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히브리서 3:1
십자가를 진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여러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학이나 교리, 교회의 가르침 등의 기초 위에 우리 각자의 믿음을 세워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과 함께 아버지의 집을 향하여 순례의 삶을 살면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삶을 주관하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려야 한다는 믿음의 길,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여정이 아니지만 자신을 내려놓을 때, 바로 큰 십자가를 지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함으로 갈수 있는 법칙중의 하나가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아마 그것이 무슨 의미이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그것은 때로 죽음과 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내려놓고 죽는다는 것은 일종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대한 죽음입니까? 이 삶에 집착하게 하는 것들로 인해 일시적인 삶이 자신의 유일한 삶처럼 여기므로, 희망이 없이 죽음의 운명을 살고 있는 것에 대한 죽음입니다. 그러한 삶에서는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희망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이 없이 살고 있는 것이지요. 세례를 통해 초자연적인 도유를 받고 성사생활을 하고, 여러가지 신심을 통해 종교적 활동에 몰두하는 종교적인 사람임에도, 오직 이 일시적인 삶에만 촛점을 맞춤으로써 성령이 활동하지 못하고, 마음 안에 하느님이 머물지 못하는 그저 단순한 죽음의 운명으로서의 좋은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자신과, 자신의 생각, 자신의 미래의 계획, 자신의 사고와 느낌, 자신의 삶의 방식 등에 너무 집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실수할 수 있는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과거에 대한 온갖 죄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자신’만을 쌓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십자가가 결혼생활이라고도 하고, 자식이라고도 하고, 경제적인 것..등등이라고 말하며 십자가를 여러가지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신비에 대해 정말 깊이 생각해보면 그것들이 십자가와 무관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겪는 모든 고통은 우리의 원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죽을 운명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죽음에 대한 상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상처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긴 사람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그분만이 무덤에서 나오셨지요. 나자로와 같이 예수님께서 허락하셨던 사람외에는 그 누구도 무덤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 첫번째 상처를 가지고 죽을 것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를 물려받아 지고 가는 것이 지요. 성바오로는 한사람으로 인해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아담에 의해서지요. 그리고 둘째 아담을 통해 생명이 세상에 왔습니다. 천국에서 내려온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바오로가 말한 이 놀라운 믿음이 제시하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구원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을 맞도록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세상에 죽음을 불러들였고 우리는 그것을 물려받았다는 것이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고 시작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일부 현대 신학자들은 아담이 실존인물이 아닌 어떤 신학의 개념으로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가 단지 개념이었다면, 모든 신학은 단지 개념이나 철학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탄이 얼마나 약삭빠르고, 영리한지 알 수 있지요. 사탄은 우리의 그리스도 사상을 흐려놓기 위해 신학에도 스며들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성 바오로가 말했듯이, 아담은 실존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실존했던 것과 같이 단지 환영이나 만들어낸 개념이 아닙니다. 맨 처음 하느님께서 두 사람을 창조하셨고 그들은 은총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맞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은총으로서의 삶의 신비 안에서 죽음을 이기는 방법을 보여 주기 위하여 하느님 자신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단순히 우리가 이 일시적인 삶에서 영원한 삶에로 들어가기 위하여 치루어야할 댓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어떤 상황에서도, 용기를 내어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는 진정한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지고 가야 할 가장 무거운 것은 순종입니다. 여러분이 아주 어렸을 적에 가장 극복하기 힘들었고 배워야 했던 것이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때로 초콜릿 상자 안에 있는 초콜릿을 모두 다 먹고 싶은데 엄마가 와서 ‘안돼! 한개만 먹어!” 라고 할 때 아주 고통스러웠지요. 순종하기가 매우 힘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엄마가 다른 쪽으로 갈 때마다 초콜릿 상자를 바라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순종이 우리의 삶의 매우 큰 도전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린시절에 시작한 그것이 성장하면서도 계속됩니다. 계속 초콜릿 상자를 바라봅니다. 초콜릿 상자가 자동차가 되고, 집이 되고, 미래의 어떤 계획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보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 초콜릿 박스를 뒤돌아 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 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의 십자가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 이라고 아주 편리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십자가와 거리가 멉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사고로서는 좀더 깊고, 복잡한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믿음에 충실하기 위한 고통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조용히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즉,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 해도 불평하거나 징징대지 않고, 예수님께 의탁하며 이 고통의 마지막에, 이 죽음의 마지막에 영원한 삶이라는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희망이 있고, 믿음을 지키며, 기쁨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며, 아주 힘든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대하여 이러한 매우 중요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에게 진지하게 자문해 보십시오. 내가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는가? 즉, 내가 진정으로 그분을 따르고 있는가? 부자청년에 대한 성서귀절을 기억하실 겁니다. 부자청년은 계명을 지키는 아주 좋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지막 해야 할 것을 요청하셨을 때, 즉 거룩해지고, 완전함으로 나아가기 위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할 때, 그는 할 수 없었으므로 슬퍼하며 돌아갔지요. 왜 슬퍼했나요? 그는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따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를 내려놓을 수 없었지요. 그렇다면 그 부가 십자가였을까요? 아니죠. 십자가가 아니지요. 그것은 그가 치루어야 할 그 무엇일 뿐이었습니다. 그의 십자가는 그가 예수님께 순종할 수 없었던 그것이었습니다. 그 순종이 너무 무거웠으므로 그는 슬퍼하며 돌아갔지요. 그에게는 십자가가 너무 무거웠던 것입니다.
