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마리노 레스트레포 강연

초자연적인 은총 - 마리노 레스트레포

Skyblue fiat 2016. 11. 1. 18:28

 

 

The Supernatural Gift

초자연적인 은총

 

 

성령의 은총인 초자연적인 은총의 삶에 대해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초자연적인 은총 자체를 깨달을 수 있는 은총이 주어졌으므로 그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반적인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큰 사명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그러한 은총을 주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책임이 뒤따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은총을 잘 사용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은총도 주셨습니다. 특히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과연 초자연적인 은총이 무엇인가? 우리는 초자연적이라는 것이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계가 움직이고 있다든지, 물리적인 무언가에 대한 육체가 반응한다는 든지 하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지만, 기도를 통해 암이 단 시간내에 치유가 된다든지 하는 것들은 볼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연 현상과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일인 것이지요. 그러한 초자연적인 은총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세례 받지 않고, 하느님의 성령을 받지 않은 일반적인 보통 사람과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대전에 나아가면 초자연적인 은총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 똑같습니다. 초자연적인 은총을 받지 않았더라도 우리 모두의 안에는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정글에 살고 있는 원주민이나 초자연적인 은총을 받은 사람이나 똑같이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그것에 대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초자연적인 은총이 더해진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 했는지에  대한 책임이 요구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뜻에 의한 사명이 주어졌으며 그로인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현존 앞에 다른 단계의 형태로 서게 될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은총이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와 같은 책임이 없습니다. 선과 악에 대한 지식 위에  초자연적인 은총이 주어진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성령으로 인해 삶이 선함을 향해 나아 가도록 할 수 있으며 자신의 삶을 증거로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의 나라에 데려다 줄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은총을 받음으로써 우리가 갖는 책임입니다.
 

그러나 일반 가톨릭 신자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초자연적인 은총에 대한 참 뜻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만일 그것을 안다면, 우리 모두가 성인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모든 곳에서 은총의 빛을 낼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난 후에 조차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교회의 반석인 성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을 받고 나서 오랫동안 그를 통해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등, 놀라운 일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야고보가 친구들과 함께 방문하였을 때, 유대인이 아닌 사람, 할례받지 않은 사람을 차별하여 성 바오로가 훈계를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갈라디아서 2:11) 모든 성령의 은총으로 가득 차 있었던, 제자 중에  가장 큰 책임을 가진 성 베드로였음에도 아주 평범한 인간의 본성으로 되돌아가 성령의 은총 위에서 행동하지 않고 그저 과거의 종교나 인간적 본성에 근거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성 베드로와 같이 사람에게도 기대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제가 묵상하기에 중요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 이유는 초자연적인 은총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주 쉽게 보통의 사람으로 되돌아 가곤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놀라운 사랑이시며 자비이시므로 우리가 허락하지 않는 한, 결코 백프로 우리를 취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마치 손님이 방문하듯, 초정을 받아 온 손님과 같이 오셔서, 결코 당신을 온전히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이 때 우리가 초자연적 은총, 하느님의 친절과, 온유, 부드러움을 인식하면 할수록, 자신 안에 더욱 깊게 그분이 오시도록 초대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드러움을 이해할 수록 더욱 완전하게 초자연적인 은총을 받아들이고 싶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성령께 기도하고, 성령의 도유를 받고, 성령으로 채워지는 큰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자신을 통해 영원히 일하실 수 있도록 충분히 자신을 열지 않습니다. 초자연적인 은총에 대한 묵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영원히 초자연적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초대를 깨닫는 것입니다. 기도나 교회의 (성사) 활동을 통해 주어지는 성령의 은총을 그 순간에만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성사 활동 안에서의 삶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결심, 즉, 고백성사, 첫영성체, 견진, 혼배성사, 사제직이나 종교적인 봉헌의 삶, 등등의 성사 등을 통한 결심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결혼할 때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어요. 좋은 남편, 좋은 아내가 될 것을 하느님께 약속했어요.” “내가 사제가 혹은 수녀가 되려 할 때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어요…”라고 말하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훨씬 더 깊은 하느님의 바다 안으로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가톨릭 교리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세가지 이유,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라고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매일 좀 더 하느님을 잘 알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좀 더 알게 되면 좀 더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되면 좀 더 잘 하느님께 순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도 서로 좀 더 잘 알게 되면, 좀 더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좀 더 용서할 수 있고, 서로에게 순종할 수 있지요. 그렇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혼을 하든, 사제를 되든, 수녀가 되든, 하느님과 약속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 행위를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초자연적이 되도록 하는 한 부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요일 미사에 나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한순간이라도 왜 자신이 가톨릭 신자가 되고, 미사에 나오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본적이 있을까요? 아마도 어떤 이유로 가톨릭 신자가 되었든, 아주 소수만이 “잠깐, 내가 왜 이 모든 것을 하고 있는 거야?”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내가 정말 이것이 초자연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가? 나의 이해와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것이 아주 크고도, 크고도, 큰 영원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죠. 
 

