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마리노 레스트레포 강연

영적세상 보기- 마리노 레스트레포

Skyblue fiat 2016. 12. 20. 15:30

 

 

Reading the Spirtual Realm
영적세상 보기- 마리노 레스트레포

 

 

우리 종교생활의 한 단계로서의 고백성사는 성사적인 삶으로 이끌어주는 동시에 우리 안에서 많은 일들이 신비하게 일어납니다. 우리의 삶을 성사적으로 다루는 가운데 아주 큰 영적방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고백 성사가 일상적인, 단순한 행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신앙의 신비로 깊이 들어간 이것으로 인한 영적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실제로 볼 수 있다면 많은 어두움이 밀려난 것을 볼 것입니다. 자만심이라는 무기를 내려놓고, 겸손해지고, 마음이 부드러워져 고백성사를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과 같이 고백성사를 보기 위해 모두 하나가 되어 자리를 마련하고, 사제들이 성사를 주기 위해 준비하는 이 모든 일들이 일종의 기적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주 큰 영적인 사건입니다. 많은 천사들과, 많은 사탄들, 교회 차원의 큰 영적전쟁과 관계되는 일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하느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르는 영혼들, 이 근처에 살고 있는 영혼들, 크게는 전국에 영향을 주는 일입니다.
 
생태계의 원리를 이해한다면, 생태계의 여러가지 요인들을 기반으로 생물들이 생존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오존 층이라든지,…여러 생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생존할 수 있도록 여러 기초가 되는 요인들이 공급됩니다. 영적세상에서도 우리는 모든 인류에게 공급해 주는 영양분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도 주변에 있는 영혼들에게 많은 영양을 공급해 주고 있는 것이며, 아주 큰 영적전쟁을 치루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주변에서 사람들을 묶고 있는 많은 타락한 천사들이 방금 여러분들이 고백성사를 봄으로 해서 매우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 못합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가톨릭 신자도 아닌, 저 거리에 있는 우리와 관련없는 누군가를 사슬로 묶고 있는 사탄이 여러분의 고백성사로 인해 몹시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겁니다. 또한 이 근처의 모든 환경에 영향을 주고 있는 괴수를 없애고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겠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거슬러 이곳의 생태계를 망치려 하고, 자연에 부조화를 가져오려 하며 병을 만들어 내고 자연이며 날씨 등에 문제를 야기시키려고도 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면에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고백성사를 보는 것은 영적인 생태계를 올바로 해 놓는 것이며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조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지옥의 많은 벌레들과 구더기들이 달아납니다. 청소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지요. 몹시 오염된 곳을 깨끗이 청소하기 시작할 때, 모든 벌레들이 여기저기로 달아나며 흩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탄들이 여기저기로 달아납니다. 그 영역 안에 청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당에서 미사가 시작되려 할 때도 사탄들이 달아납니다. 예루살렘 도시가 제대 위로 내려오면 엄청난 빛이 나오게 되어 사탄이 눈이 부셔 주변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사가 진행될 때마다, 그 지역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탄의 사슬이 느슨해집니다. 그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변화 되기도 합니다. 꼭 가톨릭 신자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기적의 행위, 미사가 일어나는 곳의 주파가 미치는 곳에 있는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 영역 안에서 성체로 인해 많은 악들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미사가 끝나면 모든 사탄들이 그 영역의 죄인들에게 되돌아 오지만 그 사슬은 전보다 약합니다. 사탄에게 묶여 있는 사람들이 미사가 있는 동안 숨을 쉴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지요. 제 말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이 영적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단순한 종교인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한 단계로서의 전통을 따르고, 하느님께 잘 보일까 하고 고백성사를 보고,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고백성사를 보고,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고백성사를 보는 것 이상의 신앙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는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 (진리의) 수액을 깊이 가져와 흐르도록 하여서 자신을 더욱 강하게 하고 효과를 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교회의 은총을 통하여 참된 진리의 수액을 더욱 많이 취할수록 더욱 효과를 낼 수 있고, 더욱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장 할 때 성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더 이상 부드러운 음식을 먹지 않고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됩니다. 단단한 음식인 영적인 인식을 가지고 더욱 깊어져야 합니다. 즉 가톨릭 신자로서의 모든 행동은 주변에 모든 영혼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 역시 모든 영혼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오존층이 있어서 태양열로부터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는 않지요.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자연스럽게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성체를 모시는 것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먹이는 것이며 실제로 수백명의 영혼에게 영양을 공급해주는 것이지만 모두들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보지 못하고, 어떤 방법인지 모른다 해도 사실이 그렇습니다. 때로 우리는 성체를 모실 준비도 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성체가 얼마나 굉장한 일이며 얼마나 놀라운 범위를 포함하는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사생활이 얼마나 많은 곳의 영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지금도 고백성사를 본 많은 사람들이 더욱 밝아지고 빛을 내고 있습니다. 밝아질수록 더욱 많은 빛을 받을 수 있고 엄청난 성령의 은총의 빛이 퍼져 나갑니다. 사탄이 약해져서 숨어버립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를 한다는 것은 신앙의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도구가 되는 것이지요. 아직은 흠 없는 도구나 성인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보물, 성령을 담을 수 있도록 준비가 된다는 것입니다. 고백성사를 봄으로써, 새롭게 된 도구가 되어 조화로운 음을 내는 완벽한 소리를 갖게 됩니다. 그 소리는 악령의 귀를 먹게 만듭니다. 사탄은 빛의 음계, 톤을 참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지옥에 가는 영혼들은 목소리를 잃어버립니다. 미움과 분노를 표현하려 해도 동물, 맹수와 같은 소리를 낼 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가질 때, 사탄은 우리의 목소리의 톤을 참지 못합니다. 그 목소리는 놀라운 힘을 갖기 때문입니다. 한마디의 말을 해도 하느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으므로 사탄이 참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모니를 이룰 때 우리는 사탄을 대적하는 작은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하느님과 멀리 있는 가족이나, 혹은 하느님을 모르고 사는 냉정하고 세상적인 이웃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궁금해 하지요. 답은 신앙의 신비에 대해 인식하며 그것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신앙의 신비를 향해 깊이 들어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갖는 것만으로도 사탄에 대항하는 작은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즉, 가족 가운데 자신 만이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앙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가족에게 축복을 가져다 줍니다. 그로써 나머지 사람에게 있는 사악한 영들을 몰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마와는 다른 것입니다. 각 개인이 사탄으로부터 구마되어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사탄을 끊어 버리려는 개인적인 선택이 필요합니다.
 
