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카를로스신부님-피정

제 15 강의 : 하느님 뜻 안에서의 경배, 흠숭

Skyblue fiat 2014. 7. 10. 13:47

제 15 강의

(2010. 9. 14. 사제 피정)

 

 

15. 하느님 뜻 안에서의 경배, 흠숭

 

 15번째 강의는 9월 14일 십자가의 현양 축일에 하느님 뜻 안에서의 경배와 흠숭에 대한 내용을 보겠습니다.

 

 6권 1903년 12월 17일 장을 보면서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예수님이 경배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경배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을 잘 알려주는 아주 흥미로운 장입니다.

 

 6권 11장 (1903년 12월 17일) :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만나신 순간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께서 하신 흠숭 행위

 

1. 여느 때와 같이 머물러 있다가 복되신 예수님을 잠깐 뵈었는데, 십자가를 지시고 지극히 거룩하신 어머니를 만나고 계신 모습이었다. 나는 그분께 이렇게 여쭈었다. “주님, 더없이 고통스러운 이 만남 속에서 당신 어머니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분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2. “딸아, 그분은 오로지 참으로 깊고 단순한 흠숭 행위를 하셨을 따름이다. 그런데 행위가 단순할수록, 지극히 단순한 영이신 하느님께 그만큼 더 쉽게 결합된다. 따라서 그분은 그 행위를 통하여 내 안에 당신 자신을 부어 넣으시어, 내가 내적으로 하고 있었던 일을 계속하셨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내 마음에 드는 일이었으니, 그분께서 한층 더 위대한 다른 무엇을 하신 것보다 훨씬 더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진정한 흠숭의 정신은 사람이 스스로를 버리고 신적 영역 안으로 들어가서 하느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을 흠숭하며 그분께 결합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3. 입으로는 흠숭의 말을 하면서 정신은 딴 생각을 하는 것이 참된 흠숭이 되겠느냐? 혹은 정신으로는 나를 흠숭하면서 의지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거나, (인간의) 한 능력, (이를테면 지성으로는) 나를 흠숭하면서 다른 능력들은 온통 불온한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을 원한다. 내가 그에게 준 일체가 다 내 안에 있기 바란다. 이것이 피조물이 나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예배 행위 - 흠숭 행위인 것이다.” 

 

 우리가 다른 장에서도 늘 보았듯이 이 장에서도 루이사가 하느님에 대해서 묵상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뒤따라서 나오는 글들은 루이사가 관상한 것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을 관상하고 묵상하는 것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피조물은 절대로 예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이 기도하면 예수님은 큰 사랑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래서 이 글들은 루이사의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입니다. 풍성한 응답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루이사가 예수님께 마리아에 대해서 여쭈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을 보고 성모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물어봤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성모님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만 참으로 깊고 단순한 흠숭행위를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간단하고 단순한 흠숭 행위가 무엇이었는지를 계속해서 설명하십니다. 흠숭 행위가 무엇인지 두 번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2 “내 안에 당신 자신을 부어 넣으시어, 내가 내적으로 하고 있었던 일을 계속하셨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내 마음에 드는 일이었으니, 그분께서 한층 더 위대한 다른 무엇을 하신 것보다 훨씬 더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었다.”(천상의 책 6-11,2)

 

 우리는 복음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한 외적 행동들에 대한 이야기를 봅니다.

예를 들면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도와준 일이 있습니다. 베로니카가 있었고 또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예수님이 고통받으시는 것을 보고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에 기록이 안 되었지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동안에 다른 여러 가지 일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외적으로 도와드린 일들이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내 어머니, 우리 어머니가 하신 일이 그런 모든 일보다 가장 뛰어나고 가장 나를 기쁘게 해주는 위대한 일이었다고 하십니다.

 

 첫 번째 설명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마리아가 내 안에 당신 자신을 부어 넣으시어”

다른 설명에서는 “사람이 스스로를 버리고 신적 영역 안으로 들어가서”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을 흠숭하면서 한다. 그러면 영혼이 나와 결합된다.”

 

 첫째 설명에서는, “마리아께서 내가 내적으로 하고 있던 일들을 그대로 계속했다.” 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은 첫 번째 설명입니다.

어저께 우리가 읽었던 장들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그분 안에서 기도하는 것을 원하셨다.” 라고 했습니다.