우리는 초자연적이라는 말들을 많이 들어왔고, 오늘날 또 한편에서는 뉴에이지 사상이 삶 전체에 퍼져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 어디를 가도 아주 많이 퍼져 있습니다. 매우 근본주의적이고 외부영향으로부터 견고하게 지켜온 이슬람교에 조차도 퍼져 있습니다. 힌두교나 그 밖의 종교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가 뉴에이지 사상에 오염이 되어 있습니다. 힌두사상이 뉴에이지의 일부이기도 합니다만, 뉴에이지는 모든 것이 혼합된 형태로서 모든 것에서 조금씩 가져다 혼합되어졌습니다. 요즘 인도에 가보면 어떤 곳에서는 패션처럼 사람들이 십자가를 하고 있습니다. 반면 또 다른 지역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합니다. 또 어떤 지역에서는 모든 종교가 혼합되어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주술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불교인, 힌두교인, 이슬람교인등이 뉴에이지로 모두 혼합되어 있습니다. 뉴에이지의 영도 일종의 초자연적인 은사입니다. 그러나 물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은사가 아니지요.

사탄은 우리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 영혼이 영양을 필요로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가짜 영양분을 공급해줍니다. 영적인 것에 굶주린 영혼이 영적인 것에 기울어져 미신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주술이나 온갖 어두움의 영성에 빠져 있는 사람을 신앙으로 데려오기가 오히려 쉬운 것을 아십니까? 완전히 물질적이고 실존적인 사람을 데려오는 것보다 쉽습니다. 물질적이고 실존적인 사람은 신앙으로 데려 오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온갖 어두움의 영성, 사탄교인을 신앙안으로 데려오기가 더 쉬운 이유는 그들은 이미 영에 열려있는 사람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빛의 영성으로 뛰어오르는 것이, 완전히 물질적인 것에 잠겨있음으로 해서, 영적인 감각을 전혀 갖지 않은 사람들, 영 이라는 개념조차 갖고 있지 않으며 그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 보다 쉬운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말씀에서도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가 나오지요. 사두가이파는 전혀 영적인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천사나  영도 믿지 않았지요. 오늘날에는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우 물질적으로 되어 있음으로써 전혀 영적 감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영성적인 삶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지요. 지금 세상은 하느님의 사람들이나 영적인 사람들 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갈수록 더 많이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영적 은사나 초자연적인 은사를 깨닫게 되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영을 식별하는 방법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큰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초자연적이라는 사실로 인해 각기 다른 단계의 영적 전쟁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부유한 집 자녀가 처음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다른 친구들이 그 아이가 돈이 많은, 힘있는 집 아이인걸 알게 됩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아빠가 돈이 많고, 그런 집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그것이 이 물질적인 사회에서 얼마나 힘이 있는 건지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는 친구들이 그 아이를 힘이 있는 아이로 취급합니다. 질투를 하고 악의를 갖거나, 이용하려 하거나 뭐 그런 것들이죠. 그러나 정작 아이는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 아이에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므로 많은 충돌을 겪게 됩니다. 그것이 영적 세상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과 매우 흡사합니다.