사제가 제의를 입을 때 모든 지옥이 떤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가장 믿음이 적은 사제, 한계가 있고, 죄의 삶을 사는 사제일지라도, 예수님께서는 그 한 인간을 쓰고 계시며 사제 직분은 여전히 일어납니다. 여전히 제대에서의 사제직은 사탄에게 끔찍한 두려움을 줍니다. 가톨릭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영적전쟁 안에서 악을 몰아내고 있으며 우리의 중요한 의무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안다면 단순히 종교적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나 종교를 쉽게 바꾸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마치 관광객처럼 가톨릭 교회에 갔다가 이곳 저곳 다른 교회를 기웃거립니다. 영적으로 신앙에 대해 모르고 단순히 종교를 선택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더 흥미롭다거나, 좀 더 이해가 간다거나, 자신의 기대에 맞는다거나 하는 이유로 쇼핑을 하듯 합니다. 온갖 철학이나 이상, 온갖 정신심리학이나 멘탈 콘트롤 기교 등에 쉽게 이끌리므로 요즘은 그러한 것들이 많은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 안에 영적인 개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탄과의 영적전쟁, 영적방어를 이해해야 하고 성사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사는 놀라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의식한다면, 교회와 조화롭게 일치할 것이며 성사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고백성사를 볼 때마다 하느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고백성사는 구마입니다. 자신을 청소하는 것으로서 사탄이 물러섭니다. 사죄를 받을 때 그 자리에서 사악한 영이 멈춰집니다.
 
