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시(새번역)/수난

609. 예수와 마리아의 고통들의 구속적 가치. 요한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으뜸이다

Skyblue fiat 2024. 3. 23. 12:54

609. 예수와 마리아의 고통들의 구속적 가치. 요한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으뜸이다

1944. 2. 20.

 

지금은 이미 저녁시간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너는 구세주들(Saviours)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지를 보아왔다. 너는 그것을 내 안에서, 그리고 마리아 안에서 보아왔다. 그래서 너는 우리가 당했던 모든 고통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너는 너희를 구원하기 위한 우리의 사랑으로 우리가 그것들을 어떤 관용으로, 어떤 영웅주의(heroism)로, 어떤 인내로, 어떤 온유함으로, 어떤 끈기로, 어떤 강인함으로 겪었는지를 보아왔다.

 

자기들을 ‘구원자들(saviours)’로 만들어주시기를 원하고 그것을 구하는 모든 사람들은, 마리아와 내가 그 모범이라는 것과 그들이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반드시 공유해야 하는 것은 고통들이라는 것을 철저히 숙고해야 한다.

 

그들의 고통은 십자가, 가시관, 못들, 물질적인 채찍질은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그 형태와 성격에 있어 다를 것이다. 그러나 똑같이 고통스럽고, 똑같이 자신을 소진시키는 것들이다. 너희는 오로지 그 고통들 가운데서 자신을 희생자로서 소진시킴으로써만 구원자들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엄격한 사명이다. 그것은 모든 사명들 중 가장 엄격한 것이다. 그 가시다발과 비교한다면, 가장 엄격한 규율 하에서 사는 수사나 수녀의 삶은 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수도원의 규칙이 아니라 내가 내 규칙과 명령에 따라 내가 뽑은 사람들을 축성하고 받아들이며, 그들에게 나의 습관인 희생에 이르게 하기까지 하는 총체적 고통을 요구하는, 내가 창립한 신적 수도생활의 사제직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너는 내 고통들을 보아왔다. 그것들은 너희의 죄들을 보속하기 위하여 적용된 것이다. 내 몸의 어느 부분도 고통당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왜냐하면 사람의 어떤 부위도 죄 없는 것이 없고, 너희의 육체적, 정신적 자아의 모든 부분들은 너희가 죄짓는 데 사용하는 도구들이기 때문이다.

그 자아는 하느님께서 완전하게 만들어 너희에게 주신 것인데, 너희가 너희의 최초의 부모의 죄와 너희 자신들의 악을 향하는 경향들, 그리고 너희의 악한 의지로 인하여 훼손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피와 내 고통으로 죄의 결과들을 취소하고, 죄의 경향들에 대하여 너희 각자의 육체적, 정신적 부분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그것들을 강화해주기 위하여 왔다. 내 피와 내 고통으로 그것들을 씻음으로써 말이다.

나의 두 손은 사람의 손들로 지은 모든 죄들을 갚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느라고 지친 다음에 상처 입고, 움직일 수 없었다. 카인들처럼 형제를 겨냥하여 총을 쏘는 심각한 범죄를 위시하여, 도둑질하고, 거짓 고소장들을 쓰고, 너희 자신들이나 타인의 몸에 대한 존경을 거스르는 몸짓들을 하고, 게으르게 빈둥거리기까지 하는 것을 말이다.

그런 나태함은 너희 악덕들을 위한 안성맞춤의 기반이다. 너희 손들의 부당한 자유를 위하여 나는 내 손들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고, 적법하고 필요한 이상으로 그 손들의 자유를 박탈하게 했다.

너희 구세주의 두 발은 내 수난의 길에서 피곤했고, 돌들에 부딪혀 타박상을 입은 다음 꿰뚫리고 움직일 수 없게 되었었는데, 이는 너희가 그것들을 너희의 죄들, 도둑질들, 간음들을 하러 가기 위하여 가는 도구를 만듦으로써 너희가 너희의 발들로 행하는 악을 갚으려는 것이었다.

나는 거리들, 광장들, 집들, 예루살렘의 발자국들을 밟았는데, 이는 너희가 사탄의 사주들에 순종하여 너희의 악한 의지에 따라, 그 위와 그 안에서, 과거와 미래에 씨 뿌리고 자라게 한 모든 악으로부터 땅의 모든 거리들, 광장들, 집들, 발자국들을 정화하려는 것이었다.