오늘 이 성전에 있는 우리들 각자는 자신이 항상 하느님께 순종하지 못했음을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항상 인식을 하고 있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 했다면 하느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매우 고통스러웠음을 알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공경하지 않으려 할 때, 유혹과 싸우지 않을 때,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바램 등에 대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을 때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들의 인간적인 면이 자주 우리를 끌어당긴다는 것이 우리 모두의 증언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인간적인 면이 사악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의 육체는 비록 죽음의 운명을 가지고 있고 불완전 하지만 가장 놀라운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이 육체가 우리의 영혼을 영원한 삶으로 데려다 주기 때문입니다. 상상할 수도 없었던 놀라운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한 십자가의 여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불순종, 즉 하느님께 순종하는 십자가를 지지 못한 우리의 최초의 조상은 커다란 실수를 하여 원죄를 짓게 되었고 우리는 모두 그 댓가를 치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것을 만회할 기회를 주셨고, 은총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방법은 순종을 통한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불순종으로 죽을 운명이 된 우리를 오직 순종만이 죽지 않을 운명으로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지상의 삶을 순종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바리산 위를 지고가신 십자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류의 죄의 무게와 동시에 순종의 무게를 진 것입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하신 대화를 기억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이 잔을 마시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십시오.” 라고 하셨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 자신의 인성을 보이셨습니다. 사람과 똑같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완벽하게 사람이었습니다. 즉 불완전했습니다. 그러기에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하지 않았습니까? 그분은 하느님이셨지만, 사탄은 그분이 완벽하게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그분이 사막에서의 사십일 후에 약해지고, 배고프고 목마르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탄은 그분의 신성이 아니라 인성을 공격한 것입니다. 그만큼 사탄은 영악합니다. 사탄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에 완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정말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사탄은 그분의 약함을 시험하려 했지만, 그분은 사탄을 이기셨고 우리에게 어떻게 유혹을 이길 수 있는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까지 십자가와 관련되었던 때에 자신을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하느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자신의 삶에서, 유일한 최종 목표라고 생각했었습니까?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해 본적이 없다면 아직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순종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아니라면 하느님이 아닌 많은 것들, 우상에 순종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순종이란 하느님의 계명, 예수님, 복음,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순종을 말하며, 그러한 순종을 우리의 삶에서 확실히 해야합니다. 왜 십자가냐구요? 우리는 이 삶, 이 여정, 이 순례의 마지막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순종이라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삶이라는 갈바리산을 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는 참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것 이상으로 좋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는 가장 놀라운 선물이기 때문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교회안에서 순종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럼에도 여전히 미소짓고 희망에 차 있으며 남들은 그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거의 눈치채지 못합니다. 그의 마음 안에서는 큰 퍼레이드가 벌어지고 있지만 어떤 트럼펫 소리도, 행진도 들리지 않고 거의 침묵하며 희망과 미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안에서 마음안의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아름답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고통을 이용해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힘을 만들어 냅니다. 성령의 힘을 발산합니다. 갈바리산에서의 성모님을 상상해보십시오. 가장 아름답고, 힘이 있으며 가장 놀라운 사람의 모습입니다. 매우 매우 깊은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온전히 그 곳의 사람들과 함께 하였다는 것을 장담합니다. 아마도 분명히 우셨겠지요. 그러나 분명히 매우 놀라운 존엄성을 가지고 걸어갔다고 확신합니다. 성모님은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도록 망연자실, 좌절하지 않으셨습니다. 히스테릭한 인간이 아닌 모습으로 그곳에 계셨습니다. 고통을 안고 그곳을 걸었습니다. 주변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거룩한 여인들과, 젊은이 요한과 함께 하셨지요. 적들의 퍼레이드 가운데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놀라운 존엄성을 가지고 자신의 고통을 이용해 가장 큰 힘을 만들어 내는 도구가 되도록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에서 가져야 할 힘입니다.