어떤 사제는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하여 사죄경을 해 줍니다. 사탄은 매우 영악해서 때로 우리로 하여금 중요한 죄를 잊어버리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고백성사를 본 한참 후에 다시 그것이 생각이 날 때도 있습니다. 쉽게 잊어버리는 그것 또한 일종의 유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백이 완전하다고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세상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가 소리를 내어 고백하지 않은 죄에 대한 보속은 조금 더 어렵습니다. 우리가 소리를 내어 죄를 고백할 때, 사제의 사죄경에 의해 그 죄에 대해 현존하는 사탄을 직접적으로 구마를 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잊어버린 죄에 대해서도 사죄경을 주게 되므로 분명히 기억하지 못한 죄도 구마가 됩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보속은 조금 다릅니다. 사탄은 우리가 죄를 기억하지 못함으로써 정확하게 무엇에 대해 보속을 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죄의식을 갖지는 않지만 영적방어 차원에서 자신이 기억하지 못해 장악하지 못한 어떤 알 수 없는 영역이 남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무튼 그 죄도 용서되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혼동하지 말고 정확하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워갚을 보속에 대한 것입니다. 내적인 자신을 완전하게 깨끗하게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시점에서 내적인 불편함을 느끼며 죄의식이 자신을 끌어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제가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도 사죄경을 줌으로써 모든 죄가 용서되지만, 죄를 덮거나 숨겨서 의식적으로 그것을 잊어버린다 해도 영혼은 그것을 압니다. 나중에라도 다시 그것을 꺼내 고백을 할 때 비로소 영혼은 평화를 되찾습니다. 우리는 숨겨둔 기억을 여전히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숨긴 것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어디엔가 그것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이 내면이 평화롭지 못한 무언가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기억해 내는 것은 놀라운 은총입니다. 우리가 충분히 하느님께 충실하고 인내할 때, 나중에라도 성령께서 죄를 기억해 내게 합니다. 그것이 은총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런 경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때로 고백성사를 보고 나서 나중에 죄가 생각날 때가 있지요. 그럴 때, 다시 고백성사를 보아야 하나 하고 생각하지요. 제 대답은 여러분은 이미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그것을 고백성사를 본다면 강력한 훈련이 될 것입니다. 자신이 잊어버린 죄를 다시 주님 앞에 내려놓고 용서를 청하는 것이지요. 용서받았다는 것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방어차원에서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부님들은 다시 고백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안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주님 앞에 그것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면 되겠지요. 사제가 필요치 않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평화를 갖게 되고 더 이상 죄의식이 끼어들지 않게 됩니다. 연옥영혼의 가장 큰 고통 중에 하나가 죽음과 함께 자신이 감추었거나 잊어버려서 내면에 잠겨버린 그 모든 영역들이 나타나서 아주 어려운 상황들을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살면서 아주 충격적인 일들이 일어나면 어떤지 아시지요. 너무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그 기억을 의식적으로 없애버립니다. 그러다 어느날 그 생각이 떠오르면 온 신경이 긴장을 하는 일들이 가끔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면 우리가 다루고 싶지 않아 뒷전으로 치워버렸던 모든 것들이 되살아납니다. 그러나 그때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습니다. 해결책이 없는 그것으로 인해 매우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톨릭 신자로서 가장 큰 은총의 하나가 고백성사의 은총입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편해지기 위해서나, 혹은 다루고 싶지 않아서 덮어버린 모든 영역들을 열어서 죄의 영역을 재현하여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살아있는) 바로 지금 다룰 수 있도록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치유를 가져다 줍니다. 그 모든 것들이 영과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죄와 동의하여 자신의 회계장부에 쌓아놓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동의하고도 많은 것들을 뒷전으로 치워버립니다. 마음으로 짓는 죄와 같은, 별 신경을 쓰지 않음으로서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소위 빛으로부터 어두움의 영역으로 건너가지만 후에 고백성사 볼 때에는 실제로는 마음의 죄에 동의하고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감정적으로는 거기에 참여를 한 것이지요. 마음으로는 그 죄의 영역 안에서 행동을 하고 죄를 지었지만, 그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죄들이 쉽게 잊어버리는 죄입니다. 유혹에 동의한 것입니다. 그러한 죄는 육체적인 행동을 수반하지 않으므로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유혹에 동의한 죄를 쌓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유혹에 동의한 죄를 쌓는 것은 지옥의 수호를 받습니다. 유혹에 동의하여 쌓아놓고 봉하게 하는 것이지요. 공개되지 않은 채 옆으로 밀어버리는 것입니다. 때로 그렇게 쌓아논 것들이 아주 클 때 폭발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에서 크게 넘어지기도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가끔 아주 좋은 남편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75세에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나서 가족을 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지요. 그렇게 좋은 남편이고 좋은 가톨릭 신자가 갑자기 도망을 가버린 겁니다.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지요. 그 이유 중에 하나가 그러한 유혹에 동의하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을 참고 쌓아두고 있다가 나중에 폭발 한 것이지요.
 
그러기에 우리의 내면은 많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매우 엄격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거스르는 행동과 생각에 계속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쌓고 있는 잘못된 것들에 대해 훈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고백성사를 올바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올바로 그 죄에 대한 평가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한 대죄가 아닌 죄에 대해서는 평가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죄가 아니면 느슨하게 하지요. 오늘날에는 분명히 아주 많은 죄들이 있는데도 많은 죄들이 더 이상 죄가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것에 아주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이 사회 안에서는 많은 부도덕한 죄, 불순종 등의 죄의 영역들이 여러 면에서 죄가 아닌 것으로 여깁니다.
 
