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노래의 설명
1. 사슴은 일단 독초에 상처 입으면 이미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자신의 상처를 낫울 방법을 여기 저기서 찾아 헤매어 이 쪽 물에 잠겨보고 저 편 물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방법을 써봐도 무슨 약을 써도 독의 작용은 더할 뿐이고 드디어는 심장에 침범되어 목숨을 잃는 데까지 이른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독초에 상처 입은 영혼도 마찬가지여서 자신의 고뇌에 처방할 약을 찾기를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뿐 아니라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하는 것 모두가 오히려 고뇌를 더하는데 도움이 될 뿐이다. 영혼은 자기의 노력이 이토록 헛됨을 보고 자신에게 상처 준 분의 손에 자신을 온통 내어 맡길 수 밖에는 약이 없음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사랑의 힘으로 자기의 생명을 끓어주시고 고뇌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이 온갖 고통의 원인인 낭군 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분께 다음 노래를 읊는다.
제 9 노래
이 마음에 상처를 낸 당신이거늘
어찌타 이를 낫우어 주지 않으시나요
감쪽같이 나 한테서 이를 앗아가지고도
이냥 이대로 어이 버려두시나요
가져가신대로 아주 아니 가지시고
해 설
2. 이 노래 가운데서 영혼은 다시 애인에게 말을 건네고 자기 고민을 그분께 호소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이 영혼이 보여주는 성급한 사랑은 쉼도 멈춤도 원치 않고 약을 찾기까지는 자기의 초조를 온갖 형태로 말한다. 이 영혼은 상처받고 있다. 그리고 고독하다. 그는 자기를 상처 입힌 애인 외에는 자기를 낫우어 줄 자는 아무도 없음을 본다. 그러므로 애인에게 말하기를 사랑의 지식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히고도 왜 모습을 보여주어 낫우어 주시지 않으시나 한다. 또한 그의 마음을 사랑으로 불태우고 이 사랑으로 그 마음을 훔치고 이미 그의 것이 아니게 하시면서 왜 이처럼 그것을 버려 두시는가고 묻는다. 그는 이미 자기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 이유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는 이미 자기 마음의 소유자는 아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애인은 이 마음을 당신의 마음 속에 참으로 넣어주지 않는가, 왜 영광 안에서 사랑을 통한 완전한 변화 속에서 이것을 당신의 것으로 해 주시지 않는가고 따진다.
이 마음에 상처를 낸 당신이거늘
어찌타 이를 낫우어 주지 않으시나요
3. 영혼은 자기가 상처 입은 것을 탄식하지는 않는다. 사실 사랑하는 자는 사랑의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더욱 좋게 보상받은 것이다. 그도 다만 애인이 마음에 상처를 주고도 죽음으로 이것을 낫우어 주지 않음을 탄식한다. 왜냐하면 사랑의 상처는 너무도 상쾌하고 감미로우므로 이것으로써 죽음에 이르지 않으면 영혼은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상처들은 영혼에게 어찌나 감미로운지 그는 생명을 빼앗길 만큼 심하게 상처 입기를 열망하고 그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마음에 상처를 낸 당신이거늘 어찌타 이를 낫우어 주지 않으시나요.” 말하자면 당신은 깊은 상처를 입혀주실 정도로 심하게 내 마음에 상처를 주셨는데 어찌하여 사랑의 격렬함으로 죽게 하여 이것을 낫우어 주지 않으십니까? 사랑의 병인 이 깊은 상처의 원인은 당신이시니 제발 사랑의 죽음으로 내 건강의 원인은 되어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부재의 고통에 깊은 상처를 입은 내 마음은 당신의 감미로운 현존의 기쁨과 영광으로 낫우어질 것입니다 라고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감쪽같이 나 한테서 이를 앗아가지고도
이냥 이대로 어이 버려두시나요.
4. 앗아간다 함은 (일어역 : ‘훔쳐가고도’ ) 소유주한테서 그 소유물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이다. 영혼은 애인에게 사랑으로 그의 마음을 훔치고 그것은 이미 그의 소유 아니고 그의 힘에 닿지 못하는 것이 되어버렸는데 어쩌자고 이 마음을 당신 위해 가지시고 정말 당신 것으로 삼지 않는가? 도둑은 흔히 훔친 것을 갖고 가는데 왜 이것을 내쳐 두시는가? 고 탄식한다.
