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리/가톨릭 십계명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십계명[그리스도의 시]

Skyblue fiat 2024. 1. 7. 02:30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2권

 

125. ‘맑은 내’에서의 예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1945. 3. 6.

 

여전히 비가 오고 있지만, 그리 심하게 오지는 않아서 사람들은 선생님께 올 수 있다.

예수께서는 한쪽에서 두세 사람의 말을 따로 듣고 계신다. 그 사람들은 중요한 일들에 대하여 그분께 말씀드린 다음 훨씬 더 침착한 모습으로 제 자리로 돌아간다.

 

그분께서는 두 다리가 심하게 골절되어 어떤 의사도 고칠 수 없는 한 어린 소년을 축복해주신다. 사실 모든 의사들은 말했었다. ‘소용없소. 두 다리의 골절이 저 위 척추 가까이까지 미쳤소.’ 그 아이의 어머니가 울면서 설명하고 있다.

“이 애는 자기의 어린 여동생과 함께 마을길에서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헤로데 당원이 전속력으로 마차를 달리게 하여 이 애를 친 다음 달려가 버렸습니다. 저는 이 애가 죽은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상태가 죽은 것보다 더 못합니다. 보시지요. 저는 이 애를 이 널빤지 위에 눕혀놓고 있습니다…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까요.뼈가 이 애의 살을 찌르기 때문에 이 애는 고통스러워합니다. 나중에 뼈가 더 이상 이 애의 살을 찌르지 않게 되더라도 이 애는 줄곧 똑바로 누워 있어야만 할 것이기 때문에 이 애는 계속 고통당할 것입니다.”

“너는 많이 아프니?”

예수께서는 측은해 하시며 울고 있는 어린이에게 물으신다.

“예.”

“어디가?”

“여기… 그리고 여기. 널빤지는 딱딱해요. 그리고 나는 움직이고 싶어요. 나는…”

아이가 작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자기의 콩팥들이 있는 부위와 등을 만진 다음 절망적으로 운다.

“내가 너를 안아줄까? 너는 이리 오겠니? 나는 너를 저 위로 데리고 갈게. 그러면 너는 내가 말하는 동안 모든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거다.”

“예…”

그 아이의 대답에는 강렬한 갈망이 가득하다. 가엾은 어린것이 애원하며 양팔을 내민다.

“그럼 오너라.”

“그렇지만 선생님, 이 애는 할 수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해요! 이애는 너무 아파요… 저는 씻어주기 위해서 이 애를 움직이지도 못하는걸요.

“나는 이 애를 아프게 하지 않을 겁니다.”

“의사는…”

“의사는 의사고, 나는 납니다. 당신은 왜 왔습니까?”

“왜냐하면 당신께서는 메시아시니까요.”

그 여자는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얼굴이 창백해지다가 빨개지며 대답한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소중한 아이야, 이리 오너라.”

예수께서는 한 팔을 움직이지 못하는 두 다리 밑으로 넣으시고, 다른 한 팔은 아이의 양어깨 밑으로 넣으신 다음 아이에게 물으신다.

“내가 너를 아프게 하니? 아니야? 그럼 네 엄마한테 작별인사해라. 가자.”

그분께서는 그분께서 지나가시도록 길을 터주는 군중 사이로 아이를 안고 가신다. 그분께서는 방의 끝까지 가셔서 사도들이 그분을 위하여 만들어놓은 일종의 연단으로 올라가신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이, 심지어 마당에서도 보이시게 된다. 그분께서는 스툴 하나를 가져오게 하여 앉으시고, 어린이를 그분의 무릎 위에 올려놓으시며 물으신다.

“너는 이것이 좋니? 자, 너도 앉아서 들어라.”

그분께서는 그분의 오른손만으로 손짓을 하시며 말씀을 시작하신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그분의 왼손으로는 아이를 안고 계시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데, 그는 무언가를 보는 것을 아주 즐거워하며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방의 반대쪽 끝에 있는 엄마를 보고 방긋 웃는다. 그녀의 심장은 희망으로 뛰고 있다. 아이는 예수의 튜닉의 끈과 그분의 부드러운 황금색 수염과 긴 머리채 하나를 가지고 손장난하며 놀고 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직한 일을 해라. 그리고 일곱째 날은 주님과 네 영혼에게 바쳐라.’113)탈출20,8-11)

이것이 안식일의 휴식에 대한 계명입니다. 사람은 하느님보다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엿새 동안에 우주를 창조하셨고, 일곱째 날에는 쉬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어떻게 감히 아버지를 본받지 않고, 방자하게도 그분의 계명을 위반하겠습니까? 그것이 어리석은 명령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육체와 정신과 영혼에게 진정 유익한 명령입니다.