아주 어린 아이를 뒷자석에 앉힌 채, 운전을 하며 길을 갈 때때로 아이는 창밖을 보며 순진함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정말 끔찍한 많은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창밖으로부터 무엇을 읽거나 보면서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되고 부모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순진함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길에는 많은 사악하고 독과 같은 것들이 일어나고 광고되어집니다. 우리는 별로 신경쓰지 않은 채 당연한 듯이 지나치지만 아이는 무엇을 보아야 하고 보지 말아야 하는지를 식별할 수 없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장하였지만, 운전을 하거나,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 보고 듣고 하는 것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많은 것들에 무의식에 자신을 이입하거나 걸러내지 못합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우리 안에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어, 숨 쉬듯 들이 마시고, 그 안에 살며, 모든 것들이 느슨하게 우리 내면으로 오고 갑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책임지지 않는 많은 행동으로 채워집니다. 단순한 가톨릭 신자로서 그 모든 것들이 죄라고 당황을 하거나, 그 모든 것들에 물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인식하며 살아가도록 훈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사에 대한 충분한 믿음을 가지고 가능한 고백성사를 자주 보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계속 깨어있도록 하여 필요하다면 큰 노력 없이 거를 수 있는 그것이 제 2의 천성이 되도록 훈련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에 의해 우리를 이끌어주는 성령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이 부족합니다. 아주 대단한 종교인이 된 것 같지만 영적이지 못하여 성사가 제 역할을 못하고 확실한 하느님의 은총의 신비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사가 단지 평화를 느끼기 위한 종교의 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고백성사를 삶 안에서 신비의 한부분이 되도록 한다면 그것이 영적인 무기가 됩니다. 실제로 고백성사를 하고나서 마음이 가벼워지고, 자유를 느끼며 마음이 새롭게 변화된 것을 느낀다면 고백성사를 잘 활용하고 제대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고백성사를 보고도 보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고 단지 종교적인 행위로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그저 좋은 것이니까 하는 정도라면 그 고백성사는 제대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며 영적인 건강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영적인 건강을 위해 우리는 성사의 신비를 이해해야 합니다.
 
