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주님

나를 사제로 부르신 “검은 옷의 부인”

Skyblue fiat 2015. 3. 11. 18:16

 

 

나를 사제로 부르신 “검은 옷의 부인”

루치아노 알리망디 신부

 

 

 내가 사제가 될 수 있었던 데는 성모님의 특별한 도움과 이끄심이 있었지만 이에 관해 제대로 밝히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무엇보다도 비행 도중에 내 생명을 구해주신 “검은 옷의 부인”에게서 받은 특별한 은총의 기적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더 그렇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인 폴 마리아 시글 신부님이 “성모님께 대한 사랑으로 그것을 쓰라.”고 하시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나는 1962년 7월 4일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는 나를 성모님 품에 봉헌해버렸다. 그리고 당신의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성모님, 이 아이가 건강하고 예수님처럼 착한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내가 태어난 직후 나를 품에 안고 있는 아버지에게 친구가, 자네 아들이 장래에 무엇이 될 것 같은가, 하고 물었다.

그때 아버지는 “사제가 될 거야.” 하고 대답하셨다고 한다. 왜 그렇게 대답하셨는지 자주 물어보았지만 아버지의 대답은 늘 같았다. “나도 모르겠다. 그냥 강한 어떤 힘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 들은 이 일은 아직도 수수께끼다!

 

 

“성모님께서는 네게 어떤 계획이 있단다!”

 

 학생시절, 예수님의 부르심이라고 여겨지는 내적 확신이 여러 번 있었지만 나는 두려웠다. 그 당시 내가 즐겨 바치던 기도는 이것이었다.
 “주님, 저는 결혼해서 멋진 가정을 꾸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주님 뜻대로 하소서.”
 기도는 이렇게 했지만, “주님 뜻대로 하소서”를 덧붙이는 것은 내게 아주 큰 희생이었다. 주님께서 내 마음과 다른 계획을 가지실 수도 있다는 예감 때문에, 그럼에도 이 기도를 덧붙였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면 나는 정말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그 무렵에 확신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예수님이 주시는 사랑의 징표를 많이 받았다. 그런데도 자기들과 함께 걷던 이가 정말 주님이셨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았던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나도 나중에야 깨달았다.
 열세 살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 성당 소년들과 함께 로마로 가서 다른 수백 명의 소년들과 함께 성모님께 봉헌식을 했었다. 우리 마리아단의 인솔자는 카를로 데 암브로시오 신부님이었는데, 그는 젊은이들을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께 봉헌시키기 위해 ‘마리아의 열렬한 젊은이 운동’을 조직한, 진짜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그날 분위기가 너무 좋았던 탓에 나는 그 첫 봉헌식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날 암브로시오 신부님이 내게 한 말도 결코 잊지 못할 것 같다. 미사 후 제의실에서 신부님이 내게 그러셨다.
 “루치아노, 네 눈에서 빛이 나는구나. 하느님께서 너를 몹시 사랑하시고, 성모님께서는 네게 어떤 계획이 있단다!”
 이것이 성모님께서 처음으로 내게 일깨워주신 사제성소의 순간임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난 후였다. 그래도 그 봉헌식 날부터 나는 더 의식적으로 성모님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성모님을 보다 더 가깝게 나의 어머니로 인식하게 되었다.
 열네 살 때 내 꿈인 비행사가 되기 위해 항공학교에 들어갔는데, 비행기를 조종할 때와 같은 실제 상황에서 자주 “성모송”을 바치며 어머니께 의지했다. 내가 탄 소형 비행기를 이륙하기 전에는 늘 성모송 세 번을 바쳤다.
 열일곱 살이 되자 실습과정으로서 교관 없이 비행해야 했다. 나는 비행에 내 모든 열정을 쏟았다. 하늘을 나는 해방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완전히 자만한 탓에, 너무 경솔한 탓에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래 너무 경솔했다.

 

 

검은 옷의 부인이 하신 일

 

 그날 나는 평소처럼 급우인 스테파노 리치와 함께 로마 우르베 공항에 갔다. 그는 지금은 결혼해서 한 가정의 행복한 가장이 되었다.
 우리는 폴리뇨까지 비행할 생각으로 두 대의 비행기에 각각 올라탔다.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내가 원하는 곳까지 “나의 비행기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꽉 차 있었다. 그리고 폴리뇨까지는 무사히 비행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한껏 들떠 있던 내 기분은 무모한 곡예비행으로 진로를 바꾸도록 나를 유혹했다. 너무 위험하다며 스테파노가 나를 말렸지만 그의 말은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 결과는 재앙이었다!
 한순간에 나는 비행기 제동력을 잃고 말았으며, 그 순간 돌맹이가 떨어지듯 내가 탄 비행기가 지상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고,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땅만 눈에 들어왔다! 속도계는 붉게 표시된 한계점을 훨씬 지나쳤고 죽음의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시시각각 돌진해오는 땅이 이미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었다. 나는 그저 큰 소리로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 성모님, 살려주세요!”


