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노래-십자가의 성요한

제 7 노래

Skyblue fiat 2014. 5. 24. 13:29

 

 

 

 

 

 

                                          제 7 노래

 

 

                      당신을 섬기는 모든 이들은 저마다

                      온 즈믄 당신의 사랑을 얘기하며

                      그럴수록 저마다 나에게 상처를 주기에

                      나는 죽어가며 던져져 있삽니다.

                      저들이 더듬대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해 설

 

     1. 앞의 노래로 영혼은 이성 없는 피조물이 신랑에 관해 전해 준 지식 때문에 사랑으로 앓고 있다는 것과 또 상처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 이 노래에서는 영혼은 이성을 갖춘 한층 고상한 피조물, 즉 천사나 인간을 중개로 받은 애인에 관한 더욱 높은 다른 지식 때문에 사랑의 깊은 상처를 받고 있음을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이 피조물들을 중개로 보여 준 감탄할 만한 하느님의 무한성을 보고 자기는 사랑 때문에 죽을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이 무한성은 완전한 영혼에게 다 보여준 것은 아니고 영혼은 여기서 그것을 “나는 무엇인지 모르고”라고 한다. 왜냐하면 말로써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혼을 사랑 때문에 죽어가게 할 정도의 것이다.

 

     2. 그런데 이런 사랑의 교섭에서 애인에게 관해 가질 수 있는 지식의 세 가지 양상이 있다. 그 첫째는 부상이라 하는데 보통 부상처럼 매우 경한 상처에서 비교적 단시일에 낫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성 없는 피조물에게서 받은 지식으로 생기는 것이어서 이 피조물들은 하느님의 업적 가운데 가장 하급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상은 또한 여기서는 병이라고 한다. 아가의 신부는 이것을 암시하여 “예루살렘의 처녀들아 제발 부탁이니 혹시 내 님 만나거든 여쭈어다오, 님 그리다 나는 병들었다고”(아가 5, 8) 여기서 예루살렘의 처녀란 피조물을 뜻한다.

 

     3. 둘째는 깊은 상처라 하는데 이것은 부상보다 깊고 그만큼 오래 계속된다. 이것은 부상이 악화되어 깊은 상처가 되는 것이어서 여기에 이른 영혼은 자기가 참으로 사랑의 깊은 상처를 입었다고 느낀다. 이 깊은 상처는 말씀의 육화나 그 밖의 신앙상의 신비의 업적에 관한 지식으로 영혼 안에 형성된다. 이것들은 하느님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며 하급 피조물을 생기게 한 사랑보다도 훨씬 뛰어난 사랑을 그 속에 간직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것이 영혼 안에 일으키는 사랑의 효과도 한층 크다. 즉 단순한 부상이 아니고 오래 계속하는 깊은 상처가 생기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 아가의 신랑은 영혼에게 “이 마음을 사로잡는 내 누이, 새색시야 단 한번 눈짓으로, 그대의 목덜미의 한 가닥 머리카락으로 내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혔구나”(4, 9) 여기서 눈이라 함은 신랑의 육화에 대한 믿음을 뜻하고 머리카락은 육화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

 

     4. 사랑을 겪는 고뇌의 셋째 양상은 하나의 죽음의 고통이다. 그것은 마치 문드러진 상처가 된 깊은 상처를 몸에 지니고 있음과 같아서 영혼 전체가 문드러진 상처로 뒤덮힌다. 영혼은 사랑이 자신을 죽이고 자기를 사랑에 변화시켜 사랑의 생명에 살기까지는 말하자면 ‘죽어 가면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인한 죽음은 신성에 관한 드높은 지식이 영혼에게 맞대임으로 생긴다. 이 노래 안에서 “저들이 더듬대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라고 한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이 접촉(맞대임)은 끊임없는 것도 아니고 오래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영혼은 육신에서 풀려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동안 지나가 버리는 영혼은 사랑으로 죽을 지경이 되어 사랑으로 죽지 못함으로 더욱 심각한 죽음의 고통을 느낀다. 이것은 성급한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에 관해 창세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라헬은 어머니가 되고 싶은 나머지 남편 야곱에게 “저도 자식을 갖게 해 주셔요. 그렇지 않으면 죽어버리겠어요.”(창세 30, 1)라고 했다. 또 예언자 욥도 “내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면 나를 산산히 부수시고 손을 들어 나를 죽여주신다면.”( 욥 6, 8-9) 이라고 했다.