내 살은 타박상을 입고, 멍들고, 찢겼는데, 이는 과장된 예배, 너희가 너희 몸에게 하는 우상숭배, 너희가 관능적인 변덕으로 사랑하거나, 또는 사랑한 것 그 자체로는 잘못이 아니지만 너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부모, 남편, 아들, 형제를 사랑한 사람들의 육체에 대하여 내 안에서 벌하려는 것이었다.

안 된다. 땅 위의 모든 애정과 모든 유대 위에 너희 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 다른 어떤 사랑도 그것보다 우월할 수 없다. 하느님 안에서 너희 가족들을 사랑해야지, 그분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

너희의 전 존재로써 하느님을 사랑해라. 그것이 너희로 하여금 너희 가족들에게 무관심하게 할 정도로 너희의 사랑을 흡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로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얻은 완전함으로 그들에 대한 너희의 사랑을 더 기를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자신 안에 하느님을 소유하게 되고, 그분을 소유함으로써 완전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 육체로부터 관능성의 독, 절제의 결여, 존경심의 결여, 야심, 그리고 다시 먼지로 돌아가도록 운명 지워진 육체에 대한 감탄을 제거하기 위하여 내 육체를 하나의 큰 상처가 되게 했다.

사람이 육체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예배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천국에서 육체에게 영원한 아름다움을 주는 것은 그 육체로부터의 분리를 통해서이다.

내 머리는 무수한 고문들로 고통당했다. 매질로, 햇볕에의 노출로, 외침들로, 가시들로. 그것은 너희 생각들의 죄들을 갚으려는 것이었다. 교만, 성급함, 인내심 결여, 불관용은 너희의 머릿속에서 버섯처럼 솟아오른다. 나는 그것을 피로 장식된 관에 넣고 봉함하여 고통당한 기관 안으로 집어넣었는데, 그것은 너희 생각으로부터 싹트는 모든 것을 갚으려는 것이었다.

너는 내가 원했던 유일한 관(冠)을 보아왔다. 미친 사람이나 죄인만이 쓸 수 있는 관을.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아),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 자유를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 관을 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미친 사람으로 치부되었고,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관점에서 보아 나는 미쳤었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거나 그토록 나를 적게 사랑하는 너희를 위하여 죽기를 원했고, 너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악을 더 사랑하는 것을 알면서도 너희 안에서 악을 패배시키기 위하여 죽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에게 먹이였으며, 그에게 단죄된 죄수였다. 나 하느님은 사람에게 단죄되었다.

 

너희는 얼마나 자주 사소한 것들로 인하여 인내심을 잃는지! 너희는 시시한 것들로 인하여 공존하지 못하게 되고, 가벼운 병들로 인하여 못견뎌한다!

그러나 너희 구세주를 보아라. 서로 다른 신체부위들이 계속적으로 찔리고, 내 머리카락들이 가시들 안에서 엉키고, 내 머리를 움직일 수 없는데도 가시관이 계속 움직이는 것을 느끼면서, 고통당하지 않고는 어디에도 기댈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성가셨을지 생각해보아라!

군중들의 외침들, 내 머리에 가해지는 타격들, 작열하는 태양이 고통당하고, 아프고, 고열이 나는 내 머리에게 무엇일지 생각해보아라. 내가 목요일 저녁에 했던 노력들로 인하여 온몸이 아프면서 금요일의 임종의 고통에 들어간 이후, 나의 고문당한 신체와 고문들에 의하여 초래된 이상상태로 인한 신열에 의하여 내가 내 불쌍한 머리에 어떤 고통을 느꼈을지 생각해보아라.

 

내 머리, 두 눈, 입, 코, 혀는 각각 그것들의 고문을 받았다. 악인 것을 보기를 열망하고, 하느님을 찾는 것을 잊어버리는 너희의 시선들을 보속하기 위하여, 네가 기도하고, 가르치고, 위로하기 위하여 네 입술들을 사용하는 대신 내뱉는 너무 많은 너무 그릇되고, 더럽고, 음란한 말들을 바로잡아주기 위해서 말이다.

 

내 코와 혀는, 너희의 폭식과 후각의 정욕을 보속하기 위하여 그것들의 고통을 받았다. 너희는 그것들을 통하여 불완전들을 초래하고, 그것들은 더 중대한 죄들의 기반이 된다. 그리고 너희는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동정하지 않고, 너희가 아주 자주 이득을 취하는 불법적인 수단에 의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잉여의 음식에 대한 열망으로 인하여 죄들을 짓는다.