여러가지 종파의 현대 그리스도교 가운데, 혹은 슬프게도 가끔 가톨릭 사제조차도, 고통을 피하려고만 하며 고통을 저주라고 생각하기 조차 하지요. 큰 고통을 겪기라도 하면, ‘오.. 구마가 필요해요.’라고 하며 고통이 너무 많으면 마귀가 들린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하지 않습니다. 오직 부활만을 말합니다. 마지막 만찬에서 부활로 튀어가지요. 갈바리산에서 개신교는 볼 수 없을 겁니다. 개신교인들에 대해 감정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신학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이 아닌 그리스도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모든 것은 영과 관련된 것입니다. 신학에도 악령들이 일합니다. 오 악령들이 신학안에서 아주 바쁩니다. 그들은 모든 진리를 왜곡하려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통과 역경은 우리의 가장 큰 힘의 근원이 됩니다. 성모님의 예가 그것이지요. 그 놀라운 갈바리산의 드라마에 자신이 있는 것을 상상해보십시오. 그리고 아들의 옆에서 걸어가고 있는 성모님을 상상해보십시오. 성모님은 자신안에 있는 고통을 주변사람에게 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다른이들이 가지고 있는 고통을 함께 하려 했습니다. 예를 들어 장례식에 믿음 깊은 여성이 남편이 죽게 되어 장례식장에 있는 관옆에 서있다고 합시다. 자식들과 가족들이 울고 있습니다. 이 여성은 이 세상을 떠난 남편 옆에서 슬픔을 가지고 서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에 신앙의 기쁨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의탁하며 이제 하느님이 자신의 남편이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혼자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내면이 강해져서 자신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을 증거합니다.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반대로 남편을 데려갔다고 하느님께 화가 나고, 이제 혼자인데… 어떻게 살아 가느냐고….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침묵, 아름다운 침묵을 말합니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존엄성을 가지고 두발로 굳게 서서,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니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져야할 십자가가 그것입니다. 고통은 가장 놀라운 힘을 주는 무기입니다. 여러분이 고통을 치유모드로 놓을 때, 고통을 많이 받으면 받을 수록 성령께서 여러분을 통해 더욱 활동하신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삶의 굴곡을 통해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굴곡을 지나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는 세상에는 많은 해결책이 나와 있지요. 현대심리학이며 여기저기서 상담자가 나오구요.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소리를 합니다. 그들이 내 놓는 해결책은 모두 다른 사람은 잊어버리고, 자신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말하는 것입니다. 희생하라거나, 용서하라거나, 잊어버리라거나 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함께 가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십자가를 지고 침묵하여 그것이 힘이 되도록 하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세상이 말하는 것과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만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정확하게 고통을 은총안에서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불평하셨던가요?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안좋은 일에 대해 하루종일 치를 떨며 불평하는 것이 전부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안좋은 일에 대해 불평하며 몇시간씩 소비합니다. 친구와 자신의 고통이나 벗어나려는 노력에 대해 함께 나누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그것과 울고불고 불평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자신이 스스로 대단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시간을 계산해 보면요. 아마 자신도 놀랄것입니다. 기도할 때나, 하느님께 무언가 청할 때나, 미사를 참여할 때나, 종교행위를 할 때만 그리스도인이고 그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삶,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삶에서 온갖 실수를 하고 불순종하며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얼마만큼이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자신이 정말 십자가를 지고 가는가를 이해하려면 자신이 매일 24시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지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반쪽 그리스도인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어중간하고 미지근한 것을 싫어하십니다. 왜냐구요. 그것은 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순종의 십자가를 반만 지고 갈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돈을 관리할 회계인이라든지, 누군가를 고용한다고 할 때, 그가 정직한 편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으로 여러분의 돈을 관리할 사람으로 충분하겠습니까? 아니지요. 여러분은 백프로 정직한 사람이 필요하겠지요. 그렇다면 믿음은 어떨까요? 우리는 믿음의 회계인입니다. 우리가 한일,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 모두 기록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각기 다른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각기 다른 달라트로서 서로 다른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회계를 잘 하여 마지막에 하느님에 대전에 서야 할 것입니다. “네 주님, 저에게 달란트를 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것으로 무엇을 했느냐?” “네…무언가 좀 하긴 한것 같은데... 저는… 전 그저 인간일 뿐인걸요…” 그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그것으로 주님의 대전에서 충분치 않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고 있지요. 단순한 인간의 용어로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백프로 정직하지 않은 사람을 신뢰할 수 없지요.
