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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시기 - 마리노 레스트레포

Skyblue fiat 2017. 3. 22. 09:33

 

 

 

 

LENT

사순시기 - 마리노 레스트레포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는 통회를 하고 고백성사를 보고 우리의 신앙과 삶,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는 등의 기본적인 사순절의 가르침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은총이 주어진 우리의 영혼은 자신이 원치 않는다 해도 성령의 언어를 이해합니다. 이미 도유되어졌으므로 영혼이 진리를 들을 때마다 성령께서 그것이 진리임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로부터 달아나거나 벗어날 수 없습니다. 또한 성령의 도유를 받은 우리는 그 은총에 대해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세례 받은 것을 없앨 수 없습니다. 세례의 신비, 성령이 우리 안에 있다는 신비, 초자연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신비를 이해할 때, 책임에 대해 깨닫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 하기 위해 그 은총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기본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보다 더욱 깊어질 것을 요구하십니다. 
 
교회는 거룩합니다. 교회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이지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입니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성 바오로로부터 배워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수난의 부족한 부분을 우리 안에서 채운다는 것입니다. 즉 그 신비체의 세포인 우리 각자는 매우 중요하며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고통의 부족한 것을 채워서 구원의 회계가 완성되면 마지막 날 그 분이 다시 오실 때, 죽음이 영원히 멸망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신비에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모든 인류를 위하여 하느님의 신비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모든 인류를 위하여 서로에게 그 신비를 나누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 존재한다는 신비입니다.
 
물고기는 물 안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우리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느님의 물 속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분명히 우리는 그 물 속에 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 밖에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러나 하느님 바깥에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물고기가 ‘나는 물에서 나갈거야. 독립할거야’ 라고 말하는 것과 같지요. 물고기가 물 밖에서 살 수 없듯이 인간은 하느님 바깥에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저쪽에(다른 곳에) 계시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하느님 안에 속해 있고 하느님은 우리 안에 속해 있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입니다. 분리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에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 것을 선택하여 영원한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떠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물질과 육체가 없는 영적인 세계로 일단 들어가면 분명히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두움을 분리하신 어둠의 장소가 존재하며 그들은 그 곳에 속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지상 순례 중인 우리는 끊임없이 빛으로 회개할 수 있는 은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부터 자신의 모든 작은 생각과 행동, 일, 느낌, 욕구 등의 모든 것들을 하느님을 향해 바꾸어 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그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해 헤엄쳐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안전한 항구에 도착하는 것이지요. 매일 24시간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 노력과 싸움과 작업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이 일시적인 삶과 이 세상의 용어에 너무 오염이 되어 있어서 인내하지 못하고 몹시 서두릅니다. 당장 평화로워야 하고, 행복해야 하고, 모든 것이 당장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삶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왜 내 삶은 엉망이고, 되는 일이 없냐고, 이것도 했고, 저것도 했는데 아무것도 되는 것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살아가면서 그러한 절망감이 들기도 하지만, 영적으로 되어지면 그러한 갈등은 끝이 납니다. 아침에 눈을 뜰때도, 다르게 깨어나고 모든 일을 하느님에게로 돌려놓습니다. 나쁜 생각이 떠오르면, 하느님을 향해 좋은 생각으로 돌려 놓는 것입니다. 나쁜 느낌이 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 나쁜 일을 맞는다면, 하느님을 향해 돌려놓으려 노력합니다. 항상 노력과 싸움이 필요한 일입니다.
 
물론 항상 잘 할 수 없습니다. 여러번 사랑하려 노력 했지만 못하게 된 때도 있을 것입니다. 미워하지 않으려 했지만, 거의 미움과 같은 것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지요. 우리는 모든 행동에 승리하지는 못합니다. 모든 것에 대해 회개(마음을 바꾸는 것)하지 못하지요. 그러나 모든 것을 하느님을 향하도록, 선을 향하여, 회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노력하는 것을 보실 때, 비록 완전히 모든 것을 다 회개하지 못했더라도 하느님에게 있어서는 회개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오직 그것만을 원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선하신 우리의 하느님은 정의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몇 번이나 성공했는지 세어 보시고 그것을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노력하며 일한 것을 보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의도와 지향을 보십니다. 언제나 회개를 위해 노력한 우리의 지향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사랑하려고, 용서하려고, 선해지려고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비록 이루지 못했지만, 그것만을 원했고 그것을 위해 노력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의도와 지향입니다.
 