 

 내 뜻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내 뜻 안으로 들어오면 그 안에 모든 것들이 다 있다. 하느님도 있고 모든 피조물도 다 있다. 그래서 나의 뜻 안으로 들어오면 하느님과 모든 것들이 그 안에 있다. 지금 네가 그 뜻 안으로 들어오면 그것들이 그냥 네 것인 양 다 감싸 안고 거기 있는 그 모든 것을 네가 취해서 그것을 나한테 다 주고, 또 그것들을 가지고 네 형제자매들에게 가서 나누어 주어라, 내가 한 모든 일들은 그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한 것이었다." 라고 하십니다.

 

 어저께 우리가 읽었던 것과 지금 설명하고 있는 흠숭하는 행위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지금 흠숭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이 흠숭행위에서 우리는 그분과 하나가 되고 일단 우리가 그분과 하나가 되면 그분이 하는 일을 우리가 계속 하는 것이 됩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고, 완전한 흠숭이시고, 그러면 우리가 그분의 모든 행위와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그 영원한 행위, 하느님 사랑의 영원한 행위는 그 안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보속과, 사랑에 대한 응답과, 영광, 찬미, 그런 모든 행위가 영원한 삶 안에, 생명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멜깁슨의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성모님이 예수님을 껴안았습니다. 껴안으실 때에 성모님은 말이 없고 예수님이 말합니다. 물론 성모님이 하신 말씀이 하나는 있습니다. ‘나 여기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 내가 모든 것을 다시 새롭게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하고 있는 거라고, 새롭게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때 성모님이 예수님 안에 당신 자신을 집어넣어서,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예수님이 하는 것을 모두 함께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전 인류의 역사를 실제로 다시 새롭게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의 모든 죄를 보속하시고 그걸 다 다시 체험하시고,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성부님께 모든 피조물들이 드려야 하는 완전한 영광을 드렸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이 하시던 이 모든 것을 계속 같이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완전한 흠숭 속에서, 완전한 흠숭 행위 안에서 이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다 반복해서 하시니, 성모님이야 말로 진정한 공동 구속자입니다.

 

 흠숭은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이고 또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함께 행한다는 것이니 그분이 하시는 일에 완전하고 순수하고 거룩하게 같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첫째 원인은 아니고 성모님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그 안에 둘째 원인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절대로 어떤 것의 원천도 아니고 어떤 것의 근원도 아닙니다.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것은 그분이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 안에서 우리가 당신과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다음 장으로 가겠습니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여기 흥미로운 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 마음과 능력, 의지와 지능과 기억, 우리의 힘, 우리의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 안에 우리의 모든 것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지능, 능력, 기억, 마음이 다 거기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입으로는 좋은 말을 하면서 우리의 마음이나 생각은 딴 곳에 가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교회의 학자인 아빌라의 데레사는 ‘마음은 딴 데 가 있으면서 소리로 하는 소리기도, 그것은 기도가 아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정신의 기도가 아닌, 마음의 기도가 아닌 소리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그 소리기도가 주님을 모욕하는 게 됩니다.

 

 내가 만약 당신에게 이야기를 하러 와서 입으로는 말하면서 정신은 다른 곳에 있으면 내가 당신을 모욕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진 것이 피조물이 주님께 대하여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예배행위이고 흠숭행위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피조물에게 준 것 모두를 다 도로 다오. 내가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완전히 주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6권 42장 (1904년 6월 6일) :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을 따르려면 용기와 충실성과 극히 깊은 주의가 필요하다

 

1. 평소대로 머물러 있노라니 그분께서 나의 내면에서 잠시 모습을 보여 주셨다. 처음에는 그분만이 보였고, 나중에는 성삼위 한 분 한 분이 다 보였는데, 모두 깊은 침묵에 잠겨 계셨다. 나는 그분들의 현존 안에서 늘 하던 대로 내적 일을 계속하였다.

 

2. 그리고 성자께서 나와 일치하시려는 것 같아서 그저 그분을 따랐을 따름이다. 하지만 일체가 침묵이었고, 이 침묵 속에서 내가 하느님과 하나 되고 있었으니, 내 온 존재가, 내 애정과 심장 박동과 소망과 호흡이 지엄하신 임금님께 대한 깊은 경배로 바뀌는 것이었다. 이런 상태가 얼마간 지속된 뒤에 그 세 분께서 한꺼번에 입을 여시는 것 같았는데 그러나 오직 하나의 음성을 이루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3. “사랑하는 딸아,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네 안에서 하시는 일을 따르려면 용기와 충실성과 극히 깊은 주의가 필요하다. 네가 하는 모든 일은 네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네가 하는 것이라고는 다만 네 영혼을 하느님께 거처로 내어 드리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왕이 초라한 오두막을 가지고 있는 가난한 여인에게 그 오두막을 거처로 달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일이 너에게 일어난다. 그 여인은 왕의 요청대로 그것을 내어 주고 왕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한다. 그리하여 그 초라한 오두막은 왕이 거처하기에 부와 고상함과 영광과 온갖 좋은 것을 다 내포하게 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누구의 것이겠느냐? 왕의 것이다. 그러니 왕이 거기를 떠난다면 그 가난한 사람에게는 무엇이 남겠느냐? 전과 같이 그 자신의 가난만 남을 뿐 아니겠느냐?” 

