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노래-십자가의 성요한

제 1 노래

Skyblue fiat 2014. 5. 24. 13:33

 

 

 

 

 

 

 

 

                                                    제 1 노래

 

                                  아아 어디에 그대를 숨기신고

                                  사랑하는 님하 울음 속에 날 버려두시고

                                  상처만 나에게 남기신채

                                  사슴마냥 가버리신 그대

                                  그대 뒤 외치며 나섰더니 벌써 가고 없구료

 

 

           해 설

 

     2. 이 첫째 노래에서 영혼은 자기 신랑, 하느님의 아들인 말씀에 대한 사랑에 타 그분의 신적 본질을 뚜렷이 봄으로써 그분과 일치하고 싶은 열망에 자신의 사랑의 초조를 말하고 그분의 부재를 탓한다. 더구나 그분은 그 사랑으로 이 영혼에게 상처를 주어 중상을 입혔으므로 영혼은 모든 피조물과 자기 자신에게서 나왔는데 아직도 애인의 부재를 괴로워해야 한다. 또한 그분은 영혼을 그 없어질 육체에서 해방하여 영원한 영광 가운데서 그분을 즐길 수 있도록 해 주시지 않으므로 영혼은 말한다.

 

 

 

 

             아아 어디에 그대를 숨기신고

 

    3.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오! 말씀이여 내 낭군이여 당신이 숨은 곳을 제게 알려 주세요!” 이것은 그분의 신적 본체를 나타내 보여달라고 청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아들이 숨어 계신 곳이란 성 요한이 말함 같이 “하느님의 품”(1, 18)에 계시고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의 본체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지성에는 숨겨져 있다. 그 때문에 이사야는 하느님께 이야기할 때 “참으로 당신은 숨어 계신 하느님이십니다.”(이사 45, 15)고 했다. 그러므로 유의해야 할 점은 이 세상에서 영혼이 대단한 하느님의 친교나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여도 제 아무리 숭고한 인식을 하느님께 관해 품고 있어도 이렇게 영혼이 감지하는 것은 하느님의 본질은 아니고 그것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참으로 하느님은 우리 영혼에게는 언제나 숨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자기에게 보여 주는 것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언제나 하느님을 숨으신 분으로 알고 “어디에 그대를 숨기신고”라고 하면서 그 숨은 곳에서 그분을 찾아야 한다. 사실 하느님과의 숭고한 교류도 하느님을 느낄 수 있는 현존도(可感的 現存) 하느님이 영혼 안에 무상의 은혜로 계시는 확증은 못된다. 그것은 메마름이나 이런 유의(可感的) 은혜의 결핍이 하느님의 부재의 표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예언자 욥은 말한다. “그가 내 앞을 스쳐 가시건만 보이지 않고 지나가시건만 알아 볼 수가 없네”( 욥 9, 11)

 

 

     4. 여기서 알아들어야 할 것은 설령 영혼이 하느님과의 숭고한 교류나 영적 이해나 감동을 경험했더라도 그 때문에 자기는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다든가 하느님을 뚜렷이 본질적으로 보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아무리 깊이 이런 것을 느껴도 그것 때문에 자기는 하느님을 더욱 많이 소유하고 있다거나, 또는 하느님 안에 더욱 깊이 들어갔다고도 생각해서는 못쓴다. 그리고 이러한 느낄 수 있는 영적 교류가 모두 결핍되어 영혼은 메마름과 어둠 속에 버려진 상태에 남더라도 그 때문에 하느님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다. 첫째의 경우가 하느님의 은혜 중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보증이 될 수 없음과 같이 둘째 경우도 하느님의 은혜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표는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자는 “하느님 대전에서 아무도 자기가 사랑을 받을만한지 미움을 받을만한지 모른다.”(집회 9, 1)하였다. 따라서 이 시구에서 영혼이 지향하는 주된 목적은 다정한 감정적 신심만을 찾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은 이 세상에서 하늘의 신랑을 소유하고 있음을 확실히도 명백히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욱 우선 첫째로 하늘의 신랑 본체의 뚜렷한 현존과 직관을 찾는 것이며 이것을 내세에서 확실한 양상으로 즐기고 싶은 것이다.