 

세례를 받고 가장 큰 은총들을 받은 우리의 주변에는, 모든 은총을 잃어버리고, 전혀 갖지 않은, 앞으로도 가질 수 없는 온갖 망가진 영들이 서성이며 우리를 몹시 미워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장 부유하며 가장 큰 힘을 가졌습니다. (악)영들이 우리 가운데 섞여 있습니다. 그들은 천국에서 이곳으로 떨어졌지요.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가장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그들을 볼 수 없지만, 그들은 이곳에 우리와 함께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부유한 집 자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자신에게 힘이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리고는 이곳 저곳을 공격 받지요. 박해를 받구요. 그리고 우리는 삶 안에서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방법이 없습니다. 삶에서 많은 일들이 막히고, 멈춰지고,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물려 받았는지 아는 (악) 영들의 짓이죠. 그들은 우리가 매우 부유한 집 자녀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부유함을, 힘을 갖고 싶은 그들이 우리를 몹시 미워하고 질투하며 어떤 방법이라도 써서라도 우리를 망쳐 놓으려 합니다. 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물려받은 은총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 부유한 아버지를 가진 자녀로서의 위엄을 가지고 나아 가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이시죠.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보다 더 나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거슬러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유산을 가지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왕국을 잘 관리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공급해 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것을 제자리에 놓는 방법입니다. 악령은 자기가 속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지난번 제가 하느님의 영원한 현존에 대해 말씀드렸지요. 제가 이 십자가를 들 때, 제가 하느님의 은총 지위에 있다면 악령은 이 십자가를 금속 조각으로 보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안에 있지 않는 악령이 바로 하느님이 현존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들면 악령들이 즉시 예수님의 십자가의 발 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금속 십자가 발 아래가 아니라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 발 아래입니다. 하느님의 영원한 현존안에는 예수님께서 골고타의 십자가 위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곳에 있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 십자가를 들기도 전에 제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아는 그들이 달아납니다. 그것이 영적전쟁의 한 예입니다. 만일 제가 성모님의 메달을 목에 걸었고, 제가 믿음에 충실하다면, 악령들은 메달을 보지 않고 살아있는 성모님을 봅니다. 그러나 제가 은총지위에 있지 않다면 어떤 성물도 보호의 힘을 갖지 않으므로 의미가 없습니다. 은총 지위에 있지 않는 사람에 대해 성물이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직접적인 혈연 관계나 영적 관계로서 그 사람에 대한 책임을 가진 사람이 그 힘을 전해줄 때입니다.

예를 들어 은총 지위에 있지 않은 자녀에게 부모가 메달과 같은 어떤 성물을 줄 때, 그 부모가 믿음에 충실하고 은총지위에 있음으로써 자신의 날개 아래로 그 성물을 통하여 하느님께 악으로부터 보호해달라고 기도한다면, 부모의 축복으로서 자녀들에게 많은 도움이 줄 수 있습니다. 혹은 사제와 같은 영적 아버지가, 삶에서 어떤 이유에서든 하느님께서 나아갈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 축성된 성물을 줄때,... 사실혼 관계에 있어서 끔찍한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사람이라든지, 혹은 여러 다른 형태의  죄 안에 살면서 빠져 나올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거나 하는, 하느님께로 갈 것 같지 않은 사람이라든지…그런 사람에게 사제나 수녀와 같은 영적 부모가 그들의 회개를 기도하며 메달이나 십자가 등 성물을 줄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여러 다른 영적 단계에 있어서 사탄에게 어려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한 보호를 받은 사람에 대해 사탄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 묵주나 여러 성물을 몸에 걸고 어떤 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시몬과 같지요. 그는 제자들에게 돈을 줄테니 안수해달라고 합니다. 그걸로 돈을 벌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에 관한 물건을 돈을 주고 거래할 때 교회는 시몬의 죄라고 부르지요. 이러한 것들이 초자연적인 것과 관련하여 분명히 해야 할 것들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안다면,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성사생활을 하며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충실하다면 많은 적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영적 세상 안에서 무장을 하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모든 적들이 항상 그 사람을 겨냥하게 될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 항상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한가지 드릴 수 있는 말은 십자가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말씀드렸듯이, 여러분이 골목길에 들어서기도 전에 그들은 여러분이 그곳으로 갈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것을 알고 그들은 그 골목길에서 달아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께 충실하다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유혹하는 것 뿐입니다. 그 외에는 어디를 가든 여러분을 막을 수 없습니다.