 이 장에서 주님이 강조하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지속적인 흠숭 경배이기 때문에, (주: 주의를 기울인다는 말은 루이사의 글에서 몇 백번, 몇 천 번 나옵니다.) 주님께서 계속 여러 번 루이사에게 말했습니다.

"주의를 기울여라. 주의를 집중해라."

왜 그랬는지 주님께서 설명하십니다.왜냐하면, 신성이 네 안에서 작용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이고 생활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내가 또 하느님 뜻 안에서 작용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굉장히 주의를 집중해야 됩니다. 우리가 어떤 초대를 받고 있느냐 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것과 동일시되고 하나로 합쳐져야 됨을 요청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의가 다른 데로 흩어져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과 하나로 일치하겠습니까? 하나가 되겠습니까?

  다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이야기로 가면, 만약 레오나르도 다빈치하고 똑같은 그림을 그리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하나하나를 다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거기에 주의를 집중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어떻게 똑같은 그림을 그릴 수가 있겠습니까? 못 그립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내면을 주님의 내면과 하나로 합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눈에 보이는 예수님으로 모시고 있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다 모방할 수 있도록 우리 옆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물리적으로 모시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성부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지고 있는 순수한 지향, 거기에 합쳐져야 되며 그렇게 같아져야 됩니다. 단순하고 깨끗해져야 되고 합쳐져야 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지향은, 목적은 완전히 예수님 안에 하나로 합쳐지는 것,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용기와 충실성과 깊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질문하신 것들 중의 하나는, 하느님 뜻 안에서의 기도, 하느님 뜻 안에서의 행동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게 무엇이냐? 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지금 설명한 것이 그 질문에 관련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셨는데

 “무엇이나 내 안으로 들어오려면, 그것이 나에게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다. 말씀만이 아니라 모든 게 성령에 의해서 영감을 받지 않은 것이라면 들어올 수 없다. 그러니까 성령의 감도에 의한 것, 내 안으로부터 나온 것, 그런 것들만이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야고보 사도가 야고보서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열렬히 갈망하신다.”(야고보 4,2b-3.5)

 하느님 뜻 안에서의 기도와 행위가 되기 위한 첫째 조건은 하느님 뜻에 맞는 것, 합치되는 것이라야 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의 감도를 받은 것이라야 됩니다.

하느님 뜻에 맞는 것, 합치되는 것이 아니면 절대로 하느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둘째, 그것을 그분의 뜻 안에서 하기를 우리가 원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조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그분 안에서의 행동과 기도의 의미를 알고, 우리가 하느님 뜻 안에서의 공로와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고 하려고 하기 때문에 중요한 조건 두 가지를 말씀드린 것입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첫째 조건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하느님 뜻에 맞는 일만 한다, 맞는 것만 기도하고 행동한다는 그 첫째 조건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인류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첫째 조건만 가지고 그렇게 해온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세대들 속에서 그런 좋은 행동과 기도가 있었습니다. 벌써 이미 오랫동안 그 모든 것들이 다 하느님의 뜻에 조화롭게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동과 기도들의 주된 행동자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뜻이었습니다. 인간의 뜻이 기도하고 행동하는 것, 그것은 다 해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이 초대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뜻의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것을 그분의 뜻 안에서 그분과 함께 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지금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 지향을 우리 행동 안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앞의 시작 기도에서 우리가 이야기했듯이 주님, 오셔서 내 발걸음 속에서 같이 걸으시고, 내 숨 속에서 같이 숨 쉬고 그렇게 같이 하자고 주님을 초대했습니다.

루이사 글의 다른 장들에서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난 어떤 때 굉장히 슬프다.' 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런 일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때 나에게 같이 하자고 청하면 될 텐데, 그렇게 청하지를 않아서 내가 슬프다. 예수님이 인간이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그렇게 맡아서 어려운데 나를 부르면, 나하고 같이 그 일을 하면 굉장히 쉬울 텐데, 그들은 왜 나를, 왜 예수를 초대하지 않는가?”