 

     5. 이것이 또한 신적 아가 안에서 신부가 말하고저 한 것이다. 신부는 신랑인 말씀의 신성에 일치하고 싶다고 원하여 그것을 성부께 간청하며 “제발 알려 주세요. 어디서 식사하고 한낮이면 어디서 쉬시는지”( 1, 7)라고 말했다. 성부께 어디서 잡수시는가하고 묻는 것은 바로 그 아들 말씀의 본체를 보여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당신의 영광이신 외아들 밖에서는 취할 수 없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 어디서 휴식을 취하는가고 묻는 것은 같은 소원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곧 성자만이 성부의 즐거움이고 성부는 성자 안에서만 쉬시고 성자 안에서만 계시기 때문이다. 성부는 당신의 본체 전부를 한 낮 동안 성자께 전달하시면서 온통 성자 안에 쉬신다. 한 낮 동안 즉 영원토록 그리고 거기서 성부는 끊임없이 성자를 낳고 또한 낳으신 성자를 품에 안으신다. 그러므로 영혼의 신랑이신 말씀은 성부께서 영원한 영광 중에 잡수실 양식이다. 그것은 성부께서 사랑의 무한한 희열 중에 모든 사람의 눈에 온갖 피조물에게 깊이 숨어 쉬시는 꽃으로 꾸며진 침상이고, 신부인 영혼은 “어디에 그대를 숨기신고”라고 할 때 이것을 보여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6. 그런데 이 굶주리고 목마른 영혼이 그 하늘의 신랑을 찾게 하고 이 지상에서 가능한 한 사랑의 일체로 그분과 결합하여 그분에 관하여 이 지상에서 맛들일 수 있는 한 방울의 맛으로 그 갈증을 풀어주기 위해 이 영혼의 손을 잡고 그분이 숨으신 정확한 곳을 알려 주면서 영혼의 질문에 그분 대신으로 대답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영혼이 바로 이것을 신랑께 청했으니까

이렇게 하면서 이 지상에서 할 수 있는 한 완전하게 그리고 감미를 맛보면서 틀림없이 신랑을 찾아 만나도록 해 주겠다. 그러면 영혼은 다른 사람들의 뒤를 따라 헛되이 헤매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말씀은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본질로써 현존으로서 숨어 계신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그분을 찾으려는 영혼은 애정과 의지에 관한 온갖 것에서 떠나 일체 것은 마치 존재하지 않음 같이 생각하면서 자신 속에 들어가 깊이 잠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 아오스딩은 그의 고백록에서 하느님께 말하기를 “주여, 저는 자신 밖에서 당신을 못 만났습니다. 당신은 안에 계신데 저는 그르쳐 밖에서 당신을 찾았기 때문입니다.”하였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영혼 안에 숨어 계시므로 올바른 관상자는 사랑을 다해 거기에서 하느님을 찾아야 한다. “어디에 그대를 숨기신고” 하면서

 

     7. 오!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영혼아, 너는 사랑하는 분을 찾아 그와 일치하기 위해 그분이 계신 곳을 저토록 열심히 알고 싶어한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네게 말한다. “네 자신이 그분이 사는 집이다. 그분이 숨어 계신 작은 방, 숨은 집인 것이다.”라고. 너의 모든 보화 모든 소원의 목표이신 분이 이토록 네 곁에 계시고 네 안에 계신다고 하기보다 오히려 그분 없이는 네가 존재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 네게는 커다란 만족이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일 것이다. 하늘의 신랑을 “하느님 나라는 이미 네 안에 있다.”(루가 17,21)하고 말했다. 또 그분의 종인 사도 성 바오로도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이다.”(2고린 6, 16)하고 말했다.

 

     8. 하느님은 결코 자기를 떠나지 않음을 아는 것은 영혼에게 큰 위안이다. 대죄 상태에서조차 그렇다면 은혜 상태에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오! 영혼아 이 이상 무엇을 더 원하는가? 밖에서 무엇을 찾는가?

