 전생을 허락하신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소?”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벌써 중요한 영혼의 불멸에 대한 이 생각이,

비록 이교도에게 있어서는 이 불멸이 생겨나는 방식에 대하여는 정확하지 못한

평가라는 오류와 합쳐졌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에서는 완전해야 할 거요.

런데 오히려 반대로 이 생각을 이교적인 주장의 개념에 의해서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축소되고 가치가 떨어지고 사악한 생각이 되오.

 

그것은 그것만이 홀로 영원하신 진리를 스쳤으므로 우러러 볼만한 것으로 나타나고,

인간의 혼합된 성질을 증언하는 어떤 생각의 영광이 되지 못하오.

 

이교도의 경우에는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며 우리를 동물과 구별 짓는

신비스러운 것의 불멸의 생명에 대한 그의 직관 때문에 영광이 되지만 말이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의 지혜와 참 하느님을 알면서,

그처럼 철저하게 영적인 것에 대해서까지도 물질주의적인 것이 되는 생각의 타락이오.

 

영의 이행(移行)은 조물주에게서 인간으로, 인간에게서 조물주께로 가는 것밖에 없소.

조물주께는 사람이 죽은 다음에 삶이나 죽음의 심판을 받기 위하여 가는 거요.

이것이 진리요. 그리고 사람이 보내진 곳에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이오.”

 

“선생님께서는 연옥을 인정하지 않으십니까?”

“왜요? 인정하오. 왜 그것을 묻소?”

“선생님께서는 ‘사람은 보내진 곳에 남아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연옥은 일시적인 것인데요.”

 

“그것은 내 생각으로는 연옥을 영원한 생명과 동일시(同一視)하기 때문이오.

연옥은 벌써 ‘삶’이오. 축소되고 구속되고 했지만 역시 생명이오.

연옥에 일시적인 체류가 끝나면

영혼은 완전한 생명을 얻고 더 이상 한계도 속박도 없이 생명을 누리게 되오.

남아 있는 것은 둘뿐일 거요, 하늘과 -심연. 천당과 -지옥,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지극히 복된 사람들과 -영벌을 받는 사람.

 

그러나 지금 존재하는

이 세 가지 나라에서는 어떤 영혼도 결코 돌아와서 육체를 다시 차지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최후의 부활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영이 육체 안에 들어가 사는 것과

불멸의 것이 죽을 것 안에 들어가 사는 것이 영원히 끝날 것입니다.

그렇소. 어떤 사람이 살기 위하여 창조되는 순간부터 영과 은총과 그의 의지로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소.

그러나 영원에 이르지는 못하오. 일생은 시작을 가정하오.

하느님께서는 시작이 없으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생명’이라는 말은 없소.”

 

“그러면 선생님은요?”

나도 육체를 가졌고, 사람의 육체 안에 그리스도의 영혼을 하느님의 영에 결합시켰기 때문에

나도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살아 계신 분’이라고 말하는데요.”

“과연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모르시오. 하느님은 생명 자체이시니까요.

한없는 생명. 하느님의 생명이 아니라 바로 생명이시오. 이것뿐이시오.

율법학자 양반, 이것은 뉘앙스요, 그러나 지혜와 진리는 뉘앙스로 외관이 장식되오.”

 

“이방인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이방인들에게는 이렇게 말하지 않소. 그들은 알아듣지를 못해요.

그래서 그들에게는 태양을 보여주오.

그러나 마치 그때까지 눈이 멀고 바보였다가 기적으로 눈을 뜨고 총명해진 어린이에게 보여주듯이 보여주오. 따라서 하나의 천체로 보여주고, 그 구성을 설명하기에 이르지는 않소.

그러나 당신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소경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오.

무척 오래 전부터 하느님의 손가락이 당신들의 눈을 뜨게 하셨고, 당신들의 정신을 비추어 주셨소….”

“맞습니다, 선생님. 그런데도 우리는 소경이요 바보들입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된 거요.그러면서 당신들, 당신들을 사랑하는 사람의 기적을 원치 않소.”

“선생님 …”

“율법학자 양반, 이것은 사실이오.”

 

율법학자는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문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를 떠나 더 멀리로 가신다.

그리고 지나시는 길에 여러 가지 빛깔의 조약돌을 가지고 놀기 시작한 마륵지암과

율법학자의 어린 아들을 쓰다듬어 주신다.

예수의 전도는 차라리 이 집단 혹은 저 집단과의 대화이다.

 그러나 그 전도는 모든 의문을 풀어주고, 어떤 생각이든지 다 밝혀 주고,

이미 한 말이나 어떤 사람이 부분적으로 기억한 생각들을 요약하거나 부연하기 때문에 계속적인 전도이다. 그리고 시간은 이렇게 지나간다.

 

 

축복을 내리는 예수

1481년, 한스 멤링(Hans Memling, 1435/40-1491), 목판에 유채, 보스턴 미술관(Bo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