 인간들은 좋은 행위를 완성하려고 합니다. 그들의 이 좋은 일들을 완성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그것을 완성하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초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모릅니다. 그 작업을 예수님과 함께 하도록 예수님을 초대하면 되는데 사람들이 초대할 줄을 모릅니다.

 흠숭 경배에 대한 다른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16권 1924년 5월 13일 : 흠숭 경배가 또 다른 무슨 뜻이 있는지?

이 장 전체를 읽지 않고 문단별로 읽겠습니다. 이 문단은 4절까지입니다.

 

16권 55장 (1924년 5월 13일) : 참된 흠숭은 하느님의 뜻과 영혼의 완전한 일치에 있다. 이 흠숭의 완전한 모범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시다. 영혼이 본의 아니게 만드는 사랑의 빈자리를 채우는 법.

 

1 일상적인 기도 중에, 나 자신을 온전히 지고하신 뜻의 팔 안에 맡기고 이 뜻 안에서 거룩하신 임금님께 나의 흠숭을 드리려고 생각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기동하시며 두 팔로 내 영혼을 안으시고 이것을 하늘과 땅 사이로 들어 올리시며 나와 함께 지극히 높으신 분을 흠숭하셨다. 그런 다음 내게 이르셨다. 

 

2 “딸아, 참되고 완전한 흠숭은 하느님의 뜻과 영혼이 한마음으로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에 있다. 영혼이 자기의 뜻을 자기 창조주의 뜻과 하나 되게 할수록 그의 흠숭이 더욱더 완전하고 완벽한 것이 된다.

 

3 그러니 인간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하나 되지 않으면 - 하물며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 흠숭이라고 일컬어질 수 없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그림자, 또는 흐릿한 그늘이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뜻이 지고하신 뜻의 일치의 입맞춤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흠숭은 고사하고 모욕이나 조롱이 될 수 있다.

 

4 흠숭의 첫 행위는 자기 창조주의 뜻을 알아보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실행이 따르지 않으면 말로만 흠숭할 뿐 실제로는 악담과 모욕을 퍼붓는 격이 된다. 네가 흠숭의 참되고 완전한 모범을 알고 싶다면, 나와 함께 거룩하신 삼위 가운데로 들어가자.”

 

 여기 주된 아이디어가 확실히 드러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더 가깝게 더 일치될수록 더 완전하고 더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황 베네딕도 16세께서 기도와 회칙 안에서의 사랑, 그 다음에 바티칸에서의 기도, 무슨 행사 때에서의 기도에서, 작년에 사랑에 대해서 회칙에서 말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내 뜻이 될 때 사랑이 완전해진다. 내 의지와 하느님의 뜻이 하나가 될 때 기도가 완전해진다.”

 왜? 이것이 주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흠숭이라는 것은 하느님 안으로 우리를 녹아 들어가게 하고 그분이 하신 일을 계속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이 모든 것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반복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반복해서 이런 것을 여러 번 말해야 됩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가르치실 때마다 이렇게 하시는 것뿐만이 아니라 피조물이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들어오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여러 번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가르칠 때 반복해서 하는 게 중요합니다. 특별히 사람들에게 우리가 가르칠 때, 특별히 공부를 한 사람들에게 가르칠 때, 우리가 조심해야 됩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과 하나가 되도록 초대를 받았는데, 그분의 영원한 신비에 참여하도록 초대를 받았는데 우리가 그 초대하신 대로 참여할 때에 인간적으로 참여하면 한정이 됩니다. 우리 편에 제한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고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렇게 참여하는데 항상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 있는 것, 우리는 물론 하느님이 하시는 것처럼 그 모든 것을 껴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이니까 그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루이사에게 아주 아름다운 예를 들어 주셨습니다.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네가 위가 아프다고 생각하자. 네가 배가 위가 아프니까 아무것도 먹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음식의 맛은, 냄새는 향기는 너를 귀찮게만 한다. 그런데 그때 아주 친한 친구가 너의 집으로 온다. 그래서 너는 그 친구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 친구가 이제 집에 오면 배가 아픈데도 불구하고 그 친구를 위해서 좋은 음식을 만든다. 주방에 들어가서 친구를 위해서 음식을 만드는 것이 너에게는 큰 희생이다. 그런데 친구는 배가 아프지 않다. 그래서 네가 준비해준 음식을 그 친구가 먹는다. 네가 준비해준 음식을 그 친구는 아주 맛있게 먹고 너에게 이제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문제는 음식에 있었던 게 아니고, 문제는 너의 건강에 있었던 것이다. 너의 배가 아픈 것이 문제였다.”

