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건 신학생의 다섯 번째 편지
발신일 : 1842년 12월 21일
발신지 : 요동 백가점
수신인 : 리부아 신부
(네 번째 편지와 다섯 번째 편지는 일부 내용이 중복되어 있다. 그러나 편지를 받는 분이 다르다.)
예수 마리아 요셉,
리부아 신부님께 백가점에서
우리는 계획한 대로 에리곤호를 타고 우리의 선교지에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신부님께 알려드렸으리라 생각됩니다마는 아주 엉뚱한 다른 일들이 연거푸 일어난 뒤에 우리는 산동 대목구장이며 강남 직할서리구장이신 존경하올 플로렌티노 베지 주교님께로 인도되었습니다.
우리는 주교님으로부터 아주 환대를 받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신자의 배를 마련하여 주셔서 약 보름이 걸려 우리가 목적했던 태장하 항구에 다다랐습니다. 이 항해는 순조로워 아무런 역경도 당하지 않았고 다만 북풍이 우리의 항진을 더디게 하였을 뿐입니다. 배 안에서는 네 사람 외에는 모두 신자들이어서 이들은 우리를 잘 대우해 주었고 신부님들께서는 매일 하느님께 미사를 봉헌하셨습니다.
범 요한은 일을 주선하도록 요동 교우촌에 파견되었는데, 그는 거기에 머물고 그 대신에 두 요셉이라고 하는 교우촌 회장을 보내왔습니다. 공경하올 신부님들과 우리가 계획한 대로 신부님들을 밤중에 인도하려고 하였으나 그때의 주변상황이 이를 허용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날이 환히 밝은 후에야 외교인들의 작은 배로 짐을 보내고 우리는 두 요셉의 안내로 배에서 내렸습니다. 짐을 운반하기 위하여 두 명의 선원이 우리 배에 올라탔는데, 그들이 미소를 짓고 계시는 신부님들을 보고 서양 사람인 줄 알아차렸습니다.
우리가 세관에 접근하였을 때 두 요셉은 저에게 방금 물이 빠져서 대단히 질퍽거리는 강변에 신부님과 함께 내리도록 귓속말을 하였습니다. 그곳은 세관에서 마주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신부님들이 세관에서 봉변을 당할까 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토마스(최양업)와 함께 세관으로 직행하였습니다.
우리는 메스트르 신부님과 브뤼니에르 신부님, 두 명의 선원 그리고 저까지 다섯 명이었는데, 모두 진흙에 발이 빠졌고 길도 아닌 곳을 허둥대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외교인들은 신부님들을 보고 영국인이라고 떠들었습니다.
잠시 길을 걷고 있을 때 세관 쪽에서 30명 가량의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고함을 치면서 달려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경찰관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경찰관도 있고 손님의 안내자도 있었습니다. 신부님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걸어가시고 그들은 오랫동안 힐문하여 우리를 괴롭힌 후 자기 자리로 되돌아갔습니다.
우리는 백가점이라 불리는 교우촌으로 길을 재촉하였고 두 요셉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이 촌락은 바다에서 60리 가량 떨어져 있는 곳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신자들이 2백 명 가량 살고 있는 곳입니다.
두 요셉의 가족 외에는 이곳 신자들은 신부님을 영접하기를 꺼리며 더구나 신부님을 쫓아내려고 음모를 꾸미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베롤 주교님이 그들 집에 머무시는 것도 그들이 원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아직 인심이 안정되어 있지 못하여 주교님과 신부님들에게 불쾌한 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만일 편지지가 넉넉하다면 신부님께 그런 사정을 전부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브뤼니에르 신부님은 토마스와 함께 개주 부근에 있는 양관(陽關)이라는 교우촌에 계시고 메스트르 신부님은 저와 함께 어떤 과부의 조그마한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조선에서 온 소식에 대하여는 신부님께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다만 존경하올 베롤 주교님이 변문에 파견한 연락원이 외교인들한테서 얻어 듣고 돌아와 주교님께 보고한 바를 전해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들리는 바로는 조선어와 중국어와 서양어에 능통한 두 명의 외국인이 종교를 이유로 조선인 3백 명과 함께 참수당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 아우구스티노는 그렇게 엄청난 범죄의 주모자로서 죽음을 당하고 그의 시체는 여섯 조각으로 찟겨 새들의 밥이 되었으며 그의 모든 가족은 멸족되었다 합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신부님들은 거짓 신자로부터 밀고 당하였다 하며 그자는 신부님 얼굴을 익히려는 의도에서 입교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공경하올 베롤 주교님과 메스트르 신부님의 계획대로 조선으로 갈 출발일을 12월 22일로 정하였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은 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고자 하였으나 스승님도 잘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위험이 없지 아니하므로 존경하올 베롤 주교님께서 저에게 어려움이 더 커질까 염려하여 메스트르 신부님의 동행을 금하셨습니다.
만일 직접 대면하여 말씀드릴 수 있다면 아직도 스승님께 드릴 말씀이 많으나 편지로 이 모든 사정을 일일이 적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멈추고 공경하고 경애하올 스승님께 이 작은 아들을 기도 중에 항상 기억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안녕히 계십시오.
공경하올 스승님께, 순명하는 아들 김해 김 안드레아가 절합니다.
백가점에서 1842년 12월 21일
새 소식을 추가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개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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