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인들/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Skyblue fiat 2023. 9. 25. 11:41

 

1846년 9월16일날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가

177년후 똑같은 날 2023년 9월16일 바티칸에 성상으로 부활

 

 

김대건(金大建, 1821년 8월 21일 ~ 1846년 9월 16일)은 한국인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이자, 순교자, 여행가로, 세례명은 안드레아이다.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다.[1][2]

어린 시절 이름은 재복(再福)이고, 족보명은 지식(芝植)이다.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 (기념일)은 7월 5일이다. 그의 세례명 안드레아는 아버지 김제준의 동생이자 순교자인, 김대건의 작은 아버지 김한현의 세례명을 이어받았다.[3]

 

출생      1821년 8월 21일
조선     충청도 면천군 범서면 솔뫼( 現,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솔뫼마을)
선종      1846년 9월 16일(25세)  조선 한성부 새남터

교파      로마 가톨릭교회
시복      1925년 교황 비오 11세
시성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매장지  미리내성지
축일      7월 5일
수호      한국인 성직자

 

 

출생과 가계
1821년 8월 21일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솔뫼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제준, 어머니는 고 우르술라였고 10대조 김희현이 아산 현감을 역임했으며 9대조 김의직은 충청병마절도사 재직시 임진왜란에서 전훈을 세우자 가문 대대로 토지와 벼슬을 보유하게 되었다. 사헌부감찰과 통훈대부를 지낸 8대조 김수완 때부터 김대건의 가문이 솔뫼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1784년 경 김대건의 백조부 김종현과 조부 김택현이 내포 사도 이존창의 권유로 서울 김범우의 집에서 교리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자 하급 관리였던 증조부 김진후도 관직에 물러나 입교하여 신앙 생활을 해 가문이 천주교에 귀의하였다.

신유박해로 인해 증조부 김진후는 1801년부터 감옥에 드나들기 시작하더니, 1804년에는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고 해미성지에서 10여 년간의 옥살이 끝에 1814년에 옥사하였다. 또힌 작은 할아버지인 김한현은 1816년 안동에서 체포되어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 당하였다. 기해박해 여파로 아버지 김제준은 아들 김대건을 서양에 사제 수업을 받게 하기 위해 유학을 보낸 중죄인으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1839년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 당하였다. 또한 당고모였던 성녀 김 데레사도 앵베르 주교의 처소를 돌보며 신앙을 전파하다 체포되어 1840년 초 서울포청에서 교사 당했다. 김대건의 가문은 4대에 걸쳐 순교자가 나왔다.

 

생애 초반
김대건이 태어날 때 이미 증조부와 작은 할아버지가 순교한 천주학 집안이어서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고, 박해를 피해 할아버지 김택현은 김대건이 7살이 되던 해에 경기도 용인시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이사하였다. 15살 때인 1836년 피에르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4] 최양업(토마스)과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했고 상해(上海) 진쟈상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1845년 8월 17일 사제로 서품돼 그 해 10월에 귀국한다.

생애 후반
1845년 조선에 입국한 김대건은 용인 일대에서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외국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해 힘쓰다 1846년 9월 16일 서울 한강변 새남터에서 국문 효수형을 받고 2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신학생 시절
정하상의 도움
한양에서 라틴어와 성직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배우는 기초 신학공부를 마친 후에 김대건은 평신도 신학자인 정하상(바오로)과 함께 조선교회에서 활동한 이광렬(요한), 조선에서 중국 청나라로 귀국하는 유방제(파치피코)신부의 도움으로 1836년 12월에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등과 함께 조선을 떠났으며, 만주와 요동을 거쳐서 1837년 6월 7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피에르 모방 신부는 조선에서 비교적 가까운 북경신학교[5]나 중국인 신학교를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마카오까지 가서 유학을 하게 된 것이었다.[6]

마카오 신학교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동양경리부의 불란서 가톨릭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온 신학생들에게 직접 신학, 철학, 지리, 역사, 신학을 공부하기 위한 라틴어[7], 프랑스어 등을 가르쳤다. 조선 신학생들의 스승이었던 르그레즈와 신부는 "조선 소년들은 훌륭한 사제에게 바람직스러운 것, 신심, 겸손, 면학심, 스승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대견해했다.[8] 마카오 신학교에서의 신학생들의 공부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학문을 성실히 해야 함을 말하는 교회사 사례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어려움
영국의 아편수출에 따른 민중항쟁, 김대건 신학생의 약한 체질, 서양과 동양의 전통이 다른 문화충격, 최방제 신학생의 병사(위열병, 1837년 11월 26일에서 27일), 조차지인 마카오를 통치하던 포르투갈 정부의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에 대한 불이익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하지만 천주교 세종로성당에서 연재하는 천주교회사에 따르면,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정치가 불안해지면 피신하라는 파리 외방전교회 지침에 따라1839년 4월 필리핀 마닐라로 피신했으며, 1839년 5월 이동한 필리핀 롤롬보이의 성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원에서 공부할 때에 안정된 환경과 도미니코 수도회 사제들과 수사들의 친절덕분에 몸과 마음의 건강이 좋아졌다.