 

 우리가 주님 뜻 안에서 행동을 하면 그분의 행위가 우리 안에 주된 행동자이기 때문에, 또 그분은 아주 건강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내 행위의 모든 아름다움과 그 모든 충만함을 완전히 즐기십니다. 그래서 내가 작은 피조물이고 내가 좀 아프다고 해도 그게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물론 나는 지금 배가 아파서 내가 하는 모든 행위의 그 아름다움과 좋은 것을 내가 다 즐기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는 피조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무한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그 모든 것을 우리가 즐기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정말로 누리시고 즐기십니다. 비록 내가 드린 것은 부족한 것이지만, 내가 드린 것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받으신 것만큼 그만큼 즐기십니다.

 

 다음 문단을 읽겠습니다. 

5 예수님께서 나를 더 세게 껴안으시면서 - 어떻게 그렇게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 더 높이 끝없는 빛 가운데로 들어 올리셨다. 나는 무화(無化)되는 느낌이었지만, 이 나의 무가 하느님의 생명과 맞닥뜨렸다. 하느님의 생명이 그 자신으로부터 아름다움과 거룩함과 빛과 선성과 평화와 사랑 등의 다양한 그늘을 내뿜었고, 그 그늘들로 인해 나의 무가 알아볼 수 없도록 변화되어, 나를 이처럼 아름답게 꾸미신 분을 매혹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자 다정하신 예수님께서 말씀을 다시 계속하셨다.  

 

6 “보아라, 딸아, 우리 성삼위의 원초적 행위는 우리 뜻의 완전한 일치다. 우리의 뜻은 합일되어 있어서 각 위(位)의 뜻이 서로 구분될 수 없다. 세 위격은 서로 구분되지만 - 그러니 우리는 셋이다.- 우리의 뜻은 하나이고, 이 하나의 뜻이 성삼위 상호간의 완전한 흠숭 행위를 계속한다. 이 뜻의 일치가 거룩함과 빛과 선성과 아름다움과 능력과 사랑의 동일성을 낳고, 우리 안에 질서와 평화의 진정한 다스림을 이룩하면서 우리에게 무한한 기쁨과 행복, 끝없는 지복을 주는 것이다.

 

7 따라서 하느님 뜻과 인간 뜻의 일치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를 잇는 첫 연결 고리이고, 이것으로부터 하느님의 여러 덕이 도관을 통과하듯 피조물 안으로 내려오면서 그 사람 안에 자기 창조주에 대한 참된 흠숭과 완전한 사랑이 생겨나게 한다. 그리고 그는 동일한 도관으로부터 신적 속성들의 다양한 그늘을 받는다. 그러므로 영혼이 높이 올라 이 영원한 뜻 안으로 뛰어들 때마다 아름다워지고, 뛰어든 횟수보다 더 많고 다양한 신적 아름다움을 얻게 된다.

 

 여기에 나오는 설명은 우리에게는 좀 이상하게 느껴지는 설명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삼위일체 위격들 사이의 그 완전한 흠숭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으로 흠숭을 생각할 때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생각했는데 여기서 삼위 사이의 흠숭을 이야기하니까 좀 이상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똑바로 이해하려면 우리 식의 범주를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흠숭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가르쳐주시는 그것을 우리가 그냥 잘 받아드리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흠숭은 사랑하는 상대방의 인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분과 나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 아주 동일시되도록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과 내가 완전히 하나가 되었을 때, 그분이 하는 일을 그분과 함께 내가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흠숭입니다.

 

 세 위격께서 이렇게 하십니다. 이것이 세 위격의 삶입니다.

 성부는 성자 안에서 살고, 성자는 성부 안에서 살고, 그 두 분이 모든 것을 같이 하십니다. 둘이서 함께 모든 것을 하십니다. 그래서 그 두 분이 서로 완전한 흠숭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설명하시는 그 흠숭은 이런 식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주님을 흠숭하는 조건으로 창조주인 주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의 관계는 그 조건에 포함시키지 않으시고 무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의 핵심은 두 뜻의 완전한 일치입니다. 그 세 위격들 사이에 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뜻은 하나뿐입니다. 한 뜻만 있습니다. 세 위격이 계시지만 세 위격의 뜻은 하나입니다.

