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주님

여성 철학자의 모델 -자넷 E. 스미츠 박사

Skyblue fiat 2015. 6. 18. 10:08

여성 철학자의 모델
(A Model Lady Philosopher)

 

디트로이트 성심 대 신학교 생명윤리 석좌교수
자넷 E. 스미츠 박사

(Janet E. Smith, PhD)

 

 

 

잘 아시겠지만, 우리같이 잘 잊곤하는 사람들은 지루해야 할 이유가 적습니다. 우리는 예전에 이미 체험했던 책, 영화, 명소들을 새로이 체험하는 즐거움을 갖습니다. 그리고 우리같이 아둔한 사람에게는 권태를 이겨낼만한 자산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명백한 진리도 새로운 볼거리가 됩니다. 저는 춥고 비참하고 흐릿한 잿빛의 축축한 어느 초겨울 날 토론토 대학 캠퍼스를 걸어 다니면서 너무도 내관적(內觀的)이고 생각과 우수에 잠겨 있던 대학원생 시절에 대한 날카로운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페미니즘을 지성적으로 수용하던 유행이 절정을 이루던 때였습니다. 저는 페미니즘에 마음이 끌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남성과 여성이 본질적으로 현저히 다르지 않다는 주장, 즉 우리가 다른 몸을 가지고 있고 다른 행동을 하도록 사회화 되었을 뿐 내면은 다를 바 없다는 논변이 특히 당황스러웠습니다. 당시 제가 잠겨있던 생각이 무엇이었건 간에, 저는 진흙탕에서 뒹굴며 풋볼을 하는 남자들의 광경에서 시선이 멈추었고 그와 함께 상념도 멈추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이 ‘매우’ 다름을 말해주는 증거였습니다. 그런 날씨에 따뜻하고 아늑한 불가에 둘러 앉아 있는 일단의 여성들이 있다면, 온몸에 진흙이 묻고 심하게 멍들 것을 바라보면서도 밖으로 뛰쳐 나가 기묘하게 생긴 공을 차며 뛰어다니자는 초대에 기꺼이 응한다는 것은 저로서 상상하기 힘듭니다. 어떠한 ‘사회화’ 개념도 그러한 사실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귀여운’ 아기 옷 선물을 예쁘게 포장하여 개봉 할때마다 기쁨의 묘성(妙聲)을 지르는 남성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본래적인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명한 차이에 대한 인식이 제게 아주 놀랄만한 발견은 아니었습니다. ’60년대말, ’70년대에 풍미하던 가장 어리석은 운동들조차 포용했던 저의 삶의 시기가 짧게나마 있기는 하였지만, 저는 결코 페미니즘을 좋아한 적이 없었습니다. 부분적인 이유는 아마도 제게 매우 행복한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어머니는 단연 명랑하고 유쾌하며 천성적으로 낙천적이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저는 제 어머니의 행복이 아내이자 어머니라는 신원으로부터 흘러 나온다고 (비논리적이 아님) 추론하였습니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 본 ’60년대 중반에 고등학생이었던 저는 그것이 모성을 경축하는 운동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맨발로 부엌에서 요리하고 있는 임신한 여성의 모습을 족쇄를 채운 노예의 초상과 동급으로 생각하는 듯한 페미니스트들로 인해 저는 정신이 아주 아찔했습니다.

성녀 에디트 슈타인은 페미니스트 운동 초창기 시절에 젊은 여성들과 많은 일을 했습니다. 여성에 대한 슈타인의 에세이들은 어떤 면에서 매우 매혹적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철학적 위업을 광범위한 실천적 경험과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은 어느 평론은 에디트 슈타인의 에세이가 성녀가 “극단적 페미니스트 입장” (radical feminist stance) 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슈타인은 남성과 여성이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며 어느 쪽도 다른 쪽보다 우월하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슈타인은 여성이 봉사하지 못할 직업이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슈타인은 가정의 영역 안에서는 함양하기 어려운 재능을 소유한 여성들이 있음에 주목하면서도, 결혼한 여성에게는 가정 공동체 생활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믿었습니다. 진정으로 성녀께서는 여성을 “특징짓는”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동반자이자 어머니가 될 본성적 경향 뿐만 아니라, 양육과 부드러움과 개인에 대한 염려와 같이 그러한 본성에 수반하는 덕(德)들이 여성에게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성은 자기도취, 허영심, 주관성과 같은 특별한 악덕들로 기우는 경향도 갖습니다.

슈타인은 일반 범주를 만드는 데 주저하지 않았으나 모든 여성이 동일한 틀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슈타인은 세 가지 서로 다른 성소의 “유형”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첫째는 남성과 여성이 공유하는 성소로서, 하느님과 일치를 추구하는 성소입니다. 슈타인은 인류의 타락이 남성과 여성에게 서로 다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합니다. 선(善)을 이루는데 있어 남성만이 갖는 특유의 어려움이 있고 여성도 여성 특유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슈타인은 인류의 타락이 하느님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도 뒤틀어 놓았다는 기민한 관찰을 합니다. 따라서 여성은 남편에 대한 반감과 자신의 자녀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욕망과 싸울 것입니다. 슈타인은 모든 여성이 특별히 여성으로서의 성소를 받아들이려 한다면 우선 자신의 모성적 본성부터 받아들여야 한다점을 강조합니다. 모든 여성 개개인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모성적 특성들을 깃들게 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요? 슈타인은 각 개인의 요구와 느낌에 대한 섬세한 민감성과 그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열망을 갖는 것으로 모성적 특성을 정의합니다.

