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산상수훈 세 번째 말씀
정결의 가르침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뵈올 것이다. (마태오 5:8)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요한 19:26)
산상 수훈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뵈올 것이다.” (마태오 5:8) 갈보리 산에서 공생활을 마치시며 주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요한 19:26) “고 말씀하셨다.
물론 이것은 세상의 행복과는 다른 것이다. 세상은 오늘날 육정의 시대라고 묘사되는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은 섹스를 찬양하고 금욕을 미워하며 순결함을 냉정함이라고 생각하며 순수함을 무지함이라고 생각하며 남자나 여자를 맹목적으로 우상처럼 만들며 팔짱을 끼고 오로지 자신만 들여다보고 자신만 생각하는 세상이다.
주님께서 세 번째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정욕의 특성인 그런 섹스에 대한 찬양과 이기주의와는 완전히 반대의 것이다.
세 번째 산상수훈과 십자가에서의 세 번째 말씀은 실천에 대한 이론, 사례에 대한 교의의 관계이다. 그분은 순결하셨기 때문에 어머니를 내어 주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말씀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최상의 가르침일 것이다. 즉, 마리아는 그분의 아드님이신 하느님께서 순결함 그 자체이셨기 때문에 우리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조건에서도 그분은 그렇게 완전하고 진심으로 어머니를 우리에게 주실 수 없으셨다.
마리아가 순결함을 통해서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육체의 본성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도록 하자. 육체는 본질적으로 정당한 만족을 추구할 때조차도 자기 본위적이다. 육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며 만족한다. 자기보존 법칙조차도 그 말 자체로 일종의 자기 본위를 의미한다. 불법적인 것을 추구할 때 육체는 더욱 자기 본위적이 된다. 육체는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다른 것을 억눌러야만 하며 그것들을 태워 육체의 불꽃이 타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육체의 자기 본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지혜롭게 가르쳐주셨다. 혼인 성사와 정결 서원. 그 두 가지는 이기심의 고리를 끊어버릴 뿐만 아니라 더 크고 넓은 범위의 봉사를 가능하게 해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순수한 마음이 커질수록 자기 본위는 줄어든다.
하느님께서 가르쳐주신 육체의 자기 본위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방법은 혼인 성사이다. 혼인은 자기 본위를 깨뜨려버린다. 무엇보다도 혼인은 사람들을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협조적인 삶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바로 혼인은 그 영속성이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그런 덧없는 열망을 파괴하기 때문에 자기 본위를 깨뜨리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의 상호적 사랑은 그들을 자신에게서 벗어나 그들의 사랑의 열매, 그들의 분신인 아이들을 향하게 하기 때문에 혼인은 자기 본위를 파괴한다. 또한 아이들의 교육은 희생을 요구한다. 희생이 없다면 아이들은 물을 주지 않는 꽃처럼 시들어 죽기 때문에 마침내 혼인은 자기 본위를 사그라들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육체와 관련된 혼인의 부정적인 모습일 뿐이다. 혼인은 육체를 상대방에 대한 봉사로 사용함으로써 자기 본위를 치유한다는 것을 명심해야만 한다. 헌신과 희생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지평은 육체의 눈을 열게 한다. 상대방이 자신보다 더 중요하게 되고 에고(ego)는 속박에서 벗어나 더 넓어진다. 에고가 상대방에게 이르면 때때로 자신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대 가족들이 소가족들보다 덜 자기 본위적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남편과 아내는 자신만을 위해서 살 수 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녀들을 위해 살아야하기 때문에 자신을 죽여야만 한다. 그들은 평범한 생활의 고결함을 파괴하는 모든 무질서하고 이기주의적인 애착을 벗어던진다. 마음이 있는 곳에 그 보물이 있는 법이다. 그들은 그들의 육체를 희생의 제단에 던져 다른 사람들이 살게 한다. 이것이 사랑의 시작인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또한 육체의 자기 본위에서 벗어나는 또 다른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그것은 혼인 성사보다 더 완전한 것인 정결 서원이다. 남자와 여자는 결혼이 요구하는 희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크고 자유로운 봉사를 하기 위해서 육체의 모든 집착으로부터 이탈하겠다는 정결 서원을 한다.
성 바오로는 이렇게 가르친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지만 결혼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에 마음을 쓰게 되어 마음이 갈라집니다. (고린토 I 7:32-34)
정결 서원은 육체의 요구로부터 더 큰 해방을 추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혼인보다 더 숭고한 희생의 형태이다. 정결함이 커질수록 자기 본위는 작아진다. 정결 서원을 하는 사람들은 남편이나 아내, 그리고 자기 아이들에게만 자유롭게 봉사하거나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사랑으로 하나가 된 모든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에게 봉사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혼인은 가족에게 봉사를 하기 위해서 개인적인 자기 본위에서 육체를 해방시키고 정결 서원은 여전히 자기 본위가 있을 수 있는 제한된 자기 가족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라는 가족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육체를 해방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고 서원을 하고 모든 자기 본위를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어느 한 가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속하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더 커다란 가족 안에서 사제는 ‘아버지(Father)’라고 불리는 것이다. 사제는 육체가 아니라 영적으로 자녀들을 낳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 수도 공동체의 장상들이 ‘어머니(Mother)'라고 불리는 것이다. 수녀원장들은 자신의 양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돌본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 수도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형제(Brother)”라고 불리며 정결 서원으로 수도 생활에 묶여 있는 여자들이 “자매(Sister)”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육체적 탄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이타적으로 추구하시고 죄인들을 구원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 모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분인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 성하를 정점으로 한 재탄생으로 새로 맺어진 하나의 가족이다.