 

 이 하나 됨이 성덕, 선, 사랑, 힘, 빛 이런 것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 것의 원천입니다. 그리고 세 분의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의 끝없는 지복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무한한 일치를 살도록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복음에서 진정한 흠숭자들은, 진정으로 흠숭하는 사람들은 주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영혼과 진리로 주님을 흠숭합니다. 경배합니다.”

이 모든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그분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아주 잘 설명해 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피조물이지만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첫 의무는 주님을 흠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장은 주님이 흠숭, 경배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해주는 아주 큰 도움이 되는 부분입니다.

 

 보통 우리가 흠숭이라고 하면 바닥에 전신을 완전히 엎드리는 것, 그런 걸 생각합니다. 흠숭이라고 하면 아주 깊이 큰 절을 하는 걸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게 흠숭이 아니고 경배가 아닙니다. 그것이 필수적인 흠숭은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 흠숭의 알맹이입니다. 이것이 진짜 흠숭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이 가르침을 다 지니고 있다면, 우리가 이것을 마음속으로 알고, 이걸 마음속에 가지고 깊은 큰 절을 하거나 땅에 엎드리는 것이라면 그런 외적 행위도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의 알맹이를 우리 마음 안에 가지고 있지 않고 그냥 건성으로 큰절을 하고 엎드린다 해도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헛것입니다.

 

 계속되는 문단들을 읽으면서 이 장을 끝내겠습니다.

8 이것이, 내가 내 뜻을 이루는 영혼이 나의 낙이며 만족이라고 말하는 까닭이다. 나는 이 낙을 즐기려고 내 뜻의 붓을 손에 들고 있다. 영혼이 내 뜻 안으로 뛰어들면 붓을 대어, 나의 아름다움과 사랑과 거룩함과 내 모든 속성들의 그늘을 하나씩 더 그려 넣으면서 즐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는 그 영혼 안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똑같다. 성삼위의 흠숭과 똑같은 흠숭, 나의 뜻, 나의 사랑을 보기 때문이다.

 

9 또한 내가 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무엇이 언제나 있기에, 때로는 능숙한 화가로서 그 안에 나의 모상을 그려 넣고, 때로는 스승으로서 지극히 높고 탁월한 가르침을 주고, 때로는 열렬한 연인으로서 사랑을 주고 또 받기를 원한다. 요컨대 그 영혼과 함께 즐기기 위하여 나의 모든 기량을 동원하며 발휘하는 것이다. 

 

10 그러므로 내 사랑이 사람들에게 모욕 받고 피신처를 찾지 못할 때, 나를 몰아내어 죽이거나 하늘 궁창으로 떠나도록 강요하는 사람들에게서 달아날 곳을 찾지 못할 때, 그때에는 내가 자기 안에 내 뜻을 지닌 영혼에게 피신한다. 여기에 있으면 내 능력이 나를 보호하고, 내 사랑이 나를 사랑하며, 내 평화가 내게 안식을 준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는 것이다.

 

11 나의 뜻은 따라서 모든 것을 - 하늘과 땅과 모든 선을 - 함께 연결하여 하나로 만든다. 여기에서만 가능한 모든 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선이 나온다. 그러니 내 뜻을 실천하는 영혼이 나의 전부이고, 나는 그 영혼의 전부라고 말해도 무방한 것이다.”

 

 하느님 뜻의 선물로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모든 것을 함께 나누실 수 있습니다. 그분의 뜻만이 하느님의 완전함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풍요로움, 인간의 능력은 가능한 한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뜻은 하느님의 완전함을 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만약 당신 자신을 우리들 안에서 보고 싶으시면 그리고 주님께서 당신께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주고 싶으시면, 그분은 당신의 뜻을 우리 안에 집어넣으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만 그런 것들이 가능해집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 뜻 안에 그분의 뜻을 받아들일 만한 여지나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뜻을 우리 뜻 안에 가지고 우리가 그분의 뜻과 완전히 하나가 되면 우리 뜻이 그분의 뜻과 완전히 하나가 됩니다.

 

 우리 영혼 안에서 그 세 분의 흠숭과 그 세 분의 뜻 그런 것을 보십니다. 우리 안에 당신의 모습, 당신과 닮음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다른 모든 행위들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그분의 뜻이 없이는 이런 일을 그분이 성취하실 수가 없습니다.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캔버스도 없고 붓이랑 그림 도구들이 없는 것과 같은 셈이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당신의 프로젝트를 완수하시려면 그분의 뜻이 우리들 안에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다스려야 됩니다.

