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리/가톨릭 십계명

“주 네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십계명[그리스도의 시]

Skyblue fiat 2024. 1. 6. 01:45

127. ‘맑은 내’에서의 예수. “주 네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미소 짓고 계시는데 그분께서 그토록 환하게 미소 지으시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사람들은 속삭이며 그분께 목례한다. 그들은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네 주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118) 탈출1,1-7)

이 계명은 너무 자주 잊힙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뜻을 하느님께 강요하려고 할 때 우리는 그분을 시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거룩하고 완전하며, 그 영적인 면에 있어 주요한 것이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육체도 다루고 보호하는 이 계명을 거슬러 무분별하게 행동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시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용서받고 나서 다시 우리의 죄들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도움 받은 다음에 우리 자신의 방식들로 돌아가고,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하고, 우리에게 하느님을 상기시키는 그 도움을 손상시킨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시당하거나 조롱당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너무도 자주 일어납니다.

 

어제 여러분은 하느님을 우롱하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벌을 보았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께서는 뉘우치는 사람에게는 연민으로 가득하시지만,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신을 고치려고 하지 않는 영혼들에게는 지극히 엄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에게 옵니다. 여러분은 기적들을 얻기 위하여 나에게 옵니다. 여러분은 용서받기 위하여 나에게 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기적들과 그분의 용서를 주십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에게 기적들과 용서를 줄 수 있고, 하느님을 알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어제 그(바리사이 도라)는 나답과 아비후119) 레위10,1-2)처럼 하느님의 진노의 불에 의하여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를 판단하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다만 여러분은 어제 일어난 일 즉 새로운 기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느님을 친구로 모시도록 행동할지를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그도 회개의 물을 원했지만, 그는 초자연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영을 위하여 그것을 원했습니다. 자기의 병을 고쳐주고, 자기를 재앙에서 건져줄 어떤 마술적 수단으로서 말입니다. 자기의 몸과 추수만이 그가 원하고 있었던 전부였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무가치한 것이었던 불쌍한 자기의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유일한 가치는 목숨과 돈이었습니다.

나는 말합니다. 마음은 그것의 보물이 있는 곳에 있고, 보물은 마음이 있는 곳에 있다고요. 그러므로 보물은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마음속에 목숨과 많은 돈에 대한 목마름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것을 얻으려고 했습니까?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심지어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그렇다면 세례를 달라는 그의 간청은 하느님을 우롱하고 그분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의 오랜 죄 많은 삶에 대한 진정한 뉘우침은 거룩한 죽음과 땅 위에서 그가 정당하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을 그에게 얻게 하는 데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기에 결국 자기 자신마저도 사랑하지 않기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증오는 사람의 자기 자신에 대한 동물적이고 이기적인 사랑마저 죽이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뉘우침의 눈물이 그의 세례수가 되어야 했습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여러분 모두는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 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따라서 여러분 모두는 이 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에서 솟구쳐 나와 여러분에게 내려와 여러분을 씻어주고, 더렵혀진 것을 정화시켜주고, 넘어진 것을 일으켜주고, 죄에 의하여 피 흘린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주입해줍니다.

그는 이 땅의 사소한 것들만을 얻으려고 애썼습니다만, 사람이 숙고해야 하는 불행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잃는 영원한 불행입니다.

 

그는 의식(儀式)적인 제물들을 봉헌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 자기의 영혼의 제물을 드릴 줄을 몰랐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죄짓기를 그치지 않았고, 회개하지 않았으며, 착한 행위들을 통하여 용서를 청할 줄을 몰랐습니다.

불법적으로 얻어진 부를 통하여 만들어진 위선적인 제물들은 마치 사람의 악행들의 공범이 되어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느님을 우롱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느님께서는 ‘저는 희생을 바칩니다’ 하고 말하면서 계속 죄짓기를 원하는 사람을 물리치십니다. 영혼이 죄를 삼가지 않는다면, 육체의 단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기서 죽은 그의 죽음을 계기로 여러분은 하느님께 사랑받기에 필요한 조건들을 묵상해야 합니다. 지금 그의 호화로운 저택에서는 그의 친척들과 고용된 곡녀들이 곧 무덤에 안치될 시체를 애곡하고 있습니다. 오! 진짜 애곡이고, 진짜 시체입니다! 그는 한 시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낙심한 애곡일 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은 그 영혼은 그가 혈연관계로나 사고방식의 유사성으로 인하여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설사 그들이 영원히 같은 곳에 함께 있게 된다 해도, 그들은 그곳을 지배하는 증오에 의하여 분리될 것입니다. 그때 죽음은 ‘참된’ 이별이 됩니다. 사람이 자기의 영혼을 죽였을 때 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애도 받는 대신 자기가 자신을 위하여 애곡하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통회하는 겸손한 마음의 눈물을 통하여 그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 자기의 영혼에게 생명을 돌려주게 될 것입니다.

 

가시오. 증오나 비난 없이 겸손만을 가지고요. 증오 없이 정의에 따라 그에 대하여 말한 나처럼 말입니다.

삶과 죽음은 어떻게 하면 잘 살고, 행복하게 죽으며, 죽음 없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