너는 자기 자신 안에서 네 부(富)와 즐거움, 만족, 그리고 네 나와 즉 네가 동경하고 찾고 있는 사랑하는 분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기뻐하라, 네 안에서 그분과 함께 깊이 몰두하고 기뻐 춤추라, 너는 이토록 가까이 그분을 소유하고 있기에 말이다. 네 안에서 그분을 바라고 그분을 경배하라, 그리고 네 밖에서 그분을 찾으러 나가지 말거라. 그것은 다만 마음을 흩을 뿐이고 피로케 할 뿐이어서 네 안에서보다 더욱 확실하고 더욱 신속히 더욱 가까이 그분을 찾아 만나 그분을 즐길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 문제되는 것은 내 안에 계셔도 그분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분이 숨어 계신 곳을 아는 것이 대단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영혼아, 네가 사랑과 열정을 쏟아 “어디에 그대를 숨기신고”라고 할 때 너는 또한 이 지식을 탄원한 것이다.

 

     9. 그러나 너는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사랑하는 분이 내 안에 계신데 어찌 나는 그를 만날 수도 없고 느끼지도 못하나요?” 라고 그 이유는 이렇다. 그분은 거기에 숨어 계신데 너는 그분을 만나고 그분을 느끼기 위해서 숨지 않는다. 숨겨진 것을 찾고 싶은 사람은 그것이 숨겨진 저 깊은 곳까지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찾았을 때는 그도 또한 그 곳에 숨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네가 사랑하는 신랑은 네 마음의 밭 속에 숨겨진 보화 즉 그것을 사기 위해서는 지혜로운 장사꾼이 자기가 갖고 있는 온갖 것을 다 주었던 (마태 13, 44) 저 보화이다. 그 때문에 그분을 찾아 만나기 위해서는 너는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잊고, 모든 피조물에서 멀리 떠나 내심의 암자에 숨어 문을 닫고 (즉 의미로써 일체 버리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마태 6, 6) 이처럼 그분과 함께 숨어 있으면 너는 조용히 그분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조용히 그분을 사랑하고 기뻐하며 남몰래, 즉 언어와 감정을 초월한 양상으로 그분과 함께 즐길 것이다.

 

     10. 그러므로 아름다운 영혼아 용기를 가져라. 네가 지금 동경하고 찾는 애인이 네 가슴속에 숨어 계심을 알고 있으므로 그분과 함께 잘 숨어 있도록 힘써라. 그리고 자기 가슴속에서 그분을 느끼고, 그분을 포옹함이 좋다. 그분이 예언자 이사야의 목소리를 빌어 너를 이 숨은 집으로 부르고 있음을 듣거라.

“어서 너의 골방으로 들어가거라, 들어가서 문을 꼭 닫아걸어라.(즉 온갖 피조물에게 대해서 네 모든 능력을 닫아라.) 잠시 동안 - 곧 현세라는 이 짧은 순간 - 잠깐 숨어 있어라.”(이사 26, 20)

     오 영혼아, 만일 네가 이 세상의 짧은 생명 동안 현자가 말했음 같이 네 마음을 경계하며 지킨다면(잠언 4, 23) 어김없이 하느님은 역시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주면 네게 주실 것이다.