정직함이 어떤건지 아십니까? 때로 우리는 정직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을 정직하게 할 수 있을까요? 고백성사를 봄으로써 할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의 마음을 열고 ‘나는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지요. 그렇게 고백함으로써 정직하게 될 수 있습니다. 주변사람들이나 자신으로부터 완벽함을 기대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대전으로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자비의 대전으로 가져와 자신이 잘못한 것, 거짓말을 했고, 물건을 훔쳤고,… 등등 수많은 나쁜 행위를 한것에 대해 고백하며 순종과 정직성이 결여됐음을 깨닫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불완전함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에게 그토록 놀라운 고백성사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불완전한 것을 아시며, 그곳에 용서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의식해야 합니다. 용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용서해 주실 것을 알고 있으니 계속 죄를 지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24시간 끊임없이, 유혹과 싸우고, 우리의 약함과 싸우라는 것이며 그러다 우리의 약함으로 인해 넘어질 때는 일어나서 고백소로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환영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진심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극복하지 못하는 것들을 고백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영적 면역성이 약해져서 사탄의 힘이 더 세집니다. 가끔 기도하기를 멈추고 영적인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을 멈출 때, 지나치게 세상적으로 되어지고 세상적인 것을 우선으로 하는 그 때가 사탄의 손에 넘어간 때입니다. 기도의 부족, 성사생활의 부족, 하느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오직 자신에 대한 사랑만을 가질 때 자신이 약해져서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 시작하고 오직, 나,나,나 밖에 모르고 자신이 아주 커져버립니다. 그것이 자신을 죽이고, 은총을 죽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를 알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동시에 우리의 마음을 참된 회개와 통회안에 놓고 우리가 잘못한 것이 무언지를 깨달았을 때,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저절로 되는 것으로 놔두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많은 악습을 고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것을 일종의 자랑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오 그건 집안 내력이야. 우리 할아버지 때도 그랬어… 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잘못이나 약점에 대해 수없이 합리화를 시킵니다. 그러나 합리화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거룩함과 완전함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들도 완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분은 좋은 스승이고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원할 때 은총이 옵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나아갈 때 은총이 옵니다. 친구 사이나, 부부가 함께 할 때도 서로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지요. 불가능합니다. 서로에게 진심과 정직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만일 (불완전한)제가 여러분에게 저의 잘못을 고백할 용기가 있다면 상황이 달라지지요. 제가 잘못한 것이 다 없어지지는 않지만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합니다. 달라질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새롭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잘못을 할 때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증오합니다. 하느님의 사람들로부터 용서와 희망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나가서 자신이 신앙고백하는 믿음을 증거하며 살지 못합니다. 많은 부모들이 그러한 모습이므로 자녀들이 완전히 교회라면 질색을 합니다. 이 사람들이 보여주는 하느님이 그런 것이라면 나는 하느님을 알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요. 많은 부모들이 자식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다고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의 증거하는 신앙이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진심으로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면 그것은 가장 큰 힘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겸손의 힘, 동정, 용서의 힘이며 사랑의 은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성령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모든 덕이 흘러 넘쳐 이웃을 향해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약하여 덕이 흘러 넘치지 않는다면, 신실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에게 아주 긍정적이고 착하고 도움을 주는 좋은 친구가 있는데, 어느날, “내가 아주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으니 나에게 기대하지 말아, 내가 미소짓지 않고, 명랑하지 않다고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아. 