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제 4 강의
(2010. 9. 20. H.D.W. Inchon)
37. 질의응답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우리 마지막 강의는 14권 70장 1922년 10월 30일자에 나오는 하나의 장을 읽음으로써 시작하겠습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 활동하는 피조물이 이루는 놀라운 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글을 읽은 다음에는 질의와 응답 시간을 갖겠습니다.
2 “딸아, 내 뜻 안에서 활동하는 피조물이 이루는 놀라운 일을 보아라.
내 뜻 안으로 들어와서 생각하며 기도하고 활동함에 따라, 그는 나와 함께 위로 떠오른다.
3 그런데 나는 말이 없는 목소리다. 이런 내 목소리가 각자의 마음에 그들 자신의 필요에 따라 도달한다. 모든 피조물 사이에 있는 다양한 언어로, 그러나 모두가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소통 방식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나는 또한 손이 없는 활동이므로 각자의 활동이 되고, 발이 없는 걸음이므로 내가 어디를 가든지 활동 중인 나 자신을 보게 된다.
4 이와 같이 내 뜻 안에서 활동하는 영혼도 말이 없는 목소리, 손이 없는 활동, 발이 없는 걸음이 된다. 나는 그래서 그 영혼이 내 목소리 안에, 내 활동과 내 걸음 안에 흘러드는 것을 느낀다. 어디서나 그를 느낀다. 언제나 나와 함께 있는 그를 느끼기에 더 이상 외롭지 않다.
5 나는 이렇듯 피조물의 동반을 받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혀 그를 신화(神化)하고 부요하게 하며 하늘과 땅이 놀랄 만큼 큰 은총을 준다.”
이것이 우리가 창조된 목적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뜻 안에서 살고 하느님 뜻 안에서 작용하고 활동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삶은 우리가 하느님 뜻의 궁전 안에 있어야만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궁전 밖에 있다면 그리고 또 모든 인류 세대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다 궁전 밖에 있으면, 우리 전부는 왕궁을 향해서 걸어가야 되고, 왕궁 안에 들어가는 길에 있을 때까지는 하느님 뜻이 피조물들 안에서 활동하지 않습니다. 왕궁으로 들어가는 길에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왕궁으로 가는 길에 있을 때에는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다스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다스려지는 것은 피조물들이 하느님의 왕궁 안으로 다시 들어가서 살게 될 때 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피조물들이 자기들의 힘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희생이나 공로나 과학이나 지식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이것은 선물입니다.
질의와 응답을 시작하기 전에 제가 여러분들이 이것을 잘 이해하실 수 있도록 비유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여기 있습니다. 지금 내가 이야기를 하고 있고 여러분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 사이에 공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공기는 내 목소리의 떨림을 여러분의 귀에까지 전달해주는, 자동차와 같은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귀에서 머리로 가서 여러분의 마음으로 내 얘기가 전달됩니다. 이 자동차 같은 전달 도구는 큰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마이크를 가지고 내 목소리를 더 크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이크로 내 목소리를 더 크게 만들어도 내 목소리는 이 방 안에서만 들을 수 있습니다. 방 밖의 사람은 이 소리를 못 듣습니다. 우리가 아주 굉장히 강력한 확성기를 쓰면 아마 1마일 안에 있는 사람들은 내 목소리를 듣겠죠. 그런데 소리는 소리의 속도에 따라서 아주 천천히 갑니다.
그런데 한국 텔레비전 회사의 주인이, 인공위성을 가지고 있는 회사의 주인이 그 통신 수단을 나한테 제공해 줍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는 이 마이크를 그 굉장한 통신수단에다 접속시켜주면, 그러면 내 목소리는 전자 안에서 빛처럼 변합니다. 전자파의 형태로 모양이 변합니다. 그러면 내 목소리가 빛의 속도로 달리게 됩니다. 소리의 속도가 아니라 빛의 속도로 달리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공기만 사용해서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보다 한없이 빨라집니다. 소리가 빛의 속도로 달리고 아주 광활하게 나갑니다.