이 주제는 여기에서 끝내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질문 중에 한 질문에 더 대답을 하겠습니다. 나머지는 앞으로 차차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지금 이런 주제가 자주 나옵니다. 몇 천 년, 몇 천 년 이런 것, 그리스도 전 4000년, 그리스도 탄생 후 2000년, 그 다음에 또 그리스도 탄생 후 4000년 이런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서부터 그리스도까지, 그 다음 그리스도 이후… 이런 시간들은 우리 달력으로 계산한 것입니다. 이 숫자들은 성경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리고 또 교회 교부들도 이런 식으로 시간을 계산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시간을 가르칠 때는 우리와 똑같은 방법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에, 최근에 와서 교회와 교회 학자들이 숫자를 사용하는데 최대한 조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교회가 이런 숫자들에 대해서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 말고 좀 더 이 문자가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 무엇을 상징하는지? 라는 식으로 이해하도록 우리들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성경 안에 이런 숫자들이 나옵니다.

아담에서 예수까지 4004년입니다. 그리고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 1950년, 그 다음 아담에서부터 대 홍수까지 1650년입니다. 그리스도 탄생 1000년 전에 사울 왕과 다윗 왕이 있었습니다. 이런 숫자들이 성경이 우리들에게 말해주는 숫자들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태어나신지 2000년에 와 있는 것, 이것은 확실합니다.

 예수님이 루이사하고 얘기하실 때 이렇게 쓰신 숫자, 몇 년 이런 것은 예수님이 루이사 시대에 교회가 사용하던 방법 그대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무엇인가 더 있습니다. 루이사의 글에서 예수님이 이런 것을 여러 번 얘기하신 것은, 예수님이 루이사 시대의 교회가 쓰던 방법으로 숫자들을 얘기하셨는데 제가 보기에는 뭔가 더 있습니다. 그 이상의 무엇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몇 년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시면서 같은 아이디어를 얘기하시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도 40이라는 숫자가 여러 번 나왔습니다. 40일, 40년 이런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40이라는 숫자로 피조물들 안에 갇혀 있었던 시간 즉, 4000년을 이야기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이 피조물 안에 갇혀 있었던 시간을 40이라는 표현을 써서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40이라고 쓴 것은 4000년을 의미합니다. 100이 40이면 4000입니다. 그런 식으로 40이라는 숫자를 사용하십니다.

 계속해서, 주님께서 광야에서의 40일, 태어나시고 40일 만에 성전에 봉헌되십니다.

이런 표현은 하느님 뜻이 감추어져 있던 40세기하고 관련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다음의 40세기 동안, 하느님의 뜻이 그 4000년 동안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다스리기 시작한 것은 아담과 하와 이후 4000년 만에, 그러니까 40세기만에 시작된 일입니다.

 우리의 예수님과 성모님을 통해서 4000년 만에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이 비유를 계속하십니다.

“내가 부활 후에 40일 동안 이 세상에 머물렀다. 부활 후에 40일 동안 이 세상에 있었던 것은 내 부활 후에 4000년 동안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도 다스릴 것을 얘기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벌써 이 왕국의 2000년을 산 것입니다. 2000년이 지나간 것입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이 다 승천하셨는데 그 나라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예수님과 성모님이 이 세상에 살아계실 때는 물론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부님 질문: 그러나 예수님과 성모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도 하늘나라가 이 땅에 있었나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늘나라가 계속되었습니까, 아닙니까? 

(대답) 계속되었습니다.

 

신부님 질문: 어디에? 누구 안에 계속되었습니까?

(대답) 예수님과 성모님 안에서 계속되었습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 한 행위는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 있는 것입니다.

 

신부님 질문: 아닙니다. 루이사가 올 때까지는 누구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가 2000년 동안 어디에 있었습니까?

(대답) 2000년 동안 살았던 사람들 안에 있었습니다.

 

(신부님 대답) 아닙니다. 성체 안에 있었습니다. 성체 성사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겠다고 하신대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내내 성체 안에 계셨습니다. 이 땅 위에 하늘나라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디 공중에 떠있거나 그런 게 아니라 진짜 땅에 살아 계셨고 예수님은 아주 실질적인, 실체적인 현존을 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신비체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땅을 다스리게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 안에, 성체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를 우리는 벌써 2000년 동안 보유해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이 세상에 있었듯이 40세기 동안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도 다스리는 왕국이 계속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왕국의 마지막 2000년이 지금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글에서 보면, 이제는 일반적인 인간적인 삶으로써 루이사 안에서 또 하느님의 왕국이 있었습니다. 이 왕국이 우리 안에서 이제 계속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지금부터 세말(世末)까지 시간이 얼마인지 그 양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지금부터 2000년 더’ 라고 하십니다.