너와 상관 없는 일이야. 그저 나를 위해 기도해 줘. 내가 지금 매우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기 때문이야” 그것이 아름다운 인간적인 것 아닙니까? 우리는 하루종일 명랑하게 뛰어다니기만 할 수 없지요. 때로 우리는 아주 힘든 때를 지날 때가 있지요. 그러나 침대에서 일어나 나오세요! 우리는 얼마나 몸이 아픈 것도 아닌데, 너무 마음이 힘들다고 침대에서 나와 밖을 걸어다닐 수 조차 없을 때가 많았습니까? 우리 모두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십자가가 되고 그것이 꼭 순종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십자가입니다. 침대에 누워있게 하는 자신만을 위한 십자가입니다. 자신의 실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를 축복해주시길 원하십니다. 이유가 있어서 우리를 이곳에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성령에 의해 불타 올라야 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특별한 메시지를 여러분의 마음을 통해 주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겸손한 마음으로 충분히 마음을 열 때 성령께서 지금 바로 한순간에 여러분에게 경이로운 일을 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성령께 마음을 열고 불타오르게 하십시오. 성령의 불이 마음 안으로 들어가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겸손과 경외심을 주실것이며 무릎꿇는 방법과 어떻게 용서를 청하고,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지, 어떻게 동정심을 가질 수 있는지, 오늘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 알려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당에 함께 있는 사랑들을 인식하는데 얼마나 어려움을 겪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피정에 참여하고도, 때로 일주일을 함께 하고도, 이 성당에서 나갈 때는 그곳에 누가 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친한 사람이나 함께 온 사람이나, 강연자는 기억할지 몰라도 그저 혼자 왔다가 혼자 갑니다. 하느님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 자신, 자신에 관한 것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커져있는 자신을 위해 무언가 찾으려 한 것뿐입니다. 우리는 이곳에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하느님과 모두 하나가 되기 위해 왔습니다. 어떻게? 겸손하고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해 염려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받는 가장 큰 선물일 것입니다. 오늘 이곳에 은총을 받고 싶다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느끼십시오. 여러분 마음 안에 가져오십시오. 이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중요함을 확실이 하십시오. 모든 사람을 느끼고, 주님께 “주님,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염려합니다. “ 라고 말씀드리십시오. 우리들의 신부님부터 시작해서요. 우리는 사제들을 정말 많이 도와야 합니다. 만일 사제가 없다면, 오늘 우리는 이 성전에 모이지도 못했습니다. 고백성사도, 영성체도, 어떤 성사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사제들을 위해 아주 많이 기도해야 하고, 그들이 겪고 있는 영적전쟁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가족의 일부로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의 일부로서의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안에 계시며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서로를 사랑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참된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깨에 십자가를 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아주 매너 좋고, 세련되었으며, 매우 안정된 그리스도인들을 보지만, 그들 어깨에 상처가 없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져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삶의 마지막에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오직 이 일시적인 삶의 왕국에만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잃지 않는다면, 결코 참된 영원한 삶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렇다고 우리 모두 동굴에 들어가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의미는 자신을 주님의 사명을 다하는 자로 변화시키라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있던지, 이 한계를 가진 삶에 주어진 것을 이용해 정직한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은 커피샵에 갔을 때 미소지으며, 겸손하게 열심히 서빙하는 사람을 보면 아름답지 않습니까? 혹은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겸손하게 조건없이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보면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러한 것들이 소중한 것이고 그들이 바로 하느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은 아주 끔찍하지요. 자신의 직업을 존중하지 않고,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는 주변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무엇도 존중하지 않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그러한 사람들을 하느님께서는 싫어하십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이 세상에 모든 슬픔과 비극을 가져오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가져다 주지 않지 않으며 삶의 은총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인것입니다.