하느님 뜻 안의 삶은 하느님의 인터넷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의 빛 안에서 우리가 말합니다. 그분의 빛 안에서 우리가 일을 합니다. 그분의 빛 안에서 우리가 고통을 겪습니다. 그 영원한 빛의 능력 때문에 우리의 약한 인간 행위가 하느님의 영원한 빛의 품격을 가지게 됩니다.
내가 인공위성을 사용해서 내 목소리의 효과가 크게 확대되는 것은 내 행동에 무슨 공로가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강의가 오늘날의 모든 인간 존재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은 인공위성을 가지고 있는 TV 회사의 주인이 자기의 모든 도구들을 나한테 제공했기 때문에 내 목소리가 모든 사람에게 들립니다. 인공위성의 모든 시스템을 다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지금 얘기하는 것 이상으로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인공위성 회사에서 다 해주면 내 강의를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한테 듣게 해주려고 내가 여기서 소리소리 지르면서 말하지 않아도 전파를 타고 내 목소리가 오스트레일리아 까지 갑니다. 나는 마이크를 켜고 그냥 이렇게 말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내 목소리가 온 세상 사람들에게 다 들린다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그 인공위성 방송회사 사장이 나한테 이런 방송 기술을 다 제공해 주는데 내가 그것을 믿으면 마이크를 켜고 애기하면 다 전달이 됩니다. 그런데 그 회사 사장이 와서 다 해주겠다고 해도 내가 그것을 안 믿으면 마이크를 안 켭니다.
이 영원한 인터넷의 주인이 여러분들에게 ‘와서 내 빛 안에서 말해라. 내 빛 안에서 일하기를 배워라.’ 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것을 믿고 그대로 하면 여러분들은 그 대단한 효과를 볼 것입니다.
“내 뜻 안에서 하는 너의 조그만 생각과 조그만 행동은 한없이 영원한 효과를 가지게 될 것이다.”
신부님 질문 : 여러분은 이것을 믿습니까?
참석자 대답 : 예!
예, 됐습니다. 그러면 마이크를 켭시다.
이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이런 빛 속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면 하느님 뜻에 맞는 것, 합치되는 것만을 해야 됩니다. 나쁜 말을 하기 위해서 하느님 뜻의 인터넷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거짓말을 하려고, 내 형제자매들에 대해서 나쁜 말을 하려고 하느님 뜻의 인터넷을 쓰면 안 됩니다. 아주 어둡고 죄로 가득 찬 곳으로 걸어가기 위해서, 또 나에게 속하지 않는 물건들을 훔치려고 하느님 뜻의 인터넷을 사용해도 안 됩니다.
영원한 빛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자기의 빛을 이런 나쁜 것에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 조건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하느님 뜻이 원하는 대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성인들이 이미 그렇게 했지 않습니까? 신부님께서 이야기하신 것에 새로운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새로운 것은 이 영원한 빛 안에서 이러한 모든 것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것입니다.
오늘까지도 주님께서 그 빛 안에서 행동할 것을 인간들에게 다시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 때가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을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강생을 준비하기 위해서도 수천 년이 필요했습니다. 그 때가 되어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파견되었습니다. 그 때 마리아가 ‘피앗’이라는 말을 했고 그래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전에는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를 위해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이 대단한 하느님 뜻 선물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 선물을 인간이 거부했었습니다. 인류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희생으로 그 선물을 다시 사셨습니다.(구입했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거부했던 것을 다시 사셨습니다.(구입했다는 의미입니다.) 성부께 이 선물을 청하라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2000년 동안 성 교회가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면서 매일 기도해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성부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셨다. 나는 나의 어머니와 함께 이 하느님 왕국을 소유하고 있다.
이제 피조물에게 이 왕국을 줄 준비가 되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무엇인지, 또 피조물들 자신이 이런 좋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이 선물의 이런 진실을 알려줌으로써 피조물들로 하여금 이 좋은 것들을 차지하려고 미리 준비하고 노력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면 점차적으로 작은 그룹, 몇 안 되는 사람이 이 귀한 선물을 알게 되고 또 조금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되고 나중에는 모든 나라와 온 세상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것이다. 내 구원과 같은 식으로, 구원은 나와 엄마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나를 알고 나의 강생을 알던 소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알았고, 내가 공생활을 시작했더니 조금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고, 그리고는 나의 사도들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서 내가 모든 인류를 위해서 얻어낸 공로를 다 전해주었다.
