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노래
내 사랑들을 찾으며
이 산들과 물가를 나는 가리라
꽃들을 꺾지도 않고
들짐승들을 무서워함도 없이
나는 힘센 이들 경계선을 넘어가리라
해 설
1. 영혼은 애인을 만나기 위해서는 제 1과 제 2 노래에서 했음 같이 중개자의 도움을 빌리는 것도 충분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애인을 찾는 영혼의 소원은 진실하고 그의 사랑은 열렬함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어떠한 노력도 아끼고 싶지 않다. 사실 하느님을 진실히 사랑하는 영혼은 자기 애인인 하느님의 아들을 찾기 위해 우물쭈물 하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한 뒤에도 만족하지 않고 자기는 아무것도 안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셋째 노래에서 영혼은 스스로 노력하여 그분을 찾아 만나려고 다짐하고 그것을 위해 어떤 방법을 취할 것인가를 말한다. 즉 모든 덕을 수련하고 활동과 관상생활의 영적 수업에 전심하는 것이며 그 때문에 어떠한 즐거움도 쾌락도 거절하고 영혼의 세 원수인 세속과 악마와 육신에서 오는 그 어떠한 힘이나 계락으로도 도중에서 못가게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영혼은 이렇게 말한다.
내 사랑들을 찾으며
2. 이것은 말하자면 내 애인을 찾으면서란 뜻이다. 영혼은 하느님을 진실히 찾기 위해서는 마음이나 혀로 기도하는 것도, 타인의 호의에 의지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고 이와 함께 자기도 또한 힘닿는 데까지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그 사람 자신이 하는 하나의 행위를 다른 이들이 그를 위해 해 주는 많은 행위보다도 더욱 존중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혼은 “찾으시오, 얻을 것입니다.”(루가 11, 9)하신 애인의 말씀을 기억하고 앞서 말했음같이 자신의 행위로 그를 찾으려고 나가서 그분을 찾아 만나기 전에는 결코 중단 않기로 다짐한다.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얻기 위해 말뿐이고 그것도 별로 좋지 않은 말 이상의 댓가를 지불하기를 원치 않고 약간의 수고로운 일은 거의 아무 것도 그분을 위해 하려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기호에 맞는 쉬운 곳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일어서려 않고 한 발자국도 내딛는 수고를 취하지 않으며 자기의 기호나 위로 무익한 소망의 한 부분을 잃으면서 자기를 억제하려 하지는 않고 하느님의 위로가 입이나 마음에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찾아 만나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에서 나오지 않는 한 아무리 하느님께 큰 소리로 외쳐보아도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아가의 신부도 애인을 이렇게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기나긴 밤, 잠자리서 나는 찾았네, 찾아도 못 만났네, 내 사랑 임을, 떨치고 일어나 읍으로 가리, 이 거리 저 광장을 두루 거치며 사랑하는 내 님을 찾아가 보리, 찾기는 하였어도 못 만나고 말았네.”( 3, 1-2) 그리고 얼마간 어려움을 겪은 뒤에 그분을 발견했다고 한다.
3. 그러므로 자신의 기호나 쉼 속에 머물고 싶어하면서 하느님을 찾는 이는 밤에 찾는 사람이어서 못 찾아 낼 거이다. 그러나 자기의 기호나 쾌락의 잠자리에서 떨치고 나와 덕행의 수업이나 행위로 하느님을 찾는 이는 낮에 찾는 이와 같아서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밤의 어둠 속에서는 찾지 못한 것도 대낮의 밝은 데서는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신랑은 친히 지혜서에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신다.
“지혜는 시들지 않고 항상 빛나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원하는 사람들은 쉽게 지혜를 찾을 것이다.”(6, 12-14) 이것은 영혼이 자기 뜻이라는 집이나 자기 기호라는 잠자리에서 나와 완전히 그것들에서 떠나자마자 이 신적 지혜, 곧 자기의 신랑이신 하느님의 아들을 만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영혼은 말하기를 나의 사랑을 찾아서
이 산들과 물가를 나는 가리라
4. 산들은 높다. 그것은 여기서는 덕을 뜻한다. 말하자면 덕은 숭고하기 때문이며 또 덕의 산을 오르기 위해선 곤란과 노고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영혼은 덕행으로 관상생활을 수련해간다는 뜻이다.
