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제3권 공생활 둘째 해 1 p148~p155

169. 산상 설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1945. 5. 22.
예수께서는 간선도로를 따라 빨리 걸어가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혼자시다. 그분께서는 큰 길 옆에 솟아 있는 산을 향하여 가고 계시는데, 그 산은 호수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뻗어 있다. 그것은 처음에는 완만하게 상승하여 상당히 멀리 뻗어나가 고원을 이루고 있는데, 거기서 남쪽으로는 호수 전체와 티베리아스 시내가 보이고, 북쪽으로는 그보다는 덜 아름다운 다른 도시들도 보인다. 그러다가 암괴가 나타나고, 거기서부터 산은 꽤나 가파르게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낮아지고, 그 다음에는 다시 첫 번째 봉우리와 비슷한 다른 봉우리까지 올라가 일종의 이상한 안장모양을 이루고 있다.
예수께서는 노새들이 다니는 아직은 비교적 평탄한 길을 따라 고원을 향하여 올라가기 시작하여 그 주민들이 고원지대를 경작하는 한 작은 마을에 이르신다. 그곳의 곡식들은 이삭이 패기 시작한다. 그분께서는 마을을 가로질러 여기저기 꽃이 피어 있는 풀밭과 곡식포기들이 바스락거리는 밭들 사이로 지나가신다.
맑은 날씨로 인하여 주위의 자연의 모든 아름다움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예수께서 가시는 외딴 작은 산 너머 북쪽으로는 헤르몬 산의 웅장한 봉우리가 보이는데, 그 정상은 눈으로 덮여 있는 반면 나무로 뒤덮여 있는 사면은 초록색이어서 그 정상은 마치 에메랄드들의 바탕에 놓여 있는 거대한 진주와도 같다.
겐네사렛 호수와 헤르몬 산 사이에 있는 호수 너머에는 초록색 평야가 있다. 메롬 호수는 그 평야에 있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서북쪽으로는 티베리아스 호수 방향으로 더 많은 산들이 있고, 그 호수 너머로는 멀리 아름다운 평야지대와 먼 거리로 인하여 윤곽선이 부드러워 보이는 다른 산들이 있다. 간선도로 맞은 편 남쪽으로는 야산들이 있는데, 나는 그 너머에 나자렛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로 올라갈수록 시야가 넓어지는데, 산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 나는 서쪽에 있는 것을 볼 수 없다.
예수께서는 맨 먼저 사도 필립보를 만나신다. 그는 거기서 망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선생님, 당신께서 이곳으로? 저희는 간선도로에서 당신을 만나 뵐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저는 이 산들 위에서 양떼들을 방목하고 있는 목자들에게 양젖을 구하러 간 제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 아래 간선도로에는 시몬이 시몬의 유다, 이사악과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오! 여기… 이리 오게! 이리 와! 선생님께서는 여기 계시네!”
물병들과 물통들을 가지고 내려오고 있던 사도들이 뛰기 시작하는데, 당연히 더 젊은 사람들이 먼저 도착한다. 그들이 선생님을 다시 만나 표시하는 반가움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마침내 그들 모두가 함께 모인다. 예수께서 미소 지으시는 동안에 그들 모두가 그분께 말씀드리고 싶어 한다…
“그런데 저희는 큰길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당신께서는 오늘도 오시지 않나 보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었습니다.”
“당신께서도 아시다시피 많은 사람들이 와 있습니다.”
“오! 저희는 당황했었습니다. 율법학자들 몇 명이 있었고, 심지어 가말리엘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나의 주님, 그건 맞습니다! 당신께서는 적시에 떠나셨어요! 저는 그때만큼 두려웠던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다시는 이번처럼 저를 골탕 먹이지 마십시오!”
베드로가 불평하자, 예수께서는 미소 지으시며 물으신다.
“혹시 너희에게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일어났었느냐?”
“아! 아닙니다! 정반대로… 오! 선생님! 하지만 당신께서는 요한이 설교했다는 것을 모르시지요?… 그것은 마치 당신께서 요한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저는… 저희 모두는 깜짝 놀랐습니다. 일 년 전에 겨우 그물이나 칠 줄 알았던 이 젊은이가… 오!”
