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카를로스신부님-피정

제 16, 17 강의: 하느님 뜻의 지속적인 흠숭자

Skyblue fiat 2014. 7. 10. 14:05

제 16 강의

(2010. 9. 14. 사제 피정)

 

 

16. 하느님 뜻의 지속적인 흠숭자

 

   ○ 성령께서 오시기를 비는 기도

 

   오소서, 오 성령님, 창조주시여, 저희 마음에 오소서.

   당신 은총과 함께, 창조하신 저희들을 찾아오소서. 

   오, 정다운 위로자시며 지고하신 아버지의 선물이시여,

   당신은 살아 있는 물이요 불이며 사랑이시고,

   영혼의 거룩한 기름부음,

   하느님의 손가락, 구세주의 약속이시니,

   당신의 일곱 은사를 쏟아 부으시어

   저희 안에 말씀께서 살아 움직이시게 하소서.

   저희의 지성을 밝히는 빛이 되시고

   저희의 마음을 태우는 불꽃이 되시어

   저희의 모든 상처를 당신 사랑의 향유로 치유해 주소서.

   저희를 원수에게서 지켜 주시고 평화를 선물로 주시며

   당신의 힘 있는 인도로 모든 악에서 저희를 보호해 주소서.

   영원한 지혜의 빛이시여, 사랑이신 당신 안에 일치해 계신

   천주 성부와 천주 성자의 위대한 신비를 저희에게 알려 주소서.

   영광이 천주 성부와 부활하신 성자와 보호자 성령께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지금의) 16번째 강의는 하느님 뜻의 지속적인 흠숭자라는 주제를 다루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뜻의 흠숭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을 시작하기 전에 질문하신 것 몇 가지에 대하여 짧게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질문 : 예를 들면 ‘선생님을 위해서 기도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어떤 특별한 사람이나 어떤 특별한 사정을 기도 지향으로 가질 수 있습니까?

답 : 예, 그렇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내가 루이사의 글을 전부 읽으면서 이해한 바로는, 특별히 하느님 뜻 안에서 행동하는 것 하나가 가지는 무한한 가치를 생각해 보면, 하느님 뜻 안에서 기도하면서 동시에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정에 대해서 특별한 지향을 두고 청하면 그 모든 사정들, 그런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가 간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엄마가 내일 무슨 수술을 받습니다. 외과 수술을 받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뜻 안에서의 내 기도를 우리 엄마를 위해서 바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내일 외과적인 수술을 받을 사람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일 수술을 받을 우리 엄마를 위해서 기도를 할 때, 내가 의식적으로 온 세상에서 내일 수술받을 사람 모두에게도 그 은혜를 청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하느님 뜻 안에서의 기도의 은혜의 무한함이 사라져 버립니다. 엄마를 위해서 기도할 때 또 다른 이들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기도해야 합니다. 어제 읽은 것입니다만, 하느님 뜻 안에서의 기도는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한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도 다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질문 : 우리가 듣기로는 루이사의 글은 19권까지만 우리가 출판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우리가 20권에서부터 36권까지도 출판할 수 있습니까?

답 : 지금 당장 20권에서부터 36권까지 출판하는 것은 교회의 뜻이 아닙니다. 1권부터 19권까지는 처음부터 교회의 닐 롭스타와 인프리마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렇게 교회의 검정을 받을 때까지는 누구의 손에도 루이사의 글에 대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책임이 있는 교회의 권위자의 루이사의 글에 대한 공식 판을 기다리는데, 그 권위자는 트라니 대교구입니다. 트라니 교구가 루이사의 글에 대한 공식 판을 내야 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약간의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지금 시작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공식 판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20권부터 36권까지는 내용이 거의 완전하고 충실한 것이기 때문에 미리미리 번역을 해 두었다가, 트라니 대교구에서 공식 판이 나오든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그런 것이 나오면 그때 우리가 번역해 놓았던 것을 출판할 수 있습니다. 20권에서 36권까지 공부도 할 수 있고 연구도 할 수 있으니까 지금이라도  번역된 것이 있으면 우리가 읽고 공부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일반 사람들과는 함께 하지 말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아직 공식적인 책자나 승인도 안 나왔고, 사람들은 우선 1권부터 19권까지를 먼저 알아야 되니까 사람들을 데리고 함께 공부하는 것은 하지 마십시오.

 

질문 : TV 같은 데 나가서 강의를 할 수 있습니까?

답 : 할 수 있습니다. 할 수는 있는데 굉장히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그냥 일반 행인들 같은 사람들은 하느님 뜻을 받아들이는데 준비가 안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준비 안 된 사람들이 TV 같은 것을 보고서 대충 알게 되면 아주 쉽게 굉장히 혼란스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TV나 홍보매체를 통해서 무엇을 할 때에는 아주 간단하고 아주 기초적인 것만을 강의해서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아주 조심스럽게 해야 됩니다. 몇 년 전 미국에서, 그렇게 홍보매체를 사용해서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중적으로 전파하는 것을 시행했다가 말할 수 없이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미국에서의 경우입니다. 그래서 교회 권위자가 중재에 나서서 하느님 뜻을 전파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뜻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니까 단계적으로, 굉장히 조심스럽게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질문 : 방금 중재로 하느님 뜻 전파하는 것이 금지 당했다고 했습니까?

