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주님

'누구든지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예수성심께 비워낼 수 있으면' -안승관 베드로 신부님 묵상글

Skyblue fiat 2022. 9. 4. 02:45

 

<2021.11.3.연중 제31주 수요일>

<루카14,25-33>그때에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내 제자가 될 수 없다.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32 맞설 수 없겠으면,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어머니께 무슨 기도 드리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안신부 건강하고…..”
“어머니, 건강이 구원과 상관이 있나요?”
“???”
“그런 기도 하지마세요. 어머니가 저 때문에 세상적 가치에 메이며 사는 것 싫어요!”
“…”

나중에 막내 말을 들어보니, 어머니가 우셨다고 합니다.
제가 하는 기도는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네요.

저는 제가 어머니를 끊어 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기도 안 한다는 것은 ‘아직, 때가 안 되었군’ 하며 기다려 줄 수 있었는데,
어머니가 안 하신다고 하니까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끊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세속을 끊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그림이 제게 있었던 것입니다.

회개하고 그 그림을 내렸습니다.
나의 문제임을 절감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저보다 더 잘 하고 계십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누구든지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예수성심께 비워낼 수 있으면 됩니다.
한 번에 되지 않으면, 계속 반복해야 합니다.

방법은?

인간의 삶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함으로 인해 구원 받는 데에 있습니다.

 


1.묵상기도
1)기도
홀로 머물며 하느님과 일대일의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매일 미사의 복음 말씀을 2번~10번 읽고 영화처럼 눈을 감고 상상한 후에 예수님을 만나서 질문이나 대화를 합니다.
예수성심께 30초~1분 무념무상으로 의식마저 내려놓은 채, 예수성심 안에 침묵으로 머뭅니다.

2)정화
1)삶 안에서 복음 묵상 중에 만난 예수님을 모시고 삽니다.
순간순간 올라오는 것들을 예수성심께 봉헌합니다.

2.자아의 죽음

1)단순 기도
(1)기억
a)정화
“영spirit-혼soul”의 기능인 지성 기억 의지가 있습니다.
내 지성이 십자가 상 아래에 계신 성모성심을 통한 예수성심께 대한 믿음을 갖고,
내 기억을 마음(영spirit)으로 내려놓고 성모성심을 통한 예수성심과 일치하려는 소망을 갖고,
내 의지로 모든 기억들을 성모성심을 통해 예수성심께 봉헌하면 됩니다.

b)기도
내 일생에 대한 기억이 한 번 봉헌될 때마다 성모성심을 통한 예수성심에 30초~1분 무념무상으로 머뭅니다.
이러한 과정이 10번 이상 반복되면, 기억이 나도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2)몸
a)정화
내 지성이 십자가 상 아래에 계신 성모님을 통한 예수성심께 대한 믿음으로,
내 몸(에 대한 기억)을 마음(영spirit)으로 내려놓고 십자가 상 아래에 계신 성모님을 통한 예수성심과 일치하려는 소망을 갖고,
내 의지로 내 몸(에 대한 기억)을 십자가상 아래에 계신 성모님을 통해 예수성심께 봉헌하면 됩니다.

b)기도
내 몸이 한 번 봉헌될 때마다 성모성심을 통한 예수성심에 30초~1분 무념무상으로 머뭅니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하느님은 누구신지?”를 세 번 묻습니다.

침묵 중에 올라오는 것들을 성모성심을 통한 예수성심께 봉헌합니다.
무의식이 다 올라오고 봉헌되면,
자신의 신념들이 올라옵니다.
그것마저 다 봉헌되면,
“나”라고 여겨지는 자아(에고)가 올라옵니다.
그 에고를 예수성심께 봉헌하면 자아의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이 끊어지게 됩니다.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Luke14,25-33>
25 Great crowds were traveling with him, and he turned and addressed them,
26 "If any one comes to me without hating his father and mother, wife and children, brothers and sisters, and even his own life, he cannot be my disciple.
27 Whoever does not carry his own cross and come after me cannot be my disciple.
28 Which of you wishing to construct a tower does not first sit down and calculate the cost to see if there is enough for its completion?
29 Otherwise, after laying the foundation and finding himself unable to finish the work the onlookers should laugh at him
30 and say, 'This one began to build but did not have the resources to finish.'
31 Or what king marching into battle would not first sit down and decide whether with ten thousand troops he can successfully oppose another king advancing upon him with twenty thousand troops?

