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인들/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여섯 번째 편지(세분 신부님들과 부모의 순교를 알림)

Skyblue fiat 2023. 9. 25. 12:12

● 김대건 신학생의 여섯 번째 편지


발신일 : 1843년 1월 15일
발신지 : 요동 백가점
수신인 : 르그레주아 신부
(여섯 번째 편지와 일곱 번째 편지의 일부 내용이 중복되어 있으나 편지를 받는 분이 다르다.)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저는 계획대로 12월 23일에 떠나 나흘 후에 아무런 장애 없이 변문에 도착하였습니다. 변문에서 멀지 않는 곳을 지나가다가 길에서 굉장히 큰 무리를 거느리고 북경으로 들어가는 조선 임금님의 사신 일행을 만났습니다.  


하느님의 안배로 그 일행 중에 김 프란치스코라는 조선의 연락원이 저에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저도 그를 모르고 그 역시 저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제가 그에게 신자냐고 물었더니 그가 그렇다고 대답하고 세례명은 프란치스코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함께 온 중국인 안내자들을 멀리서 뒤따라오게 하고 그를 따라가면서 우선 조선에 계신 신부님들의 안부부터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어보면 신부님들은 종교의 이유로 살해되었고 2백여 명의 신자도 처형되었는데 그들 중에 대다수가 지도급 인사였다고 합니다.  


저의 형제 토마스(최양업)의 부모도 살해되었는데 부친(최경환)은 곤장으로, 모친(이성례)은 칼을 받아 순교의 화관을 받았다고 합니다.
저의 부모 역시 많은 고난을 당하여 부친(김제준)은 참수되었고, 모친(고 우르술라)은 의탁할 곳이 없는 비참한 몸으로 신자들 집을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프란치스코가 저에게 이야기한 것이 매우 많으나 여기에 다 기록하기에는 너무 장황할 것 같습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앵베르) 주교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배신자와 포졸들의 수색을 받으시어 수원이라는 곳에 은신하셨는데 유다(김여상)가 지옥의 심부름꾼들을 거느리고 그곳에 당도하자 주교님은 쉽사리 더 피신할 수 없음을 아시고 스스로 포졸들 앞에 나가시어 재판소로 끌려 가셨다고 합니다.

  
(모방, 샤스탕) 신부님 두 분도 자수하지 않으면 천주교인이라는 이름까지 전멸될 것이라는 말을 주교님이 들으시고 편지를 보내어 두 분 신부님을 서울로 불러 올려 다 같이 한날에 순교의 화관을 받으셨다 합니다.
오! 이분들은 참으로 찬란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용맹하게 싸워 승리를 얻은 후 황제의 붉은 옷을 몸에 두르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천상 성소로 개선 용사로서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은 얼마나 불행한 땅입니까! 그렇게나 여러 해 동안 목자들을 여의고 외로이 지내다가 갖은 노력을 들여가며 가까스로 맞이한 신부님들을 일시에 모두 잃었으니 조선은 얼마나 불운합니까. 적어도 한 분만이라도 남겨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모두 다 삼켜버렸으니 조선은 참으로 안타깝고 괘씸합니다.


요새는 박해가 멎어서 신자들은 조금 안정을 누리고는 있지마는 신부님들이 안 계시어 마치 목자 없는 양떼처럼 탄식하며 방황하고 있답니다.


근년에 신앙을 받아들였다가 주요한 배반자가 된 김여상은 사형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사형 이유는 그가 흉악한 인간으로서 남들을 공적으로 해친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는 듯합니다.
다른 사람 하나(김대건의 매부)는 아내의 부모를 신고하였으므로 국법에 따라 교살 당하였습니다. 신부님들과 수많은 신자를 체포한 포도대장도 짐작하건대 남에게 불의한 짓을 저지른 탓으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된 후 사형을 받았다고 말들 합니다.


주변 상황이 허락지 않아서 그 밖의 소식을 더 오래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을 인도하기 위하여 변문으로 되돌아갈 수 있느냐고 그에게 물었더니 외교인들의 의혹과 박해의 위험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외교인 친구들이 있어 그들의 도움으로 중국에 들어가 북경까지 갈 수 있는 허락을 얻어 사신 일행의 명단에 올라 수행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는 저에게 인내심을 가지라고 충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선교사 신부님의 입국에 대하여 다른 신자들과 함께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전력을 쏟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저는 신부님들이 1년 후에야 담당 선교지인 조선으로 입국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2월쯤에 신부님을 인도할 마음으로 곧 조선에 들어갈 여행 준비가 되어 있음을 그에게 밝혔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에게 어느 누구라도 조선에 입국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는 국경을 통과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잘라 말하면서 오직 유일한 방법은 가난한 나무꾼 행세로만 입국할 수 있을 듯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쯤 듣고 나서 그가 가지고 온 편지들을 받아가지고 그와 작별한 후 변문으로 다시 돌아와 하루를 지냈습니다. 이튿날 새벽 1시쯤 일어나 조선옷을 갈아입고 중국인 안내자들을 작별한 후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해가 넘어갈 무렵에 의주 읍내가 멀리 보였습니다. 과연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마음이 죄어드는 듯 하였습니다. 특히 나무할 칼을 잊어버리고 변문에 놓고 왔기 때문에 더욱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예로부터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보호하심에 달아드는 자는 아무도 버림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성문을 향하여 갔습니다.