베드로는 아직도 감탄해 마지않으며 말없이 미소 짓고 있는 요한을 흔든다.
“당신께서는 이 아이가 이 웃는 입으로 그런 말들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얘는 솔로몬처럼 말했습니다.”
“시몬도 아주 말을 잘 했습니다, 나의 주님. 그는 정말로 ‘우두머리’였습니다.”
요한이 말한다.
“그것은 놀랄 일이 못됩니다. 그는 저를 진퇴유곡에 빠지게 했습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제가 말씀을 잘 전했다고 합니다.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요한의 말로 인하여 깜짝 놀라 있었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한다는 두려움과 당신을 초라하게 보이게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당황해 있었으니까요.”
“나를 초라하게 보이게 하다니? 그러나 말하는 것은 너였으니 초라하게 보이는 것도 너였을 텐데, 시몬아”
예수께서 그를 놀리신다.
“오! 저야… 저는 저 자신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았습니다만, 저는 그들이 바보를 당신의 사도로 선택하셨다고 당신을 비웃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겸손과 사랑으로 인하여 기쁨에 빛나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렇게 묻기만 하신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어땠느냐?”
“열성당원도 말을 아주 잘했습니다만, 그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터입니다. 하지만 이 애는 정말로 뜻밖이었습니다! 하기야 저희가 기도하러 피정 갔을 때부터 이 젊은이의 영혼은 항상 하늘에 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그들 모두가 베드로의 말에 동의한다. 그 다음에 그들은 예수께 계속 말씀드린다…
“당신께서도 아시지요? 시몬의 유다의 말로는, 지금 제자들 중에 대단히 중요한 두 사람이 있습니다! 유다는 아주 적극적입니다. 물론입니다! 그는 그들 교양 있는 사람들 중 다수를 알고 있고… 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말을 아주 잘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몬과 당신의 사촌들의 말을 듣기를 더 좋아하고, 특히 이 젊은이의 말을 듣기를 더 좋아합니다.
어제 어떤 사람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저 젊은이는 말을 잘 합니다―그는 유다를 지목하여 말하고 있었습니다―하지만 나는 당신을 더 좋아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오! 불쌍한 사람 같으니라고! 그는 몇 마디 말만을 연결하여 겨우 말할 줄 아는 나를 더 좋아하다니!… 그런데 당신께서는 왜 이리로 오셨습니까? 약속 장소는 큰길이었고, 그래서 저희는 거기 있었는데요.”
“왜냐하면 나는 여기서 너희를 만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내 말을 들어라. 내려가서 다른 사도들과 아는 제자들에게 올라오라고 말해라. 오늘 사람들은 오지 못하게 해라. 나는 너희에게만 말하기를 원한다.”
“그러시다면 당신께서는 저녁까지 기다리시는 편이 더 낫겠습니다. 석양 무렵에 사람들은 인근 마을들로 흩어졌다가 다음날 아침에 다시 와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들을 제지할 수 있겠습니까?”
“좋다. 그렇게 해라. 나는 저 위 정상에서 너희를 기다리고 있겠다. 지금은 밤에도 훈훈하니 우리는 한데서도 잘 수 있다.”
“선생님, 당신께서 원하시는 어디라도 좋습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함께 계시기만 하다면요.”
제자들은 물러가고 예수께서는 다시 올라가기 시작하여 그 산의 정상에 이르시는데, 그곳은 산상 설교의 끝부분과 막달라의 마리아와의 최초의 만남에 대한 지난해의 환상에서 이미 본 적이 있는 산정상이다. 지금은 시야가 더 넓어 보이고, 저녁노을에 더 밝아지고 있다.
예수께서는 바위 위에 앉아 묵상에 들어가신다. 그분께서는 오솔길에서 사도들이 돌아오는 발소리들이 그분께 들려올 때까지 그대로 계신다. 날은 점점 어두워진다. 그러나 산 정상은 여전히 빛나고 있고, 모든 풀과 꽃에서 향기가 풍겨 나온다… 야생 은방울꽃들은 강한 향기를 내뿜고, 수선화의 키 큰 줄기들은 이슬을 부르는 듯 그것들의 별 같은 꽃들과 꽃봉오리들을 흔든다.
