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주님

[아들들아, 용기를 내어라!] 제164장. 인생은 하나의 시련이오 (비오 10세 교황)

Skyblue fiat 2014. 7. 25. 18:08

 

164. "인생은 하나의 시련이오"

 

 

  옷타비오 형제, 쓰시오, 나는 비오 10세(1903년 8월부터 1914년 8월까지 재위한 제257대 교황. 성인)이오.

 

 

  그대는 인간의 세상살이를 실제 그대로, 즉 하나의 시련으로 보고 생각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 이 주제에 대해서 그대는 이미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가 시련의 성질에 관하여 천명한 것 역시 어쩌다가 우연히 던진 말이 아니라오. 성녀는 이 시련을 이루는 세 가지 요소를 "믿음에 대한 충실""하느님의 법에 대한 충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충실"이라고 하였소.

 

  비오 12세도 이 시련의 종국인 하느님의 '심판'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아무도 이를 피할 수 없다고 하였소. 

그러나 엄청난 수의 천사들을 휩싸고 있는 오늘날의 어둠은 심야의 어둠보다 더 짙은 어둠이오. 사실, 세상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일체가 끊임없이 삶과 죽음을 생각하게 하오.  조된 만물은 사라질 수가 없기 때문이오. 게다가 인간은 이 모든 피조물의 중심에 위치하고, 따라서 만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완전한 존재인 것이오.

 

  과연 인간 안에는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다른 어떤 피조물에도 없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소. 곧

 

  1) 불사불멸에 대한 강한 열망. 죽음은 인간에게 반감을 일으키므로 인간은 죽지 않기를 바라오.

죽음에 대한 그러한 반감은 인간보다 못한 하등동물에게는 보이지 않는 점인데, 그 이유는 무엇이겠소?

 

   그것은 인간이 그렇게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이오. 처음에는 충만한 삶을 누리도록 창조되었으니 말이오. 죽음은 인간이 하느님께 반역한 결과일 따름이오. 이 과도기적인 사건을 이해하고 믿는 것은 은총 지위에 있는 인간의 영혼이며, 이는 믿음으로 변화되는 직관이오. 믿음은 두려움을, 더 심하게 말하자면 공포를 없애버리는 것이오! 이 두려움이나 공포는 물질주의적인 인생관에 빠져서 정신이 흐려진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니, 무덤 저쪽에는 단지 무서운 허무의 심연만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오.

 

  2) 행복에 대한 욕망. 이는 인간 내부에서 강렬하게 끓고 있는 욕구이니, 사람들은 사방으로 행복을 찾아 다니는 것이오. 얼마나 극성스럽게 찾아 다니는지, 앞서 간 모든 세대의 체험들을 다 동원해도 세상에서는 행복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지경이오. 그러나 세상에서는 아무리 행복을 찾아보았자 헛수고일 것이오. 인간은 세상의 그 무엇도 줄 수 없는 영원한 행복인 까닭이오.

 

  3) 평화에 대한 욕구. 이 욕구도 세상에서는 충족시킬 수가 없소. 인간이 필요로 하는 평화는 오직 '높은 데서' 만 올 수 있는 것이고, 인간보다 낮은 어떤 것도 이토록 높은 선물을 인간에게 마련해 줄 수 없기 때문이오.

 

 

 

인간은 기만당한 피조물인가?

 

  이제까지 언급한 것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이겠소? 인간은 기만당한 피조물이어서 그 주위를 애워싸고 있는 열등한 존재들과는 달리, 충족시킬 수도 실현할 수도 없는 열망과 욕망과 욕구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겠소?

 

  그것은 잘못된 결론이 될 것이오. (그러한 인간 본성을, 즉) 자연을 오류로 여기지 않는 이성의 올바른 추리에 어긋나기 때문이오.  자연의 조화도 침해되어 손상을 입을 수 있지만, 이는 인간의 악의와 어리석음이라는 외부 요인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 자연이 그 자체로 스스로를 손상하여 상처를 입는 일은 결코 없는 것이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자연" 이라는 말을 우주와 우주 속에 포함된 일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즉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있소. 그것은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불사불멸과 행복과 평화와 빛에 대한 갈망들은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점이오. 따라서 그 갈망들은 이 세상의 산물이 될 수 없는 것이오.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겠소?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인간 존재에 깃들인 그 고차적인 욕구들은 자연 외적인 기원, 다시 말하자면 초자연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지만, 이성과 믿음으로 이를 분명히 엿볼 수 있다는 점이오. 실상, 더 높거나 다른 본성은 더 열등한 것에서 올 수가 없는 법이오.

 

  그런데 이러한 고찰을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소? 그것은 악하고 믿음이 없는 이 세대 사람들이야말로 어둠이 그들을 온통 뒤덮게 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그대나 그대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려는 것이오. 인간이 그 본성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인간 내부에 밝혀 두신 자연적인 빛을, 즉 이성의 빛을 꺼버리고 말았으니, 징벌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오.

 

  이 가공할 책임에다 '계시' 에서 나오는 빛인 믿음의 빛을 배척한 책임도 보탠다면, 인간은 결국 깊은 어둠에 잠기고 말아서, 그 어둠에서 빠져 나오기가 여간 어렵지 않게 되는 것이오.

 

 

 

그들은 휩쓸려 가고 말리라 - - -

 

  옷타비오 형제여, 그러므로 위대한 영적 실재들에 관한 이성의 빛과 믿음의 빛을 일생 동안 항상 거부한 사람들은 - 그래도 사실은 그러한 영적 실재 속에서 살며 참여하고 있었지만 - 가지에서 떨어진 낙엽들처럼 지옥의 어둠 속으로 휩쓸려 가고 말 것이오.  이 지옥의 존재에 대해서는 그들의 죄에 대한 가책과 마음을 괴롭히는 고통에 의해서 번번이 확인하지 않을 수없었고, 그 기원에 대해서도 아무런 의심을 품을 수 없었고 또 그래서도 안되는 것이었으니 말이오.

 

  옷타비오 형제여, 이런 이유로 비오 12세가 그대와 그대들에게 정화의 때에 일어날 일을 두고 하느님을 판단해선 안된다고 말했던 것이오.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고" (로마 5,12), 죄로 말미암아 '생명'과 '죽음', '선' 과 '악', '빛' 과 '어둠' 이 대립하게 되었다는 것을 모두가 기억해야 하오.

 

  오늘이나 그 언제나, 그대들은 결코 판단하지 말 일이오!

 

  형제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강복하오.

그대들은 그대들의 "섬김과 순종과 사랑" 의 계획에 굳건히 일치하시오. 그러면 어떤 난관도 극복하게 될 것이오.

 

(1978년 9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