물가는 낮다. 그것은 억제, 고행 그 밖의 영적 수업을 뜻한다. 영혼은 이런 것으로 수련을 쌓아가면서 지금 말한 관상생활에다 활동생활을 합쳐서 나아가고자 한다. 왜냐하면 확실히 하느님을 찾아 만나고 덕을 쌓기 위해서는 이 양편이 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도 같다. 내 애인을 찾으면서 나는 높은 덕을 실천하고 언제나 겸손의 수련으로 자신을 낮추자고, 사실 하느님을 찾는 길은 하느님 안에서 선을 행하고 자기 안에서 악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다음 시구에서 말하기를
꽃들을 꺾지도 않고
5. 하느님을 찾기 위해서는 자유스럽고 강한 마음 모든 악에서 해탈하고 또 순수히 하느님의 것이 아닌 것이면 선까지도 해탈한 마음이 요구된다. 그래서 영혼은 이 시구와 다음 시구에서 하느님을 찾기 위해서는 지녀야 할 자유와 굳셈을 말한다. 이 시구에서 영혼은 도중에서 눈에 띄는 꽃을 꺾지 않겠다고 한다. 꽃이란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제공해 주는 즐거움, 만족, 쾌락을 뜻하고 만일 이것들을 꺾고 받아들이려고 하면 자기의 걸음은 방해받을 것이다. 이 즐거움에는 세 종류가 있다. 즉 현세적인 것, 감성적인 것, 그리고 영적인 것이다. 이런 것은 어느 것이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만일 거기에 멈추든가 앉아버리면 그리스도께로 인도되는 곧 바른 길에서 요구되는 영적 정나가 방해받는다. 그러므로 영혼은 하느님을 찾아 만나기 위해서는 이런 즐거움은 어느 것이나 꺾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바로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내 마음을 이 세속이 제공하는 부나 재보 안에 두지 않겠다. 육의 만족이나 향락을 받아들이지 않겠다. 영적 맛이나 위로에도 마음을 두지 않겠다. 그렇게 하면서 덕이나 노고의 산들을 넘어서 내 사랑을 찾는 일을 그 어떤 것으로도 중지되지 않게 하리라.’ 즉 이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예언자 다윗은 “너희 재산 는다 하여 거기 마음 두지 말라.”(시편 61,11 )고 한 권고에 따라 영혼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 부요함은 감성적 맛뿐만 아니라 현세적 재보와 영적 위로도 뜻한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함은 단지 현세적 재보나 육체적 쾌락뿐만이 하느님께 가는 길을 방해하고 이것과 반대 방향으로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위로나 기쁨도 만일 거기에 집착하든가 이것을 찾아 얻고자 한다면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나아가려고 원하는 이는 꽃을 꺾지 말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이 말하기 위해서 용기와 굳셈이 필요하다.
들짐승들을 무서워함도 없이 나는 힘센 이들 경계선을 넘어가리라
6. 이 시구에서 영혼은 세속, 악마, 육신이라는 세 원수를 말하고 있다. 이것들은 끊임없이 영혼에게 도전하고 가는 길을 어렵게 한다. 들짐승은 세속을, 힘센 이들은 악마를, 경계선(일어역:국경)은 육신을 뜻한다.