작문
계몽사에서 만든 '어린이그림전기 전집'《김대건》 위인전(구중서 지음/이우범 그림)에 따르면, 김대건은 신학생일 때에 하느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상당히 성숙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라틴어로 써서 남긴다.

“ 네로 황제가 로마 제국을 통치하던 시기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박해받았습니다. 집에서 사자를 키우던 어느 그리스도인도 잡혀갔고, 경기장에서 사자와 마주쳤습니다. 사람을 보고 달려들던 사자는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가만히 보니 그 사자는 그리스도인이 키우던 사자였습니다. 자신을 키우던 주인을 보고 조용해진 것입니다. 사자도 제 주인을 알건만, 왜 사람들은 천주님을 못 알아보는 것일까요? ”


르네상스맨
가톨릭 잡지 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의하면 김대건은 마카오 신학교 시절 그를 가르친 교수들이 만약 신학생이 되지 않았다면 화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학문과 미술 모두 뛰어난 박식가이었던 것이다. 신학생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가 공부하던 시절은 서구시장에서 성장한 자본이 세력을 넒히도록 기독교, 군대, 상업이라는 삼각형으로써 식민지를 만들려는 서양 제국주의[15]와 민족주의로써 저항하는 동방 민중들간의 대립과 투쟁이 있던 시대였다. 그래서 마카오에서의 민중운동을 피해, 필리핀 롤롬보이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공부하기도 했다.[16] 물론 필리핀에서 가톨릭 신학을 공부한 이유는 스페인의 식민통치의 영향으로 가톨릭이 뿌리내린 나라이기 때문이다. 김대건의 학문을 신봉승 작가는 《조선왕조500년:대왕 정조-김대건》( 금성출판사)에서 김대건 부제가 유창한 불어로 밀사인 김프란치스코 교우가 전하는 조선 가톨릭교회 소식을 동행한 메스트르 신부에게 전하는 장면으로 그려낸다.

프랑스 함대 통역
1842년 2월 프랑스의 프리깃함인 에리곤 호 함장인 장 밥티스트 세실이 조선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극동 선교부 소속인 리브와 신부에게 통역 한 사람을 비밀리에 요청하였다.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김수태 교수는 프랑스가 조선과 단독으로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써 경제적인 이익을 꾀하려고 세실 함장이 조선을 방문하려고 한 것으로 보았다. 파리 외방전교회 마카오 대표부 리브와 신부는 세실이 이끄는 프랑스 함선이 조선을 방문한다면, 선교사들이 해로를 이용하여 조선에 입국함으로써 선교활동을 하려는 계획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해로입국은 2대 천주교 조선교구장이었던 앵베르 주교의 생각이기도 했다. 이들은 해로를 개척하면, 천주교가 국가폭력으로 탄압받는 조선에서 선교사들이 목회하다가 순교하더라도 꾸준히 선교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신학생이 라틴어로 대답하면, 선교사가 프랑스어로 옮길 수 있도록 김대건 신학생과 메스트르 신부가 에리곤 호에 올랐다. 프랑스 함선을 타고 조선에 돌아가는 여행길에 오른 김대건은 난징조약 체결현장 참관(1842년 8월 29일)등의 경험으로써 견문이 넒어지는 경험을 했다.(페레올 주교) 김대건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글을 읽어보면 난징조약 체결현장을 자세히 썼다. 하지만 1842년 9월 세실 함장이 함선 안에 환자가 많고, 자기의 여행 예정 기간이 짧다는 이유로 조선으로 갈 항해를 망설이는 것을 보고는 더이상의 여행을 하지 못했다.[17] 1842년 2월 16일 이후, 프랑스 해군의 도움을 받아 조선에 돌아가려고 했던 김대건 신부의 경로는 필리핀 마닐라(小西洋)→중국 주산이다.(파리외방전교회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글)[18]

조선입국로 개척
서종태(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교수는 〈김대건 신부와 그의 기록〉(《기록인》 2014년 가을호, 국가기록원 소식지)에서 김대건 신부가 길을 만드는 개척자였다고 기록했다.

“ 1844년 조선 입국을 위해 애쓰던 페레올(Ferréol, 高) 주교는 용기와 열정이 남다른 김대건에게 훈춘(琿春)에서 두만강을 건너 경원으로 입국하는 동북방 입국로의 이용 가능성을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김대건은 1844년 2월에 출발하여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4월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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