이 하느님 뜻의 나라도 모두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 거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너와 나, 그리고 고해신부 만이었는데, 그 다음에는 소수의 사람들이 이 보물을 알게 되고, 이 보물을 사람들과 나누기 시작하고 그래서 온 세상이 이것을 알고 나누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과정의 시작에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운이 좋습니다. 지나간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이런 삶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손 안에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굉장한 삶을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믿는다면 하느님 손 안에 있는 도구로서 온 세상에 하느님 뜻의 나라를 전파하는 사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이제 질문해 주십시오.
1. 질문 : 하느님의 뜻이 과거 속으로 흘러들었을 때 흘러간 내 과거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요?
답 : 아주 흥미 있는 질문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질문에 대답을 해주신 게 있습니다. 루이사도 예수님께 같은 질문을 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했던 행동의 실체를 바꿀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행동에서 겸손, 단순, 선행, 애덕의 씨를 뿌렸다면 우리는 우리가 심은 대로 겸손과 단순과 애덕의 좋은 열매를 거둡니다. 우리가 나쁜 열정이나 나쁜 것들을 심었다면 우리는 부패된 것을 수확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루이사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한 것을 하나도 바꿀 수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의 모든 과거를 현재 속에다가 집어넣는 것이고 하느님 뜻 안에서의 너의 현재의 행동 속으로 집어넣는다. 너의 과거의 모든 행동들을 하느님의 아름다움으로 채워라.”
이것은 굉장히 논리적인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가 일상의 생활을 살아가면서 내 몸에다가 좋은 음식을 먹여주면 몸 안에서 좋은 효과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제 내가 먹었던 것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만일 어제 위스키 1리터를 마셨다면 오늘 그것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머리가 아플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내가 내 건강에 좋은 주스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분명해집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 내가 과거에 한 진실한 행위이든지, 진실하지 않은 행위이든지간에 그 의도는 바꿀 수가 없고 또 다른 모든 인류가 역사 속에서 한 것도 일단 행한 것은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는 내가 나의 뜻을 하느님의 뜻과 일치시킬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모든 피조물의 모든 행동을 다 안고 있기 때문에, 내 자신의 삶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의 삶을 다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뜻 안에서는 나의 모든 삶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삶까지 다 합쳐서 하느님께 완전한 찬양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제 한 것은 바꿀 수가 없습니다. 어제 내가 한 행동은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합니까?
비록 오늘은 내가 하느님 뜻 안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거의 삶은 바꿀 수 없습니다. 내가 옛날에 잘못한 것. 또 다른 인간들이 과거에 잘못한 것을 다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첫째로 고해성사를 보는 것입니다. 이 고해성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주님께서 만드신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고해성사를 보면 과거에 잘못했던 모든 죄들이 없어집니다. 우리의 보속과 하느님의 자비로 용서를 받고 우리가 잘못했던 삶의 순간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채워집니다. 고해성사를 봐서 그런 나쁜 행위들은 다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나쁜 것들은 어떠한 덕행의 씨앗도 없는 행동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좋은 것도 수확할 수 없습니다. 아주 위대한 선물은 예수님의 공로와 피와 삶으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잘못을 다 없애고 그 죄를 다 없앨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쁜 그 행동들 안에는 애덕, 순수, 진실, 정의라는 덕의 씨앗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덕들을 아무 것도 수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우리는 이런 모든 것이 예수님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로 채워진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과거의 삶은 전부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 드립시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완전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런 삶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을 다 넣을 수 있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가능성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예수님과, 예수님의 뜻과 일치시킵시다. 현재의 내 행위를 주님의 그 영원하고 무한한 모든 행동들과 공로에, 예수님의 뜻에 일치시킵시다. 그리고 과거의 모든 죄는 더 이상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해성사를 보고 용서받았으면 더 이상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는 ‘그분을 위해서’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사는 새 삶을 시작하십시오. 아직도 확실히 용서받아야 될 일이 있으면 주님께 가서 용서를 청하면 다 용서해 주십니다.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옛날에 행했던 일을 어떻게라도 해 보려고 시간 낭비하지 마십시오. 옛날 것을 생각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더 거룩해지지는 않습니다. 그 옛날에 잘못되었던 것에 대해서는 내가 얼마나 약한 사람인지를 알기 위해서만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주님 앞에서 겸손해지기 위해서만 옛날의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것뿐입니다.