피곤한 몸은 피조세계의 다른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휴식을 필요로 합니다. 밭에서 일한 소는 쉬고, 우리도 그놈을 쉬게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놈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태우고 다니는 나귀나, 우리에게 젖을 주는 새끼를 낳은 양도 휴식을 필요로 합니다. 밭의 땅도 쉬고, 우리도 그것을 쉬게 합니다.

씨가 없는 몇 달 동안에 땅은 양분을 얻고, 비에 들어 있거나 땅에서 올라오는 소금을 흡수합니다. 지혜로운 번식의 영원한 법칙들에 복종하는 동물들과 식물들은 우리의 동의 없이도 잘 쉽니다.

본능적인 명령만을 받았을 뿐인 식물과 동물 등의 하등 피조물들은 그것을 따르고 그것에 복종할 줄 아는데, 왜 사람은 일곱째 날 쉬셨던 창조주를 본받기를 원치 않습니까?

 

이것은 육체적인 계명일 뿐 아니라 정신적인 계명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엿새 동안 모든 사람과 모든 일에 골몰했습니다. 베틀의 실처럼 위아래로 움직이느라 이렇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나는 나 자신도 돌보고,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도 돌봐야겠다. 나는 아버지이니, 오늘 나는 내 자녀들에게 속해 있다. 나는 남편이니, 오늘 나는 내 아내에게 헌신할 것이다. 나는 형제이니, 내 형제들과 기뻐할 것이다. 나는 아들이니, 연로하신 내 부모님들을 돌봐드려야겠다.’

이것은 영적인 계명입니다. 일은 거룩하지만, 사랑은 더 거룩하고,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우리를 살아 있게 해주시는 착하고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께 이레 중에 적어도 하루는 드려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우리 아버지, 우리 자녀들, 형제들, 아내, 우리 자신의 육체보다 하느님을 덜 존경해야 합니까?

주님의 날은 그분의 것이어야 합니다. 오! 하루 일을 마치고 저녁에 애정이 가득한 가정에서 쉰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오랜 여행 후에 가정에 돌아오는 것은 유쾌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엿새 동안 일한 다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습니까? 왜 우리는 엿새 동안의 여행에서 돌아와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는 제가 쉬는 날을 당신과 함께 지내기를 원합니다’ 하고 말하는 아들처럼 되지 말아야겠습니까?

 

잘 들으시오. 나는 ‘정직한 일을 하라(do an honest job)’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율법이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명한다는 것을 압니다. 정직한 일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일부를 이룹니다.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은 사업에 있어 도둑질하지 않고, 노동자의 임금을 속이지 않고, 그를 부당하게 착취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인과 노동자도 자기처럼 육체와 영혼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인과 일꾼을 자기의 발로 차거나 쇠 채찍으로 때려도 되는 생명 없는 돌들처럼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하느님의 눈앞에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가 그 이득의 일부를 성전에 바친다 해도, 그것은 저주받은 것입니다.

오! 얼마나 거짓된 헌금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감히 그것에서 착취당한 아랫사람의 눈물과 피가 흐르거나 그것의 이름이 ‘도둑질’, 즉 자기의 이웃에 대한 배신으로 인하여 생긴 돈인데 그것을 제단 아래 가져다놓을 수 있겠습니까? 도둑은 자기의 이웃에 대한 배신자니까요. 사람이 자기를 성찰하고, 자기를 향상시키고, 지난 엿새 동안에 지은 죄를 보속하는 데 안식일을 사용하지 않는 한 그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고방식을 조금도 바꾸지 않는 단순한 외적 준수가 아니라 위와 같이 하는 것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살아 있는 행위들(living deeds)을 원하시지, 모조행위들(sham deeds)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율법에 대한 거짓 존중은 단순한 흉내일 뿐입니다. 안식일을 거짓으로 거룩하게 지키는 것 즉 사람들의 눈에 계명을 지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휴식을 취하긴 하지만, 한가한 시간들을 악습, 정욕, 연회로 써버리고 다가오는 일주일 동안 어떻게 하면 자기의 이웃을 착취하고 손해를 끼칠 수 있을까를 계획하며 취한 휴식은 안식일을 지키는 가짜입니다.

안식일의 물리적인 휴식이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겸손한 고백과 다가오는 일주일 동안에는 자신을 더 향상시키겠다는 확고한 결심과 함께 자기 자신에 대한 내적이고 영적인 성화시키는 성찰과 병행되지 않을 때 그것은 가짜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죄에 빠지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은 한 번 넘어진 다음 다시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다른 한 걸음을 내딛지 않으려 하는 어린이에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그 애는 어리석다고 말하겠지요.