“내가 감추어 두었던 보화를 네게 주면 네게 비밀의 실체와 신비를 밝히리라.(이사 45, 3) 이 비밀의 실체라 함은 하느님 자신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신랑의 실체요 대상이며, 신랑은 비밀이고 신비이므로 그러나 신앙이 우리에게는 덮어 숨겨진 것, 곧 성 바오로가 말하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것이 오면”(1고린 13, 10) 밝히 드러나 신적 비밀의 실체와 신비가 영혼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 없어질 생명이 있는 동안은 영혼은 아무리 숨어도 내세에서처럼 깊이 이 비밀 안에 들어 갈 수는 없다. 하지만 만일 영혼이 모세처럼 바위 동굴 속에 숨어 있다면(출애 33, 22) -그것은 곧 자기의 신랑인 하느님의 아들의 완전한 생활을 충실히 모방한 것이다. - 주님의 오른 손에 보호되어 주님의 뒷모습을 보여 주시기에 합당하게 될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지상 생명에서 이미 매우 높은 완전함에 이르고 하늘의 신랑이신 하느님의 아들과 일치하여 사랑으로 그분으로 변화될 만큼 될 것이다. 그 때 영혼은 자신이 아주 긴밀히 그분에게 일치되어 그분의 모든 신비를 매우 잘 가르침을 받고 체득하고 있음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상에서 하느님께 관해서 알 수 있는 지식에 관한 한 이미 “아아 어디에 그대를 숨기신고”라고 물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11. 오! 영혼아, 네 마음의 숨은 집에서 신랑을 찾기 위해 취해야할 방법에 관해서는 이미 말했다. 그러나 만일 더 듣기를 원한다면 사람의 지식으로는 가까이하기 어려운 진리로 충만한 뜻 깊은 한 마디를 들어라. 만사에서 네 만족을 찾지 말고, 아무 것도 맛들이지 말고 네가 알아야 할 이상으로 알려고도 말고 신앙과 사랑으로 네 신랑을 찾아라. 이 신앙은 맹인의 안내자여서 너를 네가 모르는 길로 해서 하느님이 숨으신 곳까지 인도할 것이다. 신앙, 곧 우리가 말한 저 비밀은 영혼이 하느님께 가는데 사용되는 발이요, 사랑은 영혼에게 길을 제시하는 인도자이다. 그리고 영혼이 신앙의 신비와 비밀을 관상하고 이들과 친숙해짐에 따라 신앙 안에 간직된 것, 즉 동경하면서 찾는 하늘의 신랑을 사랑으로 발견하는 은혜를 받을만하게 될 것이다. 이 신랑은 지상에서는 앞서 말했음 같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특별 은혜로 보여 주고, 내세에서는 본질적 영광으로 조금도 가리지 않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기쁨 중에 보여 줄 것이다. 그 때까지는 영혼이 이 일치(이 지상에서 이룰 수 있는 한의 높은 상태)에 도달 하였다해도 역시 신랑은 앞서 말함 같이 이 영혼에게는 아직도 성부의 품에 숨어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은 내세에서 그분을 완전히 차지하기를 갈망하여 언제나 늘 되풀이하기를 “아아 어디에 그대를 숨기신고” 하고 말하는 것이다.

 

     12. 오! 영혼아 언제나 네 하느님을 숨으신 분으로 알고 찾는 것은 매우 잘하는 일이다. 이것으로 너는 그분께 크게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이 된다. 그리고 너는 그분이 네가 도달할 수 있는 데보다 더욱 높고 더욱 깊으시다고 인식하기에 매우 가까이 그분께로 다가간 것이다. 그러므로 네 능력으로 알아듣는 것에 아예 멈춰 서지 말아라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께 관해서 네가 이해하는 것 안에서 만족을 찾지 말고 오히려 네가 이해 못하는 것을 기뻐하여라. 하느님께 관해서 깨닫고 느낄 수 없는 것을 아예 사랑하지도 기뻐하지도 말아라 도리어 그분께 관해 네가 깨닫지도 느끼지도 못함을 사랑하고 기뻐하여라.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했던 신앙으로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하느님은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이시고 숨어 계신 분이시다. 설령 네가 그분을 찾았다고 생각되고 그분을 맛들이고 붙잡았다고 여겨져도 역시 그분을 숨어 계신 분으로 보고 숨으신 분께 숨어서 봉사해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께 관해서 아주 저급한 생각을 하고 있는 저 많은 어리석은 자들과 같아서는 못쓴다. 그들은 하느님이 자기들에게 이해도 안되고 맛들일 수도 없고 느끼지도 못한다고 하느님은 자기들한테서 아주 멀리 계시고 아주 숨어 버리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와는 정 반대이다. 명확히 모르면 모르는 만큼 사람은 하느님께 다가간다. 사실 예언자 다윗은 “하느님은 어둠을 면사포로 두르시고”(시편 17, 12) 라고 하였다. 그래서 하느님께 다가갈 때 너는 네 눈이 약하기 때문에 갑자기 어둠을 느낄 것이다. 그러므로 역경에서나 또는 영적, 물질적 행운을 만났을 것에도 언제나 늘 하느님을 숨으신 분으로 보고 그분께 부르짖는 것은 잘 하는 것이다.

