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노래의 설명
1. 앞서 말한 즐거움을 비롯하여 그 밖의 많은 은혜 가운데 꽃으로 꾸며진 침상에서 쉬고 있는 이 복된 영혼 상태를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런지! 이 신적 침상의 등받이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신랑이시고 차양은 애덕, 둘러친 천은 하느님이신 신랑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 영혼은 아가의 신부처럼 진정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임께서 왼 손으로 내 머리 받치시고”라고 참으로 이 영혼은 하느님을 두르고 온통 하느님 안에 잠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더구나 그것은 외면적 뿐 아니라 그 영의 가장 은밀한 신적 기쁨에 잠기어 생명의 영적 음료를 싫도록 마신다. 말하자면 “당신 집 기름기로 그들은 흐믓하며 당신 진미의 강물을 마시우시나니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나이다.”(시편35,9) 그렇다면 이 영혼의 본질적 만족이란 무엇일까? 이 목마름을 풀어주는 음료는 진미의 강물이고 이 강물은 성령이시다. 성 요한은 말하기를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여 주었다. 그 강은 하느님이 어린 양의 옥좌로부터 흘러 나왔다.”(묵시 22,1)고 했다.
하느님의 가장 그윽한 사랑이신 이 음료는 영혼의 가장 깊은 곳으로 흘러 들어가 사랑의 음료를 마시게 한다. 이 사랑의 음료는 앞서 말한 이 일치에서 영혼에게 쏟아 부어주시는 신랑의 영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넘치듯한 풍성한 사랑 속에서 다음 노래를 부른다.
제 26 노래
사랑하는 내 님 그 그윽한
술광에서 나는 마셨네
나와 보니 허허벌판 어디라 없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네
입때 따르던 양떼를 나는 잃고 말았네
해 설
2. 이 노래에서 영혼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가장 내심 그윽한 곳으로 인도하신 더없는 은혜를 말한다. 이 은혜는 일치 또는 하느님 안에 이루어진 사랑의 변화이다. 영혼은 거기에서 얻은 두 가지 효과를 말한다. 그것은 세속 일체의 사물에서 떠남과 망각 그리고 자신의 온갖 욕구와 기호의 극복이다.
그윽한 술광에서 (일어 역을 따름)
3. 이 신적 술광에 관해서 무엇인가 말하기 위해서 또는 영혼이 이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과 말하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내 손을 잡고 펜을 움직여 주실 필요가 있다. 신부가 말하는 술광이란 이 지상에서 사람이 다다를 수 있는 사랑의 최고 단계이다. 그 때문에 그윽한 술광 곧 가장 깊은 속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토록 깊은 곳이 아닌 다른 술광도 있음을 말한다. 그것들은 이 마지막 단계까지 오르기 위해 지나가는 사랑의 여러 단계이다. 사랑의 단계 또는 술광은 일곱 개가 있다. 영혼은 성령의 일곱 은사를 자기 힘에 따라 완전히 소유할 때 이 모두를 소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영혼이 두려움의 영을 완전히 소유할 때 사랑의 영까지도 완전히 소유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의 마지막 것인 이 두려움은 아이가 아버지에게 품은 완전한 사랑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어떤 이가 사랑으로 완전하다고 말할 때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라고 부른다. 그 때문에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완덕을 예언하여 “그를 주님을 두려워하는 영으로 가득 채웠다.”(11, 3) 성 루가도 또한 성 시므온에게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라고 부른다. (2, 25) 다른 많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4. 많은 영혼은 각자가 사랑으로 완전한 정도에 따라 첫 몇 개의 술광에 다다르고 거기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그러나 이 마지막 가장 그윽한 술광에 다다르는 영혼은 이승에서는 드물다. 거기는 참으로 영적 혼인이라는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지는 곳이고 그것에 관해서 영혼은 이미 여기서 말했다. 이 긴밀한 일치에서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전달하시는 것을 말로 표현하기는 정말 불가능한 일이어서 오히려 묵묵한 편이 나으리라. 그것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설명하기 불가능한 것과 같다. 말하자면 영혼을 하느님으로 변모시키는 놀라운 영광을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전달하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 상태에서 하느님과 영혼은 마치 유리창과 태양 광선 같고 숯과 그것을 태우는 불과 같고 별빛과 태양 빛과 같이 하나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세에서와 같은 본질적 완전한 방식에서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 일치의 술광에서 하느님한테서 받은 것을 알리기 위해 영혼은 다만 “사랑하는 내 님 술광에서 마셨네” 라고 할 뿐인데 나는 이 이상 적절한 표현은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사랑하는 내 님에게서 나는 마셨네
5. 왜냐하면 마신 것이 온몸 지체나 혈관을 통해서 번져지고 흐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과의 이 통교도 실제로 영혼 골고루 번진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영혼이 하느님 안에 변화되고 이 변화로 영혼은 그 실체와 영적 능력으로 하느님한테서 마시기 때문이다. 곧 이성은 지혜 와 지식을 마시고 의지는 지극히 감미로운 사랑을 마시고 기억은 천국의 영광을 생각하고 감동하면서 쉼과 기쁨을 마신다. 처음에 말한 영혼의 실체가 기쁨을 마신다는데 관해서 신부는 아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랑이 말하자 당장 내 넋은 녹아졌나이다.”(5, 6) 여기서 신랑이 말했다. 함은 그분 친히 영혼과 이루는 통교를 말한다.
