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음을 위한 준비 -마리노 레스트레포
오늘밤 이곳에 오면서, 주님께서 제게 가르쳐 주신 것과 관련하여 죽음을 준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시작하기 전에 성서를 (아무 곳이나) 펼쳐서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요한 18:28
사람들이 예수님을 카야파의 저택에서 총독 관저로 끌고 갔다.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그들은 몸이 더러워져서 파스카 음식을 먹지 못할까 두려워,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빌라도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나와, “무슨 일로 저 사람을 고소하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저 자가 범죄자가 아니라면 우리가 총독께 넘기지 않았을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여러분이 데리고 가서 여러분의 법대로 재판하시오.” 하자 유다인들이 “우리는 누구를 죽일 권한이 없소.’ 라고 말하였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어떻게 죽임을 당할 것인지 가리키며 하신 말씀이 이루어 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택한 것이 아닌데… 분명히 주님께서 이 주제로 이끌어주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죽음에 대한 준비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신비체험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배운 것 중에 원죄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에 대해 배워서 알고 있지만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두렵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태어나서 처음 작으나마 인식을 가졌을 때부터 깨닫는 것이 우리는 죽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충격적인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숨기려고 하고,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가 잘 준비하지 않으면 엄청난 값을 치루어야 하는 큰 것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많은 두려움과, 큰 시련, 많은 정신적인 문제들, 육체적 질병, 혹은 영적 혼란들은 죽음을 잘 다루지 못해서 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원죄로 인해 우리가 어떻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부정하려는 문화에 젖어 살고 있습니다. 이 문화는 우리가 죽지 않는 척 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죽음이 가까워 오면 충격에 빠집니다. 암과 같은 진단을 받으면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빠지지요.
그러나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한가지는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것 뿐입니다. 인간의 삶 안에서, 그 외의 것들은 확신하지 못하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되는 것이고,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이지요.
세례를 받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 이상의 것을 은사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은사는 대부분 평생동안 휴면상태로 있다가 죽음의 순간이 돼서야 그 모든 은사들이 깨어납니다. 그러면 영혼은 자신이 낭비한 그 은총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것은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작부터 그것을 놓치고 날려 버렸기 때문에 그 때서야 더 힘들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지요. 영원한 삶의 여정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영역을 날려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함께 이 지상의 여정을 시작할 때, 육체의 죽음에 대한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면, 영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다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영적인 방법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방법,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없애주지 못합니다. 과학적으로 여러가지 시도는 있습니다만, 예를 들어, 여러분이 어떤 공포증이 있어서 병원을 찾아 갔을 때, 약을 먹고 얼마 후에 그 특정 공포증이 나아질 수 있지만, 얼마 지나면 또 다른 종류의 공포증이 옵니다. 계속 똑같은 과정을 겪고도 또 다른 공포증이 옵니다. 왜일까요? 인간의 과학은 공포의 근본적인 것을 없앨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포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육체의 죽음이라는 현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속량’이라는 것을 다루어야 합니다. 속량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은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 뿐입니다.
사탄이 교회를 거슬러 행한 가장 큰 타격 중에 하나가 종교개혁입니다. 사탄은 교회로부터 큰 무리의 사람들을 빼내어 큰 실수를 범하도록 했습니다. 죽음을 직접 다루는 것들, 즉 십자가로부터, 고백성사로부터, 일시적인 잠벌인 보속으로부터, 모든 은총을 그들로부터 빼앗았습니다. 그로인해 연옥 교리의 은총도 빼앗아 가버리고 말았지요. 그것이 그리스도교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그로인해 피해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것들이 인류를 상하게 했을까요? 죄 때문입니다. 두려움으로부터, 십자가에 못박히는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쉬운 방법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원하고, 치유를 원하고 온갖 일시적인 유익을 원하지만, 갈바리산, 죽음,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 십자가의 길은 원치 않습니다. 나하고는 상관없으며, 십자가는 보고 싶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그 모든 것은 끝났다고 생각하려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로부터 달아난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통이 없는 세상만을 만들려고 한다면, 그러한 세상은 영혼을 아주 약하게 만들어 이 삶의 마지막에 맞게 될 죽음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사탄이 죽음을 맞은 약한 모든 영혼을 데려다 몹시 혼란을 주어, 그 영혼은 가장 두려운 상황을 맞으며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영혼이 맞게 되는 죽음의 상황보다 더 끔찍한 상황은 없습니다.
