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주님

마음의 평화와 고요는

Skyblue fiat 2015. 6. 21. 07:46

마음의 평화와 고요는

 


왜? 어떻게?

 

 평화의 주창자이며 스위스의 수호성인인 플뤼에의 성 클라우스 수사는 이런 믿음을 늘 간직했었다. 

“평화는 늘 하느님 안에 있다.”

 이것은 그의 깊은 체험에서 우러나온 확신이며 삶의 강령이었다. 그는 수년 동안 고요한 은신처에서 육신의 욕구를 절제하는 가운데 기도에 정진했다. 그리고 영적 조언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께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오로지 영혼의 고요만이 낳을 수 있는 이 평화를 지금 세상은 애타게 찾고 있다. 쉼 없이 움직이고, 고요나 평화와는 거리가 먼 지금 이 세상은 평화를 갈구하고 있다.

 우리의 구세주시며 구원자이신 주님께서도 고요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시고 아버지와 함께 머무셨다. 지금 우리도 주님께서 하신 대로 그렇게 고요를 되찾는다면 어떤 보물을 발견하게 될까? 그때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과 깊이 만나게 되고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처럼 이렇게 외칠 수 있을 것이다.

 “내 영혼의 이 작은 궁전에 위대하신 임금께서 사신다는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그분을 그토록 자주 혼자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훨씬 더 자주 그분 곁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각기 다른 삶의 자리에서 내적 고요를 회복하여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오는 평화를 맛볼 수 있을까? 하느님과 일치하여 거룩하게 살았던 이들에게서 그 답을 찾아보자.

 



거룩한 이들의 조언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복녀(+1997년)는 이렇게 조언한다.

 “하느님의 음성을 마음으로 듣는 법을 처음부터 배워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고요한 마음에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을 입으로 말합니다. 그대의 마음이 하느님, 사랑, 순결 그리고 믿음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대의 입술은 그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침묵 가운데 하느님께 귀 기울여 보십시오. 그대의 마음이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그대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마음의 고요 중에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되면, 그대의 마음은 하느님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마리아가 은총으로 가득 차 있듯이.”

 

 삼위일체의 엘리사벳 복녀(1880-1906년) 친척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 이번 성탄절 저녁에는 깊은 침묵 중에 그분 바로 곁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그분은 나의 전부이시며, 나의 유일한 분이시다.’ 그러면 내 영혼이 얼마나 행복하고 평화로운지!

 그분은 내가 모든 것을 바친 유일한 분이십니다. 세상적인 잣대로 보면 그것은 외로움이며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심장에 가해지는 고통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의 빛나는 별이신 그분께로 내 눈을 고정시키기만 하면, 넓디넓은 바다에 떨어지는 물 한 방울처럼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은 사라지고 나는 없어지고 맙니다.

 모든 것이 고요하며 완전한 평화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너무 좋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이해를 넘어선다고! … 늘 그분께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 무한하신 존재 안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영혼은 고요함을 갈망해야 합니다. … 하느님과 함께 삽시다! 친구처럼, 모든 것에서 그분과 하나 되기 위해서 살아있는 믿음을 가집시다! … 이 지상에서 나는 이미 나의 하늘을 발견했습니다. 하늘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께서는 내 영혼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 진리를 알아듣게 되면서 내게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이 신비를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그로써 그들도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따를 것입니다. … 저의 몫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살아있는 내내 마음을 다하여 침묵과 기도로써 신랑이신 그분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울리카 니쉬 복녀(1882-1913년) 역시 하느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 안에 잠겼다. 그녀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하녀로 살았으며, 성 빈센트 자비의 수녀원에 입회해서도 주방 수녀로 살았다. 아이 때부터 혼자 있는 것은 그녀에게 문제 되지 않았기에 수도자로서 고요와 침묵에 더 침잠했으며, 하루의 모든 소임이 끝날 때면 하느님과의 내적 대화에 남은 시간을 할애하곤 했다.

 울리카 수녀는 일상생활 중 “모든 것을 주님 마음에 드시도록” 하면서 하느님과 하나 되었다. 그 어떤 것도 그녀의 묵상기도를 방해할 수 없었다.

 “울리카 수녀는 성당에서 무릎을 꿇은 채 움직이지 않고, 결코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볼 때마다 경외심이 들 정도로 그녀는 늘 하느님 안에 잠겨 있었다.”