 

저의 과거의 하느님이 없는 삶과, 하느님과의 삶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제가 하느님 없이 살 때에는 오직 행운에 의존했습니다. 작곡을 하든, 대본을 쓰든, 영화를 찍든, 무슨 일에나 항상 행운에 의존했습니다. 항상 ‘이 일에 행운이 따랐으면 좋겠다’ 고 말하곤 했습니다. 오직 행운을 의존하니 주술의 영역으로 간 것이겠지요. 미래를 궁금해 하며 카드점이며, 점술 등을 찾았습니다. 행운과 절대 자신이 콘트롤 할 수 없는 어떤 것에만 의존하는 것은 매우 두려움의 상태입니다. 전혀 알 수 없는 곳을 큰 모험을 하는 것과 같지요. 그러나 지금 주님과 함께 하는 삶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보기에 잘 되지 않았을지라도 제대로 된 것입니다. 때로는 어떤 길을 가려하며 매우 들떠 있었지만, 결국 그 길로 가지 않고 다른 길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완벽한 길입니다. 이쪽 길이든 저쪽 길이든 이제는 상관 없습니다. 더 이상, 돈이나 사업, 나의 바램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므로 저쪽 길로 가려했지만, 결국 이쪽 길에 있다 해도 그것이 제대로 된 일인 것입니다. 열매가 있다면, 이쪽이든, 저쪽이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두 길은 완전히 틀린 삶이지만, 자신이 걸어 온 길이 틀림없는 자신의 삶입니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일련의 주어진 환경 안에서 경제와 같은 것들을 따라 활동하며 생존이나 책임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간다 하여도 하느님 안에서 살고 믿음에 충실하며 하느님 뜻 안에 있다면, 무슨 일을 하든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의 개념과 꼭 같지는 않지만, 무슨 일을 하든 하느님과 함께 하며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그 안에서도 하느님께서 삶의 모든 것들이 멈춰진 것처럼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직업을 잃는다거나 돈이 바닥이 나고 많은 것들이 위기에 처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많은 평화를 가져옵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맞으면 화가 나고 단지 직업을 잃고 자살을 하기도 하고 우울증에 걸려 여러가지 치료에 의존합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하느님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아무것도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물론 경제 생활에 지장을 주고 많은 일에 영향을 미쳐 많은 것이 부족하지요. 그러나 그 순간이 바로 삶의 바다를 항해 중에 만나는 희생, 보속, 고행, 고난의 한 부분입니다. 삶의 항해 중에는 좋은 날씨도 만나고 궂은 날씨도 만납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그림 안에서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이 영적 전쟁 중이라는 초자연적인 삶을 인식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매일 묵주기도를 하라고 권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오직 오늘만 있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신비이죠. 우리는 오늘이라고 표현합니다. 성바오로가 그에 대해 말한 것을 알고 있으세요? 오늘이라고 불리우는 날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있을 것이고 내가 돌아 올 것이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승천부터 재림까지의 시간을 한 세대로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말하는 수많은 세대의 시간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얼마나 많은 세대가 지나갔습니까? 또 재림하시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세대가 지나겠습니까? 그러나 그분에게 그것은 한 세대입니다. 그러니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매일 묵주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오늘 드리는 묵주기도는 오직 그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왜냐구요? 우리의 현실 안에는 오직 현재의 시간, 오늘 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외의 시간은 현재 이곳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무슨 의미냐구요?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현재 이 곳에 있지 않지요. 과거도 이곳에 있지 않고, 미래도 이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실은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 하루 종일도 아니고,  바로 이 순간, 현재만이 우리에게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은총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현재 뿐입니다.