“아아 어디에 그대를 숨기신고”

 

 

 

             사랑하는 님하 울음 속에 날 버려 두시고

 

     13. 영혼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님하” 하고 부르면서 그분의 마음을 더욱 많이 감동시켜 드리면서 자기의 소원을 들어 주시도록 그 마음을 끌려고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 받으시면 당신을 사랑하는 이의 소원을 매우 쉽게 들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친히 성 요한을 통해서 “여러분이 내 안에 머물러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청하시오. 여러분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요한 15, 7)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영혼이 자기의 전존재를 다하여 하느님과 함께 머물면서 마음을 하느님 이외의 아무것에도 애착하지 않고 따라서 생각은 항상 하느님께로 향해 있다면 그 영혼은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님하”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이 빠졌기에 데릴라는 삼손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도무지 마음이 없군요. 그러면서 나를 사랑한다구요?”하였다. 이 마음이란 생각과 애정을 뜻한다. 어떤 이들은 하늘의 신랑을 애인이라고 부르는데 실은 참 애인이 아니다. 이유는 그 마음 전부를 그분께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기도는 하느님 앞에 별로 값어치가 없다. 하느님은 그들의 소원을 당장 들어 주시지 않고 기도를 계속하게 하시면서 그들의 넋이 더욱 끊임없이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 마음이 사랑으로 더욱 완전히 하느님이 것이 되기를 기다리신다. 왜냐하면 사랑으로서가 아니면 사람은 아무것도 하느님한테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14. 영혼은 이어서 “울음 속에 날 버려 두시고 ... ”라고 하는데 애인의 부재는 사랑하는 이에게는 끊임없는 신음의 원인인 것은 확실하다. 그분 밖에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기에 어디에서나 휴식도 위로도 못 찾는다. 그러므로 만일 하느님 밖에 아무것에도 만족할 수 없다면 그것으로서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임을 안다. 그러나 나는 왜 만족이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 사랑하는 영혼은 설령 다른 재보를 소유했더라도 만족할 수 없을뿐더러 소유하면 한만큼 그 불만은 더욱 더해 갈 뿐이다. 그것은 마음의 만족은 오만가지를 소유하는데 있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그런 모든 것에서 이탈하는 정신의 가난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완성은 이 이탈 가운데 있다. 그리고 특별한 은혜로 매우 긴밀한 일치 중에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도 거기에서 이루어지는데(의역: 이탈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상태에 이른 영혼은 이 세상에서도 어떤 유의 만족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흡족할 정도까지는 못된다. 그러므로 저토록 성덕에 도달한 다윗조차도 완전히 흡족하기 위해서는 오직 천국만을 기대하여 “당신 영광이 나타날 때 나는 흡족 하오리다.”(시편 16, 15) 하고 말했다. 그러므로 영혼이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마음의 평화와 고요 그리고 만족은 결코 완전한 것이 못되므로 아직도 자기에게 모자란 것을 희망하면서 맘속에서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탄식은 희망에 따라다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탄식은 평화스럽고 고요하여 결코 고뇌는 아니다.) 사도 바오로도 자신과 신자들에게 - 그들은 완전했음에도 불구하고 - 이것을 증거하여 “영의 첫 선물을 지니고 있는 우리 자신도 아들의 신분을 바로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면서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 8, 23) 하고 말했다. 그러므로 영혼이 사랑에 불타는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은 바로 이 탄식이다. 사랑이 아픔을 준 곳에는 애인의 부재를 슬퍼하며 부르짖는 상처 입은 영혼의 탄식이 있는데 특히 하늘의 신랑이 달콤하고 맛스러운 접촉을 약간 경험시켜 준 뒤에 영혼을 느닷없이 고독과 메마름 속에 남겨두고 멀어지셨을 때 이 탄식은 한층 더 심해진다. 그래서 영혼은 말한다.

 

 

 

 

                사슴마냥 가버리신 그대

 

     15. 여기서 유의할 것은 아가에서 신부는 신랑을 노루나 사슴에 비교한 점이다.