이곳에 있는 누구라도 오늘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육체가 없는, 그 상황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말로는 들었지만 한번도 본적이 없는 영적인 세상 안에서 강하게 서 있을 만큼, 이제는 눈 앞에 보이는 적이 와서 자신을 유혹하고 온갖 거짓 정보와 혼란을 주고 있는 것을 맞을 만큼 영혼이 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순간 자신 안에 있는 믿음의 빛을 가져와서 진짜 영원한 현실인 영적 세상을 걸어 나아갈 수 있을 만큼의 필요한 힘을 주어야 하는, 그것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이 육체가 없고, 주변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도 없고, 어디에 연락할 수도, 고백성사도, 영성체도 없고, 여기 저기 갈 수 있고, 이것 저것, 먹고 자고 하는 것들이 없는,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하는 그것들이 더 이상 없는, 그것에 대해 준비되어 있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서 죽는다면 우선 자신의 육체쪽으로 가겠지요. ‘어떻게 된거야? 내가 죽은거야? 정말?’ ㅋㅋㅋ 자신이 육체 안에 있지 않고 옆에 서 있는 겁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교류해보려 하지만 아무도 자신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합니다. 그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그토록 많이 들어왔던, 그러나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세상을 보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입니다. 모르는 사람들인데, 왠지 익숙한 얼굴들입니다. 어느 순간 그들이 갑자기 자신을 적대적으로 혹독하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잠깐만, 무언가 이상해’ 라고 깨달을 겁니다. 그들이 온갖 이상한 말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때가 무기가 필요할 때입니다. 자신이 이루어놓은 영적인 것들이 필요한 것이지요. 자신이 속한 영역을 주장하고 차지할 수 있기 위해 영혼의 힘이 필요할 때인 것입니다. 지상을 싸고 돌아다니는 영들이 처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벗는 순간 아직 이 땅에 있으므로 낮은 본성을 다루어야 합니다. 힘이 있는 영혼이라면, 그로부터 들어올려져 빠져 나올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많은 영혼들이 육체를 떠났을 때, 오르지 못하고 아래로 향합니다. 낮은 본성의 영들인 추락한 영과 멸망한 영혼들, 즉 사탄의 군대에 의해 아래로 끌어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준비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예수님을 뵐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매일 하는 영원한 준비여야 합니다. 성서를 읽어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이 오신다. 때가 됐다’라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말합니다. 무슨 의미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대부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나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오늘밤에 나를 부르실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은 곧 오십니다. 아주 가까이 와 있지요. 오늘밤일지도 모릅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무슨 일에서나, 어떤 행동을 하든, 왕이시며 창조주, 생명을 주시고, 자신을 부르시면 그분 앞에 삶을 내어놓고 영원히 자신의 운명이 결정될, 바로 그분을 뵐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알려고 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명확하게 우리에게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을 인식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은 한가지를 요구합니다.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르심입니다.
제가 세계의 많은 곳에 설교를 다니며 피정을 마치면 신자들에게 이렇게 요청합니다. ‘이제 이 모든 피정을 마치고 신앙 안으로 깊이 들어가 무릎 꿇고 각자 성인이 되도록 주님께 청하며 말씀 드리십시오. ‘제 삶 동안 오직 원하는 것, 오직 기도하고 바라는 것은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라고 말씀 드리십시오.’ 그렇게 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정말 영적이라고 생각하였다면, 그렇다고 꿈도 꾸지 마십시오. 주님께 성인을 청하지 않는다면, 아직 하느님과의 관계가 진지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미지근한 것입니다. 일부는 하느님에게 가고 또 한 부분은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명확해야 할 것은 단순한 종교생활을 하는 것으로 영적이라고 속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그것이 죽음의 순간에 필요한 힘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한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결코 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예수님이 있지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완성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고 말하지요. 