교황 성하와 마찬가지로 슈타인은 현상주의적 방법의 열렬한 애호가입니다. 슈타인은 현상에 대해 충분히 기술(記述)하는 과정에서 핵심이 드러나고 그 특징들을 정의할 수 있으며 고유하고 독특한 특색들이 나타나게 되어 그로부터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각 개인이 독특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슈타인 여성의 “유형”을 식별하려는 시도가 유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슈타인은 각 유형의 요구에 맞는 교육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유형을 언급했습니다: 모성적 유형 (자녀를 위해 산다), 에로틱한 유형 (성적 가치들에 애착한다 ), 로맨틱한 유형 (꿈같은 이상주의에 애착한다), 빈틈없는 실천가 유형 (일단 시작한 일은 끝마쳐야 한다), 지성적 유형 (학식있고 객관적이다) , 종교적 유형 (집중적, 자기희생적이다), 그리고 반항적인 노예 유형 (페미니스트!). 슈타인은 이러한 유형 목록이 모든 특성을 총망라한 것은 아니며 어떤 여성에서는 각 유형이 복합되어 있을 수 있고 교육이나 성숙, 또는 삶의 상황으로 인해 유형이 바뀔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여성에 관해 슈타인이 쓴 글을 읽는 많은 분들이 성녀께서 남성과 여성을 별 힘들이지 않고 유형화(類型化)하고 있음에 우선적으로 놀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는 유형화 (또는 일반화) 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유형화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종, 민족, 또는 성에 따른 “유형화 ”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유형화를 부정해버리는 지혜롭지 못한 혐오감은 비판적 기능을 선용하는 우리의 능력을 위태롭게 합니다. 즉, 비교하거나 판단할 수 있는 유형적이고 일상적인 작업이 없는 경우, 현실에 대해 내려야 하는 분별이 어려워지며 독특하고 비일상적인 것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정작 우리가 거부해야 할 것은 유형화에 집착함으로써 그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고정관념입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슈타인은 남성과 여성에서 특징적인 덕과 악덕들을 즐거이 밝혀냈습니다. 자, 그러면 저 자신과 같은 성을 갖는 (여성) 분들에 그러한 유형화를 적용시켜 보도록 초대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자신을 다른 여성들과 비교합니다. 저 여자는 나보다 더 매력적이고, 더 세련되고, 더 똑똑하며, 나보다 더 나은 어머니이자 아내이며, 나보다 요리를 더 잘 하고, 생활을 더 짜임새 있게 가꾸고, 나보다 더 따뜻이 접대할 줄 알며, 나보다 더 생각이 깊다! 등….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은 그런 생각을 체험하는 사람의 삶이나 자기 존중심을 좀처럼 향상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저 뿐만 아니라 여러분도 익히 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부러워하는 모델과 같은 유형의 사람이 전혀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슈타인의 “유형” 이론이 우리가 무엇이 해롭고 무엇이 유익을 줄 수 있는지 알고 비교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도움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즉, 어떠한 유형으로부터 다른 유형으로 옮겨갈 기회와 이유에 어느 정도 유연성이 있기는 합니다만, 우리의 성질이나 삶의 특징이 무척 영구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도 진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이 어떠한 특정 유형이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불공평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이 (적어도 어떤 주어진 시간에) 어떤 유형인지를 앎으로써 자기 파괴적인 비교 행위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저는 결혼한 제 친구들이 자신을 다른 여성들과 비교하여 자신을 비하하는 불평을 듣습니다. 그들은 자기보다 다른 여성들이 자녀, 남편, 교회에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완벽하다고 생각되는 그 여성들조차도 자신을 다른 여성과 비교하여 왜소하게 느끼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습니다. 저는 그러한 비교가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역할” 모델을 설정하는 일과는 거리가 멉니다. 역할 모델은 자기존중심을 깎아 내리는 수단으로 작용하지 않고 오히려 적격한 삶의 방식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질투심을 유발하는 “비교행위”가 건강한 초대를 강화하는 작용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성들이 자신과는 아주 다른 인물과 자신을 비교하는 일이 드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느 사람이 다른 사람과 ‘전혀’ 비슷하지 않다면 그는 그 사람 아닌 또 다른 사람과는 비슷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직무(사명)”나 “은사 (카리스마)”와 같은 개념을 가족 구성원들에게까지 확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가족 구성원은 학문적인 면에 강점이 있고, 다른 이는 음악에, 또 다른 이는 운동에 강점이 있다는 것이 진실 아닐까요? 어떤 면에서 가족은 작은 수도 공동체와도 같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도미니꼬회원은 예수회원일 수 없고, 예수 회원은 프란치스꼬회원일 수 없으며, 갈멜 회원은 교구 사제일 수 없을 것입니다. 각 수도회는 자기 고유의 카리스마와 사명이 있으며 어느 한 공동체에서 잘 성장하는 사람이라도 다른 공동체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도미니꼬 회원일 될 사람은 훌륭한 갈멜회원을 모범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탁월한 도미니꼬 회원들을 모범으로 삼아 그를 본받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성녀 에디트 슈타인은 진정한 그리스도 철학자였습니다. 슈타인은 진리에 대한 열정과 논거를 추적할 용기와 그에 인도를 받는 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녀께서는 자신의 가족과 가까이 머물었으면서도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의 소중한 개별성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고 학생의 “유형”이나 필요에 따라 양성 과정을 마련하려 했습니다. 슈타인은 자신의 삶과 공부에 기도가 필수적인 도움이 됨을 발견했습니다. 여성 철학자가 되길 갈망하는 우리들은 성녀 에디트 슈타인을 우리 모범으로 삼아 마땅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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