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주님

깨어있지 않으면, 단식 그 자체에 꽂혀서 에고의 만족으로 가버립니다. -안승관 베드로 신부님 묵상글

Skyblue fiat 2022. 9. 2. 21:19

 

<2021.1.18. 연중 제2주간 월요일 강론>

<마르2,18-22>그때에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21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22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을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 편에서는 당황스러운 질문입니다.
단식의 목적은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것인데 말이지요.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왔는데 왜 아직도 단식을 하느냐?”라고 물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르2,19-20) 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신랑이고 교회가 신부인 것이지요.
교회는 두세 사람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 함께 계시니(마태18,19), 우리 자신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즉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시는 “그 날”에 우리는 해마다 단식을 합니다. 사순절인 것이지요.

예수님의 오심은 우리의 본성의 변화, 즉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인간이 되신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 우리가 동참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우리는 칠성사로 그분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기에, 참으로 그분은 신랑이고, “나”라는 우리 각자의 영혼은 그분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신랑 신부가 한 몸이 되는 것은, 하느님과의 사랑의 일치이며, 영성의 끝이며 완성입니다.

그러나 그 좋은 기회를 그들은 놓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된 원인은 자신들이 열심히 한다고 자부하는 단식으로 인해 놓치게 됩니다. 더 깊게 들어가면, 에고가 있는 상태에서 단식이나 의로운 일을 하게되면 대 놓고 큰소리 칩니다. 남을 가르치려 합니다. 교만해지는 것이지요.

단식을 한 이유는 바로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기 위해서인데, 그들은 구세주를 몰라보는 것입니다. 구세주인 예수님은 사랑자체이시고 겸손자체이시기에 사랑과 겸손이 아니면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악을 물리칠 때는 겸손과 사랑으로 대해야 악이 꼼짝 못하고 쫒겨가듯이, 예수님을 만나려할 때도 겸손과 사랑으로 가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됩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단식 그 자체에 꽂혀서 에고의 만족으로 가버립니다.
단식 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자부심이 생기면 자연스레 에고를 향하게 되어 자기자신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어, 깨어서 하느님께 즉, 예수성심께 자랑스러운 마음을 봉헌하지 않는 이상 사랑과 겸손을 얻기가 어렵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준수와 같은 십계명 준수를 통해 율법 정신인 사랑을 키워가야할 그들은, 율법준수 자체에 매달려 사랑 대신에 자신들의 자부심을 키워간 것입니다. 자신들의 신앙을 키우지 못하고, 자만을 키워갔던 것입니다.

단식 즉, 율법을 준수하는데 왜 사랑이 커지지 않는 것일까요?

감정을 객관화시키지 않으면 감정과 “나”를 분리하지 못하여 감정과 내가 하나되어서 화를 참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감정이 올라올 때 감정에서 빠져나가 객관화 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감정을 객관화 시킬 수 있고, 예수성심께 봉헌할 수 있게되어 기도의 상태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에고를 객관화 시키지 않으면 에고와 영혼인 “나”를 분리시키지 못하여 단식을 실천해서 오는 마음의 성취감이나 자부심을 예수성심께 봉헌하는 기도의 상태가 되지 못하고 그 자부심을 자신을 향해 끌어들이기 때문에 겸손과 사랑으로 가지 못하고 교만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와 자선과 단식을 남이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내적인 힘이 생겨 에고와 싸울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와 자선과 단식을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는 에고를 강화시키기에 자기자신의 명예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따라서 안과 밖이 다르게 되고, 이를 예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에고와 “나”인 영혼을 객관화 시켜서 따로 바라보는 정화와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쉬어야 합니다.
내가 한 일에 대해서 “나”라는 영혼이 따라올 수 있게해야 합니다.

의식의 구조를 보면,
가장 깊은 곳에 하느님의 영이 있고, 그 다음이 영혼, 집단적 무의식, 개인적 무의식, 의식, 그리고 생각과 말과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영혼)집단적 무의식)개인적 무의식)의식)생각과 말과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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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느님의 영은 영혼 안에 있다가 영혼이 대죄를 지으면 영혼 밖으로 나와 영혼 주위를 맴도는 것이며, 성사를 보면 다시 영혼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를 “내 탓이오! 내 탓이오!” 하지만 이때 성사를 보는 것은 현실의식 차원이기에 피상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며 하등통회인 것입니다. 상등 통회가 안 되었기에 계속 반복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상등통회는 십계명의 죄의 뿌리가 되는 칠죄종을 통회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죽이고 싶도록 증오한다면(십계명) 그 뿌리에는 시기와 질투(칠죄종)라는 죄의 뿌리가 있는 것을 살피는 것입니다.
성사볼 때는 “시기 질투(칠죄종)로 인해서 마음으로 죽이고 싶도록 미웠습니다(십계명).” 라는 식으로 고해성사를 보면 좋습니다.
물건을 훔쳤으면, 탐욕(칠죄종)으로 인해서 도둑질(십계명)을 했습니다” 라고 고해성사를 보면 됩니다.
물건과 돈의 경우에는 반드시 갚아주어야 합니다. 아니면 당사자로부터 탕감 받아야 합니다.
정화의 차원에서 이것은 언제까지나 생각 즉, 의식차원으로 한 것이며, 기도중에 무의식 안에 칠죄종에 해당하는 상징물이 나와 봉헌되어 10개월간 새로나는 기간을 거치지 않으면 아직 작업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영혼의 기능이 지성, 기억(감정), 의지이기 때문에 감정이나 생각 그리고 행동을 완전히 바꾸려면 지성 기억(감정) 의지가 나오는 영혼이 함께 동행해야합니다.
그런데 영혼이 함께하려면 쉬어주어야 합니다.