“노루와도 같으신 네 사랑 님은 한창 때의 숫 사슴과 다름없구나.”( 2. 9 ) 신부가 말한 것은 신랑이 괴짜이고 고독을 좋아하고 사슴처럼 반려를 피할 뿐만 아니라 모습을 감추다가도 금새 나타나기가 재빠르게 때문이다. 사실 하늘의 신랑의 소행은 이렇다. 그분은 충실한 영혼들을 기쁘게 해 주고 힘을 주기 위해 그들을 찾아오시는데 그 뒤로는 그들을 시험하고 낮추고 가르치기 위해 냉정히 다루고 부재를 느끼게 한다. 그 때문에 그들은 신랑의 부재를 몹시 쓰라리게 느끼어 영혼은 다음의 말로 표현한다.

 

 

 

             상처만 나에게 남기신 채

 

     16. 이 뜻은 이렇다. 당신의 부재로 내가 항시 느끼는 고통과 번민으로는 부족했나 봅니다. 당신은 화살로 더욱 세차게 나를 사랑에 상처 입히시고 당신을 보고 싶다는 내 열정과 욕구를 부추겨 주신 뒤에 사슴처럼 재빨리 도망가 버리고 잠시도 당신을 붙잡을 틈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17. 이 시구의 뜻을 잘 이해하기에는 다음 것을 알아야 한다. 곧 하느님은 영혼을 사랑에 상처 입히고 사랑으로 더욱 드높여 주시기 위해서 여러 가지 다른 양상으로 영혼을 찾아오신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하느님은 때로는 어떤 유의 조용한 비밀스런 사랑의 접촉을 하실 때가 있다. 그것은 불화살과 같이 영혼을 상처 입히고 꿰뚫어 사랑의 불로 온통 다 태워 버리신다. 이 상처는 의지와 애정을 너무나도 태워 주시기에 영혼은 자신이 사랑의 화염 속에서 뜨거워져 이 불꽃 속에서 타버린다고 생각될 만큼 이로 말미암아 영혼은 자기 자신한테서 나와 온전히 새로워져 마치 새 존재 양식으로 옮겨진 것 같다. 그것은 흡사 몸을 태워버리고 새롭게 재생하는 불사조와 같다. 이 재생에 관해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내 마음이 쓰라렸을 때 콩팥이 헤져 나갔을 때 나는 아둔하여 못 알아들었나이다.”(시편 72, 21. 23)하였다.

 

     18. 예언자가 콩팥이라고 한 욕구와 애정은 마음이 이토록 타오를 적에 마음이 뒤흔들리고 신적인 것으로 변화된다. 그리고 영혼은 사랑으로 무로 돌아 간 듯 사랑 밖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가 된다. 이 콩팥, 즉 욕구와 애정의 변화는 심한 고통과 동시에 하느님을 보고싶은 갈망과 함께 일어나기에 영혼은 사랑이 자기에게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대한다고 생각된다. 영혼의 고통은 자기가 상처받아서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 상처는 참된 건강으로 여기고 있다.) 그것은 사랑이 영혼을 이처럼 괴롭히고도 목숨을 앗아갈 만큼 심한 상처를 주지 않는데 있다. 목숨을 빼앗기면 완전한 사랑의 생활로 하느님과 일치하여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이 고통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알리기 위해 말하기를 “상처만 남기신체”라 한다.

 

     19. 말하자면 “당신은 나를 이토록 상처 입히시고 당신께 대한 사랑의 아픔으로 죽게 된 나를 내쳐두시고 사슴마냥 날세게 숨어버리셨습니다.” 이 영혼의 고통은 무척 심하다. 하느님이 영혼에게 지워주신 사랑의 상처에 떠밀려 의지의 애정은 접촉의 느낌을 주셨던 사랑하는 분을 소유하려고 빠르고 격렬한 약동이 일기 때문이다. 이것과 똑같은 열기로 영혼은 사랑하는 분의 부재와 이 세상에서는 원하는 대로 그분을 소유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동시에 즉시 이 부재로 슬픔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문은 하느님이 영혼을 위로하고 만족케 하기 위한 방문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찾아오심은 낫우어 주기보다는 오히려 상처 내고, 기쁘게 해주시기보다는 도리어 슬프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이해를 활달하게 해주고 욕구를 더해 준다. 따라서 영혼의 고뇌는 하느님을 보고싶은 이 갈증을 더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것들을 사랑으로 말미암아 영적 상처라고 하며 영혼에게는 매우 상쾌하고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기에 영혼은 이처럼 창으로 찔린 상처로 천 번이라도 죽고싶다고 바란다. 그것은 영혼을 자기 자신에게 나오게 하여 하느님 안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영혼은 다음 시구 속에 암시하고 있다.