속량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자신 안에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 나아가 ‘주님! 저 좀 보십시오. 이 약함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지만 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원치 않으며, 거부하고, 경멸하고, 당신을 모욕하고 이웃과 내 영혼을 상하게 하는 이것을 제 삶에서 원치 않습니다.’ 라고 진정으로 말씀드리면 주님께서 매번 고백성사를 볼 때마다 용서해 주십니다. 그것을 원치 않는 진심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 바오로는 육체의 가시에 대해 말하지요. 세번이나 가시를 가져가시도록 말씀드리지만 주님께서 가져가시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것으로 인해 겸손하게 하려는 것이죠. 우리도 그렇게 한다면, 전적으로 그 죄를 끊어 버리려고 노력한다면,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었던 그것을, 이 삶의 마지막에 주님께서 완성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모두 주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고백성사와 함께 옵니다. 그러기에 고백성사가 놀라운 무기인 것입니다. 자주 되돌아 가서 무릎꿇고 원치 않았던 그 행위를 또 하고 말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원치 않았지만 결국 하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주님 제가 또 했습니다. 다시 또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차라리 데려가십시오, 주님” 그와 같이 진심으로 잘못된 행위와 맞서 싸우는 그것이 거룩함을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죄를 경멸하며 주님께 ‘제가 원하는 것은 오직 성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그것이 참되게 죽음을 준비하는 순간입니다.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은 거룩함을 위해 노력하는 것 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혀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죽음이 두려움의 원인이 되어 그 두려움이 자신의 삶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을 진지하게 직면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죽는 것처럼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이순간 죽은 것입니다. 육체를 떠납니다. 육체를 떠나서 자신의 육체를 봅니다. 그보다 더 극한 상황은 없습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창조물을 즐겼습니다. 아주 즐거움을 주는 아름다운, 강력한 것이었지요. 꽃이며 나무, 하늘이며, 모든 것이 아주 놀라운 것들입니다. 자연이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주며 함께 한 것이었는지 믿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성, 감각, 본능, 이성 등이 얼마나 대단하게 우리와 함께 했는지 모릅니다. 특히 우리의 위, 내장, 식욕 얼마나 큰 동반자였는지요. 또한 자신의 모든 작은 생각들, 꿈 등이 함께 했었습니다. 성, 애정, 주변 사람들, 얼마나 큰 동반자였습니까?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 죽는다면 그 모든 즐거움을 주던 동반이 끝이 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성)을 제외한 아무 것도 남겨지지 않습니다. 육체가 아닌 오직 지를 가진 개체만이 남습니다. 그것이 영인것이지요. 그것이 자신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10년, 20년, 40년이 남아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죽는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삶에서 영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영원히 자신을 규정하게 될 그 변화에서 절대 영적인 존재가 아닐 것입니다. 오직 세상에 속한 육적인 존재일 뿐인 것이지요. 영혼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세상적인 것만을 생각하고 살았고 종교조차도 일종의 치료법처럼 자신에게 세상적인 삶에 대한 동반자일 뿐일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흥분하고, 강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고백성사와 성체로 편안함을 느끼고, 성지나 순례여행을 하면서 강렬함을 느끼는 것, 그 모든 것들이 영적인 것과 관계없는, 감정적인 것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이 영혼에 영양을 공급하지 못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종교는 영적인 것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초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그 위에 영적인 것을 지어야합니다. 주님의 영으로 자신의 영혼을 먹여 살리고 강하게 해야 합니다. 자신 안에서 하느님이 자라도록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예수님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인 시작입니다. 그 시작은 자신이 죽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는 것이 죽음을 만나는 시작입니다.