예수께서 일어나 인사하신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많은 제자들이 사도들과 함께 올라와 있다. 이사악이 미소 지으며 그들을 인솔하는데, 그의 미소 짓는 얼굴은 고행자의 풍모를 나타낸다. 그들 모두가 특별히 가리옷의 유다와 열성당원 시몬에게 인사하시는 예수의 주위로 모여든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몇 시간 동안 너희와만 함께 있으면서 너희에게만 말하기 위하여 너희 모두가 나와 함께 여기 있기를 원했다. 나는 너희의 사명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너희에게 말할 것이 있다. 음식을 먹고 나서 이야기하자. 그렇게 하면 자는 동안에도 너희의 영혼이 계속 그 가르침을 음미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간소한 식사를 마친 다음에 큰 바위에 앉아 계시는 예수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둘러앉는다. 그들은 제자들과 사도들을 합하여 백여 명이 되는 것 같다. 모두들 주의 깊게 경청하는 표정들인데, 두 개의 모닥불이 이상하게 그들을 아래서 위로 비추고 있다.
예수께서는 조용하게 손짓하시며 천천히 말씀하신다. 그분께서 입고 계시는 짙은 청색 옷과, 하늘과 땅의 주재자인 선생님을 어루만지는 하늘에 떠 있는 구두점 같은 초승달로 인하여 그분의 얼굴은 더 희게 보인다.
“나는 너희를 여기 따로 모이게 했는데, 그것은 너희가 내 벗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열두 사도들의 첫 번째 시험이 끝난 후에 너희를 함께 불렀는데, 그 이유는 적극적인 내 제자들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내가 내 일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너희에게 주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받고 있는 지도에 대한 너희의 첫 번째 반응을 너희에게서 듣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나는 모든 것이 잘 되었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 기도로 기도하는 피정을 통하여 자신들의 생각과 마음에 새 힘을 받아 나온 사도들의 영혼을 지원했다. 인간적인 노력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의 온전한 신뢰로부터 나오는 힘 말이다.
자기 자신을 가장 의식하지 않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주었다.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않기는 어렵다.
사람은 기억들(recollections)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기억은 자신의 자아에 대한 기억들이다. 너희는 자아와 자아(ego and ego)를 구별해야 한다. 하느님과, 하느님으로부터의 자기의 기원을 기억하는 영혼의 영적인 자아(spiritual ego of the soul)가 있고, 자기의 정열들과 자기의 전존재에 관한 무수한 위기상황을 기억하는 육체의 열등한 자아(inferior ego of the flesh)가 있다.
육체의 기억들은 합창을 이루는 아주 많은 목소리들로서, 그것들은 영혼이 아주 강하지 않다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기의 고귀함을 기억하는 영혼의 외로운 목소리를 제압해버린다. 그러므로 완전한 제자가 되려면, 항상 자극되어야 하고, 싱싱하게 살아 있어야 하고, 밝아야 하는 이 거룩한 기억을 제외하고는, 인간적 자아의 모든 기억들, 필요들 소심한 생각들에 있어 너희 자신을 잊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내 열두 사도들에 대한 이 첫 번째 시험에서 가장 많이 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가장 많이 잊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뿐 아니라 자신들의 제한된 개성(limited personality)마저 잊었다. 그들은 자기가 누군지를 기억하지 않고, 온전히 하느님과 결합되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왜 그렇게 딱딱했느냐?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습관적인 거리낌과 평소의 좌고우면과 편견을 기억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왜 그렇게 과묵했느냐? 그들은 교리에 대한 자신들의 무지를 기억하였기 때문이고, 자기가 어리석게 보이거나 나를 하찮은 사람으로 보이게 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왜 그렇게 현란하게 과시했느냐?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평소의 교만과, 각광받고 갈채 받고 남보다 앞서고 ‘중요한 인물’이 되려는 자신들의 욕구를 기억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들은 왜 성공적이고, 해박하고, 설득력 있고, 당당한 웅변을 갑작스럽게 드러낼 수 있었느냐? 그 이유는 그들만이 하느님을 분명하게 기억했기 때문이다. 또한 겸손하여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너무 주제넘게 될까봐 그때까지 행사하지 않았던, 자신들에게 부여된 탁월한 품위(the preeminent dignity)를 적시에 갑자기 맡을 줄 알게 된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처음 세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열등한 자아를 기억했다. 넷째 부류의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우월한 자아(superior ego)를 기억했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 하느님과 함께 있는 데서 오는 거룩한 대담성이여!