그러므로 사순시기는 놀라운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교회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라는 의미는 신적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전례시기는 신적인 것입니다. 물론 사순시기에 하는 것과 같은 고백성사나 단식, 용서 등을 다른 때, 언제라도 할 수 있습니다. 보속, 중재, 내적 치유 등을 위한 지향, 단식을 통한 많은 지향과 관련한 은총을 똑같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각 전례시기에는 특별한 은총이 있습니다. 사순시기에는 죄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순시기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에 주어진, 단식, 보속, 희생, 가능한 가난한 이들을 돌보려 하는 것, 평상시 보다 더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 등, 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특별한 은총이 주어집니다. 최소한 이 시기에는 자신만의 편리함이나 영광을 위해 살지 않으려고 희생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모든 것들이 특별한 은총을 가져다 줍니다. 성령께서 내적인 인식의 조명이라는 은총을 줍니다. 사순절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인식을 조명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들의 죄와 우리에게 부족했던 선한 행위 등을 깊이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받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했고, 물건을 훔쳤고, 이것 저것, … 등 고백성사를 보면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잊고 지나칩니다. 성질이 나쁜 것이라든지, 그로 인해 가끔 다른 사람들로부터 기쁨을 빼앗는다든지와 같은 것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별거 아냐. 사람들이 내가 그런 것은 다 알고 있어. 내가 화를 잘 낸다는 거…’ 그것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큰 해를 끼치는지 알지 못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지요. 작은 예입니다만, 성령께서 사순시기를 위해 특별한 은총을 주신다는 점에 있어서 성령께서 자신이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주 큰 것이었음을 깨닫게 합니다. 마귀가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 두고 있어서 자신은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가끔 교회안에서 활동도 많이 하고 열심하지만,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색하고, 동정심도 없고, 좋은 표양을 보이지 않고, 가족에게도 모질게 굴기까지 하는, 그런 사람을 보고  교회에는 열심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지요. 그 사람은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이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해, 내가 성당에 있는 것을 항상 핍박해. 내가 항상 기도한다고 핍박해. 왜 그런지 몰라’ 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문제를 깨닫지 못합니다. 사순시기의 은총은 바로 그런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좋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요. 자신이 거룩하지 않다는 것, 변화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기 위해 아주 많은 것들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신경쓰지 않는 것들이 자신의 마음을 파괴하고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큰 것이라는 것을 알도록 깨어나는 것입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그것이 엄청난 연옥을 초래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순시기는 그 작아 보이는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은총을 줍니다.
 
우리는 자주 무언가 해야 한다는 충동을 느끼곤 합니다. 기도해야 하고, 누군가에게 꼭  전화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나중에 중요한 것이 될 무언가를 써야 하고, … 분명히 꼭 해야 하는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행동이 우리를 상하게 합니다. 그것을 하도록 충동을 느꼈을 때 해야만 하는 일들인 것이죠. 그러한 생각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십니까? 좋은 생각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들은 거룩한 수호천사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성인들, 성모님,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하는 모든 (천상) 가족들이 우리에게 생각들을 불러 넣어주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속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거룩한 사랑과 선함의 부르심에 아주 행동이 느립니다.
 
수호천사의 손짓은 아주 부드럽습니다. 그의 날개짓은 매우 부드럽고 천천히 터치합니다. (속삭이듯) ‘용서해… 인내해라… 걱정하지마… 참아야 해… 지금 반응하지마… 침묵해…’ 매우 아름답고 부드러우며 자애로워서 결코 강요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순종하기에 너무 쉽고, 부드럽고 자애롭기 때문입니다. 순종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내 머리라도 때려야 한다는 것이죠. 그것을 하지 않아서 잘못되면 그 때가 되어서야 행동하려고 합니다. 사순시기의 은총이 무엇인가? 성령의 부드러운 음성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받는 것입니다. 아주 큰 은총이지요.
 
