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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노년에 대한 교리 교육] 3.“노인의 지혜는 타락을 경고하고 미래 세대를 구할 수 있습니다"

Skyblue fiat 2022. 9. 5. 11:31

 

노년에 대한 교리 교육

3. 노년,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젊은이들을 위한 자산

 

프란치스코 교황 2022년 3월 16일

 

 

“노인의 지혜는 타락을 경고하고 미래 세대를 구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당대의 상징적 언어로 기록된 성경 이야기는 우리에게 인상적인 사실 하나를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일상적인 생활방식이 되어버린 인간 악행의 만연함을 보시고 괴로우신 나머지 인간 창조를 잘못한 일이라 생각하시어 인간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창세 6,9-13 참조). 급진적인 해결책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자비가 역설적으로 일그러질 수 있습니다. 동시에 더 이상 인간도, 역사도, 심판도, 단죄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부패와 폭력과 불의로 희생될 운명을 영원히 모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악에 대한 무력감에 압도되거나 “비관론을 퍼뜨리는 사람들” 때문에 사기가 저하되어 우리도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지 않나요? 인류가 지구 생명체를 점진적으로 훼손한다고 비난하는 최근의 특정 이론을 인정해야 할까요? 모든 것이 부정적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상반된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영원한 젊음에 대한 낙관론이 있습니다. 우리보다 더 효율적이고 지능적인 기계로 가득한 미래를 그린 기술의 놀라운 발전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고 우리가 죽지 않도록 최선의 해결책을 고안합니다. 곧, 로봇의 세계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상상력은 우리를 없애버릴 최후의 재앙을 재현하는 데 점점 더 집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결국 핵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전쟁의 “다음 날”, 그때도 우리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여전히 하루가 떠오르고 인간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원점에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려고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진보에 대한 개념을 폄하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홍수라는 상징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게다가 현재 감염병의 세계적 확산은 생명과 그 운명에서 중요한 것들을 하나도 생각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성경에 따르면, 타락과 홍수로부터 지구상의 생명을 구하는 것과 관련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의 맏이인 “의로운” 노아의 충실함에 그 일을 맡기셨습니다. 이러한 궁금증이 생깁니다. 과연 노년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노년이 어떻게 세상을 구할 수 있는가? 가능성은 무엇인가? 죽음 너머의 생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홍수가 나기 전까지 생존한다는 의미인가? 

 

“노아의 때”를 떠올리게 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조금 전에 들은 성경 대목(창세 6,11-13 참조)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루카 17,26-27). 사실 먹고 마시는 것,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며, 타락의 사례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타락은 어디에 있나요? 타락이 그러한 것에 있나요?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인생을 즐기는 데만 머물러 있으면 타락에 대한 인식마저 잃게 되어 존엄성을 손상시키고 그 의미를 오염시킨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타락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고 타락이 일상적인 일이 될 때, 모든 것은 대가를 치릅니다. 모든 것 말입니다! 의견이나 정의로운 행동은 사고 팔립니다. 이는 비즈니스 세계나 많은 직업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마치 인간 행복을 위한 일상적인 부분인 것마냥 타락을 태평하게 경험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러 갔는데 그 일이 더디게 진행될 때, 다음과 같은 말을 얼마나 자주 듣는지요? “팁을 주면 빨리 할게요.” 이런 일이 상당히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제게 뭔가를 주시면 먼저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타락의 세계는 인간의 정상적인 상태의 일부처럼 보입니다. 이는 나쁜 것입니다. 오늘 아침 저는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문제를 저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삶의 재화는 영적 삶의 질에 대한 관심 없이, 우리 공동의 집(지구)의 거주 환경에 대한 관심 없이 소비되고 향유됩니다. 모든 것이 착취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겪는 억울함과 굴욕, 공동체를 해치는 악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일상적인 삶이 “웰빙”으로 채워질 수 있는 한, 우리는 무엇이 정의와 사랑으로 채워지는지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괜찮아요! 왜 제가 이런저런 문제, 전쟁, 인간의 고통, 극심한 빈곤, 엄청난 악행을 신경써야 하나요? 그럴 필요 없죠. 저는 괜찮아요. 다른 사람은 신경 안 써요.” 이것이 바로 우리를 타락의 상태로 살게 하는 무의식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저는 자문해 봅니다. 타락이 당연한 일인가? 형제자매 여러분, 불행히도 그렇습니다. 산소를 들이마시듯 타락을 들이마실 수 있습니다. “당연하죠. 더 빨리 하길 원하신다고요? 얼마를 주실 건데요?” 이러한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쁜 것입니다. 좋지 않습니다! 무엇이 타락의 길로 이끄나요? 하나밖에 없습니다. 오직 자기 관리만 중시하고 상대방은 하나도 신경쓰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는 우리 모두의 삶을 침몰시키는 타락의 관문입니다. 타락은 이 같이 아무 생각 없는 사악한 모습에서 큰 이익을 얻어갑니다. 자기 자신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다른 사람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러한 무책임한 생각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을 약화시키고, 우리의 양심을 흐리게 하며, 우리를 - 심지어 본의 아니게 - 공범자로 만듭니다. 타락은 항상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범자가 항상 있는 법입니다. 그렇게 타락은 항상 더 퍼지고 또 퍼져 나갑니다. 