그러므로 이제 너희 사도들과 너희 제자들 모두는 잘 들어라. 너희 사도들은 이 개념들에 대하여 이미 들었지만, 지금 너희는 그것들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너희 제자들은 그것들에 대하여 듣지 못하였거나 단편적으로 들었는데, 너희는 그것들을 너희 마음속에 잘 새겨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양떼의 수가 점점 많아짐에 따라 나는 너희를 점점 더 광범위하게 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이 점점 더 맹렬하게 너희를 공격할 것이고, 목자인 나와 내 양떼를 해치려는 늑대의 수가 점점 늘어날 것이기에 나는 교리와 내 양떼를 지키는 데 필요한 무기를 너희 손에 들려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어린 목자들아, 양떼에게는 충분한 것이 너희에게는 충분하지 않다. 양들에게는 피를 나쁘게 하고 욕망을 자극하는 풀을 뜯어먹는 잘못이 허용될 수 있다 해도, 많은 양떼를 파멸로 이끌게 되기 때문에 너희에게는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우상을 숭배하는 목자가 있는 곳에서는 양들이 중독되어 죽거나 늑대에게 잡아먹힌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 땅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너희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싱거워서 무익한 소금이 될 것이다. 너희가 짠맛을 선물로 받고 나서 그것을 인간성의 맛없고 더러운 물로 희석하고, 관능성의 타락한 단맛으로 달게 하고, 그렇게 하여 하느님의 순수한 소금에 교만, 탐욕, 폭식, 음란, 분노, 나태의 부패를 섞음으로써 개개의 악덕의 일곱 개의 일곱 배의 알갱이에 대하여 소금 한 알갱이가 있게 하여 짠맛을 잃게 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짠 맛을 주실 수 없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다시 너희에게 짠맛을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보잘것없는 그 소금 알갱이는 어디 들어 있는지도 모르게 없어지다시피 하여 너희의 소금은 돌가루의 혼합물에 지나지 않게 되어, 이에 씹혀 갈리는 소리가 나게 하고, 입 안에 흙냄새를 남기게 하여 음식을 먹을 수 없고 메스껍게 만들게 된다.
그것은 칠죄종(七罪宗, seven vices: 일곱 가지 근본적인 죄. 그 자체가 죄일 뿐만 아니라 다른 죄를 유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교만, 인색, 탐욕, 음란, 탐식, 분노, 질투, 나태)의 맛처럼 모든 인간적인 용도에도 해를 끼치게 되어 열등한 용도에도 쓰이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버려져 사람들의 부주의한 발에 짓밟힐 뿐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느님의 사람들을 짓밟을 수 있게 되겠느냐? 선택된 사람들이 더 이상 고결한 천상의 것들의 풍미를 주는 데 사용되는 재료가 아니라 부패일 뿐이기 때문에 부주의한 사람들에게 자기들을 짓밟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해가 맨 마지막까지 입 맞추고 달이 맨 먼저 은빛으로 물들이는 이 산의 정상과도 같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은 빛나고, 드러나 보이게 된다. 가장 몽환적인 눈이라도 가끔씩 높은 곳을 쳐다보기 때문이다. 나는 영혼의 거울이라고 말해지는 육체의 눈은 영혼의 갈망, 자주 간과되지만 사람이 마귀가 아닌 한 항상 살아 있는 갈망, 이성이 본능적으로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계신다고 여기는 높은 곳에 대한 갈망을 반영한다고 말하겠다. 사람은 천국을 찾으며 일생 동안 적어도 몇 번은 눈을 들어 높은 곳들을 쳐다본다.