자신이 기분이 아주 안 좋을 때, 아이가 웃으며 다가 와서 안아달라고 하고, 놀아 달라고 하면 선택할 수 있는 두가지 행동이 있습니다. 하나는 “(울음섞인 목소리) 지금 바쁘니까 너 혼자 가서 아무거나 하면서 놀아!” 아이는 울면서 가버립니다. 또다른 하나는 무슨 일을 겪더라도 미소 지으며 아이를 안아 주고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자신을 이기고,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고, 참담하게 앉아서 울고 불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을 극복하고 사랑을 향해 가는 것이지요. 아이가 요구하는 것을 부드럽게 받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확하게 삶입니다. 삶은 아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삶에 대해 자애로워야 하고, 삶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참담함에서 벗어나 행동하고 일하고 안아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돌보아 달라고 청하는 것이 삶입니다. 깨어나서 일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많은 것들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 변화는 작은 것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이 영적 세계에서는 아주 큰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해서 화해를 청해야 하거나, 무언가를 나누어야 하는 것들을, 자존심과 같은 이유로 하지 않는다면 그 작은 일들이 나중에 여러분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만심과 같은 것으로 인해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기회를 주셨지만 자신이 그것을 받아 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 삶의 마지막에 그에 대한 큰 댓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영혼이 육체를 떠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지요. 더이상 고칠 방법이 없습니다. 만일 지금 이순간 연옥 영혼이 여러분에게 말을 할 수 있다면, 우선 “제발, 제발, 삶의 매 순간을 이용해서 자신을 고쳐서 모든 작은 것들 까지도 하느님 안으로 되돌리라” 고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 되돌린다는 것은 자신으로부터 되돌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많은 것들이 자신을 몹씨 불편하게 합니다. 우리의 생각, 원함, 행동과는 정 반대이므로 그렇게 하지 않는려는 것이지요. 성령은 거의 백프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는 반대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거의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몇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항상 반대이지요.
 
땅에서 태어난 우리는 근본적으로 자신에게 속해 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그토록 신비한 지상의 삶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살면서 여러가지 일을 맞습니다. 어떤 것은 트라우마틱하기도 하고 어떤 것을 좋은 것도 있습니다. 그로써 자신의 성격이나 개성, 심리 등이  만들어졌고, 거기에서 행동이 나옵니다. 삶에 대한 모든 행동과 태도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요. 마음으로 느끼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들이 우리 안에 있는 체험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대화를 할 때 자신 안에 있는 많은 체험들로 소통하지만, 그 체험은 서로 다르고, 차이가 커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면 서로에 대해 이해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서로를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아기가 아빠와 소통할 때 아기는 아빠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빠가 아기에게 ‘오늘 할머니 댁에 갈거야. 할머니가 이것 저것 해주실 거야….” 아기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자신을 바라보고 이야기해 주는 아빠를 보고 웃습니다. 말보다 아빠가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아빠가 계속 이야기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저 아빠가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 일어나는 일도 그렇습니다. 조건이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면 하느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을 말씀하시며 이것을(성서를 들면서) 보라고 하십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오, 이게 다 무슨 뜻이야? 라고 합니다...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니 그런가보다 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는 아기와 같이 하느님의 손길이 떠나지 않도록 손을 붙들고 있을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을 지라도 아빠의 손을 꼭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항상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을 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신경쓰지 않고 사랑으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가끔 약한 인간으로써 인관 관계에 문제가 있기도 합니다만, 우리는 목표는 서로를 조건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후회를 가져오는 많은 잘못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지향, 의도입니다. 다시 그 이야기로 갑니다만, 큰 시험을 앞둔 아이를 가진 부모를 예를 들면요. 아이가 밤을 새워가며 시험을 위해 아주 열심히 공부했지만 결국 점수를 잘 받지 못했습니다. 아이는 실망과 좌절로 집에 돌아왔지만 공정하고 바른 부모라면 부모에게는 그 아이가 점수를 잘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왜? 그 부모는 그 아이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날 마지막에 계산되어진 것이 무엇입니까? 그 아이의 의도, 지향이었지요. 우리가 해야할 일을 최선을 다했지만 하지 못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점수를 못 받았다고 비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을 보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비이고 동정심입니다. 사랑이며 용서의 하느님께서는 ‘구원을 원하느냐? 나를 원하느냐? 나를 사랑하느냐?에 기준을 두십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해도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 언제나 너를 기다린다, 언제나 너를 용서할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그렇지 못한다 해도 하느님께서는 신실하시므로 여전히 그러하십니다.
 
