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바친 삶 에디트 슈타인
박석희 이냐시오(대구 가톨릭 대학 교수 · 신부)
지칠 줄 모르는 진리에로의 여정
철학자요 가르멜 수녀였던 에디트 슈타인은 독일계 유다인으로 1891년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속죄의 날인 10월 12일 독일 브레스라우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이 에디트가 두 살이 채 못 되어서 세상을 떠나자 모친은 남편이 경영하던 목재상을 이어받아서 가정을 꾸려 나갔다. 유다교 가정으로서 기도와 종교 생활은 매우 엄격하였다.
그러나 에디트는 일찍부터 뚜렷한 이유도 없이 유다교 신앙을 잃었다. 사춘기와 학생 시절에 그녀는 무신론적인 지성인들과 가까이 지냈고 인격적인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녀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진리였다. 진리는 이론적인 지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전생애를 형성시킬 수 있는 깊이 있고 근본적인 마음의 태도였다. 그녀는 자신이 몸소 궁극적인 진리에 이르고자 하였다. 지칠 줄 모르는 진리에 대한 자신의 갈망을 후일 그녀는 “진리에 대한 추구가 나의 유일한 기도였다.”고 하였다.
브레스라우, 괴팅겐, 프리부르크 대학에서 그녀가 공부한 철학은 바로 이 진리 탐구의 여정이었다. 먼저 에디트를 매혹시킨 것은 후셀의 사상이었다. 후에 그녀는 후셀의 조교가 되어서 그의 강의를 듣고자 하는 철학도들을 모아 놓고 후셀의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그들을 준비시키는 강의를 하였다. 에디트가 후셀에게서 배운 것은 “진리는 절대적이며” “진리는 그 진리를 알고 있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러한 진리 탐구를 위하여 선입견 없이 이 세계의 실재에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후셀에 이어 에디트에게 영향을 준 철학자는 막스 쉘러였다. 그는 우리가 세계의 존재에 실제적으로 다다르게 되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라고 한다. 타인과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고, 함께 어떤 방향을 향하는 시선이다. 그렇다면 이 시선이 향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 세계가 품고 있는 어떤 깊은 실재를 향한 것이다. 이에 에디트는 세계 전체 존재자들에게 존재를 주고 이들에게 존재를 알려 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에디트가 그리스도교인이 된 것은 역시 그리스도교인이었던 자기 스승들의 사상과 자기 자신의 독서와 연구를 통해서였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으로 서로 타인이던 사람들과 함께 가족의 유대와 우정의 유대를 형성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신앙이 타인을 사랑할 힘을 주고 자기 자신을 알 힘을 준다는 것을 처음 체험하고 나서였다. 특히 자기의 친한 친구인 라이나흐가 전쟁에서 전사하고 나서였다. 친구의 부인 안나는 자기 남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신앙으로 내적 평화를 잃지 않고 오히려 남편 친구들을 위로하였다. 이러한 신앙 태도를 보고 에디트는 후일 이렇게 말하였다. “그것은 내가 최초로 만난 십자가였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들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힘이 함께하고 있는 십자가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탄생한 교회, 죽음으로부터 승리한 교회가 처음으로 분명히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 순간에 나의 무신앙은 무너졌고 유다이즘은 나의 눈에서 빛을 잃었으며, 반면에 그리스도의 빛이 내 맘에 동터 올랐습니다. 십자가의 신비 안에 깨닫게 된 그리스도의 광명이었습니다.”
가톨릭 여성 운동과 에디트
참되고 궁극적인 진리를 추구하여 오던 에디트의 긴긴 영적 투쟁도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자서전을 읽음으로써 끝난다. 그녀는 성녀 데레사의 자서전을 다 읽고 나서 “저는 이 책을 덮으면서 생각하였습니다. 오 이것이 진리다.”라고 하였다. 그녀가 찾던 진리는 철학의 진리가 아니라 인격으로서의 진리, 사랑의 하느님이었다. 에디트 슈타인은 곧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1922년 1월 1일 그녀의 나이 31세 되던 해였다.