 울리카 수녀의 집중력은 경탄할 정도였으며, 그녀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침묵하며 살았다. 그 어떤 것도 그런 그녀를 방해할 수 없었다.

 “기도를 끝낸 후 주방으로 돌아온 울리카 수녀는 마치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뿌리치고 왔다는 느낌을 주었다.”

 사람들은 울리카 수녀에게서 “주님을 자신 안에 모시고 다닌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 날 동료 수녀가 “울리카 수녀님, 나도 수녀님처럼 그렇게 주님의 현존에 잠기고 싶어요.” 하자 울리카 수녀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녀님, 그러려면 가게들을 많이 닫아야 합니다.”

 울리카 수녀는 주방 소임이다 보니 동료들보다 성체조배를 할 시간이 적은 것을 매우 아쉬워했다. 대신 소임과 기도를 병행하면서 그녀의 영혼은 사랑하는 주님과 쉼 없이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영혼 깊은 곳으로 들어가라

 

 온전히 하느님 곁에 머물기 위해서 모든 이가 수도원의 고독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소음과 활동 한가운데서도 당신을 만나는 기회를 우리 각자에게 주신다.

 

 위대한 성녀이며 교회 학자인 시에나의 가타리나(1347-1380년)는 아주 어린 시절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었지만 그녀의 부모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부모는 딸에게 그런 삶을 허락하기보다는 멋진 결혼과 세속적인 삶을 바랐다. 그래서 결혼을 거부하는 딸의 머리카락을 자르기까지 했으며, “반항적인 딸과 야만적인 전쟁을 벌였다.”

 가타리나 성녀는 산더미처럼 많은 일을 해야 했고, 고요와는 거리가 먼 시간이 계속되었다. 이런 방법으로 가타리나 성녀의 “이성”을 되돌릴 수 있기를 부모는 희망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내면의 방”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로써 가타리나 성녀는 이 시험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외적인 고요와 은둔을 빼앗긴 후 “가타리나 성녀는 성령께 귀를 기울이고, 성령께서는 그녀가 결코 외적인 일 때문에 떠나지 않아도 되는 고요한 방을 그녀의 영혼 안에 짓도록 이끄셨다.”

 그리하여 가타리나 성녀는 더할 수 없도록 큰 혼란 중에도, 지독하게 힘든 육체적인 일 중에도 자신의 영혼 안에 고요히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주님을 위한 가장 내적인 공간을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늘 지닐 수 있었다. 가타리나 성녀의 영적 지도자인 라이문트 신부는 이렇게 증언했다.

 “가타리나 성녀는 무슨 일을 하든지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서 그분께 직접적으로 봉사하게 되었다! 심지어 부엌에서 일을 하거나 식탁을 차릴 때도 그녀는 성체를 모실 때와 똑같이 주님의 현존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구원자의 현존 안에서 그녀는 점점 더 강해졌다.”

 

 멕시코의 콘치타는 31세의 과부이며 여덟 아이들의 어머니지만 일상의 모든 일에서 고요함을 잃지 않았다. 그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예수님께서 직접 그녀에게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알지 못하는 그곳으로, 네 영혼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라. 거기서 사람들은 행복을 찾는데, 그 행복은 바로 나다. 그곳으로 들어가서 결코 떠나지 마라. 거기로 가는 길을 네게 가르쳐주마. 겸손, 집중 그리고 고요! 이것 말고는 없다. … 수도원의 담을 넘어갈 필요 없다. 네 안의 그 ‘밀실’은 나에게 봉헌된 영혼의 성화를 위해서 중요한 곳이다. 그러니 결코 그 신성한 곳에서 나와서는 안 된다. 외적인 의무를 행하는 중에도 나와서는 안 된다. 이 내적‘집중’은 네가 하는 모든 일을 매우 가볍게 해줄 것이다. 네가 내 현존 안에 머무는 그만큼 말이다. … 아무도 보지 못하는 거기, 네 안의 신성한 그곳에서 나 그리고 성령이 살고 있는 곳을 바라보면서 너는 덕에 진보할 것이다.”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 외에 누가 우리를 고요의 세계로 이끌며 일상생활 중 주님과 일치하도록 가르쳐줄 수 있는가? 메주고리예에서 마리아께서는 “하루 중 고요한 가운데 하느님과 만나도록 시간을 가져라.” 하시며 우리를 기도에 초대하셨다.

 

이정은 옮김

 

(마리아지 2013. 11 · 12월호 / 통권 182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