 

은총은 항상 우리에게 부어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은총이 거의 부어지지 않는 이유는 자신을 거의 현재 이 시간에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 순간에 있지 않습니다. 제 첫영성체 때에 사진을 볼 때마다 제가 그 곳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가슴을 칩니다. 오직 관에 눕게 될 제 몸만 그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제가 그곳에 있었던 것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실제로는 제가 그 곳에 있지 않고 무언가 다른 것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시간에 우리는 실제로 그곳에 있지 않습니다. 때로 미사를 참례하고 나서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합니다. 제 1독서가 무엇이었느냐고 물으면 기억해 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복음 말씀 조차도 기억하지 못하죠. 자신은 미사에 참례했지만, 사실은 그곳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어디나 마찬가지 입니다. 한시간 동안 지금 이 강연을 들어도 집에 돌아가 오분동안의 것도 기억해 보려면 아주 힘들겁니다. 많은 시간에 자신은 이곳에 왔다 떠났다 한것이지요. 왜냐구요? 우리는 백일몽을 꾸는 삶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쉽게 자신은 그 자리를 떠납니다.

 

이유는 영적전쟁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초자연적인 사람이라는, 초자연적인 삶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요. 초자연적으로 행동하고 있지 못하고 그저 자연적인 자신인 것이지요. 그래서 목표를 자꾸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집을 겨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걱정과 불안, 우울, 어두움, 혼란을 가져다 주다가 결국 나중에는 무관심에 이릅니다. 무관심은 인간의 최악의 질병입니다. 오늘날의 인류의 가장 큰 질병은 영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마음을 무디게 하여 감정을 죽이고, 더 이상 아무것에도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정, 결혼생활, 종교적인 삶, 사제생활 등을 떠나 버리고 아무것도 남겨 놓지 못하고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속한 곳으로 가겠다는 것이죠. 내가 원하는 곳이 내가 속한 곳 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영적인 질병입니다. 암보다 더 끔찍한 병입니다. 영원한 삶으로 승화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이라는 신비를 이해하려면 우리 자신을 더욱 더 초자연적인 삶을 살도록 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더이상 단순한 이성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영적 세상에 대한 신비를 이해하기가 힘들고 보이지 않는 것이므로  좌절감을 느끼며 자연적인 인간으로 되돌아가려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신 분이 있겠습니다만, 제가 한번은 포르투갈의 청소년 피정에 참여하였습니다.

점심시간 바로 전에 짧은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는데,  마지막에 한 청년이 물었습니다. “왜 하느님은 볼 수 없는 건가요?” 그때 저는 곧 답을 주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안 보이니까 볼 수 없지’ 라고 대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점심시간 후에 대답하겠다고 말하고 성체조배를 하러 갔습니다.

점심시간은 한 시간이었고, 사십오분 동안 성체조배를 하였지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주님 앞에 앉아서 “주님 저는 그저 그런 대답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답을 말해 주고 싶습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주님께 답을 재촉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계속 대답을 재촉하고 채촉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 분 안으로 깊이 들어가 청하는 것을 원하시며,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저 그런 답을 주는 것을 제가 거절한 것이죠. 사십오분 동안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더니 갑자기 놀랍도록 명확하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나를 완벽하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를 볼 수 있도록 너희가 완벽해져야 한다.”