 ‘세말(世末)까지 앞으로 2000년 더’ 라는 것은 예수님의 그런 말씀들에서 나오는 간결한 결론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세말(世末)까지 2000년 동안 하느님 나라의 뜻은 물론 계속됩니다. 루이사로부터 세말까지 이 세상에서 일상적인 삶을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소유하고 하느님의 뜻을 사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영원하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신부님 미사 강론)

 

 친애하는 형제자매님 오늘 우리는 십자가의 현양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교회 전통 안에 있는 이 모든 가르침에 대해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로마 사람들이 사용했던 이 처형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황제에게 반대하는 사람, 반역자들을 처형하는 그 처벌 방법에 대해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형을 받으셔서 돌아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의 집권자에게 예수님께서 이 처형을 받도록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이 십자가의 신비에 대한 선포를 듣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이 십자가가 어떤 힘을 가졌었는지 우리는 듣습니다. 이 영적인 것, 이 실제적인 모든 것은 하나에서부터 옵니다.

그 하나를 루이사에게 주님이 설명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부딪칠 때, 부딪쳐서 부서질 때 그때 십자가가 생겨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뜻과 하느님의 뜻이 부딪쳐서 십자가가 생겨나면 그것은 사람에게도 십자가가 생긴 거고, 하느님께도 십자가가 생긴 것입니다. 이렇게 부딪치는 것이 죄입니다.

 

 인간 역사의 모든 악에서부터 이 죄가 나옵니다.

죽음, 병, 모든 신비, 분열, 모든 것이 여기서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결과로 지금까지 고통받으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원죄의 결과와 우리 개인적인 죄의 결과로 고통받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것이 나에게도 십자가다.’ 라고 루이사에게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그분의 무한한 사랑은 인간에게 창조의 첫 질서를 되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지혜가 이것을 완성하기 위해서 이 모든 결과를 그분의 인성 안으로 껴안는 것입니다. 루이사에게 주님께서 다른 장에서도 설명하시기를

 

 “너희들 모두가 나의 십자가였다. 모든 인간 존재와 그들의 모든 삶이 내가 강생할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십자가들이었다. 내 생애의 마지막 날에 주어진 십자가는 내 민족들이 나에게 준 것이었다. 그것은 나무로 된 십자가였다. 그 나무로 된 십자가는 내가 가진 이 모든 진짜 십자가의 그늘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자원해서 기꺼이 이 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였다. 인간이 내 십자가의 그 모든 차원을 이해할 수는 없다. 이 십자가는 모든 것,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 각자가 원하는 그 회복 방법, 약들, 그 치료 방법, 구제 방법들이 모두 다 바로 이 십자가 안에 있다.

 

 내가 아주 자원해서 받아들인 이 십자가의 모든 차원은 나의 영광이요, 나의 승리이다. 왜냐하면 내 십자가 안에 구원의 은혜가 있고 내 왕국이 있다. 하느님 뜻의 나라가 회복되고 재건되는 것이 그 십자가 안에 있다.”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영광이 그 십자가 안에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의 근거는 우리가 마지막 시간에 묵상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부께 드리는 완전한 흠숭의 행위가 그 바탕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이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그분의 사명이었고 그분이 그 사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완전한 자유의사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모든 열매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이 열매들로 인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삶은 십자가에서부터 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완전히 동의해서 바친 것 때문에 이게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몫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모든 인간의 삶을 다 품고 그 모든 결과를 우리가 다 품도록 그렇게 초대받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작은 십자가만 지고 가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뜻 안에서 우리의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겁니다.

 

 우리는 구속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지셨던 그런 대단한 사명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무한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만 그런 무한한 사명을 가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일 우리가 통고의 성모님 축일을 지냅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성모님도 예수님과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성모님은 떼어 놓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무한대한 것 안에 작은 정도로 참여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참여가 그분 뜻 안에서 그분과 함께하는 참여라면, 우리가 예수님께 우리 안에서 당신이 하셨던 것을 반복하시게 해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 두 뜻을 합치면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사시면서 완수하신 그 위대한 사명과 그 위대한 삶이 그 안에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삶이 이루었던 모든 공로와 모든 아름다움을 가지고 예수님이 당신의 삶을 우리 안에서 다시 살 수 있게 우리가 해드리면 우리의 작은 십자가는 아주 아름다운 십자가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승리와 예수님의 그 무한대한 사명에 우리도 참여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