 그러면서 남은 힘을 다해 조종간을 내 쪽으로 잡아당겨 비행기의 고도를 올렸다. 지금까지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그 극한의 속도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방향전환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으며, 비행기가 어떻게 갑자기 다시 고도를 높였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실은 이 한 가지뿐이다. 다시 위로 솟구치는 동안 비행기의 날개가 엄청난 부하에 걸려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처럼 덜덜 떨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때 나는 그것보다 훨씬 더 떨고 있었다는 것!
 30분 정도 지난 후 조종간을 떠날 때 나는 여전히 공포감에 사로잡혀 거의 마비상태였다. 자기 비행기에서 이 사건을 모두 목격한 스테파노가 내게 한 말은 이 한 문장이었다.
 “난 네가 이미 죽어있는 걸 봤어!”
 며칠 후, “비행 연습은 다 잘 되고 있니?” 하고 어머니가 물었을 때, 걱정할 것 같아 추락 사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단답형으로 그저 “예.”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질문에서 그치지 않고 어머니의 말은 분명한 어조로 계속되었다.


 “며칠 전에 아주 특별한 꿈을 꾸었단다. 꿈에서 네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었어. 넌 도저히 구조될 수 없는 순간이었는데, 그때 검은 옷을 입은 부인이 들판에서 씨를 뿌리고 있는 게 보였어. 그런데 그 부인이 갑자기 눈을 들어 하늘을 향하는 순간 네 비행기가 다시 고도를 높였단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게 있단다. 며칠 전 네 빨랫감을 정리하다가 네 스웨터 사이에서,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없는 이 상본을 발견했단다.”


 이렇게 말하며 어머니가 작은 상본을 보여줬는데 나 역시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분명하게 말했다.
 “이 사람이 바로 내가 꿈에서 보았던 그 검은 옷의 부인이야!”
 지금도 그때의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상본을 받아들고 뒷면을 보니,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 나는 자비의 샘이다. 나는 언젠가 너희가 거두어들일 은총의 씨를 뿌린다.”라고 씌어 있었다.


 그러자 모든 게 확실해졌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내 생명을 구하셨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어머니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검은 옷의 부인”상본을 마리아께서 나의 생에 개입하여 이루신 놀라운 현존의 확실한 표징으로 소중하게 간직했다.

 

“도저히 쓸 수가 없었어”

 

 그렇다!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큰 사랑으로 늘 나를 감싸고 보호하고 계셨다! 더욱이 내가 자주 “엄마는 내 바위야!”하고 부른 내 어머니를 통하여! 예수님만이 바위라는 걸 나도 알지만 나는 어머니를 즐겨 그렇게 부른다. 어머니의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어머니를 통해서, 성모님의 아들 사제인 내가 성모님의 영적 도우심을 아주 단단한 바위마냥 강하게 느끼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를 마치고 열아홉 살에 나는 리보르노에 있는 장교 과정의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장교의 삶에 끌렸던 건 아니고 그저 비행기를 조금 더 조종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의 교육이 시작되기 전, 성모님께 내 장래를 맡길 의향으로 루르드 순례에 나섰다.
 순례 도중, 로마에서 환자를 동반하고 온 사랑스런 소녀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매우 신심이 깊었고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묵주기도를 바쳤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함께 순례했던 로레토의 은총의 성모님께 우리의 장래를 봉헌했다. 나는 리보르노에, 그녀는 로마에 살기 때문에 우리는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막사에서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나는 작은 루르드 성모상을 손에 들고 무염시태 성모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하느님께서 다른 길을 제게 예비하셨다면 이 우정을 끊어주소서.”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우리가 주고받았던 첫 편지 이후 더 이상 그녀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 나는 이것을 성모님께서 주신 표지로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서 이미 수도원에 들어와 있을 때, 그녀와 처음으로 통화를 하게 되었다. 사제가 되기 위해 그동안 공부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가 진지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그럴 것으로 난 이미 생각하고 있었어! 어쩌면 넌 내 말을 믿지 못하겠지만, 그때 내가 사관학교에 있는 네게 편지를 쓰려고 볼펜을 잡으려 할 때마다 마치 어떤 손이 나를 막는 것처럼 도저히 쓸 수가 없었어. 그래서 생각했어, 하느님이 네게 다른 길을 예비하고 계시는구나, 하고.”


 “마리아의 가정”으로 나를 인도하고, 수련기를 잘 버티도록 해주신 분은 하느님의 어머니시다. 또한 1992년 12월 8일, 사제서품을 받으러 파티마로 가는 나와 동행하신 분도 마리아시다. 그날 우리 수도 공동체에서 처음으로 사제 다섯 명이 탄생했는데 그 새 사제들 중 내가 막내였다. 내게는 분에 넘치는 일이었다. 이 소명을 위해 나를 구원하신 분이 “검은 옷의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검은 옷의 부인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

나는 자비의 샘이다.
나는 언젠가 너희가 거두어들일 은총의 씨를 뿌린다.”  


(밑의 사진은 ‘나의 어머니 졸란다’)

 

                                         - 마리아지 2013년 5 ‧ 6월호 / 통권 179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