걸어 나오면서 저는 “와우”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그 답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동시에 고요한 기쁨이 있었습니다. 완벽한 대답이었습니다. 그 모든 청소년들의 침묵 가운데 하느님의 현존은 아주 큰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놀라운 주님의 현존이 우리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은 매우 가시적이지만, 우리의 불완전으로 인해 그것을 인식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주 가끔 완벽한 순간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완벽하게 일하고 계심을 느낄수 있지요. ‘나는 하느님이 일하고 계시는 걸 알 수 있어. 그분이 일하고 계심을 볼 수 있어. 틀림없이 백프로 하느님이셔.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셔” 하느님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알수 있지요. 우리는 그러한 작은 완벽한 순간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삶에 영원하길 바라지요. 하느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가 이루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그것을 위해 우리는 항상 노력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가시적이 되게 하는 것이죠. 가장 큰 기쁨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낙원에서 쫓겨나면서 잃어버린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께서 정원을 거니시며 아담과 이브와 함께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그것을 망쳐놓기 전까지 입니다. “어디에 있느냐?”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입니다. 그 후 더 이상 하느님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듣기는 하지만 보지는 못하지요. 예수님의 육화와 함께 그것이 바뀌기는 하였습니다만… 이곳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실제로 가시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항상 볼 수 있도록 좀 더 노력해야 하겠지요.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목표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그 순간을 위해 가슴앓이를 한다는 것을 느끼십니까? 우리는 그 분을 볼 수 없는 고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면의 아주 깊은 것으로서 자신에게 그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영원히 하느님을 볼 수 있기만을 바라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육체가 없음으로써 우리와 같은 한계가 없는 연옥영혼에게 하느님을 향한 갈망과 목마름은 너무도 큰 것으로서, 그들의 가장 큰 고통은  당장 하느님께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가두어 두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 갈수 없게 하는 이 곳에서 풀지 못한 것들을 고통스럽게 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집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도 그와 같은 것이,  자신도 모르는  공허함, 허전함, 외로움과  같은 것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성사를 남겨 주신 것입니다.

 

성체는 그러한 목마름을 해소 시켜주는 가장 크고도 놀라운 은총입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목마름을 해소 시켜주는 영원한 생명수이기 때문입니다. 성체조배는 그러한 공허함, 허전함에 대한 가장 큰 치유를 가져다 주는 것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 가장 필요로 하는 것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은 삶 안에서 영원히 하느님과 함께 해야 할 필요인 것입니다. 성체조배는 그러한 것에 가까이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현존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된 성체 앞에서 참되게 조배를 한다는 것은 모든 외로움, 공허,빈 느낌들을 없애고 그 곳에 하느님으로 채우는 놀라운 내면의 치유입니다. 사람들이 성체조배가 얼마나 힘이 있는 지를 알게 된다면 매일 가려고 할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말하곤 합니다. 하루에 얼마나 티비를 보며 시간을 낭비합니까? 그 중 하루에 한시간만 빼서 성체조배를 하러 가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삶의 변화는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저는 많은 좋은 가톨릭 신자들이 하루에 두 세 시간을 티비를 시청한다는 것을 압니다. 거룩한 것과 거리가 먼, 필요하지도 않은 정보를 수집하는 아주 긴 시간이지요. 잠들기 전에 일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나요? ㅎㅎㅎㅎ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한, 삶에서 무엇이 달라집니까? 그 모든 것들이 대부분 가십거리지요. 왜 그토록 호기심을 가져야 합니까? 아까 미사 중에 신부님께서 말씀 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호기심으로 묻는 질문에는 대답을 안 하십니다. 호기심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탄은 호기심에 불을 붙일 준비가 항상 되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더욱 더  호기심을 갖도록 만들려 합니다. 그 호기심은 결코 만족되지 않아서 계속 우리 마음에 외로움과 공허함을 남깁니다. 일종의 악덕 같은 것이지요.  마약이나, 불순결의 죄도 그렇지요. 잠시 모든걸 멈추고 자신의 삶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십시오. 필요한 것은 초자연적인 은총을 살찌우는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은총은 오직 하느님의 영으로 영양을 줄 수 있습니다. 시간을 정말 잘 관리하는 사람이 되려 한다면 하느님께 진정으로 가까이 갈 수 있는 장소를 찾을 것이고 가톨릭 신자로서 가장 큰 선물 중의 하나가 복된 성체입니다. 복된 성체 앞으로 나아가 하느님 앞에 머무십시오.  
 