며칠 동안 이곳에서 영과 영적방어에 대한 이야기를 해 오면서 지금 이곳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탄의 가장 큰 속임수 중 하나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실제로 이곳에 있지 않는 것이 되도록 마음을 빼앗는 것입니다. 이곳에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이곳에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면 은총을 받지 못하여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은총을 받지 못하도록 막는 것입니다. 자신을 성령으로 채울 때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과 자신의 모든 가족에게도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정한 회개를 한다면 자신의 가정 안에서 모든 가지에 빛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히 가족 구성원 각자가 하느님을 향하여 갈 것인지는 개인적으로 결정해야 하지만 자신으로 인한 축복은 여전히 그들에게 미칩니다. 축복의 예를 들어보지요. 가족이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진정한 회개를 합니다. 그러다 하느님과 멀리 있는 가족 중 한 사람이 죽음을 맞습니다. 그 사람이 죽는 순간 처음 그가 깨닫고 받는 것은 여러분과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가 즉시 그 사람의 고뇌 앞에 현존합니다. 여러분이 자신과 연결된 모든 가지에 공급해 준 빛이 바로 죽음과 함께 그 사람 앞에 현존하는 것이지요. 그 은총의 순간에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갖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가지인 가족에게 공급해준 빛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회개, 구원되면 온 가족이 구원되리라는 교회의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구원이란 이 삶의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거부하거나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입니다. 믿지 못하겠지만, 이 삶의 마지막에 하느님을 거부하는 영혼이 있습니다. 마음이 몹시 굳어져 있고 영혼이 모씨 어두워서 사랑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그러한 사람을 가끔 만나기도 합니다. 사랑에 대해 그 무엇도 알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이나 온유나 동정과 같은 것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오히려 그 사람을 상처주고 화가 나게 합니다. 누가 사랑해주는 것도 원치 않으며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죽음을 맞으면 많은 사람들이 결국 하느님을 거부합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런 사람들을 요즘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이 완전히 비어있습니다. 무엇에도 상관하지 않고 그런 채로 살아가길 원하는 사람입니다. 아주 끔찍한 삶이지만, 그 사람은 그것을 선택했고 그 누구도 그것을 바꾸지 못하게 합니다. 변화되길 원치 않습니다. 저도 가끔 그런 사람을 봅니다. 직접 저에게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저의 강연에 오는 사람들이 가끔 자신의 친지를 데려 오기도 하는데 마지막에는 결국 ‘당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저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살아온 대로 살 것이고 누구도 제 마음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그게 접니다. 그럼 이만!.’ 하고 나가지요. 그러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그를 데려온 친지는 매우 슬퍼합니다. 그러면서 아마 의문을 가질 겁니다. ‘그러면 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 그러나 어쩌면 그날 밤 그 영혼은 은총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거부하는 가운데 어쩌면 어떤 부분에 아주 조금 받아들이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 작은 받아들임이 죽음을 맞았을 때 그 영혼을 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붙들고, 잘못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가능한 일입니다. 동시에 사람이 하느님을 거부하는 일이 가능하고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옥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느님께서 사람이 지옥에 가도록 허락하실 수 있느냐고 생각하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살면서 사랑하지 않고 사랑을 받지 않으려 하며 살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보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정말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느님께 ‘노’라고 말하며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이미 지옥을 살고 있습니다. 자신이 지옥을 원하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사악한 일에 관심을 둡니다. 많은 사악한 자들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며 쾌감을 느낍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누군가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고통받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가능합니다. 사탄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존재에 대한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많은 의문을 갖지요. 죽을 때까지 답을 찾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답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신학적으로 접근한다고 해도 누구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며 우리가 죽을 때까지 답은 없습니다. 사탄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지상의 삶 동안에는 설명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모세가 하느님과 대화하며 파라오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왜 회개하지 않는지에 대해 말씀하실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파라오를 그런 방법으로 택하셨다고 말씀하시지요. 그의 마음이 굳어지게 하셨던 겁니다. 놀라운 신비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왜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예언자로 택하시고, 아브라함을 아브라함이 되도록 선택하시고, 여러분이 가톨릭 신자가 되도록 택하셨습니까. 또 어떤 사람은 사제로, 수녀로, 예언자로 택하셨습니까? 우리는 설명할 수 없지요.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어떻게 어떤 사람은 지옥을 택할 수 있습니까? 지옥은 우리가 선택하는 겁니다. 우리는 지옥을 선택할 수 있고, 사랑하지 않기를 선택할 수 있고, 용서하지 않기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는 너무 상처받았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선택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성사의 가장 큰 힘은 우리 자신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옭아매는 것을 없애버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용서를 거부하고 사랑을 거부하고 동정심을 거부하려는 그것을 성사를 통해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지근해지고 어중간한 신자가 되는 것을 멈추고 교회를 통한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함으로써 참된 신자가 되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비체라는 말을 들어 왔습니다.
성바오로는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골로새 1:24)