연습을 해봅시다. 이 방에 들어와서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은 없는 것처럼, 오직 주님이 자신을 영적인 것으로 먹이시기 위해 이곳에 부르신 것을 생각하십시오. 자신은 작아지고, 사라지기 시작하며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주는 것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을 중요하게, 대단하게, 크게 생각하는 사람은 죽을 준비가 안돼 있는 것입니다. 육체에, 세상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신경 쓰는 것이 자신과, 육체, 자신의 생각, 다른 사람들의 생각, 세상적인 것일 뿐이므로 죽을 준비가 안된 것이지요. 그런 사람에게 곧 죽을 것이라고 한다면 절대 받아들이질 못할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선 자신이 먼저 죽음으로서 죽음을 대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이 죽지 못한다면 죽음의 순간에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연옥에서 자신을 죽이는 것을 위해 머무를 것입니다. 연옥에서 자신을 죽이기 위해 몇 트럭의 총알이 필요할 것입니다. ㅋㅋ 자신을 죽이는 일이 가장 힘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곳 지상에서 자신을 죽일 수 없다면 연옥에서 자신을 죽인다는 것을 아주 아주 어려울 것입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복음 말씀을 읽을 때 아주 건성으로 넘깁니다. 특히 가장 낮은자,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라고 하는 대목에서 그렇습니다. 오 ~ 아주 빨리 넘겨 버리죠. ㅋㅋ “오~ 저 성서안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용감하구먼, 대단해!! 하지만 나는? 가장 덜 중요한 사람이 되라구? 그럴수는 없지. 항상 다른 사람이 먼저이고, 나는 맨 끝에 있는 사람이 되라구? 와우, 대단한 사람들이구먼~’ 나와는 상관없어.” 그러나 그것이 자신이 죽는 첫 출발점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낮은 사람, 가장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죽음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번 말씀드리는, 주님께서 저에게 보여주신 것 중 하나가 자신으로부터 누룩을 빼 버리는 것입니다. 삶에서 누룩, 양념을 빼버리고 맛이 없는 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친구들이 떠나가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을 것입니다. 지루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고 초대하는 사람도 적어지겠지요. 이상한 사람, 광신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맛이 없어서 더 이상 아무도 먹으려 하지 않지요. ㅋㅋ 예전에는 항상 초대받고, 첫 자리였고,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맛있는 빵이었을지라도 말이지요. 누룩과 양념이 잔뜩 들어있는 빵이었지요.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아무도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신이 죽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이목을 끌기 위해 자신을 부풀려 놓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칭찬과 칭송을 듣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자기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자신이 죽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주님 제가 당신의 뜻을 행하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저의 길을 인도하여 주십시오. 제가 하도록 두지 마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 삶에서 주님께서 저를 부르시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살기 시작했을 때, 엘에이에 있는 성당에서 무릎꿇고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것을 청하러 왔습니다. 저를 묶어 주십시오. 저는 자유를 원치 않습니다. 당신께 돌려 드립니다. 당신의 종이 되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가 계속 매일 주님께 드리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지요. 그분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지 않았으므로 원죄를 지어 낙원에서 쫒겨난 우리에게 결정할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나의 뜻을 따를 것인가? 하느님의 뜻을 따를 것인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ㅋㅋ 우리의 뜻대로 한다면 길을 잃을 것입니다. 잘못된 선택, 잘못된 방향, 잘못된 길로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주님께 ‘저를 묶어 주십시오. 자유에 대해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당신의 종이 되고 싶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원하는 일만을 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주님앞에 무릎 꿇고 ‘성인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성인만이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씀드려야 합니다. 오직 성인만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미 길을 잃었는데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성 바오로의 서간을 읽어보면 데살로니아나 갈라디아 교회에 설교합니다. 그리고 데살로니아 성인들에게 라고 씁니다. 그들을 성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왜인가? 그 사람들이 진정으로 거룩함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되기 위해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노력하는 그 누구라도 그렇습니다. 거룩함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인은 절대적으로 하느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다른 것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심했다면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의 메시지를 알 것 같습니다. 저는 귀양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집트에 살고 있습니다. 저를 데려가 주세요. 제 집으로 데려가 주세요. 주님, 이곳에 저를 남겨두지 마세요.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곳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예루살렘 도시에 속한 사람입니다. 저는 선택된 사람입니다. 제 이름이 생명의 책에 씌어져 있습니다. 빛의 도시의 여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에 데려다 주세요. 그것 뿐입니다” 바로 그것이 시작입니다. 