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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노년에 대한 교리 교육] 1. “노인이 온전하게 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계획이 필요합니다” 세월의 축복, 세대 간 통합

Skyblue fiat 2022. 9. 5. 11:14

 

노년에 대한 교리 교육

  1. 세월의 축복, 세대 간 통합

 

2022년 2월 23일 프란치스코 교황

 

“노인이 온전하게 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계획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지난 주 우리는 요셉 성인에 관한 교리 교육을 마무리했습니다. 이번 주부터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영감을 찾으며 노년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교리 교육을 시작하겠습니다. 인생의 노년기에 대해 살펴봅시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인생의 노년기는 진정한 “새로운 세대”인 노인들을 우려해 왔습니다. 인류 역사상 노인의 숫자가 이렇게 많은 적이 없었습니다. 노인들은 버려질 위험에 훨씬 더 많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지금보다 그 숫자가 많은 적은 없었으며, 지금보다 버려질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된 적도 없었습니다. 노인들은 자주 “짐(부담)”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상황이 매우 긴박했던 코로나19 대유행의 초기 단계에서 가장 큰 대가를 치른 이들이 바로 노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가장 취약한 계층이었고, 가장 방치된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산송장으로 취급되었고, 심지어 우리는 그들의 임종 순간에도 그들과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제 손에는 『노인의 권리와 지역사회의 의무에 관한 헌장』*이라는 문서가 들려 있습니다. 이 문서는 교회가 아니라 이탈리아 정부가 준비한 것입니다. 교회 문헌이 아니라 정부가 준비한 문서이지만, 노인들에게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좋은 문서입니다. 흥미로운 문서입니다. 여러분도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역주: 이탈리아 보건부 산하 ‘노인건강 및 사회복지개혁위원회’가 교황청립 생명학술원장 빈첸초 팔리아 대주교의 지도하에 준비하여 지난 2021년 9월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에게 제출한 문서. 

 

이주 현상과 함께 노년에 대한 사안은 현 시대의 인류가 직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단순히 양적인 변화의 문제가 아닙니다. 노년은 그리스어로 ‘인생 단계의 통합’이라는 의미입니다. 곧, 인간 삶 전체를 이해하고 평가하기 위한 실질적 기준점입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생애주기별로 우호 관계, 협력 관계가 있는가? 아니면 분리와 버림이 만연한가?

 

우리 모두는 어린이, 청소년, 성인, 노인이 공존하는 현실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중은 달라졌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노년층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아이들의 비중은 낮습니다. 우리는 인구 절벽에 대한 이야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불균형은 많은 영향을 초래합니다.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문화는 젊은이-성인이라는 단일 모델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혼자 모든 것을 행하고 항상 젊음에 머물러 있는 개인이라는 모델입니다. 하지만, 젊음이 삶의 온전한 의미를 담고 있는 대신, 늙음은 그저 삶의 비움과 상실을 나타내는 게 사실일까요? 무엇이 진실일까요? 오직 젊음만이 인생의 온전한 의미를 누리고, 늙음은 삶의 박탈이자 삶의 상실을 뜻할까요? 인간의 이상을 구현하기에 합당한 유일한 세대로 젊음을 찬양하고, 나약함과 퇴화 혹은 장애로 간주되는 늙음을 경멸했던 것이 20세기 전체주의의 지배적인 이미지였습니다. 우리가 벌써 이걸 잊은 걸까요? 

 

수명의 연장은 개인, 가족, 사회의 역사에 구조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수명 연장에 관한 영적 특질과 공동체적 감각은 그러한 사실과 일치하는가? 노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희생으로 살아남으려는 고집에 대해 사과해야 하는가? 아니면 모든 사람의 삶에 의미를 주는 선물로 존경을 받아야 하는가? 사실 삶의 의미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 정확히 말해 소위 “선진” 문화에서 – 노년은 거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특별한 콘텐츠도 없고, 사는 의미도 없는 시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노인들을 찾아 나서라는 격려도 부족하고, 그들을 인정하는 공동체의 교육도 부족합니다. 간단히 말해 이제는 지역사회의 결정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전체 세대의 3분의 1 수준까지 확장된 노인 세대와 관련해, 때론 그들을 위한 지원 계획이 있지만, 존재 자체를 위한 계획은 없습니다. 지원 계획들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온전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계획은 없습니다. 생각, 상상력, 창의성의 부재입니다. 이런 생각의 밑바탕에는 노인들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곧, ‘노인은 폐기물이다’라는 것입니다. 버리는 문화에서 노인들은 버려지는 물건과 같습니다.