주님께서는 이미 고난을 받으셨는데 무슨 뜻인가 하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종교개혁 그리스도인들, 개신교인들에게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하면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값을 치루셨고, 이미 고통을 다 받으셨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우리가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위해 고통을 받으셨고, 돌아가셨으므로 더 이상 우리는 고통받을 필요도, 삶의 십자가도 필요 없다고 합니다. 십자가와 갈바리산은 치우고 부활을 이야기 하며 그로부터 물질적 번영과 육체적 건강 등을 바랍니다. 오케이, 어느 정도 진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진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예수님의 신비체를 완성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영혼들 안에서 고통 받고 계시다는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하셨고, 값을 모두 치루셨고 고통을 다 받으셨다면 왜 우리가 고통을 받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필요도 없고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러나 그렇다면 주님의 신비체는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그러면 구원의 회계 역시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리는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이 지상의 삶에서 그리스도 고난의 모자란 부분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그렇습니다. 우리 각자가 하느님 성전의 살아있는 반석이며, 그로 인해 내 안에서 그분이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의 고통을 완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고통 받고 있는 그리스도의 하나하나의 세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사랑과 동정심을 가지고 받아들이고, 삶을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며, 자신의 방법으로 삶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것을 그대로 하느님께 봉헌하며 산다면 주님 신비체의 살아있는 세포가 되어 그리스도의 고통을 완성하기 시작할 것이며 그것이 우리의 작은 삶으로써, 이곳에서 하느님 나라의 성전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원한 성전의 반석으로 자신을 세워 놓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아직 그리스도 몸의 세포가 되는 중이며, 완전한 영적세상에 있는 것이 아닌 육체를 가지고 있으므로, 때로는 성전 밖으로 삐져 나오기도 하고, 흔들리고 어긋나기도 하여 완전하지는 않지만, 마지막에 우리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완전한 영적세상 안으로 들어갈 때 성전의 단단한 반석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세포를 형성 중이지만, 영원히 하느님 성전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는 (그 위에 집을 짓는) 바위이며, 세포를 형성하고 있음을 이해하도록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바위입니다. 살아있는 집을 지으려면 평생이 걸립니다. 살아있는 예수님의 피로 지어집니다. 썩어버릴 자신의 피를 주님의 순수한 피와 하나가 되게 하여, 썩지 않는 피로써 영원한 하느님의 성전의 반석, 세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고난의 모자란 부분을 완성하는 세포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살고 있는 모든 영혼과 앞으로 태어날 모든 영혼을 위한 고통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완벽한 계획을 갖고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 계획에는 정확한 숫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정확한 숫자의 영혼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구원의 회계입니다. 우리 각자가 그 구원의 회계를 공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건설의 일부입니다. 그 성전은 우리의 서약 위에 지어집니다. 그 세포, 하느님 성전의 반석이 될 것을 서약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우리가 매일 하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더욱 강하게 서약할 수록 하느님의 성전이 더욱 많이 지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매우 중요합니다. 마치 아주 큰 빌딩을 지을 때 처음에 벽돌 한장 한장 쌓기 시작할 때는 마치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이 생각되지요. 구원의 회계, 하느님 나라의 빌딩도 그렇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그것을 완성하기 위한 영혼의 숫자를 아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사탄이 점점 더 날뛰고 있다는 것이지요. 분명히 그 숫자가 채워지고 있고 그들의 시간이 끝나버린다는 것을 알고 분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 나라 성전의 참된 세포가 될 수 있는 모든 은총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이 영적세상이 복잡하고 미묘한 이유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파괴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사랑에 빠지게 하여 가치 없게 만들려 합니다. 온통 세상적인 일로 바쁘고 그것에만 정신을 팔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모든 은총을 잃어버립니다. 우리의 작은 삶으로 인해 하느님나라의 성전을 더이상 짓지 못하는 것이지요. 물질적으로 강해져서 영적으로는 아주 약하게 되는 것이지요. 오직 세상적인 일에 우선적으로 몰두하는 것이 우리를 참으로 약하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 우선 걱정하는 것이 세상적인 일입니다. 친지들을 걱정하고, 돈 걱정을 하고, 건강을 걱정하고, 날씨를 걱정하고, 아침으로 뭘 먹을까 걱정하고…ㅎㅎㅎ 그러면서 구원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삶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영혼들을 걱정하지 않고, 지옥에 가는 영혼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전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지요. 영적 삶에 대한 참된 인식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허기나 친지들에 대한 것보다 더 큰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초자연적인 것을 가르치시고자 성사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저 단순한 자연적인 인간이라면 이성을 가진 한 동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직 일시적인 삶에 대한 것만 걱정을 하는 것이지요. 가족이며, 음식이며, 날씨며…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일부이지만 가장 큰 것이 돼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더욱 깊어져서 영적으로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걱정해야 할 일은 내가 어떻게 될 것이냐에 촛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나의 미래, 이 삶의 이후를 위해 내가 지금 무엇을 짓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에 어떻게 되어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조금 노력한다면 성령께서 지금의 나의 모습이 어떤지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집중하여 하느님께 자신이 어떤지 보여달라고 청한다면 아마도 비명을 지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노~~~~ 그러나 하느님께서 현재 자신이 어떤지 보여주시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아주 놀라운 은총이 될 것입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진정으로 안다는 것, 현재의 하느님과의 관계, 자신의 내면의 삶의 실제모습, 그 내면의 삶이 진정으로 하느님과 함께 하며 영적인가? 아니면 외면이 다인 삶인가? 어떤 사람들은 외면의 삶에 너무 바빠, 내면의 삶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쉽게 우울해하고 혼란스러워합니다. 외면의 삶이 잘 되지 않으면 내면의 삶도 잘못 되기 때문이지요. 인간의 애정, 경제문제, 날씨,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따르는 것입니다. 외면적인 영향에 따르는 노예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자신을 약하게 하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 역: wisdom (번역이 늦어져서 앞부분만 먼저 올립니다. )

- 출처: 주님과 기뻐하며 http://blog.daum.net/sophiay/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