자신이 귀양살이 왔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순례중이며 잠시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이 자신이 빛의 도시에 속한 사람이 되기만을 원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그 빛의 도시에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직 성인들 뿐이지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죽음의 문화에서 가장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는 성인이 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일 누군가에게 전화해서 ‘내가 성인이 되야 한다는 것을 오늘 깨달았어”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이 막 웃을 겁니다. 가장 큰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사람이 크게 놀릴겁니다. 마리노가 성인이 되는 것을 원하라고 했다면 크게 놀리며 어쩌면 유머나 신문의 만화영화 재료가 될지도 모릅니다. ㅋㅋㅋ 그만큼 우리가 길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 곳에 자리잡고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전철 혹은 기차역을 지나다가 역에서 종이 박스 같은 것을 뒤집어 쓰고 아예 거기서 살고 있는 사람을 볼 때가 있지요. 오~ 이 사람은 집을 잃어버렸구나 라고 생각하지요. 이 지상의 삶도 기차역과 같습니다. 집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 지상의 삶을 사랑하는 것은 기차역을 집으로 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동하고 있는 중이며 깨어서 집으로 데려다 줄 기차를 기다려야 합니다. 순례 중에 언제라도 집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벨이 울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 지상의 삶의 마지막에 있을 기쁨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저는 우리가 죽으면 어떤 일이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제 자신이 잘못된 영역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바른 영역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제 삶을 매일 오늘밤과 같은 일을 하면서 최선을 다해 모든 사람들이 올바로 준비하도록 말하는 것을 분명히 하라고 제 자신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지상의 삶을 떠날 시간은 바로 코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이 지상의 삶이 약하고, 깨지기 쉽고, 일시적인 것임을 깨닫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이 삶은 영원 안에서 한 순간일 뿐입니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 보십시오. 지나간 시간은 보이지 않고 잘 생각해보면 거의 꿈과 같지요. 그 다음은 자신이 관에 들어 있는 것을 볼 것입니다. 관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람을 볼 것입니다. 하지만 더이상 그들과 대화할 수 없습니다. 그 날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날이 올 것입니다. 그것을 부정하고 살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루종일 관 속에 있을 자신을 상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ㅋㅋㅋ 그것에 집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영적인 은총에 집착하는 것, 그것은 마귀가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신비체험에 대한 집착이 만연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이 거짓예언자가 되고 거짓목격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사적인 신비가 있음을 아는 마귀가 그것을 망쳐버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일부를 망치기 위해 온갖 환상을 마음과 정신에 가져와서 자신안에서 온갖 환상적인 장면을 만들어 내고 온갖 가짜 정보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종교의 옷으로 가장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신비체험의 집착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인식을 세심히 깨우치라는 것입니다. 그것에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집을 떠나 몇 주 여행을 가려할 때 여행가방을 준비합니다. 여행가방안에 옷이며 여권이며 필요한 것들을 준비합니다. 여권을 빠뜨리고, 신용카드, 돈, 연락처 등을 빠뜨리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한다는 것을 알지요. 단순한 지상의 삶에서도 그러한데 이 삶의 마지막에 시작되는 여행은 어떨지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준비가 필요한 가장 중요한 여행입니다. 세심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이 마음이 여행가방입니다. 그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마음 안에 집어 넣어야 합니다. 그곳으로부터 자신에게 줄 영양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음안에 있는 것이 자신에게 힘을 주게 될 것입니다. 그로인해 영혼이 건강하거나 혹은 영양실조가 될 것입니다. 약한 영혼, 영양실조가 된 영혼, 기형이 된 영혼은 이 삶의 마지막에 불구가 될 것입니다.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아무도 듣지 못하고, 방법을 알 수도 없고, 모든 곳에 마귀가 있고, 온갖 불행, 지상의 삶으로부터 온갖 죄의식이며 온갖 악몽이 일어날 것입니다. 준비하지 않아서 건강하지 못한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영혼을 건강하게 하여야 합니다. 건강은 오직 성사를 통해 가져올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 진심으로 마음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고 고의적으로 다시 그 행위를 할 것을 알면서 위선적으로 고백성사를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결코 영혼에 힘을 줄 수 없습니다. 힘은 참된 통회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다시는 절대 그것을 원치 않아!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그 무엇도 하고싶지 않아! 내 삶에서 하느님만을 원해!’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결코 타협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질투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일부만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존재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창조하셨습니다. 가끔 우리는 우리의 일부만을 드리는 척 합니다. 안됩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 속하여야 합니다. 그분의 친구가 되고 싶다면, 하느님의 것이 되고 싶다면,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리십시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혼동을 합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많은 가톨릭 신앙생활을 하고, 때로 자선까지도 하지만, 너무도 많은 것을 자신이 움켜쥐고 일부만을 주님께 드리므로 혼란을 겪고 걱정과 두려움, 의심과 불안을 가집니다. 