 

내 기관들의 어느 하나도 고통으로부터 제외되지 않았다. 잔인한 채찍질과 십자가 위에서의 장기의 위치로 인하여 생긴 부종으로 고통당함으로써 내 폐들이 질식과 기침의 고통을 당했고, 내 심장이 그 위치에서 벗어나고, 무자비한 채찍질과 그전에 당한 정신적인 고통,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올라감으로써 생기고, 모든 피가 흘려짐에 따른 빈혈에 따라 생긴 호흡곤란과 심장질환의 고통을 당했으며, 간의 충혈, 비장의 충혈이 있었고, 타박상을 받고 콩팥들이 충혈되었다.

 

너는 내 콩팥들 주위의 관처럼 생긴 타박상들을 보았다. 너희의 과학자들은 내 고통의 증거 즉 수의에 대한 너희의 의심에 대하여 증거를 주기 위하여, 과로한 시체의 피와 땀과 요소(尿素)가 향료들과 혼합되었을 때 고문당한 내 시체의 자연스러운 그림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설명한다.

믿기 위한 그토록 많은 증거들의 필요 없이 믿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작품이다”라고 말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누가 너희에게 나의 십자가에의 못 박힘과 그전에 이루어진 고문에 대하여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허락하셨는가!

 

그러나 지금 너희는 더 이상 어린이들의 단순함을 가지고 믿을 수 없다. 너희는 과학적인 증거들을 요구한다―너희는 과학의 도움과 자극 없이는 똑바로 서고 걷지 못하니, 너희의 믿음은 얼마나 보잘것없느냐―너희는 나의 콩팥들에게 가해진 잔인한 타박상들이 성수의의 기적(the miracle of the Shroud)의 가장 강력한 화학적 매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채찍질들에 의하여 거의 짓이겨진 내 콩팥들은 더 이상 기능할 수 없었다. 불태워진 사람들의 콩팥들처럼 나의 콩팥들은 여과할 수 없었고, 요소가 내 피 안에서, 내 몸속에서 축적되고 퍼져서 요독증의 고통들을 초래하였으며, 내 시체에서 배어나온 시약은 그 천에 그 흔적을 고착시켰다. 너희 중의 어떤 의사라도, 요독증으로 고통당하는 누구도, 요독 독소들이 나에게 초래한 고통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만들 만큼 다량이었기 때문이다.

 

갈증. 갈증은 어떤 고통인가! 그런데도 너는 보고서야 그것을 알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에게 한 방울의 물을 준 사람은 전혀 없었다. 최후의 만찬 이후에 나는 물을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신열, 햇볕, 더위, 먼지, 혈액의 손실이 너희 구세주를 그토록 목마르게 했다.

너는 내가 몰약이 혼합된 포도주를 거절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내 고통에 대한 어떤 진통제도 원하지 않았다.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희생자들로 바칠 때 우리는 동정적 안배들, 타협들, 경감들이 없는 희생자들이 되어야 한다. 주어진 대로 잔을 마시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초와 쓸개즙을 끝까지 맛보아야 한다. 고통을 없애주는 향료가 가미된 포도주를 마셔서는 안 된다.

오! 한 희생자의 운명은 참으로 엄혹하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의 운명으로 선택한 사람들은 복되다.

 

이상이 네 예수의 무죄한 신체에 가해진 고통이었다. 그런데 나는 내 어머니와 그분의 슬픔에 대한 내 사랑의 고통들을 언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슬픔은 필요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가장 잔인한 고통이었다. 오로지 아버지만이 그분의 말씀이 그의 영, 그의 마음, 그의 육체 안에서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를 아신다.

 

내 어머니의 현존도 설사 그것이 나의 마음을 둘러싸고 있는 무한한 고독, 하느님과 사람들로부터 오는 무한한 고독 중에서 나의 마음이 필요로 하는 위안이어서 내 마음이 가장 원했던 것이었다 해도 그것은 하나의 고통이었다.

그분께서는 절망이 나를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육신의 천사로서 거기 계셨어야 했다. 마치 영의 천사가 겟세마네에서 내가 절망하는 것을 막아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구원을 위하여 내 슬픔에 그분의 슬픔을 합치기 위하여 거기 계셨어야 했다. 그분께서는 인류의 어머니로 서품 받기 위하여 거기 계셨어야 했다.