혼인과 정결 서원이 육체를 자기 본위에서 해방시켜 준다면, 점점 증가하는 정결함이 타인에 대한 더 넓은 봉사를 준비한다면, 우리는 완전한 정결함을 만날 때 무엇을 기대해야만 할까? 사람이 더 순수해질수록 점점 덜 자기 본위적이 된다면, 완전한 무죄함과 완전한 정결함을 만날 때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만 할까? 더 큰 정결함이 더 큰 무죄함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순결함에서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 바로 완전한 희생이다.
자신의 편안함이나 자신의 삶을 위해서조차 어떤 자기 본위도 없는 사람은 십자가의 희생을 받아들일 것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3) 혈육으로 묶여진 가족을 넘어 설 수 있는 정결함을 가진 사람은, 주님의 말씀처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마태오 12;50)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의 정결함을 지닌 사람은 에고(ego)에서 이탈할 것이고 자기 본위가 낯설고 육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것이므로 어머니를 보고 자기 자신만의 어머니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어머니로 생각할 것이다. 완전한 정결함은 완전한 이타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요한이라는 사람을 대표로 해서 “이분이 너의 어머니이다,”라고 하시며 그분의 어머니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주님은 어머니를, 가장 사랑스럽고 아름다우신 어머니를 자신만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으셨고 자신의 어머니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렇게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하느님의 어머니를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인간이라면 육체적 유대와 육체의 자기 본위가 너무나 제한적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육체는 너무나 제한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어머니를 다른 사람에게 줄 수가 없다. 그러나 완전히 정결한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결함에 대한 산상수훈은 십자가에서의 세 번째 말씀과 하나가 되며 주님은 완전한 정결함에 이르는 이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분의 목숨을 바치셨고 우리가 고아가 되지 않도록 그분의 어머니를 주신 것이다.
정결함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열리지 않은 꽃봉오리가 아니며 차가운 것이 아니며 삶의 무지가 아니다. 정의가 단지 부정함이 없는 것인가? 자비가 단지 잔인함이 없는 것인가? 믿음이 단지 의심이 없는 것인가? 정결함은 단지 육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에서 비롯된 이타심이며 가장 숭고한 사랑인 것이다.
서원을 한 모든 사람들은 소멸해버릴 사랑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들이다. 프란시스 톰슨이 “냉정한 열정과 거친 평온함”이라고 부른 정결은 열정을 가지고 있다.
정결은 불가능한 미덕이 아니다. 정결함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조차도 정결할 수가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으뜸가는 동정녀”라고 불렀다. 놀랍지 않은가! 성인은 동정성에 있어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복되신 성모님 다음 가는 사람으로 보았다. 거리의 평범한 창녀인 마리아 막달레나를!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그녀는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어주던 그날 밤 이미 (앞당겨) 성체성사를 함으로써 정결함을 회복하였다. 그날 밤 그녀는 정결함과 만났고 그래서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 금요일의 십자가 아래에서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다. 그녀 옆에 누가 서 있었는가? 바로 다름 아닌 복되신 성모님이 아닌가!
얼마나 놀라운 관계인가! 몇 달 전에는 죄와 동일시되던 여인과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서 막달레나도 사랑하셨는데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겠는가? 막달레나에게 희망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지 않는가! 그녀가 정결함을 회복했다면 우리도 정결함을 회복할 수 있지 않는가! 그런데 성모님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는 정결하신 모후라고 불리는데 성모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 어떻게?
막달레나처럼 회개한 죄인뿐만 아니라 정결한 동정녀와 훌륭한 어머니까지 모든 사람들은 성모님께 갈 수 있다. 성모님은 동정녀이시며 어머니이시기 때문이다. 동정성은 무언가 부족하다. 자연적으로 쓰이지 않은 재능이라는 불완전이 있다. 모성만으로는 무언가 잃어버렸다. 모성에는 무언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 그러나 “성모님은 부족하거나 잃어버린 것이 없다”고 쉴라 케이 스미스는 말한다. 성모님에게는 “영원한 오월의 꽃”인 동정성과 모성이 있다.
정결함은 이기심이 아니다. 그것은 내어줌이고 다른 사람에 대해 사려 깊은 마음이고 희생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우리의 어머니가 되실 때 정점에 이를 수 있다. 사랑은 눈이 먼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해주는 세상의 거짓 격언을 버립시다! 사랑은 눈이 먼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이 눈이 먼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볼 것이다.” 하느님까지도 볼 것이다. 마리아여, 저희 눈을 열어 주소서!
정결함은 더러움을 관조할 수 있는 힘이다. -시몬 웨일, 대죄와 은총
부도덕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진실로 순수할 수 없다.
정결함은 영혼이 사랑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사랑은 영혼이 정결하다는 것을 확인해준다.
-존 헨리 뉴먼 추기경, 여러 회중에게 한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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