“그분을 묵상하면 너도 빛을 내게 될 것이다. 하느님을 묵상하면 너도 빛을 낼 거지만 너 자신을 묵상하면 그게 안 된다. 왜냐하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묵상하면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누구와 같아지고 싶으면 바로 그 누구를 묵상하십시오. 그런 대단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질문 : 천상의 책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정의의 징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의의 징벌을 내리시는 하느님 사랑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 : 성경의 용어에서 하느님이 당신의 정의로 개입하시는 것은 우리를 정의롭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하느님이 정의의 징벌을 내린다고 말은 하지만 하느님이 정의로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서 무엇을 하실 때 그것은 벌을 주시기 위해서 하시는 게 아니라 고치기 위해서, 그것을 올바르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성화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의 정의는 우리가 정의로운 사람이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모든 것을 진리에 따라서 올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느님의 정의가 징벌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걸 올바르게 해주시려고 하시는 것을 여러분이 그런 식으로 그것을 징벌이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일에 간섭하시고 개입하시는 것은 완전하고 순수한 사랑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제자리에 올바르게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팔의 뼈가 빠지면 아주 아픕니다. 그러면 뼈를 고쳐주려고 외과의사가 옵니다. 외과 의사가 치료하러 오는 게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의사가 와서 탈구된 뼈를 제자리에 넣어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는 게 여러분에게는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개입해주시면 결국 여러분은 아주 건강해집니다. 하느님 혹은 그 의사가 우리에게 와서 정의로운 개입을 하시는 짧은 시간 동안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영원히 우리에게 좋은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의 정의가 그 순간에 개입하지 않으면 평생 고통받을 것입니다. 이제 의사가 와서 고쳐주지 않으면 어떤 때는 이 탈구된 것 때문에 결국은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엄마, 어머니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원한 뜻 안에서 제자리를 찾게 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엄마의 사랑입니다. 만일 팔만 탈구된 게 아니라 온몸의 뼈가 다 제자리를 떠나서 다 탈구되었다면, 하느님의 정의가 개입하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런데 의사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오직 사랑으로 치료해 줍니다. 그런데 치료를 받을 때는 너무너무 아픕니다. 예, 이것으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된 것 같습니다.
3. 질문 : 하느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는 표징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카를로스 신부님의 질문 : 여러분 하느님 뜻 안에 있습니까? 하느님 뜻 안에 있지 않습니까?
참석자들 답(카를로스 신부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 :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 뜻 안에 있지 않습니다.
카를로스 신부님 말씀 :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뜻 안에 있습니다. 악마도 하느님 뜻 안에 있습니다. 피조물은 하느님 뜻 밖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다 하느님 뜻 안에 있습니다. 만약 내가 하느님 뜻의 바깥에 있다면 나는 없는 것입니다.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주님의 나라에는 거처가 아주 많습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왕궁이 있습니다. 왕도 살고 여왕도 살고 왕자들과 공주들도 있고 장관 등 많은 사람이 그 왕궁에 살고 있습니다. 또 왕궁에는 왕궁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장군도 있고 병사들도 있습니다. 또 왕국에는 아주 큰 들판도 있고 크고 작은 도시들도 있고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그 왕국에서 삽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왕에게 속한 겁니다. 이것은 그 왕의 왕국입니다. 그런데 왕국에 감옥도 있습니다. 왕에게 반항하는 사람들 때문에 감옥도 있습니다. 왕국의 질서를 지키는 경찰도 있습니다. 그래서 왕국에서 질서를 안 지키는 사람들을 다 감옥에 집어넣는 경찰이 있습니다. 경찰도 반역자도 왕에게 속해 있습니다. 또 군인과 군대도 왕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왕국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왕에게 속한 겁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왕과의 관계에서 어떤 장소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확실히 왕국에 속해 있습니다. 창조된 모든 것은 모두 왕에게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왕국 안에 어느 자리를 차지하는지는 전부 여러분 자신에게 달린 것입니다.