그러나 내가 전율할 때마다 그분께서 돌아가시는 것을 보는 것은 나의 가장 큰 슬픔이었다. 심지어 배반도, 나의 희생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무익할 것이라는 것을 아는 지식도 방금 전에 너무 커보여서 나로 하여금 피땀을 흘리게 했지만, 이 슬픔과 비견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너는 그 시간에 마리아께서 얼마나 위대하셨는지를 보았다. 그분의 고통은 그분께서 유딧보다 훨씬 더 강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후자는 죽였다. 전자는 자기의 아들을 통하여 자기가 죽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저주하지 않으셨고, 미워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기도하셨다. 그분께서는 사랑하셨고, 순종하셨다. 어머니로서의 고통 중에서도 항상 그분의 예수가 그의 품위를 지키기 위하여 그의 무죄한 몸에 자기의 동정녀의 베일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분께서는 하늘의 아버지의 딸이면서도 동시에 그분의 끔찍한 의지에 복종할 수 있었다. 그분께서는 저주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반역하지 않으셨다. 하느님께도, 사람들에게도. 그분께서는 사람들을 용서하셨다. 그분께서는 하느님께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Fiat)’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중에 너는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아버지,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께서는 저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선포하며, 그분께서는 하느님에 대한 자기의 사랑의 행동을 갱신하셨다.

그 시간에! 아버지께서 그분을 찌르셨고, 그분에게서 그분의 존재이유를 박탈하신 후에 말이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신다.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나를 치셨으니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자기의 슬픔에 대하여 슬퍼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자기의 아들이 고통 받는 것에 대해서는 슬퍼하신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심장이 터진 것 때문에 외치지는 않으시나, 내 심장이 창에 찔린 것으로 인해서는 외치신다.

그분께서는 아버지께 그 이유를 여쭙지만, 자기의 슬픔에 대해서는 여쭙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그 이유를 여쭌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정배시다. 하느님과의 결합을 통하여 잉태하신 것은 그분이다. 그분께서는 어떤 인간적인 접촉이 그분의 아들을 낳게 하지 않고, 오로지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그분의 티 없는 태에 뚫고 들어가 신성한 배아, 즉 사람-하느님, 하느님-사람, 세상의 구속자의 몸을 형성했다는 것을 아신다.

그분께서는 아신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배우자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그 상처의 이유를 여쭌다. 다른 것들은 주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언제 모든 것이 성취될는지?

가엾은 어머니! 거기에는 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신의 슬픔이 당신으로 하여금 제 상처에 대하여 읽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마음을 보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야, 너는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너는 결코 그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본다? 비록 마리아께서는 그 순간에 그 상처에 대한 초자연적인 이유들을 보시지 못했으나, 즉시 그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이유로 하느님을 찬양하셨다.

가엾은 어머니, 그분께서는 그 상처가 그분 자신을 그토록 심하게 다치게 한 것은 괘념치 않으셨다. 그것은 나를 다치게 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것은 그분으로 하여금 그분을 희생시킨 하느님을 찬양하시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그분께서는 그분께서 죽지 않기 위하여 작은 위로를 구하셨을 뿐이다. 그분께서는 동터오는 교회를 위하여 필요하다. 몇 시간 전에 그분께서는 어머니(the Mother)로 창조되셨다.

교회에게는 갓난아기처럼 한 어머니의 보살핌과 젖이 필요하다. 마리아께서는 그것을 교회에 주시면서 사도들을 부축해주시고, 그들에게 구세주에 관하여 말씀해주시며,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분께서 오늘밤 마지막 숨을 거두신다면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을 것인가? 만약 마리아께서 돌아가신다면, 단 며칠 동안 머리 없이 남겨질 교회는 완전히 고아로 남겨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갓 난 고아들의 운명은 항상 위태롭다.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기도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그분 안에서 바라는 그분의 자녀들을 위로해주신다. 마리아께서는 베로니카의 위로를 통하여 그것을 증명하신다. 가엾은 어머니이신 그분께서는 그분의 두 눈에 죽은 나의 얼굴의 모습을 각인시키셨다.

그분께서는 그 모습을 견디실 수 없다. 나이 들고, 부어오르고, 그분을 쳐다보지 않고, 두 눈을 감고 있고, 그분에게 말하거나 웃지 않는 비틀어진 입술들의 그의 모습은 그분의 예수가 아니다.