저는 매우 특이한 경우를 알고 있는데요. 저는 해마다 사순기간 동안 뉴욕 맨하탄에 있는 한 성당에 강연을 가곤 하였습니다. 첫 한 두해 동안 그 곳에 갈 적마다 만나는 한 흑인 남성이 있었는데, 그는 그 성당에서 가까운 부르클린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항상 그 곳에 오곤 하였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은 적도 없고, 가톨릭 교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지만 가톨릭 교회에서 매우 강렬함을 발견하고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곳에서 보는 모든 것이 매우 강렬하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곳에 강연을 갈 적마다 그가 왔고, 제가 매우 강렬하다고 했습니다. ㅎㅎㅎㅎㅎ 

그의 이름은 탐이었고 저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그를 위해 기도해주기를 청했습니다. 그는 트럭 운전수로 열심히 일하는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세 자녀와 매우 겸손하고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당에 나오지 않았지만, 성당 밖에서 한번 만난 적이 있었지요. 그 곳 신부님에 의하면 그는 일요일에 가끔 미사에 오지만 끝까지 있지 않고 뒤 쪽에서 조금 왔다 갔다 하며 머물다가 가버린다고 하였습니다. 불과 몇 주 전에도 사순기간에 그 곳에서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는 저에게 선물로 오렌지…등등 을 주었습니다.

제가 성당 밖에 앉아 있는 그를 발견하고 별일 없냐고 물으니, 그는 열심히 일하고 있고, 딸이 대학에 입학하여 돈이 많이 든다…등등.. 일상 이야기를 나누고 저는 그와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성당 안으로 가면서 그가 말했습니다. “제가 결코 이해 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고, 기도를 드리는 그분이 누구인지, 알 수도 없는 그것에 대해 사람들이 왜 그토록 민감하고 마음을 다 할 수 있는지... 저는 이 곳에 오면서도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신부님께서 저에게 세례를 주고 싶다고 하실 때마다, 저는 겁이 납니다.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세례를 받지 않고도 이렇게 뭐가 뭔지 모르겠고, 어려운데 세례를 받으면 얼마나 더 할 지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두려워 할 필요 없어요.” 라고 하자 그는 “저는 두렵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저를 이곳에 오도록 끌어 당기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이에요. 하느님께서 당신을 창조하였습니다. “ 그러자 그는 “그 말에 더 두려워졌어요.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ㅎㅎㅎㅎㅎ  그것이 제가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을 때 일입니다.

 

저는 그가 하느님에 의해 영혼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압니다. 그를 신앙으로 데려 오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뒤에 온 가족이 올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들 가족도 아주 겸손하고, 순종적인 아름다운 사람들로 그의 아내도 그의 말을 잘 따르기 때문입니다. (청중;….ㅎㅎㅎㅎㅎㅎ)… ㅎㅎㅎ 그의 아내가 일반 사람은 아니죠. 미국… 그것도 뉴욕에서요….ㅎㅎㅎ  그런데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남성이 놀라운 거룩함의 감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가 초자연적으로 도유된 사람들보다도 더 초자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초자연적인 현존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세례를 받으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이미 그 곳에 일어나는 일을 보고도  놀라고 두려운데 세례를 받으면 오죽 하겠냐는 것이지요. 아주 단순하고 겸손하며 기본적인, 그러나 아주 순수함입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일하고 있음을 압니다.

 

첫째로 그는 저에게 주님에 대한 큰 교훈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겸손함이구요. 둘째는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단순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매우 상반되는 방법으로 어떻게 영혼을 만들고 계신지를 알려 주십니다. 완전히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되는 것이지요. 아마도 이 남성은 우리 중 많은 사람들보다도 영적으로 더 좋은 모습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 미소한 하느님의 사람이 “와우...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야? 정말 강렬하다… 정말 강렬한 곳이야.”라고 표현하며 그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신부님이 그를  소개할 때 저에게 “제 친구를 소개합니다. 이 사람은 당신이 처음 이 곳에서 강연할 때부터 왔어요.” 라고 하고는 그에게 “어떻게 오게 됐는지 말씀드려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저에게 “매우 강렬해서 오게 됐어요.” ㅎㅎㅎㅎㅎㅎ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우리에게도 자신의 초자연적인 은총이 사실이 되도록 이러한 강렬함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강렬합니다. 우리는 그저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주 강렬한 사람들입니다.

 

 

 

(역: wisdom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http://blog.daum.net/sophiay/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