우리가 사순절의 영으로 이 시기를 보낼 수 있다면 사순시기는 인식의 조명을 가져다 주는 놀라운 은총이 시기입니다. 사순절의 영은 통회입니다. 고백성사는 통회의 행위입니다.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고 묵상하는 통회는 오늘밤 자신이 죽는다면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금 어떤 상태인지, 자신이 누구이고, 오늘밤 자신이 죽는다면 영혼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두 개의 자신으로 나뉩니다. 때로는 자신이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의 사람처럼 보이지만, 자신을 위해 많은 것들을 남겨 놓고 있는 것이지요. 자질구레한 것들을 자신을 위해 보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한다고 하지만,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남겨 놓고, 하느님께 내놓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속하지 않은 몇가지를 빼고 나머지를 하느님께 속하게 하는것, 그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중적인 상태로 죽는다면, 하느님의 자비에 의해 구원은 되겠지만, 주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 오랫동안 연옥에 머물러야합니다. 자신을 위해 남겨놓은 모든 것, 하느님과 멀리 있는 그것들은 (연옥에서) 하느님에게로 다시 돌려 놓아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 그것을 시작하는게 낫겠지요. 그러므로 자신을 위해 얼마나 남겨 놓았는지 깨달아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하느님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 신자로서 하느님과 함께 한다고 하며 기도하고, 교회내에서 봉사하지만 백프로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습니다. 교회 내에서 가끔 대죄상태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주 행복하게 교회를 다닙니다.
 