32 But if not, while he is still far away, he will send a delegation to ask for peace terms.
33 In the same way, everyone of you who does not renounce all his possessions cannot be my disci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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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첫 번째
몸과 마음을 준비시키는
집중의 비법

공부에 집중하려면 일단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 집중이 잘되는지 따져 보자. 사람마다 최적의 공부 컨디션을 발휘하는 특정한 장소와 시간이 있다. 어떤 사람은 도서실에서, 어떤 사람은 자기 방에서 혼자 공부할 때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한다. 내게 맞는 곳에서 책을 펼쳐라.
특별히 생각나는 곳이 없다면 다수의 조언을 따라 보자. 공부 장소로는 넓고 개방된 곳보다는 적당한 크기의 폐쇄된 방이 좋다. 너무 조용하면 정서적으로 안정이 안 될 수도 있다. 너무 조용하면 정서적으로 안정이 안 될수도 있다. 음악을 틀되 평소에 자주 듣거나 아주 좋아하는 음악은 피하는 게 좋다. 노래 가사를 흥얼거리다 보면 그 음악과 관련된 기억이 떠올라 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이 좋다는 의견이 많지만 졸음이 온다는 사람/도 있다. 각자의 취향에 맞게 선택하자.
조명은 방 전체는 간접 조명으로 훤히 밝히고 책상 위는 초점 조명, 스탠드로 밝히자. 각성과 집중이 동시에 된다. 너무 덥거나 추워도 집중이 되지 않는다. 더운 것보다는 약간 싸늘한 쪽이 나을 수도 있지만 자기에게 쾌적한 온도가 좋다.
책상 위는 당장의 공부에 필요한 것 외에는 말끔히 치워야 불필요한 자극을 피할 수 있다. 의자는 30센티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바짝 붙이고, 앉을 때는 의자에 등을 기대라. 발판에 발을 올려놓되 뒤꿈치가 무릎과 일치하게 가지런히 모은다. 그래야 발의 울혈 상태를 방지할 수 있고 피로가 분산된다.
공부 도구는 좋아하는 것으로 하되 좀 비싼 것으로 준비해라. 펜을 써 보고 싶고, 스탠드를 켜 보고 싶어서라도 책상에 앉게 된다. 도구에 들인 돈이 아까워서라도 공부하게 된다.


주변 환경이 조성되었으면 크게 심호흡을 해 보자. 바른 자세로 앚아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는 동안 우리 뇌에서는 세로토닌이 분비된다. 딱 몇분간만 해 보자. 그 1분간의 명상으로도 뇌는 충분히 공부 준비를 한다.
공부 시작 전 간단히 기합을 넣는 것도 뇌가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학교 다닐 때 수업이 시작되기 전 반장이 일어나 ‘차렷, 경례’하고 선생님에게 인사했다. 자세를 바로잡는 순간 명상 효과가 생기고, 큰 소리로 인사하는 순간 몸에 약간의 기합이 들어가면서 수업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게 된다. 혼자 공부할 때도 그 기억을 떠올/리며 공부의 시작을 몸에 알려 보자. 자세를 바로 하고 “시작!” 이라고 외쳐 보자. 이제부터 공부다. 뇌의 전환이 일어난다. 공부하다 꾀가 나고 졸릴 때도 혼자 “차렷, 경례!” 하고 기합을 넣어 보자. 정신이 바짝 들 것이다.
이제 책을 펴고 오늘의 목표를 정해라. ‘몇 시까지 두 챕터를 읽겠다’, ‘오늘 중으로 단어 50개를 외우겠다’ 하는 식으로 구체적인 목표를 정해라. 싫어하는 공부도 이렇게 시작하면 뇌가 의지를 따라 줄 것이다.
목표와 그 목표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하되, 목표는 도달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것이어야 한다. 무조건 많이 하겠다는 욕심을 내고 책을 보면 쉽게 지친다. 쉽게 하고픈 변연계의 편도체가 반발하기 때문이다. 해도 끝이 보이질 않으니 포기하고 싶어진다. 그 부정적인 감정의 틈을 타고 잡념이 침범한다. 분량이나 소요 시간을 짧게 끊어 목표를 정하고, 일단 정한 이상 반드시 그 목표를 달성하자. 이것은 자신과의 약속이다. 약속을 지키고 나면 성취감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이게 다음 진도를 나가는 데 발판이 되고 공부가 즐거워지도록 돕는다.