 

젊음은 매우 아름답지만 젊음이 영원하리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착각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젊다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고 또 아름답습니다. 이를 기억합시다. 삶의 모든 단계를 인류에게 회복시켜주는 세대 간 통합은 우리가 잃어버린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되찾아야 합니다. 버리는 문화와 생산성의 문화에서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러한 통합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 전 요엘 예언자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요엘 3,1).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곧, 노인들이 꿈을 과거에 묻어두고 성령을 거스르면, 젊은이들은 더 이상 미래를 열기 위해 해야 할 일을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노인들이 자신의 꿈에 대해 말할 때,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똑똑히 보게 됩니다. 자신의 좁은 안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더 이상 노인들의 꿈에 물음을 던지지 않는 젊은이들은 현재를 짊어지고 미래를 견뎌내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젊은이들은 스마트폰 쪽으로 더 많이 몸을 웅크리게 될 것입니다. 스마트폰의 화면은 계속 켜져 있어도, 생명은 수명보다 더 빨리 꺼질 것입니다. 코로나19 대유행의 가장 심각한 영향은 바로 수많은 젊은이들의 손실이 아닐까요? 노인들은 언제든지 기댈 수 있는 삶의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경험해 왔던 인생 말입니다. 그렇다면 노인들은 가만히 서서 젊은이들이 지평을 바라보는 역량을 잃어버리는 것을 지켜볼 것인가요? 아니면 젊은이들의 꿈을 따뜻하게 데워 그들과 동행할 것인가요? 노인들이 꿈을 꾸고 있을 때 젊은이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노년을 동행하는 긴 여정의 지혜는 생존의 타성으로 소비해서는 안 되고, 삶의 의미를 제시하는 것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노년이 인간다운 삶의 존엄성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모든 사람의 사랑을 앗아가는 낙담 속에 스스로 고립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류와 문명의 이 도전은 우리의 노력과 하느님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성령께 도움을 청합시다. 노년에 대한 교리 교육을 통해 저는 노인들이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선물과 다른 세대에 줄 수 있는 선물에 대해 애정을 갖고 생각할 수 있도록 모든 사람들이 용기내길 바랍니다.

 

노년은 모든 세대를 위한 선물입니다. 성숙과 지혜의 선물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우리가 노년의 의미와 가치를 분별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꿈과 비전을 주시길 빕니다. 교리 교육을 시작하면서 들었던 요엘 예언자의 말씀처럼, 중요한 것은 노인들의 지혜와 그들이 살아왔던 삶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노인들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고, 노인들은 젊은이들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합니다. 이 교류는 인류의 지혜를 전달하는 다리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성찰이 우리 모두에게 유용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요엘 예언자가 말한 것처럼, 젊은이와 노인의 대화 안에서 노인은 꿈을 주고 젊은이는 꿈을 받아 그 꿈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현실을 이어가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가족 문화와 사회 문화 모두에서 노인은 나무의 뿌리와 같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노인들은 그곳에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젊은이들은 꽃과 열매와 같습니다.

 

뿌리에서 ‘수액(그리스어로 flebo[플레보])’이 올라오지 않으면 결코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제가 수차례 인용했던 아르헨티나의 시인 프란치스코 루이스 베르나르데스(Francisco Luis Bernárdez)의 말을 잊지 맙시다. “나무에 피어난 것은 나무 아래 묻힌 것에서 나온다”(Por lo que el árbol tiene de florido, vive de lo que tiene sepultado). 사회의 아름다운 모든 것은 노인의 뿌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저는 노년에 대한 교리 교육을 통해 노인의 모습을 강조하고, 노인이 버려야 하는 물건이 아니라 사회의 축복임을 잘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노인이 온전하게 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계획이 필요합니다” - 바티칸 뉴스 (vaticannews.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