오늘, 주님께 용서를 청할 뿐만 아니라 용서 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때로 거리에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도 용서가 필요합니다. 길에서 지나가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조차도 괜히 미워하는 경험을 한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용서할 수 있어야 하고 항상 모든 사람을 용서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거기에 자기 자신도 포함됩니다. 몇번이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나요? 사람들이 실수를 하고 왜 화를 내는지 아십니까? 자기 내면에서 자신이 완벽할 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겸손이 부족한 것이지요. 그래서 화가 난 것입니다. 그리고 실수를 한 자신에게 화가 나는 것이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실수한 것에 너무 화가나” 라고 말하지요.” 그것이 자신을 좋게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입니다. 어쩌면 이세상의 관점에서도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참된 지혜는 고개 숙이고, 무릎꿇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죄인이며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지만 하느님 안에 희망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바오로는 하느님께 세번이나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가져가시도록 청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않았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네게 나의 은총은 이미 넉넉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영광은 너의 약함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고쳐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바오로가 슈퍼맨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누구에게도 동정심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약함 안에 있도록 두십니다. 그 약함이 우리를 정화하고 거룩함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매일 매일 끊임없이 다듬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우리를 정화시킵니다. 자신의 약함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항상 그것 때문에 노력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큰 힘을 주며, 훌륭한 증언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매우 성질을 잘 냅니다. 우스운 말로 휴즈가 짧다고 하지요. 그러나 그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람들은 그가 그렇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것이 표출되는 것을 참고 있으므로 내면에서는 거의 죽음이지요. 가끔 그것이 사람들을 놀라게도 하지만 거의 사람들은 모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허세나 이중적인 면으로 인해 그것을 가리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에 순종하는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나쁜 성질을 인내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현대심리학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종류의 악습을 정당화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동성애라든지, 소아성애와 그밖의 죄들이, 오늘날 유행처럼 되어버린 삶의 철학들, 그 모든 것들이 죽음의 문화가 되어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따라 살아 갑니다. 무엇에도 상관하지 않고 자신만 행복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악습임에도 무엇에도 상관없이 그대로 두어야 만족해 합니다. 그 모든 행위들이 전체 인류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아주 큰 잘못입니다. 비록 오늘날 교회내에서 조차 도덕성이 정치성향과 같은 것으로 인해 많이 타협되어져 있지만 그것은 교회의 도덕성이 아닙니다. 교회에서조차 핍박이 두렵고, 감옥이 두려워 그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복음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 믿음을 증거하길 원하십니다. 오늘의 복음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내가 주님의 천사들 앞에서 너희를 증언할 것이다.” 라고 하셨죠. 우리가 모른다고 하면, 이 삶이 끝났을 때 나도 너희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증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리를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어떠한 현대 신학이나 현대 심리학, 어떠한 논리를 복음안에 가져올 수 없습니다. 성서를 바꾸고, 그것을 접목시켜 세상적인 방법으로 바꿔서는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만이 자비롭고 용서하는 분이시며, 우리는 자비롭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한다고 하며 죄를 합리화합니다. 오 노…. 성바오로는 하느님의 천사라도 성서의 하나라도 바꾸면 불 속에 던져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정확한 말입니다. 근본주의자나, 자비나 동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모일 수 있는 기회를 주신것에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성령께서 이 성전에서 우리 가운데 움직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는 방법,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믿음은 매우 논리적이고, 모양새가 좋은 어려운 신학으로서, 어떻게 마음 안에서 적용해야 할지 모르는 그런 것이 아니라, 접근하기 아주 쉬운 것입니다. 성령은 매우 겸손한 영이며 매우 단순한 언어를 사용하십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언어가 아닙니다. 인간의 지성의 형태로부터 나온 복잡한 언어가 꼭 마음안으로 들어가는 공식이 아닙니다. 때로 그럴수는 있지만, 인간의 지성이 영적으로 승화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성령이십니다.
(역: wisdom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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