5.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는 그 마음을 그 사랑의 대상에게 도둑 맞고 또 빼앗겠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은 이미 자신 안에는 없고 사랑의 대상 속에 있으므로 그래서 이미 그 마음을 자신을 위해 갖고 있지 않고 그 사랑의 대상을 위해서만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영혼은 자기가 순수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순수히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마음은 이미 자기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기의 이익을 헤아리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영예와 영광만을 찾아 다만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한다. 말하자면 마음은 자신의 일은 생각하지 않게 할 수록 더욱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6. 마음이 정말 하느님한테 도둑 맞았는지 어쩐지는 다음 두 가지 표 중 하나로 알 수 있다. 즉 영혼이 여기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마음이 고민스러울 만큼 하느님게 대한 동경을 품고 있고 하느님 이외의 것을 즐기려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마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소유하지 않으면 평화도 휴식도 맛도 없다. 그리고 매우 강하게 사랑할 때는 앞서 말했음 같이 자기자신도 또 다른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한편 만일 자기의 사랑의 대상을 완전히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 그 고통의 크기는 자기에게 부족한 것에 필연적으로 비례하는 것이며 또한 완전한 소유로 완전히 만족하기까지 게속된다. 그 때까지 이 영혼은 이것을 경험으로 느끼면서 말한다. “이냥 이대로 어이 버려 두시나요?” 라고 말하자면 왜 이처럼 공허하고, 굶주리고, 고독으로, 사랑으로 상처입고, 병들고, 지탱할 데 없이 공중에 매달려 있음을 그대로 버려 두십니까 라고 하는 것이다.
가져가신대로
아주 아니 가지시고
7. 이 뜻은 말하자면 사랑으로 당신이 훔치신 이 마음을 가지시고, 채워주시고, 배불러 물리게 하시고,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 낫우어 주시고, 당신 안에서 온전히 안주(安住)와 휴식을 주시기 위해서 왜 갖고 가지 않으십니까? 사랑에 타는 영혼은 아무리 애인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있어도 자기 사랑의 정당한 보수를 원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그는 이 보수 때문에 애인에게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참된 사랑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의 보수는 사랑 밖에는 없고 영혼은 사랑의 완전함에 이르기까지는 사랑의 증대 이외의 것을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서만 같아진다.
예언자 욥도 이 영혼과 같은 초조와 갈망에 이끌려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이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생애는 품꾼의 나날 같지 않는가? 해 지기를 기다리는 종과도 같고 삯을 기다리는 품꾼과도 같지 않는가? 날마다 돌아오는 것은 허무한 것일 뿐 고통스러운 밤만이 꼬리를 문다네. 누우면 언제나 이 밤이 새려나 하고 기다리지만 새벽은 영원히 올 것 같지 않아 밤이 새도록 뒤척거리기만 한다네”(욥 7, 2 -4) 이토록 하느님의 사랑에 열절히 타는 영혼은 완전한 서늘함을 얻기 위해서는 이 사랑의 완성을 갈망한다. 그것은 마치 여름 더위에 자신 노예가 서늘한 그늘을 원하는 것과 같다. 또 품꾼이 작업이 끝나기를 원하듯이 영혼도 자기의 행위가 끝나기를 바란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예언자 욥은 품꾼이 자기의 노고의 끝을 기다린다고는 하지 않고 그 작업의 끝을 바란다는 말인데 그것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을 드러내 주기 위한 것이며 즉 우리가 말하고 영혼은 그 노고가 끝나는 것을 기다린다는 것이 아니고 그 행위가 마치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의 행위는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사랑한다는 행위의 종결과 완성을 즉 자기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앞서 인용한 구절에서 욥이 표현한 영혼 상태에 머물러 있다.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그에게는 공허로 느껴지고 밤은 밤대로 언제나 길고 괴롭다. 지금까지 말한 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자신의 봉사의 갚음으로 하느님을 완전히 사랑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찾지도 기대도 해서는 안됨이 명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