꾀가 나거든 하품을 하거나 기지개를 켜라. 각성 중추가 자극되어 가뿐한 기분이 든다. 그래도 집중이 흐트러지면 일어나라. 서 있기만 해도 100개 근육이 이완과 긴장을 반복하며 뇌를 자극한다. 창문을 열고 방 안을 걷거나 암기장을 손에 들고 소리 내 읽어라. 찬물로 세수하는 것도 좋다. 안면 근육과 손이 뇌 신경과 연결되어 있어 뇌/가 활성화되면서 각성과 집중력을 높인다. “짝!” 소리가 나게 박수를 쳐라. 손과 귀가 동시에 자극받으면서 정신이 번쩍 날 것이다.
정 피로감이 심해지면 아예 큰대자로 누워라. 공부하다 피로가 몰려오는 것은 생각을 많이 해서라기보다는 강행군으로 인해 신체적 피로가 누적된 탓이다. 5분 정도 누워 있는 것이 최고의 피로 회복제다.
일어나면 기지개를 켜고 차나 커피, 간단한 스택, 초콜릿 등을 섭취한다. 카페인에 민감하지 않다면 한두 잔의 커피는 각성 효과가 있다. 껌을 씹는 것도 좋다. 세로토닌이 분비되고, 교근(咬筋-저작근의 하나)은 삼차 신경과 연결, 뇌로 전달되어 뇌 세포가 활성화된다. 또한 뇌로 혈류가 증가하면서 집중력과 사고력이 향상된다.


공부할 땐 만복보다 약간 배고픈 상태가 해마의 기억력을 높여 준다. 배고플 땐 식욕 촉진을 위해 그렐린이 분비되는데, 이것이 해마의 신경 연락망을 증가시켜 기억력을 증강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온몸을 움직여서 머리를 쉬게 하자. 단 이 시간은 딱 10분이다. 10분이 넘으면 공부에의 뇌 회로 활성도가 차츰 떨어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회로를 다시 작동시키려면 시간이 걸린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 격렬한 스포츠 경기를 관람했거나 스릴 넘치는 액션 영화를 보았다면 이미 우리 뇌에서는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었을 것이다. 마음이 차분하지가 않다. 경기 장면이 자꾸 떠오르고 스릴 넘치는 흥분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뇌는 공부보다는 계속 그런 자극을 받고 싶어 한다.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사람의 본성인/ 것을. 이럴 때는 책상 앞에 무조건 앉아 있기보다는 10분 정도 가벼운 산책을 하는 것이 좋다. 머릿속에 아까의 경기 장면이 떠오르면 그대로 두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숨을 내쉴 때 그 생각을 날려 버린다는 생각을 해 보라. 산책과 호흡 등으로 세로토닌 분비를 추진시키면 집중에 방해가 되는 아드레날린을 잠재울 수 있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면 즉시 책상 앞으로 돌아와라. 이제 다시 공부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159-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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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인간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어떻게 깨닫나요?

인간은 양심을 통해 자기의 죄를 깨닫습니다. 양심 덕분에 자신의 잘못을 비난하고, 이를 하느님 앞에서 시인합니다.[1797, 1848]->229, 295-298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1요한1,8)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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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 악을 저지른 사람에게 그의 양심의 판결은 회개와 희망의 보증이 되어 준다.