 

 

 

             그대 뒤 외치며 나섰더니 벌써 가고 없구료

 

     20. 사랑의 상처인 경우 상처를 주신 분이 아니시면 약을 얻을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상처 입은 영혼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분의 힘에 떠밀리어 낫우어 달라고 큰 소리로 애원하면서 자신에게 상처 입힌 분의 뒤를 쫓아간다. 이 시구에서 ‘나섰더니’란 뜻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영혼이 하느님의 뒤를 쫓아가는 두 가지 양상을 말한다.

     첫째는 온갖 것에서 이탈하는 것인데 이것들을 미워하고 업신여기는 것이다. 둘째는 자기 자신을 잊음으로 자신에게 이탈하는 것인데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이 사랑이 여기서 말함같이 진실히 영혼에게 닿으면 그것은 영혼을 드높여 줌으로 영혼은 자기 망각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나올뿐 아니라 그 본래의 소질이나 양상이나 경향에서도 빠져 나올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은 하느님께 외치면서 다음과 같은 뜻의 말을 한다. “오! 하늘의 신랑이여, 이 접촉으로 또 이 사랑의 상처로 당신은 내 넋을 온갖 사물에서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빼내 주셨습니다. - 사실 영혼은 육체에서 끌려 나온 듯이 느낀다. - 그리고 당신은 나를 당신께로 드높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께 외치면서 나섰고 당신을 잡으려고 온갖 것에서 떠나버렸습니다. 아, 그러나 가고 없구료.”

 

     21. 이 뜻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내가 당신의 현존을 잡으려고 생각할 때 나는 이미 당신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자신에게서는 이미 떠났고, 더구나 당신도 붙잡을 수 없어 사랑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나 자신 스스로 지탱할 힘도 당신의 부축도 없이 홀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여기서 사랑하는 분을 찾아 나선다는 것을 아가의 신부는 “일어난다.”고 했다. “떨치고 일어나 읍으로 가리, 이 거리 저 거리 저 광장을 두루 거치며 사랑하는 내 님을 찾아 가 보리, 찾기는 하였어도 못 만나고 말았네... 그리고 나는 상처 입었네.”( 3, 2) 신부인 영혼이 “떨치고 일어나자.” 한 것은 영적으로 말하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오르는 것을 뜻하고, 시구에서 영혼이 ‘나선다’고 하는 것과 같다. 곧 저열한 자기 행동 양식이나 사랑하는 방식에서 숭고한 하느님의 사랑에로 오르는 것이다. 아가의 신부는 신랑을 만나지 못해서 상처 입었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영혼은 자기가 사랑의 상처를 받은 채 그대로 방치되었다고 말한다. 달리 말해서 뜨겁게 사랑하는 영혼은 사랑하는 분의 부재 때문에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산다. 즉 사랑하는 분께서 당신을 주시기를 기대했는데 그분은 좀처럼 당신을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은 사랑하는 분을 위해 온갖 사물과 자기 자신을 잃었는데도 그 손실을 메꿀 이득은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영혼은 아직도 사랑하는 분을 소유하기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22. 완덕에로 다가가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부재가 주는 이 고통, 이 고민은 이러한 신적 상처를 입을 때 너무도 심하게 되므로 만일 주님께서 그들을 부축해 주시지 않으시면 그들은 그 때문에 생명을 잃을 것이다. 그들의 의지의 미각(味覺)은 건전하고 영은 순수하며 하느님의 역사 하심에 잘 준비되어 있고 또 한편 앞서 말한 접촉에서 그들이 만유 위에 갈망하는 하느님의 사랑의 감미로움을 다소 맛보기를 허용해 주셨기에 그들은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괴로워한다. 그들에게는 무한한 보화를 약간 보여 주셨고 그러면서도 그것을 주시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 표현할 길 없는 고통, 고민이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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