에디트가 영세한 것은 실상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가르멜 수녀회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녀의 지도신부와 주위 사람들의 만류로 그녀의 소망이 당장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922년에서 1931년까지 8년간 스피르의 도미니꼬 수녀회에서 경영하는 한 학교에서 여고생들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그녀는 성 토마스 아퀴노를 만나게 된다. 성 토마스의 진리론을 독일어로 번역하였고 그 결과 “후셀의 현상학과 성 토마스 아퀴노 철학”이라는 연구집이 나오게 되었다. 성 토마스를 만남으로써 철학적인 진리와 하느님의 진리가 하나임을 더욱 깨닫게 된다. 존재자와 진리와 선은 모두 하나이며 같은 것이라는 토마스의 직관을 즉시 포착하였던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진리이고 선이며 아름다움이다. 이 존재의 무한한 빛을 제거하고 나면 허무뿐이다. 이렇게 에디트는 성 토마스의 사상을 연구함으로써 가르멜 수도자로서의 관상 생활을 위한 지성적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입회의 시기는 아직 오지 않았고 그때가 올 때까지 에디트는 여성 운동을 위한 강연을 독일은 물론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등 전 독일어권으로 다니면서 하게 된다. 1932년부터 뭔스터의 교육 대학에서 여성 교육법과 철학도 강의하였다. 이때에 나온 책이 “여성과 그 운명”이다. 여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에디트 슈타인은 여성의 마음에는 신부가 되고 어머니가 될 운명이 있으며, 어떠한 교육도 이 성소를 추상화시킬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여성의 성소는 여성의 육체 구조나 심리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육체적 삶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본다. 여성에게 있어서 영혼과 육체의 관계가(남성들과) 다르며, 정신과 감성 사이의 관계가 다르다. 여성은 이와 같이 본질 자체가 타인을 위하여 만들어 졌기 때문에 구체적 인간, 살아 있는 인간을 개별적으로 파악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여성을 남성에게 노예 관계로 예속시키는 생활 개념과 관능적 도구의 생활로 만든 정신을 여성 특유의 타락으로 본다. 여성이 자신의 참모습을 알게 되는 것은 “반항하는 노예”로서가 아니다. 여성 실존의 특수한 의미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관계만으로써 이해될 수 없다. 어머니의 역할은 분명 여성에게 본질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남성과의 관계로만 보게 되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여성은 자신을 위해서도 더욱이 남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남성과 여성은 성을 초월하며, 양자 모두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절서 지워져 있다. 인간이 “그리스도를 모방”해야 한다면 여성은 “성 마리아를 모방”해야 한다.
신적인 생명은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사랑이란 결국 성부께서 인간에게 미리 정해 주신 모습대로 되기 위하여 인간들이 서로 모든 이를 섬기는 일이다. 여성의 성소가 남김없이 밝혀지는 곳은 이러한 사랑의 심층에서이다. “사랑으로 다른 존재에게 자신을 주고, 남김 없이 다른 존재의 유익이 되어 주며, 이 다른 존재를 완전히 소유한다는 것은 여성의 마음이 갖고 있는 깊은 요구에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에디트는 여기서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한 인간이 바치는 헌신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누가 그 영혼을 잃지 않고 구원할 만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느님 이외에 누가 그렇게 해주겠는가. 이와 같이 여성의 성소와 사랑은 하느님께 바치는 전폭적인 헌신으로써만 완전히 실현된다. “무한한 위탁은 수도회의 생활 원칙인 동시에 유일한 완성으로서 여성의 갈망에 절대적으로 일치한다.” 이렇게 에디트는 가르멜 수녀회를 향한 자기 성소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된다.