6. 둘째로 이성이 지혜를 마셨다 함은 신부는 같은 성서에서 일치의 입맞춤을 그리워하면서 신랑에게 그것을 청한다. “당신이 거기서 나에게 지혜와 사랑의 지식을 가르치시면 향료 든 포도주를 드리겠어요.”(8,2) 가로 향기 좋은 포도주 말하자면 당신의 사랑으로 조미된 내 사랑, 곧 당신의 사랑으로 변화 된 내 사랑이란 뜻이다.
7. 셋째로 의지가 사랑을 마신다. 함에 관해서 신부는 또 같은 아가에서 말하기를 “님은 나를 이끌고 그윽한 술광으로 데려가 내 안의 사랑을 바루어 주었다.”(2,4 : 일어 역) 이것은 곧 “그분은 나를 그분의 사랑 안에 넣어 내게 사랑을 마시게 했다.”란 뜻이다. 그러나 더 명백히 적절하게 말한다면 “그분은 그 사랑에 나를 순응케하여 내 것으로 하면서 그분을 내 안에 정비 시키셨다.”란 뜻이다. 이것이 영혼이 애인의 사랑을 마신다는 것이고 이 사랑은 애인 자신이 영혼에게 쏟아 부은 것이다.
8. 이에 관해서 우선 이성이 이해하지 못하면 의지는 사랑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음을 유의하기 바란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제법 그럴사하다. 왜냐하면 자연적 길에서는 사랑하는 이를 우선 이해 못하면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자연적 길에서 하느님은 명확한 지식을 부어 주시고 또는 증대시키지 않고 사랑을 쏟아 주시고 혹은 증대시켜 주실 수 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성서 구절에서 똑똑히 밝혀 준 대로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영적 사람들이 경험한 것이어서 그들은 전보다도 명확한 지식을 더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에 타오름을 느낀다. 말하자면 적게 알고 많이 사랑할 수도 있고 많이 알고도 적게 사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느님께 관해서 특출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는 저 영적 사람들의 의지가 풍요로워짐은 상례이다. 그들에게는 주부적 신앙이 이성의 지식 부족을 보충하기에 넉넉하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 신앙으로 그들에게 사랑을 부어 주시고 사랑을 증대시켜 주시고 또한 사랑의 행위도 완전케 해 주신다. 거듭 되풀이하겠는데 그들은 지식이 더해지지 않으면서도 보다 많이 사랑한다. 그러므로 이성이 새 지식을 마시지 않고도 의지는 사랑을 마실 수 있다. 다만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경우에는 영혼은 사랑하는 분한테서 마셨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윽한 술광에서 이루어지는 일치 곧 영혼의 세 능력에 공통된 일치이므로 여기서는 세 능력이 동시에 마셨다고 알아들어야 한다.
9. 넷째는 영혼의 기억으로 애인한테서 마시는 것인데 영혼이 “사랑하는 분과의 일치 안에 소유하고 즐기는 재보”를 상기하면서 이성이 빛에 비추어 짐은 명백하다.
10. 이 시적 음료는 영혼을 엄청나게 신화하고 높이 올려 주시어 하느님 안에 흡수하므로 영혼은 말한다.
나와 보니
11. 이것은 “이 은혜가 지나갔을 때”란 뜻이다. 영혼은 하느님을 통하여 일단 영적 혼인의 숭고한 상태에 인도되면 항상 그 상태에 머문다. 그러나 비록 영혼의 실체가 그렇더라도 앞서 말한 모든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현행적 일치에 관해서는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영혼의 이 본체적 일치는 흔히는 자주 모든 능력도 일치 시켜주시고 술광에서 마신다. 이성은 이해하면서 의지는 사랑하면서 등 등. . 그러므로 영혼이 나왔다 함은 신적 혼인의 본질인 이 본체적 일치에서 하는 말이라고 알아들을 것이 아니다. 모든 능력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고 이 일치는 이 세상에서는 계속적은 아니고 또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능력의 일치에서 나온 뒤
허허 벌판
12. 말하자면 곧 세속의 넓은 전체를 말한다.