 

노년은 향락에 집착하고 내적으로 공허한 삶을 정상화하려는 속임수를 파악하기에 적절한 위치에 있습니다. 내적으로 공허한 삶, 다시 말해 생각 없는 삶, 희생 없는 삶, 내면 없는 삶, 아름다움 없는 삶, 진실 없는 삶, 정의 없는 삶, 사랑 없는 삶은 모두 타락입니다.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관심, 생각, 애정에 대한 나이든 우리 노인들의 특별한 감수성은 다시 한번 많은 사람들을 위한 소명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새로운 세대를 향한 노인들의 사랑의 선택이 될 것입니다. 우리 노인들은 주의와 경고를 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조심하시오. 그것이 타락이라네. 거기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네.” 오늘날에는 타락에 맞서기 위해 노인들의 지혜가 많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세대는 우리 노인들에게서, 우리 연장자들에게서 예언을 기대합니다. 타락인지 아닌지 분별하지 못하는 세상, 타락의 관행이 만연한 세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는 예언 말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노년을 선택합니다. 이 은사가 너무 인간적이고 인간답기 때문입니다. 내 노년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노인들은 저마다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타락에 맞서는 예언자가 되어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만두시오. 나도 그 길을 갔지만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다네. 이제 내 경험을 말해주겠네.” 노아가 당대의 타락에 맞서는 예언자일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유일하게 그를 신뢰하셨기 때문입니다. 노아처럼 우리 노인들도 타락에 맞서는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저 자신을 비롯하여 여러분 모두에게 묻습니다. 오늘날의 타락에 맞서는 예언자가 되기 위해 내 마음이 열려 있는가? 노인들이 성숙하지 못하고 젊은이들처럼 타락한 습성으로 늙어가는 것은 나쁜 일입니다. 수산나를 심판한 판관들에 대한 성경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타락한 노년의 예를 보여줍니다. 그러한 노년으로는 젊은 세대를 위한 예언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노아는 결실을 가져오는 노년의 본보기입니다. 그는 타락이 아니라 결실을 가져옵니다. 노아는 일장연설을 늘어놓지 않고, 불평하지 않으며, 비난하지 않습니다. 다만 위기에 처한 세대의 미래를 돌봅니다. 우리 노인들은 위험에 처한 어린아이들과 젊은이들을 돌봐야 합니다. 환대의 방주를 만들어 사람과 동물들이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노아는 모든 형태의 생명을 돌보면서 창조의 부드럽고 너그러운 몸짓을 반복함으로써 하느님의 명령을 이행합니다. 이 명령은 실제로 하느님의 명령을 고취시키는 바로 그 생각, 곧 새로운 축복, 새로운 창조입니다(창세 8,15-9,17 참조). 노아의 소명은 항상 현재 진행형입니다. 성조 노아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해야 합니다. 특정 연령에 도달한 - 노인이라고 말하면 불쾌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으므로 - 우리 모두는 다른 이들에게 말할 수 있는 지혜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합시다. “이보게, 이 타락의 길에선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네.” 우리는 오래 숙성된 좋은 포도주처럼 나쁜 메시지가 아닌 좋은 메시지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노인이라고 표현하는 대신, 어느 정도의 나이에 다다른 모든 분들에게 이렇게 호소합니다.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은 마치 모든 것을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완전히 상대적인, 일종의 상대주의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타락을 비난할 책임이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갑시다. 세상은 앞으로 나아가는 강인한 젊은이들과 지혜로운 노인들을 필요로 합니다. 주님께 지혜의 은총을 청합시다. 

 

 

 

“노인의 지혜는 타락을 경고하고 미래 세대를 구할 수 있습니다” - 바티칸 뉴스 (vaticannews.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