성문에는 군인이 지키고 서서 지나가는 사람마다 통행증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마침 변문에서 소를 몰고 돌아오는 사람들 틈에 끼여 지나갔습니다. 그곳에 있던 군인이 저에게 통행증을 요구하는 차례가 되었을 때 세관원들한테로 갔습니다. 저는 요행이 몸집이 큰 소의 덕을 톡톡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위험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관에서는 여행자들에게 한 명씩 세관장 앞으로 나아가 성명을 대라고 하였습니다. 날이 어두웠으므로 불을 켜놓고 조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세관장 외에도 다른 세관원 한 사람이 높은 곳에 서서 아무도 달아나지 못하도록 두루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저는 어떻게 처신하여야 할지 몰랐습니다. 한편에서는 이미 조사를 받은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하기에 저는 슬그머니 그들 뒤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제 등 뒤에서 세관원이 저를 부르며 통행증도 내지 않고 가느냐고 호령하였습니다. 그가 연거푸 저를 부르기에 저는 통행증을 벌써 내주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저를 뒤쫓아오는 줄로 믿고 달아나 성 밖 변두리로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저를 맞아줄 집이 한 채도 없었으므로 밤새도록 대략 백리를 걸었습니다. 동이 틀 무렵에 너무나 추워서 몸을 녹이려고 어떤 조그마한 주막에 들어갔더니 여러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 얼굴과 의복을 살펴보고 또 말소리를 들어보고 외국 사람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들은 저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제 머리를 살펴보고 제가 신은 중국 버선을 검사하였습니다. 한 사람만 저를 동정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를 반대하여 제가 어디로 가든지 잡힐 것이라고 떠벌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백하고 또 조선 사람이니까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나의 근본이 변할 리 없다고 대답하고, 또 혹시 제가 잡힌다 할지라도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은 자기를 변호하기가 어렵지 않으니 마음은 편안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이 말을 듣고서 저를 내쫓았습니다.


제가 조선의 수도 서울, 즉 한양으로 간다는 말을 하였기에 그들은 그런 줄로 알고 간교하게도 사람 하나를 보내어 제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정탐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포졸들의 손아귀를 피하기가 지극히 어려웠고, 만일 잡히는 경우에는 제 몸에 지닌 돈만 보더라도 도둑의 혐의를 받아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도둑은 국법에 의하여 모두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는 정탐꾼이 되돌아가는 것을 보고서 그 사람들에게 제가 정말로 서울 쪽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그 작은 주막을 멀리 피하면서 우회하여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해가 뜬 다음에는 감히 길에 나서지를 못하고 수목이 울창한 산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해가 떨어져 어둠이 땅을 내리 덮었을 때 걸음을 재촉하여 새벽 2시쯤에 의주에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서 바다와 반대쪽, 즉 읍의 왼편으로 방향을 정하여 길도 없는 험악한 곳을 헤매었습니다. 이런 곳에도 사방에 지붕이 보이기에 저는 국경 수비대 막사로 여겼습니다. 압록강에 도착하였을 때는 벌써 해가 떠올라 사방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첫째 강과 둘째 강 사이에 낀 황막한 들길을 걸었습니다. 여기는 낮동안 조선 사람들이 중국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기도 하는 길목이었습니다. 저는 걸어가는 도중에 중국 의복으로 갈아입느라고 나머지 한나절을 소비하였습니다.


다시 일어나서 약 백리 길을 걷고 나니 해가 떠올랐습니다. 계속 길을 걸어 저녁때가 지나 변문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물건을 마련하고 5일 만에 백가점에 도착하여 공경하올 메스트르 신부님에게로 되돌아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3월에 프란치스코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평온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기도 중에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전에 정성껏 저를 기억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공경하올 신부님, 안녕히 계십시오.  


공경하올 스승님께, 순명하는 아들 김해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출처: 한국성지와 사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