아는 것이 전혀 없었네
13. 이 이유는 영혼이 마신 하느님의 저 지극히 높으신 지혜의 음료는 영혼에게 세속의 사물을 온통 잊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이 영혼은 전에 알고 있던 것 또는 전 세계가 아는 것마져도 이 새 지식에 비교하면 온전히 무지처럼 여겨진다. 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의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단계에 있는 영혼이 세속사정에 관한 무지의 특수 원인은 이 영혼이 초자연적 지식에 온전히 침투되어 있고 이 지식 앞에는 자연적 또는 세속적 지식은 지식이라기보다 오히려 무지라는 것에 있다. 이 지극히 높으신 지식에 드높여진 영혼은 그 빛 속에서 이 신적 지식에 관련 없는 모든 지식은 지식이 아니고 무지이며 따라서 그것에 관계하지 말아야 함을 깨닫고 있다.
이 진리를 사도 성 바울로가 설명하기를 “하느님 앞에서는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1고린 3, 19) 그 때문에 영혼은 신적 지혜를 마신 뒤에는 이제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지혜를 전달하시고 사랑의 음료로 굳세게 해 주시기 위해 당신의 거처로 하신 영혼만이 이 진리 말하자면 시간과 전 세계의 지혜도 온전히 무에 지나지 않고 알만한 값어치가 없음을 알고 있다. 사실 이 사랑의 음료야말로 이 진리를 뚜렷이 깨달을 수 있다. 솔로몬은 잠언에서 이를 가르치기를 “그는 자기와 함께 계신 하느님께 격려되어 말하기를 ‘나는 사람의 슬기조차 갖추지 못한 어리석은 자이다.’”(30,1)라 하였다. 이 이유는 하느님의 지혜의 지극히 높은 고에 있으면 인간의 낮은 지혜가 그에게는 무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적 지식, 또는 하느님의 업적을 아는 것마저도 하느님 자신을 아는데 견주면 아무 것도 모르는 것과 같으므로
그러므로 성 바울로의 말처럼 “자연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1고린 2,14) 그러므로 하느님이 현자와 세속의 현자는 서로 어리석은 자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후자는 하느님의 지혜와 지식을 느끼지 못하고 전자는 세속의 지혜를 조금도 맛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는데 세속의 지혜는 하느님의 지혜에는 무지일 따름이고 하느님의 지혜는 세속에 대해서 마찬가지이다.
14. 또한 이밖에 정신의 신화 하느님께서 드높여 주심으로 영혼은 황홀하게 되어 사랑 속으로 삼켜져서 흡사 온통 하느님으로 변화되므로 어쨌든 세속 일에 유의할 수 없다. 영혼은 모든 것에 대해 자기 자신에게 조차도 무관심해지고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되어 사랑 속에 온전히 녹아들어 사랑으로 변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자신에게서 나와 사랑하는 분 안에 옮겨가 사는 것이다. 아가의 신부는 애인에게 대한 사랑으로 변화됨을 말한 다음 자기가 처해 있는 이 일체 것의 망각상태를 “어찌 된 일인지 나도 모르게”라는 한 마디로 표현했다.
이런 상태의 영혼은 무죄한 아담 상태와 다소 비슷하다. 이 영혼은 온통 천진하게 되어 악을 모르고 또한 어디서도 악을 찾지 못한다. 그는 매우 나쁜 악을 보고 듣더라도 그것이 악이라고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악의 습성을 이미 안 갖고 있기에 악이라고 판단 할만한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들한테서 불완전한 습성과 무지(죄의 악은 그 속에 들어감)을 치워 주시고 참된 지혜의 완전한 습성으로 바꾸어 주셨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해서도 또한 “어찌 된 일인지 나도 모르게”라 한다.
15. 이런 영혼은 자신의 사정까지도 생각하지 않을 정도이니 더구나 남의 일에는 거의 간섭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영혼 안에 계신 하느님이 영은 영혼을 망각으로 이끌고 자신에게 관련 없는 것 특히 자기 진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게 하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영은 잠심의 영이므로 영혼을 자기 자신 한테로 돌아오게 하여 남의 사정에 관계하게 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거기에서 끌어낸다. 그러므로 영혼은 여태껏 자신에게 친숙했던 사정에 관한 지식을 잃는다.