그리고 항상 일반적으로 하는 말이 ‘주님께서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어’ 입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므로 항상 주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 저것 청했는데 하느님께서 주시질 않으니, 더 이상 무엇을 청해야 할지 모르겠어.’ 라고 합니다. 오직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청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내려 놓지 않으면 자신 안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적을수록 하느님이 더 많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비우어야 합니다. 모든 원하는 것과 바라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무언가에 묶여 있는 한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을 멀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께 속해 있고, 이것 저것을 한다고, 하느님에 대해 다 알고 있는 척을 하지만 나 자신을 위해 이것을 원하고 저것을 원하며 하느님께 ‘주세요. 주세요. 제발 주세요’ 라고만 합니다. 그리고는 ‘왜 응답을 안 주실까? 언제 될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정말 주실까?’ 그것이 바로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를 죽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은 하느님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러한 생각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드리는 것이지요.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것을 제안하는 것이죠. 좋으신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아빠 저에게 이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것이 저에게 좋고, 옳은 것인지 알려주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당신이십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응답을 받았다면,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이지요. 답을 받지 못했다구요? 그분이 원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잊어버리세요. 주님께서 성서에서 ‘청하라, 받을 것이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라고 하시며 계속 청하라고 하시지요.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는 영원한 유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유익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차가 필요하다구? 주님께 청해! 계속 캐딜락을 청해봐!’ 매일 매일 ‘벤츠를 주세요. 벤츠를 주세요!” ..ㅋㅋ ‘분명히 그렇게 청하면 언젠가 주실거야. 성서를 봐, 구하면 받는다고 했잖아.” ㅋㅋ 그것이 때로 개신교에서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이죠. 세상적인 것에 대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갖기를 원하신다고, 청하면 모든 것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가톨릭 신앙을 통해 주신 그리스도 사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저 위에 있는 것을 구하여야 합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 먼저, 저 위에 있는 것, 하느님 나라를 찾으십시오. 이 아래에 있는 것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죽음의 두려움을 다루는 시작점입니다. 지상에서 왜 그리도 많은 것을 원해야 합니까? 우리가 이곳에 속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자리잡고 살려고 아주 많은 계획을 가지고 있지요. 사람들이 복권을 사며 말하는 것 아시지요 ‘복권이 당첨되면, 연옥영혼을 위한 성당을 지을거야~!” ㅎㅎㅎㅎ ‘사천칠백만불 당첨되면 오십만불은 주님께 드려서 성당을 지을거야’ ㅎㅎㅎ 그러치요? ㅎㅎ
이 지상의 것들을 내려놓고 거룩함을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기 시작할 때 주님께 ‘이 지상의 것은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제가 관리해야할 것을 주신다면 관리하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짐을 원치 않습니다. 떠날 준비를 하고 싶습니다. 저를 부르신다면 당신을 향해 날아가겠습니다.’ 날아가는 것입니다. 육체를 떠나서도 여전히 이곳에서 그 모든 것에 붙들려서, 꽃이며, 토끼며, ㅋㅋ 이웃이며, 모든 생각, 꿈, 바램, 소유한 것들을 내려 놓지 못한다면 그것은 악몽이 될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내려놓는 것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서 시작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고, 자신의 피부를 보고 거울을 들여다 보면, 시들어 갑니다. 보세요. 이 육체는 시들어 갑니다. 이 죽어가는 육체와 사랑에 빠진다고요…우리는 영원한 것과 사랑에 빠져야합니다. 영혼과 사랑에 빠져야 합니다. 영혼을 그리스도 안으로 데려가야합니다. 그러면 죽어서 이 시들어 가는 육체를 떠났을 때 주님의 영으로 빛을 내며 그분의 왕국으로 날아 갈수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은총입니다. 우리 앞에 항상 그 생각을 두어야합니다. 자신이 영원한 빛으로 녹아 들어가서 영원한 빛의 도시를 향해 날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매일 꿈꿔야 합니다. 우리의 눈을 천국에 맞추어 놓아야합니다. 마음을 천국에 놓아야합니다. 말을 천국에 놓아야합니다. 팔, 다리, 발 모두 천국에 놓아야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천국에 놓아야합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보여주신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지상에서 천국에 있는 것, 전례 안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이 신적인 전례가 지상에 있는 천국이라고 하셨습니다. 진심으로 전례의 은총을 이해하고 전례를 따르게 된다면, 전례시기를 따라가며 이 지상에 있는 천국의 영역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죽음을 맞으면 천국에 있게 될 것입니다. 전례 안에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전례가 천국이라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저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전례를 이해한다면 우리 가톨릭 교회는 전례를 매우 잘 연구해 왔고, 전례시기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전례시기들이 교회를 통해 어떻게 결집되어 있으며 일년동안 전례시기가 돌아가며 우리를 어떻게 각기 다른 주님의 육화의 신비로 이끌며 놀라운 성체성사의 신비를 주고 있는지. 그 전례안에서 매일의 삶을 봉헌하며 깊이 살아간다면 죽음을 맞았을 때, 천국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상에서 천국을 사는 방법입니다. 