우리 모두가 어렸을 때 그와 같았고, 넘어졌다고 해서 우리 아버지들이 우리를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으니 우리는 그 애가 걸음걸이가 확실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겠지요.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어머니가 얼마나 수없이 입 맞춰주고, 아버지가 얼마나 쓰다듬어주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늘에 계시는 지극히 다정하신 아버지께서도 똑같이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땅에 넘어져서 울고 있는 그분의 어린 자녀에게 몸을 굽히시고 말씀하십니다. ‘울지 마라. 내가 너를 일으켜주마. 다음번에 너는 더 조심해라. 지금 내 품으로 오너라. 여기서 네 모든 고통은 그칠 것이고, 너는 튼튼해지고 나아서 기뻐하며 떠날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 말이기도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여러분은 매사에 성공할 것입니다. 믿음, 기억하시오. 어린이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린이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는 무엇이 일어날지, 어떻게 일어날지 묻지 않습니다. 그는 일들의 깊이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신뢰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을 믿고, 그들이 자기에게 말하는 대로 합니다.

여러분도 지극히 높으신 분에 대하여 어린이들처럼 되시오. 그분께서는 땅의 아름다움인 저 길 잃은 천사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요! 그분께서는 이와 같이 어린이처럼 순진하고, 착하고, 순결한 영혼들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가지는 것을 배우는 한 어린이의 믿음을 보기를 원합니까? 보시오. 여러분 모두는 내가 내 품에 안고 있는 이 아이를 안타까워했습니다. 의사들과 이 아이의 엄마의 말과는 달리 이 아이는 내 무릎에 앉아 있을 때 울지 않았습니다. 보이세요? 이 아이는 오랫동안 전혀 쉬지 못하고 밤낮으로 울기만 했었는데, 여기서는 울지 않고 내 가슴에 기대 평온하게 잠들었습니다.

내가 이 아이에게 ‘너는 내 품에 안기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이 아이는 자기의 비참한 상태나 자기가 움직이는 과정에서 느낄 수도 있는 고통을 따져보지 않고 ‘예’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아이는 내 얼굴에서 사랑을 보았고, 그래서 ‘예’ 하고 대답하고 나에게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저 널빤지에서 꼼짝 못하고 있었던 아이가 여기 높은 곳에 와서 보는 것을 기뻐했고, 딱딱한 나무 대신 부드럽고 따뜻한 몸 위에 누워 있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는 방긋 웃었고, 자기의 작은 손으로 내 머리카락 한 줌을 잡은 채 잠들었습니다.

지금 나는 입맞춤으로 이 아이를 깨우겠습니다…”

 

예수께서 아이의 갈색 머리카락에 입 맞추시자 그가 미소 지으며 깨어난다.

“네 이름이 뭐니?”

“요한.”

“요한아, 들어라. 너는 걷고 싶으냐? 너는 네 엄마한테 가서 ‘메시아가 엄마의 믿음 때문에 엄마를 축복하신대’ 하고 말하고 싶으냐?”

“예!”

아이가 자기의 작은 두 손으로 손뼉 치며 대답하고 나서 예수께 묻는다.

“당신은 나를 걷게 해주실 거예요? 풀밭에서? 더 이상 이 보기 흉하고 딱딱한 널빤지 없이? 나를 아프게 하는 의사들도 더 이상 안 보고?”

“안 본다. 다시는 안 봐.”

“아! 나는 당신을 많이 사랑해요!”

아이는 자기의 두 팔로 예수의 목을 얼싸안고 그분께 입 맞춘다. 그는 더 잘 입 맞추려고 예수의 무릎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팔짝팔짝 뛰며 예수의 이마, 두 눈, 두 뺨에 수없이 입 맞춘다.

아이는 너무 기쁜 나머지 지금 이 순간까지 마비되어 있었던 자기가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엄마와 군중이 지르는 외침에 놀라 돌아보고 깜짝 놀란다. 아이의 양윈 얼굴 위의 무죄한 큰 눈들은 질문하듯 주위를 둘러본다. 그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자기의 한 팔로 예수의 목을 얼싸안고 웅성거리는 군중과 반대쪽 끝에서 자기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을 번갈아가며 ‘요한아! 예수님! 요한아! 예수님!’ 하고 부르는 자기의 엄마를 가리키면서 은밀히 그분께 묻는다.

“왜 사람들과 우리 엄마가 소리 지르고 있어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어요? 당신이 예수에요?”

“그래, 나는 예수다. 사람들은 네가 걸을 수 있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에 소리 지르고 있다. 잘 가거라. 어린 요한아. 네 엄마에게 가거라. 그리고 착하게 살아라.”

예수께서는 그에게 입 맞추시고 그를 축복하신다.

아이는 자신 있게 예수의 무릎에서 내려간 다음 자기의 엄마에게로 달려가 그녀의 목을 얼싸안고 말한다.

“예수가 엄마를 축복한대. 그런데 엄마는 왜 울고 있어?”

사람들이 약간 진정되자 예수께서는 우레 같은 소리로 말씀하신다.

 

“죄짓고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힌 여러분은 어린 요한처럼 행동하시오.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시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환호하는 군중의 함성이 한 어머니의 행복한 눈물로 섞여드는 동안 예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의 호위를 받으시며 방을 떠나시고, 환상은 모두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