16. 그러나 영혼이 모르는 상태에 머물러 있어도 얻은 지식의 습성을 잃었다는 뜻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 습성들은 보다 완전한 습성 곧 주입된 초자연적 지식의 습성으로 한층 완전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 습성들은 지식을 얻기 위해 불가불 이것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 만큼 매우 뛰어난 역할을 영혼에게 하지 않는다. 더구나 어느 경우에는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시적 슬기와 영혼과의 일치 안에서 닦여진 지식의 습성은 다른 모든 지식에서 훨씬 뛰어난 하나의 지식에 맺어져 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작은 빛이 다른 큰 빛과 합해질 때와 같다. 작은 빛을 압도하여 비추는 것은 큰 빛이지만 그렇다고 작은 빛을 없애 버리지는 않는다. 작은 빛은 큰 빛보다 약하지만 전보다 더욱 완전한 것이 된다. 천국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선택된 사람에게서 닦여진 지식의 습성은 변질되지 않지만 별로 도움도 못된다. 왜냐하면 신적 슬기는 훨씬 뛰어난 지식을 그들에게 전달할 것이므로
17. 그러나 영혼은 이런 사랑 속에서 황홀하게 되었을 때 사물의 특별한 관념이나 형상 그리고 상상적 행위 구체적인 어떤 이해 등 모두 잃어버린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영혼은 사랑의 음료를 마시고 황홀하게 되었으므로 다른 일에 종사하고 유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하느님으로 이루어진 이 변화는 아무런 형상도 상상도 끼어 들지 못하는 하느님의 단순성과 순결에 영혼을 닮게 했으므로 영혼도 또한 청조하고 순결하여져 처음에 갖고 있던 온갖 형상이나 상상으로부터 비어져 단순한 관상으로 씻어지고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흡사 태양이 유리를 비출 때와 같다. 태양이 유리를 투명하게 하고 때나 먼지는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태양이 비추지 않으면 먼지나 때가 다시 보인다.
그러므로 영혼에게는 이 사랑의 작용이 어느 기간동안 계속되므로 그것이 일으키는 무지의 상태도 함께 계속된다. 그리고 사랑의 작용이 지나가기까지 영혼은 아무데도 주의를 기울일 수 없다.
영혼은 이 작용 때문에 사랑으로 불붙고 또한 변화되었으므로 사랑 아닌 일체에 대해서 무능하게 된다. 이것은 앞에서 이미 인용한 다윗이 말인데 “내 마음이 타올랐을 때 속이 터져 나갔을 때 나는 아둔하여 못 알아들었나이다”(시편 72, 21) 라는 뜻이다.
마음이 타오르면서 생기는 이 속의 변화란 영혼의 모든 욕구와 활동의 변화이다. 그것은 영혼이 전의 모든 습성은 박탈되고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 생명이다. 예언자는 자기가 업신여겨지고 아둔해 졌다고 하는데 이것은 마치 신적 술광의 술은 마시므로써 생긴 두 가지 효과이다. 영혼이 전에 갖고 있던 지식을 없애고 온갖 것이 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었을 뿐이니라 전 생활은 그 불완전함과 함께 없어졌다. 이 영혼에게는 오직 새 사람만이 살아 있다. 이것은 둘째 효과인데 다음 시구에 포함되어 있다.
입때 따르던 양떼를 나는 잃고 말았네
18. 영혼이 여기서 문제 된 완전한 상태에 다다르기 전에는 제 아무리 영적으로 되었더라도 아직 어떤 욕구나 작은 기호나 그밖에 자연적 또는 영적 불완전한 작은 한 떼를 갖고 있기에 그 뒤를 쫓아가기도 하고 따르기도 하면서 그것들을 만족케 해주려고 한다. 말하자면 그것들의 한 때를 양목 하려고 애썼다. 달리 말해서 이성의 경우 알려고 하는 욕구 속에 어떤 불완전함이 남아 있다. 의지는 어떤 기호든지 욕구 등이 끊임없이 이것저것에 대한 크든 작든 간에 애착하여 무엇인가 소유하려고 의지를 끌고 간다. 또 자부심이라든가 남의 존경을 원한다든가 그밖에 아직도 세속을 느끼게 하는 작은 불완전함 등이 있다.
물질적 거에서는 음식물에 관한 기호나 가장 좋은 것을 원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영적 사정에서는 하느님이 위로나 그밖에 원해서는 안 될 것을 원하는 것 등인데 완덕에 다다르지 못한 상태에서는 영적 사람들이 넘어지기 쉬운 숱한 비참이 있다. 기억에 관해서는 영혼을 끌로 가는 갖가지 정신 산만, 걱정, 주제넘은 염려 등이 있다.
19. 영혼은 그 네 가지 정에 관해서도 수많은 희망, 기쁨, 슬픔, 무익한 공포 등을 갖고 있어서 그것들의 뒤를 따라간다. 이런 불완전한 무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더욱 수가 많다. 그러나 그윽한 술광에 인도되어 마시기까지는 누구라도 어떤 무리든 쫓아다닌다. 그러나 그 곳에 들어가서 비로소 무리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 뒤 영혼은 온전히 사랑으로 변화되어 자기의 불완전한 무리가 불 속에 던져진 금속의 동녹보다 쉽게 테워짐을 본다. 영혼은 자기를 끌고 다닌 이러한 모든 유치한 기호나 비참에서 해방됨을 느끼고 “입때 따르던 양떼를 나는 잃고 말았네”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