->1848 바오로 사도가 확언하는 바와 같이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다”(로마5,20). 그러나 은총이 그 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드러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은총은 우리 마음을 회개시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한다”(로마5,21). 상처를 치료하기 전에 상처를 검진하는 의사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생명의 빛으로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687)/

죄인을 비추신다.

회개는 죄에 대한 자각을 요구한다. 회개는 그 자체로 양심의 내적인 판단을 내포하고 있다. 회개는 진리의 영이 사람의 가장 깊은 마음 속에서 활동하시는 증거이며, 동시에 은총과 사랑의 새로운 선물이 시작됨을 뜻한다. “성령을 받아라.”. 이처럼 “죄를 드러내는 일” 안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은혜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양심의 진리라는 선물과 구속의 확실성이라는 선물이다. 진리의 성령은 위로자이시다.(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생명을 주시는 주님’, 31항: AAS 78(1986), 843면)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688)/

IV. 유일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변화

->229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우리를 오직 우리의 최초의 근원이요 최종 목적지이신 하느님께만 향하게 하고, 하느님보다 먼저 다른 무엇을 선택하거나 하느님을 다른 무엇으로도 바꾸지 않도록 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20)/

IV.창조의 의미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사랑으로 창조하신다

->295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지혜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는다(지혜9,9 참조). 그러므로 세계는 어떤 필연성이나, 맹목적 운명이나,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피조물들을 당신의 존재와 지혜와 선에 참여시키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세계가 생겨났음을 우리는 믿는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만물이 주님의 뜻에 의해서 생겨났고 또 존재합니다.”(묵시4,11). “주님께서 하신 일이 많고도 많건마는, 그 모든 것을 지혜로써 이룩하시었나이다”(시편103[104],24). “주님게서는 온갖 것을 선으로 대하시고ㅡ 일체의 조물들을 어여삐 여기시나이다”(시편144[145],9).

하느님께서는 ‘무에서’ 창조하신다.

->296 하느님께서는 창조를 위하여 이미 존재하는 아무 것도 아무런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1: DS 3002 참조). 창조가 신적 실체의 필연적인 유출은 더욱 아니다(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에 대하여, cc. 1-4: DS 3023-3024 참조). 하느님께서는 자유로이 ‘무에서’ 창조하셨다(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제2장, ‘가톨릭 신앙에 관하여’: DS 800; 제1차 바티칸 고의회, Dei Filius,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에 대하여, c. 5: DS 3025)

“하느님께서 이미 존재하는 물질로 세계를 만드셨다면 특별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인간 장인(匠人)도 재료를 주면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전능은 바로 무로부터 당신께(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44)/

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만드신다는 데서 드러납니다(아티오키아의 성 테오필루스, ‘아우톨리쿠스에게’, 2, 4: SC 20, 102(PG 6, 1052).

->297 성서는 ‘무에서’ 창조하신다는 신앙을 가능성과 희망이 넘치는 진리로서 증언한다. 이를테면 일곱 아들의 어머니는 그 아들들에게 순교의 용기를 이렇게 북돋아 준다.

“너희들이 어떻게 내 뱃속에 생기에 되었는지 나도 모른다. 너희들에게 목숨을 주어 살게 한 것은 내가 아니며, 또 너희들의 신체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너희들은 지금 너희들 자신보다도 하느님의 율법을 귀중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사람이 출생할 때에 그 모양을 만들어 주시고 만물을 형성하신 창조주께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하늘과 땅을 바라보아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라. 하느님께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만드셨다고 생각하지 마라. 인류가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다(2마카7,22-23.28).

->298 하느님께서는 무에서 창조하실 수 있으시므로, 성령을 통해서 죄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심으로써(시편50(51),12 참조) 그들에게 영혼 생명을 주실 수도 있으며,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로마4,17)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에게 부활을 통해서 육신 생명을 주실 수도 있다. 또,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어둠에서 빛이 생기게 하실 수도 있으므로(창세1,3 참조) 당신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빛을 주실 수 있다(2코린4,6 참조)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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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식사동성당 (성체성혈) | 2021.11.3.연중 제31주 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