거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은 본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병원 응급실에 데려가겠지요. 병원에서는 그 상처를 치료할 때까지 내보내지 않습니다. 치료를 하고나서 나가게 하겠지요. 대죄상태에 있는 사람을 교회로 데려왔을 때 어떤일이 있을 것 같습니까? 영혼의 병원, 하느님의 응급실인 교회입니다. 마찬가지이지요. 영혼은 치료되어야하고 의사는 그 영혼이 낫기 전까지는 내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제로 그 영혼을 병원에 있도록 할 수는 없지요. 그것이 하느님께서 병원에 온 영혼에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 영혼은 치유가 되어야 합니다. 대죄 상태로 교회에 다닌다면 분명히 그 영혼은 죽을만큼 피를 흘리는 아픈 영혼입니다. 빨리 치료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죄상태인 사람이 교회에서 치료할 의도를 보이지 않을 때, 변화될 의도가 보이지 않을 때, 그것이 우리의 책임임을 알아야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주 어두운 교회내에 있습니다. 어떤 성당은 아주 우아하고 멋져 보이고 깨끗해 보이지만, 신자들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부서져 있습니다. 세상적이고 대죄상태에 살고 있음에도 아무도 그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 그저 기도나 해줘. 상관하지마, 아이쿠 난 건들고 싶지 않아. 나를 죽이려고 들거야. 누구 누구도 시도했는데 아주 나쁜일을 당했어…. 그러니 내버려둬. 아무말도 하지마.” …그러다 그 사람은 대죄 상태로 죽게 됩니다. 하느님 대전에 나아갔을 때 그게 누구 책임이겠습니까? 성서에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대죄 상태에 있을때,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 죄를 자신이 쓰리라는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누군가가 대죄 중이라면 마음 안에 가능한 많은 사랑과 동정심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말해 주어야합니다. “미안해. 너에게는 선택할 자유가 있어. 너의 삶에서 네가 원하는 것을 할 자유가 있어. 그런데 너는 대죄 중에 있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 너를 오랫동안 보아 왔는데, 여전히 변화되려는 의도없이 계속 성당에 나오는 것 같다. 나는 너를 염려한다. 오늘 밤 죽음을 맞는다면 어떻게 되겠어.” …어쩌면 그 사람은 화를 낼지도 모르고 다시는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구요.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느님 앞에서, 천사들 앞에서 그에게 증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하느님께서 뭐라고 하실까요. 예수님을 증언했다고 할 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제가 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고 가톨릭 신자인 우리 모두는 항상 서로의 믿음을 강하게 해 주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동정심을 가지고 해야합니다. 그러나  보고도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주 위험한 큰 죄입니다. 즉 그들의 죄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큰 죄들에 무관심합니다. 낙태며 동성결혼 등… 도덕성과 교회, 하느님을 거스르는 아주 끔찍한 죄임에도 가톨릭 신자가 신앙과의 반대표를 던지기도 합니다. 그런 신자는 간단하게 하느님에게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하느님 대전에 나아가서 “저는 항상 교회 일을 했습니다. 이런 저런 자선을 했습니다….”라고 한다면 “악을 일삼는 자들아, 나는 너희를 모른다.” 라고 하실 것입니다. 교회에서 얼마나 일을 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자신에게 하느님이 있는지가 계산되어질 것 입니다. 하느님이 있는 만큼 진리를 증언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의 증인입니다. 하느님의 법의 증인들입니다. 용서, 동정을 가진 증인들로서 목소리를 내어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 진리를 증언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명하게,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가끔 가족들이 모두 냉담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족중에 미사참례를 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 뿐이고 다른 가족들은 그런 자신을 비웃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믿음을 가지고 계속 그렇게 한다면 결국 마지막에 다른 가족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진심으로 믿고 항구하게 한다면 언젠가 그들 모두 그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수 없습니다만, 저의 어머니는 평생 저를 위해 기도하셨고, 저의 회개를 보시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죽음의 침상에서도 제 손을 잡으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계속 살면 지옥에 간다’ 라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완전히 세속적인 사람이었던 저에게 죽어가면서도 계속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저는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의 기도가 들어진 것이지요. 그러므로 언제, 어떻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조건없이 계속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이것이 맞는 것이고 들어 주실거라는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입니다. 살아서 그것을 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구원입니다. 구원은 영원한 상태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위해 평생 기도한다는 것은 아주 좋은 것입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들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 사람의 마지막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도와 주는 영혼은 결코 버려지지 않습니다. 계속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면 하느님의 자비는 아주 크십니다. 죽음의 순간에 그 모든 기도가 살아서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수백만의 영혼들이 기도로 인해 구원이 됩니다. 특히 어머니의 기도가 그렇습니다. 하느님으로 부터 멀어진 자녀를 위해 평생을 기도하는 어머니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버리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 어머니의 믿음으로 인해 하느님께서 그 자녀들이 구하실  것임을 믿으십시오. 그 자녀가 큰 정화를 거쳐야 할것이라는 것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그러나 구원에 있어서 그들은 구원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중재 기도를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영혼의 구원을 위해 인내하며 기도하고 하느님을 신뢰해야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내가 아니라 오직 주님이라는 것을 알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마음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 특히 개신교에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만 하면 구원된다고 설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만으로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성 바오로가 와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올림픽에 나가서 왕관을 쓰고 싶다면 그것을 준비하는 것이 좋을 거야. 경주에서 이기려면 준비를 해야 해.” 일시적인 왕관이 아니라 영원한 왕관입니다. 우리는 경주에 이기도록 준비해야합니다. 일시적인 왕관을 위해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하는지 아시지요. 우리는 영원한 구원을 위해 그보다 더한 훈련을 해야합니다. 매일 아주 강한 훈련을 하며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로 돌려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삶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제가 항상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살면서 가장 중요한 묵상은 ‘오늘 내가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죽게 된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만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지근하게 무언가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아직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충분히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속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로 인해 자신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에 중요한 것은 진실입니다. 자신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마주 대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오늘밤 죽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역: wisdom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 출처: http://blog.daum.net/sophiay/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