즉, 내가 화상을 입으면 멈추고 내 몸을 치료하기위해 돌보는 시간이 필요하듯이,
내 마음이 상처를 입으면 멈추고 내 마음을 치료하기위해 돌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회의를 하는데 갑자기 누가 나에게 다짜고짜 말도 안 되는 말로 상처를 주었다면?
나를 살펴야 합니다. 내가 놀랬는지? 화가 났는지? 무서운지? 억울한지?
나를 살피는 시간을 30초 정도 시간을 할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상태를 확인하고 내 감정에 공감해주고 그 다음에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때 솔직하게,
내 느낌 표현을 해야 이성이 작동하게 됩니다.
그 말을 들으니 “당황스럽군요!”, “화가 나는 군요!”, “소름이 돋는데요?”. 등등으로 표현하면 감정이 내려가서 이성이 제대로 작동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도 마음에 상처가 되는 것이기에 마찬가지고 통회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서에서 마음은 생각하고(지성) 감정을 느끼고(기억) 행동을 결심하는 것(의지)을 말합니다.
따라서 내 지성과 기억과 의지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그 근원지인 영혼에 의식이 가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영혼의식 상태로 갈 수 있을까요?

영혼의식으로 가려면 역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은 쉼의 시간이어야 합니다.
이 쉼이란 “눈 뜨고도 코 베어가는 세상”에서는 ’긴장’ 하기에 쉼이 없으며,
기도 안에서만이 (일반 사람들은 명상) 쉼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긴장이 풀리기 때문입니다.

방법은?
일을 잠시 멈추고 영혼이 현실을 따라올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기억을 시간 있을 때마다 비워내고(정화), 의식마저 내려놓고 30초~1분 무념무상의 상태로 있어야 합니다(기도). 그러면 영혼의식 상태로 갈 준비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반복하다보면 과거의 기억이 더 깊이 나고 많아집니다. 어렸을 때 제가 전학와서 교실 밖에 서 있는 저를 괴롭혀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뭐가 날라와 나를 때려 바라보니 신발 주머니를 여러개 연결해서 길게 만들어 그것으로 저를 때린 친구였는데, 이름이 “임억영” 이라는 것까지 생각나는 것 등입니다.
시간을 내어,
모든 기억을 예수성심께 봉헌하고 나면 더 이상 기억이 없게 되거나 있어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됩니다.
이 때부터 순교를 생각하고, 성인들과 함께 순교 당하는 것을 상상한 후
“눈을 뽑아서 예수성심의 불속에, 팔을 잘라서 예수성심의 불속에” 던져야(봉헌해야) 합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5,29-30)

의식을 관장하는 신뇌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형상을 상상으로 만들어 몸을 봉헌하면, 무의식을 관장하는 구뇌는 진짜로 몸이 없어졌다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그 때 내가 누구인지 찾게되면, 내 몸이 내가 아니라는 느낌이 옵니다.
이 때, 에고와 나의 분리 훈련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알게 모르게 죄성을 느낍니다.
이러한 죄성을 창녀나 세리와 마찬가지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 안에 죄성을 비춰주지만 아직 극복할 은총이 주어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생각과 말과 행위의 차원에서 단식이나 율법준수를 통해 자부심을 자신의 에고를 향해 끌어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에고는 영혼과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느끼는 “나” 입니다.
따라서 에고가 정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을 해도 이기적인 사랑이 되는 것이지요. 점점 사랑이 커지기 어려운 것이지요.

이러한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마르2,21)
그렇습니다. 한 번 빨 때마다 새 천 조각은 더 많이 줄어들어 더 심하게 찢어지게 됩니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마르2,22)
그렇습니다. 새 포도주는 발효로 인해 팽창되면 헌 가죽부대가 찢어지게 됩니다.

에고에서는 욕망이 나오지만, 하느님의 영에서는 영성이 나옵니다.