7. 세속을 들짐승이라고 함은 하느님의 길에 들어선 영혼에게 세속은 마치 잔인하게 협박하는 야수와 같아서 그 상상 속에 들어옴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로 세 가지 양상으로 이루어진다. 첫째는 자기는 세상에서 받던 호의와 벗, 신용, 존경, 재산마저도 잃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 둘째는 이와 못지 않은 야수인데 세속에서 누린 만족이나 향락을 아예 갖지 않고 세속의 기쁨을 깡그리 없애고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하고 상상하는 것, 셋째는 - 그것은 가장 무거운 것인데 - 사람들에게서 말로 공격을 받는 것, 자기가 조롱, 비난, 손가락질과 경멸의 대상이 되리라고 상상하는 것인데 이런 일은 어떤 영혼에게는 너무도 뚜렷이 보여주기 때문에 이런 야수들과 계속 싸우기 위해서는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한 발자국도 내딛기조차 곤란하게 된다.
8. 그러나 더욱 용감한 영혼은 보다 내적이고 더욱 영적인 다른 야수를 만나야 한다. 그것은 여러 종류의 곤란, 유혹, 박해, 시련이며 그들은 이것들을 통과해야 한다. 하느님은 높은 완덕으로 드높으시려는 영혼에게 이런 것을 보내시어 불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신다. 이에 관해서 다윗은 “올곧은 사람은 불행이 많다.”(시편 33, 19)고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서 주님은 해방시켜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만유 위에 자기 애인을 존중하는 사랑에 타는 영혼은 애인의 사랑과 은혜에 신뢰하고 다음과 같이 말함은 결코 지나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들짐승들을 무서워하지 않으리”
9. 둘째 원수인 악마를 영혼은 ‘힘센 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세찬 힘을 부려서 이 길을 저지하려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유혹이나 간계는 세속이나 육신의 것보다 훨씬 심하고 쳐이기기에 더욱 어렵고 또한 더욱 분별키 어렵다. 거기에다 앞의 두 원수, 곧 세속과 육신을 충동하여 한층 강세가 되어 영혼에게 격렬한 싸움을 걸어온다. 그러므로 다윗은 악마를 “광포한 자들”(시편 53, 3)이라 불렀고 광포한 자들 내 목숨을 앗으려 한다고 했다. 예언자 욥도 그들의 힘에 관해서 “지상에는 악마의 세력에 견줄 세력은 없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도록 만들어진 자입니다.” 하였다. 이는 악마의 힘에 견줄 인간의 힘은 하나도 없고 오직 하느님의 힘만이 그를 이기기에 충분하며 다만 하느님의 빛만이 그들의 간계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기도에 의지하지 않고는 악마의 힘을 쳐 이길 수 없으며 억제와 겸손 없이는 악마의 속임수를 알아차릴 수 없다. 그러기에 성 바오로는 신자들에게 “여러분이 악마의 계교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무장하시오. 실상 우리의 싸움은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에페 6, 1)하고 충고했다. 이 피란 세속을 말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무기라 함은 기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그 안에 앞서 말한 억제와 겸손이 있다.
10. 영혼은 또한 경계선(국경)을 넘어간다고 한다. 국경이란 앞서 말했음 같이 영혼에 대한 육의 자연적 혐오와 반격을 뜻한다. 성 바울로도 “육은 영을 거슬러 일어납니다.”(갈라 5, 17)하였는데 그것은 영적 길을 방해하여 마치 국경처럼 거기에 막아 서 있다. 영혼은 곤란을 뚫고 영의 힘과 결의로써 감각적 욕구와 자연적 애호를 깡그리 짓밟고서 국경을 넘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영혼 안에 이런 것을 계속 갖고 있으면 그것들은 영을 어찌나 무겁게 누르는지 영혼은 참 생명이나 영적 기쁨을 받을 수 없다. 이것을 성 바울로는 똑똑히 가르치기를 “여러분이 육을 따라 살면 죽고 말겠지만 영을 따라 몸의 행실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로마 8, 13)하였다. 이것이 앞의 시구 안에서 영혼이 이 길을 통해서 애인을 찾아갈 때 가져야 할 행동 방침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바로 꽃을 꺾으려고 몸을 굽히지 않기 위해 매우 굳세고 참을성 있고 흔들리지 않고 담대해야 하며 이미 설명했듯이 덕행의 산들이나 물가를 넘어갈 궁리만을 한다는 것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starlite03/30034107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