마귀는 그것을 참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전례안에서 살아갈 때 마귀를 눈멀게 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성체로 인해 참된 감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가든 자신 안에 살아계신 주님으로 인해 빛을 발산합니다. 하느님의 전례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무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호받고 있고 정보가 있고 은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매일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사도직은 하느님의 군사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과 사랑에 빠지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볼 때 우리가 살아계신 하느님을 믿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느님이 말씀하시고 여러 방법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지만 그것이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가지고 싶어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사욕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 사욕도 이용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끔 기적을 찾아 다닙니다. 치유미사도 가고 순례를 다니며, 그 뒤에는 사욕이 있습니다. 돈이며, 결혼문제며 무언가를 바라고 치유를 바라고 가지요. 오직 그 문제를 위해 갑니다.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얻기 위해 가지요. 그러나 이것 저것 찾아 다닐 때, 주님께서 재빠르게 그를 낚아챕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모든 것을 이용하시는 방법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아픈이들을 구하러 오셨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동정심이 더 많아집니다. 더 사랑하고 용서하고 모든 이들에게 대해 자비심을 갖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이 필요하고 들여 올려져야 하고 모든 사람이 집으로 가야합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집으로 가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영혼들을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쓰시는 도구입니다. 우리는 어부입니다. 우리는 참된 신앙을 증거하고 확신을 가지고 기쁨으로 그것을 삶으로써 영혼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데려 가도록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그 기쁨이 우리에게서 빛을 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 모든 동정심에서, 우리는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하느님의 도구로 씌여집니다. 겸손은 우리를 작게 만들고 거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습니다. 아주 부드럽고 지상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집으로 가는 것만을 원합니다. 돈이나 남에게 관심을 받는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영광드리고 모든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세상 구석구석에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 안에 하느님의 나라를 짓는것 뿐일 때, 기쁨을 갖습니다. 다른 그 무엇도 마음안에 더한 기쁨을 가져다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부터 사람들 마음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의 빌딩안으로 가는 것 외에는 원치 않습니다. 그 밖에 모든 것은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죽을 운명입니다. 잠시 있다 지나가고 말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결코 지나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지어야합니다. 그 빌딩의 건축가가 되어야합니다. 항상 그것을 위해 벽돌을 가져오고 이미 마련된 놀라운 디자인대로 그것을 지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 그것이 이미 하느님에 의해 디자인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재료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일부가 되기에 너무 크게 부풀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일부, 그리스도 몸의 일부로 창조 됬습니다. 정확한 사이즈가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양이 변해서 창조된 그 자리에 맞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아져야 하고 사이즈를 줄이고 다시 작아져서 자신이 속해야하는 자리에 맞도록 해야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에 정해진 위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작습니다. 네, 우리는 너무 커~져 있습니다. 줄여야합니다. 죄로 인해 켜져 있습니다. 자만심과 허영심때문이지요. 주님께 겸손의 은총을 청합시다. 영혼의 아기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합시다. 그럼으로써 성령의 은총을 되찾아 다시 작아지도록 합시다. 우리 마음안에 가장 큰 주제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오늘밤 주님께 나의 죽음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주시길 은총을 청합시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죽는 것입니다. 오늘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밤 죽을 준비를 한다면 살면서 처음으로 제 자리에 온 것이 될 것입니다. 내일 일어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내일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겸손하게 그것을 이해한다면 잠자기 전에 ‘주님, 당신과 함께 오늘밤 죽습니다. 당신께 모든 것을 드립니다. 저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고 성호를 긋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지요. 그리고 내일 아침 일어날 것처럼 하지 마십시오. 이것을 매일 밤 훈련한다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준비하며 마치 죽는 것처럼 항상 통회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그곳에 내어 놓으십시오. 자신을 성찰하십시오. 그러면 자신이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는지 발견할 것입니다.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역: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http://blog.daum.net/sophiay/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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