그러나 여기 살아있는 예수의 얼굴이 있다. 슬퍼하고 있고, 상처받았으나, 아직 살아 있는 얼굴이다. 여기서 그의 두 눈은 그분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두 입술은 ‘어머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그의 미소는 여전히 그분께 인사드린다.

오! 마리아야! 네 슬픔 가운데서 네 예수를 찾아라. 그는 언제나 와서 너를 볼 것이다. 그는 너를 부르고 너에게 미소 지을 것이다. 우리는 슬픔을 공유하지만, 곧 결합하게 될 것이다!

 

요한아, 작은 요한아, 너는 마리아와, 그리고 예수와 슬픔을 공유했다.

항상 요한처럼 되어라. 그 점에 있어서도. 나는 이미 너에게 말했다. ‘너는 묵상들과 받아쓰기들로 인하여 위대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내 것들이다.

너는 네 사랑으로 인하여 위대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가장 깊은 사랑은 슬픔을 공유하는 데 있다.’ 그것은 너에게 통찰에 의하여 하느님의 가장 작은 소망들도 알고 모든 장애들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목요일 밤부터 금요일 밤까지의 요한의 역동적이고 섬세한 예민함을 보아라. 그리고 그 후까지도. 그러나 우선 그 시간들 동안의 것을 고찰해보자.

실망의 순간. 지루함의 한 시간. 그러나 체포의 흥분으로 졸음을 극복하고, 사랑으로 흥분을 극복한 다음에 그는 와서 베드로를 끌고 데려간다. 주님께서 사도들의 우두머리와 그분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사도를 보심으로써 약간의 위안을 가지시도록 하기 위하여.

그러고 나서 그는 어머니에 대하여 생각한다. 어떤 잔인한 사람이 그분의 아들이 이미 체포되었다고 소리칠지도 모른다. 그는 마리아께서 이미 그분의 아들의 고통들을 경험하고 있으며, 사도들이 자고 있고 있는 동안에 그분께서는 깨어 기도하시고 그분의 아들과 함께 임종의 고통을 겪고 계셨었다는 것을 모른다. 그는 모른다. 그래서 그는 그분께 가서 그 소식에 대하여 그분을 준비시킨다.

그 다음에 그는 카야파의 집에서 총독관저로, 카야파의 집에서 헤롯의 궁전으로, 다시 카야파의 집에서 총독관저로 왔다 갔다 한다. 그날 아침에 그를 갈릴래아인으로 보이게 하는 옷들을 입고 증오에 취해 있는 군중들을 밀치고 다니는 것은 유쾌한 일이 못된다. 그러나 사랑이 그를 지탱해준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예수와 그의 모친의 슬픔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는 나자렛 사람의 추종자로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다. 그것도 문제가 안 된다. 그는 모든 것에 맞선다. 다른 사람들은 도망가고, 숨고, 신중함과 두려움에 이끌린다. 그는 사랑에 의하여 인도된다. 그래서 그는 남아서 자신을 나타낸다. 그는 순결하다. 사랑은 순결 안에서 무럭무럭 자란다.

 

만일 그의 동정심과 그 백성의 한 남자로서의 상식에 따라 마리아를 군중들과 총독관저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그는 마리아께서 영적으로 그분의 아들의 모든 고문들로 고통당하시고, 그 고통을 공유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모른다― 예수에게 그의 어머니가 필요한 때가 왔고, 그 어머니를 그 아들로부터 더 이상 떼어놓는 것이 옳지 않다고 그가 판단했을 때 그는 그분을 그에게 모셔가고, 그분을 돕고, 그분을 지켜드린다.

그 광포한 군중에 비하여 무기도 없고, 어리고, 권위도 없는 단 한 사람의 남자와, 그가 이끌고 가는 몇 명의 여인들로 이루어진 한 줌의 충성된 사람들은 무엇이냐? 아무것도 아니다. 바람이 흩어버릴 수 있는 나뭇잎들의 작은 더미, 폭풍이 이는 대양이 가라앉힐 수 있는 그 위의 작은 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랑은 그의 힘이고, 그의 돛이다. 그는 사랑으로 무장되어 있고, 그것으로 끝까지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을 보호한다.

요한은 나의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다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는 연민의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러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우두머리이다. 그는 그런 면에서 네 스승이다. 그가 너에게 주는 순수함과 사랑의 본보기를 통하여 그를 따라가거라. 그러면 너는 위대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평안히 가거라. 나는 너를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