     영혼은 이 노래 안에서 사랑의 고뇌에 두 가지 양상 즉, 깊은 상처와 죽을 고통인데 이것을 일으켜 주는 역할은 피조물이라고 말한다. 깊은 상처는 신앙을 통해 가르쳐 주는 하느님의 지혜의 신비에서 그들은 사랑하는 분의 무수한 매력을 말함으로 생긴다. 죽을 고통은 그들이 다만 더듬대기만 하므로 생긴다. 즉 영혼이 때로는 하느님께 관해서 하는 말을 들을 때 갑자기 받은 신성에 관한 감동이나 지식으로 생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을 섬기는 모든 이들은 저마다

 

     6. 섬기는 모든 이들이라 함은 앞서 말했음 같이 이성적 피조물이며 즉 천사와 인간을 뜻한다. 왜냐하면 온갖 피조물 가운데서 그들만이 하느님 사정을 이해하고 하느님 일에 종사하기 때문이다.

     섬긴다 함은 “하느님께 종사하는 모든 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 중 어떤 이는 천국에서 하느님을 관상하고 즐기면서 하느님 일에 종사하는 천사들이다. 또 다른 이는 지상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희망하면서 하느님 일에 종사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이 이성적 피조물을 통해서 영혼은 하느님께 관한 한층 발랄한 지식을 받는다. 말하자면 영혼은 하느님이 온갖 피조물 위에 계시다는 초월성을 생각하든가 또는 하느님께 관해서 그들이 가르치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이런 지식을 얻게 된다. 그들 중 가령 천사는 은근한 영감으로 내적으로 가르쳐 주고 다른 이 즉 인간은 성서의 진리를 갖고 외적으로 가르쳐 준다. 그래서 말하기를

 

 

 

           온 즈믄 당신의 사랑을 얘기하며

 

     7. 이 뜻은 그들은 당신의 육화의 업적이나 그 밖의 당신의 사정을 제게 가르쳐 주는 신앙상의 진리에서 보는 당신의 아름다움이나 자애로움에 관한 일들을 깨우쳐 주고 더구나 언제나 항상 더욱 더 많은 것을 제게 말하려 한다. 왜냐하면 많이 말할수록 더욱 더 많은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저마다 나에게 상처를 주기에

 

 

     8. 이 뜻은 천사들이 나에게 영감을 준 만큼 또 인간이 당신께 관해 제게 가르치면 가르친 만큼 저는 더욱 격렬히 사랑에 불타기에 모든 피조물은 저를 더욱 더 하느님 사랑에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다.

 

 

 

           나는 죽어가며 던져져 있삽니다.

           저들이 더듬대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9. 이 뜻은 다음과 같다. 이 피조물들은 당신께 관해서 천만가지 당신 아름다움을 내게 깨우쳐 주면서 내게 깊은 상처를 입히지만 아직도 무엇인가 더 말할 것이 남아 있다고 느끼고 뭔가를 말못한 것이 남아있음을 알아차립니다. 영혼에게 보여 준 하느님의 숭고한 발자국은 찾아보지 못한 채이고 하느님께 관한 드높은 이해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 때문에 영혼은 이것을 “나는 무엇인지 모르고”라고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내게 사랑의 깊은 상처를 준다면 내가 깨치지 못하면서도 깊이 느끼는 저것은 내 목숨을 앗아간다. 이런 일은 이미 진보한 영혼에게 자주 일어나는 일이어서 하느님은 그들이 듣고 보고 아는 사정을 통해서 혹은 이런 일이 전연 없을 때라도 높은 지식을 주시는 은총을 받을 수도 있다. 즉 하느님은 당신의 숭고함, 위대함을 깨우쳐 주시고 또 느끼게 하시는 것이다. 이 경우 영혼은 하느님의 숭고함을 너무도 강하게 느끼므로 하느님께 관해서는 모두가 알지 못한 일로 남아 있음을 뚜렷이 깨달을 정도이다. 이처럼 신성이 알 수 없을 만큼 광대 무변하다고 깨닫고 또한 느끼는 것은 매우 숭고한 지식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이 세상에서 어느 영혼에게 주시는 매우 큰 은혜 중의 하나는 하느님께 관해서는 완전히 이해하거나 느끼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명백히 알수록 하느님의 숭고함을 명확히 깨닫게 해 주시고 또 느끼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천국에서 하느님을 뵙는 이들의 양상과 얼마간 비슷하기 때문이다. 천국에서는 하느님을 더욱 잘 아는 이들일수록 자신에게는 아직도 알아야 할 것이 무한히 남아 있음을 똑똑히 깨닫는다. 이와 반대로 하느님을 보다 적게 뵙는 이들은 아직 못 본 부분이 있음을 많이 보는 자들처럼 명백히 깨닫지 못 한다.

 

     10. 이것은 경험 없는 자에겐 완전한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을 경험하는 영혼은 자기가 강하게 느끼고 있으나 역시 자기에게는 알지 못하는 것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알고 있으므로 이것을 “더듬대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말할 수도 없다. 앞서 말했음 같이 느낄 수는 있어도 그렇다. 그래서 영혼은 피조물이 다만 더듬댈 뿐이라고 한다. 그들은 완전히 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더듬댄다 함은 어린이의 말투여서 어린이는 할 말을 정확히 말할 수도 또 이해시킬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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