나는 우리 모두가 어린 시절부터 예루살렘에 들어가면서 했던 일을 회상해보라고 너희에게 권한다. 우리 눈들은 어디를 향하느냐? 성전의 대리석과 황금으로 장엄하게 관 씌워진 모리아 산이 아니냐? 그리고 성전 경내에 들어갔을 때 우리의 눈들은 어디를 쳐다보느냐? 우리는 햇빛에 반짝이는 귀중한 돔들을 쳐다본다. 거룩한 경내에는 홀과 회랑과 안마당들에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산재해 있느냐! 그런데도 역시 높은 곳에 있는 것은 우리의 시선을 끈다.
나는 우리가 여행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회상해보기를 너희에게 부탁한다. 우리는 먼 길과 지루함과 피로와 더위와 길의 먼지를 거의 잊기 위하여 어디를 쳐다보느냐? 산들의 정상을 쳐다본다. 그것들이 별로 높지 않고, 멀리 있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평탄하고 단조로운 평야를 걷고 있을 때 산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은 얼마나 위안이 되느냐? 길에 진흙이 있느냐? 위에는 산뜻함이 있다. 평지가 무더우냐? 위에는 시원함이 있다. 여기 아래에서는 시야가 막혀 있느냐? 높은 곳에서는 시야가 넓다. 산봉우리를 쳐다보기만 해도 더위를 덜 느끼게 되고, 진흙은 덜 끈적거리고, 걸음걸이가 덜 고통스럽다.
산꼭대기에 빛나는 도시가 있다면, 어떤 눈도 그것을 감탄하며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산봉우리 높은 곳에 공중누각처럼 옮겨놓는다면 소박한 마을이라도 아름답게 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참 종교와 거짓 종교들이 가능한 한 높은 곳에 신전을 세웠고, 언덕이나 산이 없을 때에는 많은 노동력을 들여 석조 기단을 건설하여 지대를 최대한 높인 다음에 그 위에 신전을 건설했다. 왜 그렇게 했느냐? 왜냐하면 사람들은 신전이 잘 보이게 하여 그 신전을 봄으로써 인류가 하느님을 상기하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너희가 빛들이라고도 말했다. 너희가 저녁에 집안에서 등불을 켤 때 너희는 그 등불을 어디에 두느냐? 화덕 밑에 두느냐? 지하 저장고로 쓰이는 굴속에 두느냐? 아니면 궤 속에 넣어두느냐? 그렇지 않으면 뒤주 속에 감추어두느냐? 너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선반 위에나 등잔걸이에 둠으로써 높은 곳에 있게 하여 방 전체와 그 방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출 수 있게 한다.
높은 곳에 있는 것은 반드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상기시키고 비추어야 하기 때문에, 그 임무를 다할 수 있어야 한다.
너희는 참 하느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기에 너희는 너희 안에 칠중의 이교(paganism)를 가지고 있지 않은지 확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이러저러한 신에게 바쳐진 신성한 숲들을 가진 불경스러운 높은 곳이 되어 너희를 하느님의 성전들로 보는 사람들을 너희의 이교로 끌어들일 것이다.
너희는 하느님의 빛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더러운 심지, 기름을 빨아올리지 못하는 심지는 연기만 내뿜고, 빛을 내지 못하며, 고약한 냄새만을 풍기고, 밝히지는 못한다. 더러운 석영 판 뒤에 감추어진 등불은 우아한 광채를 내지 못하거나 깨끗한 광물 등피를 통하여 빛의 눈부신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고, 오히려 수정등피를 시커멓게 만드는 검은 연기의 막 뒤에서 꺼져버린다.
하느님의 빛은 불가피한 접촉, 반응, 실망을 동반하는 일 자체에서 생기는 찌꺼기를 날마다 없애기 위하여 부지런히 일하는 의지가 있는 곳에서 빛난다. 심지가 기도와 사랑의 풍부한 기름에 잠겨 있을 때 하느님의 빛이 빛난다. 하느님의 빛은 하느님의 완전(perfection)들의 수만큼 무한히 휘황한 반사로 증가한다.