왕국에서 감옥에 가서 살고 싶으면 하느님 뜻을 거역하기를 시작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 행동의 그 결과로 우리는 고통을 받기 시작할 것입니다. 왕의 뜻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것을 계속하면 평생 감옥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왕국에 있기는 있습니다.
마귀는 하느님의 허락 하에 그 왕국 안에서 사람들을 속이기도 하고 사람들한테 나쁜 짓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맨 나중에는 주님께서 그 마귀들을 완전히 통제하실 겁니다. 마귀는 조그만 피조물입니다. 주님 앞에서 마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보다는 힘도 훨씬 세고, 우리보다는 훨씬 더 똑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보고 깨어있으라고, 정신 차리고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부님께 마귀로부터 영원히 구해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절대로 하느님과 같은 수준에 있는 다른 하느님이 아닙니다. 마귀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작은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주님에 불순종하여 그 결과를 받든지, 혹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보상을 받음으로써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우리는 왕국 안에 있습니다. 왕국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질문하신 것의 정확한 의미는 ‘하느님의 나라의 이 왕국 안에서 어느 자리에 내가 살고 있는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지’ 그것을 알고 싶은 건데, 그 대답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셨습니다.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마르 10,40)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베드로가 예수님께 요한에 대해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다른 측면으로도 대답을 해드리겠습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은 물론 왕국의 감옥에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또 왕국에는 왕궁에서 너무 멀리 살아서 왕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하느님 뜻 안에 사는 사람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왕궁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주 엄격하게 말하면 루이사의 글들은 임금님의 왕궁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의 강의들은 다 어떻게 하면 그 왕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그분을 위해서’ 하고, ‘그분과 함께’ 하고, ‘그분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의 사는 모습은 왕궁 안에서 사는 것과 같이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은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이미 왕궁 안에 있고 왕궁 안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단계에서, 우리는 지금 왕궁 앞에 와 있습니다. 왕궁의 문도 열려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왕궁 안에 들어가서 좀 다른 행동들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뜻이 완전히 왕궁 안에 있지는 않은 것, 내 자신의 이기심, 우리 과거의 삶, 우리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것들이 가끔 우리의 뜻을 왕궁 안에서 밖으로 끌어내는 것입니다. 우리 뜻이 가끔 나와서 우리가 이런 짓을 하고 있다면 우리가 조심해야 됩니다. 주님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아라. 나머지 것은 너에게 다 따라 온다.’는 그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그분을 위해서’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하기로 노력하십시오. 이제 우리가 하느님 뜻 안에서 하느님의 왕궁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해주는 그런 날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주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주님께 주의를 기울이면 다른 모든 것들은 주님께서 해 주십니다.
4. 질문 : ‘수난의 시간들’ 제6시간입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고통의 둘째 시간, ‘수난의 시간들’의 성찰과 실천에서
‘당신께서는 고통을 너무 많이 받으셨으니 쉬셔야 합니다. 당신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니 당신을 대신해서 저희가 대신 받게 해주소서.’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시오.
답 : 우리는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을 나누어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신비체입니다. 그분은 우리 신비체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받을 수 있는 고통을 모두 다 받으셨습니다. 또 지금도 받고 계십니다. 그분의 수난에서 빠져 있는 것은 그분의 수난이 내 수난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에 아무것도 보탤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수난이 우리 안에 반영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고통을 함께 받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고통을 말할 수 없이 많이 덜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분의 수난은 무한한 사랑으로 이루어진 수난입니다. 성부님께 대한 무한한 사랑, 또 나를 위한 무한한 사랑으로 예수님께서 무한한 고통을 받으십니다. 만약 내가 거울과 같다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나한테 비추어 보시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 거울 안에 예수님 자신이 비춰진 것을 보시면 그것이 예수님께는 너무너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창조한 목적이 실제로 우리 안에서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는데 나 같은 거울 안에서 고통 받으시는 그분 자신을 보시는 것이니까 창조의 목적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주님을 위로해 드리고 쉬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 안에 그분이 반영되도록 하는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하는 방법입니다.
세세에 살아계시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찬미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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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4 강의 : For Him (2010. 9. 20 H.D.W. Inchon) (0) | 2015.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