십자가 학문
타인을 위하여, 그리고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을 위한 완전한 봉헌은 에디트 슈타인이 져야 하는 십자가가 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권좌에 오르자 독일에 있던 유다인들의 운명도 날이 갈수록 위험한 처지에 있었다. 유다인이면서도 가톨릭의 성세성사를 받은 그녀가 자기 가족 특히 모친에게 준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만큼 에디트의 마음도 아팠다. 그러나 이제 유다인이 히틀러 치하에서 겪게 될 고통이 날로 심하여지고 자신도 반 유다인 학생들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에디트는 자기 민족을 위해서도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의식을 날카롭게 하였다. 교황께 유다인을 위한 회칙을 반포하시기를 간청하였으나 그녀의 간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에디트는 자기 민족을 위한 특수한 사명이 무엇인지를 찾았다. 주위의 사람들은 그녀가 남아메리카로 가서 뭔스터에서 하던 자기 학문 연구를 편안하게 지속하라고 제안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1933년 10월 4일 쾰른의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유다인이고 그러스도인으로서 에디트 슈타인 수녀는 하느님 앞에 자기 민족을 대표하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느꼈다. 기도와 희생으로 자기 백성을 위해 전구하는 가장 좋은 길이 가르멜 수녀회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를 포기하는 일이고 그분의 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민족 차별로 말미암아 유다 민족이 희생이 된 것을 에디트 수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았고, 유다인 박해는 곧 예수의 인간성에 대한 박해였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선이 악을 이기리라고 보았다. 악을 이긴다는 것은 고통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의 힘으로 그 고통을 자기 것으로 취하는 것이다. 이렇게 십자가의 베네딕다(에디트의 수도명) 수녀는 종신 서원 후 장상의 허락으로 저술을 할 수 있게 되자 제일 먼저 “십자가의 학문”을 저술해 갔다.
그가 쓰고 있던 “십자가의 학문”은 참으로 십자가의 고통에서 체험된 것이었고 지금도 체험하고 있는 것이었으며, 나아가서는 자기 스스로 그 십자가 죽음을 치르게 될 것이었다. 히틀러의 유다인 박해가 더욱 심하여지자 장상들은 그녀를 네덜란드의 에히트 수녀원으로 피신시켰다. 그러나 이곳도 곧 히틀러 치하에 들어가 안전한 곳이 못되었다. 하지만 에디트는 이곳에서 얼마든지 숨어 있을 수 있었지만 자기가 유다인이라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1942년 8월 2일 십자가의 베네딕다 수녀는 자기를 따라 가톨릭 신자가 된 언니 로사와 함께 비밀 경찰에 체포되었다. 아메르스퍼르트 수용소로 갔다가 다시 1942년 8월 7일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옮겨져 1942년 8월 9일 그 곳 가스실에서 죽었다. 수용소에 같이 있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녀가 참으로 말없이 침착하였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애기들을 씻기고 음식을 먹여 주며 돌보았다고 전한다. “그녀의 깊은 신앙은 분위기를 변화시켰으며, 그녀의 주위에는 은총과 평화의 분위기가 생겨났다.”고 어떤 이는 증언하였다. 수용소에서 원장께 보낸 마지막 전언에 “저는 모든 것에 만족합니다. 참으로 십자가의 무게로 고통당하기 시작할 때만이 십자가의 학문을 얻을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그녀는 온몸과 마음으로 “십자가 학문”을 쓰면서 하느님께로 갔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삶의 궁극 목적을 추구하였고 또 찾아 얻었습니다. 그녀의 삶과 죽음은 그분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1987년 4월 25일 십자가의 베네딕다 수녀를 시복하기 위하여 독일 방문 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하신 말씀.)
에디트 슈타인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 분은 장 드 파브레규 지음, “실존주의의 선구자 : 에딧트 슈타인의 전향”(대구 가르멜 수녀원 옮김, 계성출판사)을 참조하시 가 바랍니다.
[경향잡지, 1990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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