하느님의 종이 모든 더럽히는 정열들의 연기로부터 자기 영혼의 흠집 낼 수 없는 수정(unattackable quartz)을 보존한다면, 각 완전은 그 성인 안에서 영웅적으로 실천한 하나의 성덕을 자극한다. 흠집 낼 수 없는 수정. 흠집 낼 수 없는!(예수께서는 이 결론을 우레 같은 목소리로 외치시고, 그래서 그분의 목소리는 천연적인 원형 경기장 안에 울려 퍼진다)
하느님만이 그분의 뜻이라는 금강석으로 이 수정에 금을 긋고 그 위에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이름을 써놓으실 권리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그때 이 이름은 가장 깨끗한 수정 위에 초자연적인 아름다움의 더 밝은 결정면을 부각시키는 장식이 된다.
그러나 주님의 어리석은 종이 자제력을 잃고 완전히 전적으로 초자연적인 자기의 임무를 보지 못하게 되어 이 수정에 하느님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 대신 사탄의 불 발톱에 의하여 그려진 불가해하고 악마적인 숫자의 거짓 장식과 거짓 금이 그려지게 한다면, 그때는 그 훌륭한 등불이 더 이상 그 온전한 아름다움을 가지지 못하게 되고, 균열이 생기고, 부서져 깨진 수정조각이 그 불꽃을 꺼지게 하거나, 설사 그것이 부서지지는 않더라도 그 표면에 분명한 성질의 여러 가지 표가 생기고, 그을음이 그 안에 침투하여 그 등불을 더럽힌다.
불행하다. 세 배로 불행하다. 사랑을 잃은 목자들. 자신들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목자들의 상승을 기대하는 양떼를 데리고 날마다 더 높이 올라가기를 거부하는 목자들! 나는 그들을 쳐서 떨어뜨리고, 그들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그들의 모든 연기를 꺼버리겠다.
불행하다! 세 배로 불행하다. 지식(science)으로 흠뻑 적셔지는 지혜(Wisdom)를 배척하고, 자주 지혜와 반대되고, 항상 교만하고, 때로는 자기들을 순전히 인간으로 만들기 때문에 악마적이기도 한 선생들은 세 배로 불행하다. 왜냐하면―듣고 기억해라―모든 사람은 사람을 하느님의 아들로 만드는 성화를 통하여 하느님처럼 되게 되어 있지만, 선생 즉 사제는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아들의 면모를 가져야 하고, 그런 면모만을 가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영혼들과 완전에 전적으로 헌신된 사람의 면모를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는 자기의 제자들을 하느님께로 이끌기 위하여 그런 면모를 가지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인간적인 지식의 우상이 되는 초자연적 가르침의 선생들은 저주받을 것이다.
불행하다! 일곱 배로 불행하다, 내 사제들 중에서 영혼이 죽고, 짠맛을 잃고, 죄스러운 육체를 가지고 마치 비참한 게으름뱅이들처럼 사는 사람들! 그들의 잠에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만을 빼놓고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환각적인 유령이 가득하고, 사람들의 마음의 부와 하느님의 부를 늘리겠다는 초인간적인 욕망만을 빼놓고는 모든 종류의 계산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물질적이고 비참한 둔한 삶을 살면서, 그들이 ‘생명’인 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자기들의 죽음의 물속으로 끌어들인다. 사랑하는 내 작은 양떼를 타락시키는 자들에게는 하느님의 저주가 내릴 것이다.
오, 주님의 나태한 종들아, 나는 너희의 게으름으로 인하여 멸망하는 사람들에게 해명을 요구하지 않고, 너희에게 해명을 요구할 것이며, 허비한 모든 시간, 모든 세월과 그 결과로 일어난 모든 악에 대하여 그들을 벌하지 않고, 너희를 벌할 것이다.
이 말들을 잘 기억해라. 그럼 지금 가거라. 나는 정상으로 올라갈 터이니 너희는 자거라. 내일은 목자(the Shepherd)가 자기의 양떼에게 진리의 목장들을 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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