내 행위를 하고 에고를 객관화 시키지 않는 이상, 나는 바리사이적인 의인일 뿐입니다.
하지만 율법이 아닌 주님의 은총인 성사로 우리는 이 길이 열려있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 사함과 육신의 부활(예수님 처럼)을 믿으며 영원히 삶을 믿나이다” 아멘

천주교회를 믿게 된 것을 얼마나 감사드려야할까요!

 

 


<mark2,18-22>
Ms heq 18 The disciples of John and of the Pharisees were accustomed to fast. People came to him and objected, "Why do the disciples of John and the disciples of the Pharisees fast, but your disciples do not fast?"
19 Jesus answered them, "Can the wedding guests fast while the bridegroom is with them? As long as they have the bridegroom with them they cannot fast.
20 But the days will come when the bridegroom is taken away from them, and then they will fast on that day.
21 No one sews a piece of unshrunken cloth on an old cloak. If he does, its fullness pulls away, the new from the old, and the tear gets worse.
22 Likewise, no one pours new wine into old wineskins. Otherwise, the wine will burst the skins, and both the wine and the skins are ruined. Rather, new wine is poured into fresh winesk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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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왜 쉬는가?
굳이 영성적이거나 종교적이지 않아도 적당한 휴식은 좋은 보약이다. 육체의 피로를 말끔히 날려버릴 뿐 아니라 에너지를 재충전시켜 주기 때문이다. 휴식은 말 그대로 자신이 가장 편안한 상태로 들어가 쉬는 것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잠을 자는 것도 좋고,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도 좋다. 이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느긋하게 휴식을 즐기는 동안에도 감성을 담당하는 우리의 뇌는 왕성한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상태를 계속하다보면 느닷없이 머릿속을 스쳐가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창조적 영감을 얻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휴식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영적 휴식’이다. 미국의 유명한 토마스 키팅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영혼의 토양은 딱딱한 지반 같아서 정서적 잡초를 뽑기가 쉽지 않다. 은총의 자유로운 흐름을 막는 잡초를 뽑기 위해서는 가장 깊은 육체적 정신적 휴식이 필요하다. [......] 진정한 의미의 휴식, 그것은 영혼의 휴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의 영혼은 오히려 육신보다 더 많은 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켈트인에게 전해 내려오는 글에 이런 것이 있다.
“지쳐버린 많은 사람은 그동안 자기 자신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일을 잠시 멈추고 자신들의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지 않은 것이다. 자신에게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은 단순하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모든 (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249)/

일을 잠시 내려 놓고, 그동안 무시했던 그대의 영혼이 다시 그대를 만나게 하라. 그것은 그대의 잊혀진 신비와 다시 가까워지는 멋진 일이다.”
(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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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신앙과 과학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하나요?

신앙과 과학 중 어느 한쪽에만 진리가 될 수는 없기 때문에, 둘 사이에 풀리지 않는 모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159]

“먼저 수학을 철저히 공부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느님과 인간의 일들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아우구스티노 성인(354~430년), 교회 학자, 초대 교회의 유명한 저술가이자 신학자)

“우리는 하느님과 자연 과학 사이에 아무런 모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자연 과학은 오늘날 많은 이들이 염려하듯이 서로를 배제하지 않으며, 서로 의존하고 보완합니다.”(막스 플랑크(1858~1947년), 물리학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양자 이론의 창시자)

과학적 진리와 상충하는 신앙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앙과 과학적 이성 둘 모두와 관련이 있는 단 하나의 진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은 신앙을 원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성도 원하셨고, 그 이성을 통해 우리가 이 세상이 지닌 합리적 구조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과학을 요구하고 또한 장려합니다. 신앙은 이성에 이해 명백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성을 뛰어넘어 실재하는 것들을 우리가 인식할 수 있게 합니다. 신앙은 과학이 하느님을 대신할 수 없으며 창조에 기여해야한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과학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기보다는 존중해야 합니다.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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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신앙과 과학. “신앙이 이성보다 우위에 있기는 하지만, 신앙과 이성 사이에 진정한 불일치는 있을 수 없다. 신비를 계시하고 신앙을 주시는 바로 그 하느님께서 인간의 정신에 이성의 빛을 비춰 주시기 때문이며,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시거나 진리가 진리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제 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4: DS 3017). “그러므로 모든 분야의 방법론적 탐구가 참으로 과학적 방법으로 도덕 규범에(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2)/

 

따라 이루어진다면 결코 신앙과 참으로 대립할 수 없을 것이다. 세속 사물이나 신앙의 실재는 다 똑같은 하느님에게서 그 기원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오히려 겸허하고 항구한 마음으로 사물의 비밀을 탐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의식하지는 못하더라도, 만물을 보존하시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손에 인도되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3)/

 

 

천주교 식사동성당 (성체성혈) | 2021.1.18. 연중 제2주간 월요일 강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