답 :  교회지도자가 중지를 시켰다는 말입니다. 인터뷰를 통해서 하느님 뜻 전파를 중지하라고 했습니다.

 

질문 : 그럼 공식적으로 금지한 것입니까?

답 : 미국의 많은 주교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트라니 대교구의 카사티 대주교님 자신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질문 : 미국에서만 중지하라고 하셨습니까?

답 :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다 중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불평을 말하는 아주 많은 연락이 왔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계시는 교황 대사님조차도 트라니 교구의 카사티 대주교님에게 불평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카사티 대주교님이 하느님 뜻을 추진하는 우리와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파하는 일을 일단 중지하고 굉장히 조심스럽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하느님 뜻 영성은 대중적으로 퍼트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아주 잘 설명하면서 전달해야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나중에는 그렇게 대중적으로 전파할 때도 올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사람들과 사제들이 이걸 받아들일 만큼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공격할 준비들이 되어 있는 상황으로까지 보입니다.

 

이제 지속적인 흠숭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마리아넬라께서 쓰신 편지가 여기에 있습니다만, 그것을 보기 전에 먼저 마리아넬라와 내가 이것을 시작할 수 있게 해주었던 원인, 계기를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제가 21권에 있는 것을 조금 읽겠습니다.

 

21권 2장 1927년 2월 26일 :  권능, 지혜, 사랑의 끈 셋을 가진 영혼. 모든 조물 안에 현시된 하느님 뜻.

 

16 아! 사람들이 창조된 만물 안에 나타난 내 뜻의 모든 현시들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언제나 경배하는 자세로 있을 것이다. 내 뜻의 향내가 퍼진 꽃핀 들판에 현시된 내 뜻에 경배하기 위해서, 또한 내 뜻의 온갖 단맛이 퍼진 열매 달린 나무들에 현시된 내 뜻에 경배하기 위해서 말이다.

 

17 내 뜻이 거룩하고 특별한 자기 현시를 하지 않은 조물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뜻에 합당한 영예를 주지 않으니, 모든 조물 안에 나타난 ‘지고한 피앗’의 현시에 항구한 경배를 유지하는 것이 너의 임무다. 딸아, 너는 다른 경배자도 피조물 편의 사랑의 보상도 없이, 이 뜻의 영구적인 경배자로 자기 자신을 바쳐야 할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성체 안에 예수님 자신이 현시되어 있습니다. 성당에서, 혹은 경당에서, 혹은 성지에서 그분의 뜻은 성체로서 현시되어 있고 아울러 그분의 뜻은 모든 피조물 안에 현시되어 있습니다.

 

 성체 현시의 경우도 예수님이 거기에 계신 것을 우리가 믿지만 실제로 보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이 몸과 피와 신성으로 성체 안에 계시지만 그래도 우리는 눈으로 보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피조물들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감추어져 있습니다. 보이지는 않습니다. 만일 하느님의 뜻이 모든 피조물들 안에 없다면 그 피조물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각 피조물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은 특별한 현시를 합니다.

 

성체 안에서의 예수님의 현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든지 작은 제병 모양으로 그렇게 현시되어 있습니다. 성광 안의 성체의 모습은 제병 모양으로 현시되어 있습니다. 멕시코에서나 아르헨티나에서나 여기서나 성광 안의 제병 모양으로 현시되는 것은 모두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뜻이 피조물들 안에 현시될 때는 그 피조물에 따라 형상이 각각 다 다릅니다.

 

성체 안에서는 예수님을 가리는 베일, 예수님을 안 보이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그 작은 제병의 형상입니다. 또 하느님 뜻의 현시는 이 피조물들 안에서는 빛으로 덮여 있고, 바람으로 덮여 있고, 물로 덮여 있고, 온갖 종류의 꽃과 향기로 맛과 형태로 덮여 있습니다.

 각 피조물 안에서의 하느님 뜻의 현시는 각 물건들 안으로 하느님의 뜻이 들어간 것입니다. 하느님 뜻이 그 안으로 들어간 것과 같이 그렇게 하느님의 뜻이 거기에 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체 성사 안에서는 내가 성체로 현시될 때, 비록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흠숭자가 조금은 있다. 그런데 하느님 뜻의 현시는 흠숭자가 하나도 없다. 또 피조물들로부터의 사랑의 교환도 없다. 그러니까 제일 높은 피앗이 모든 피조물들 안에 현시되어 있는데 그 현시 안에서 지속적인 조배를 계속하는 것은 너한테 달렸다. 네가 그 지속적인 조배를 지속해라. 그 지속하는 것은 너한테 달렸다. 라고 루이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내 딸아, 네가 너 자신을 이 뜻의 지속적인 흠숭자로 봉헌해라.”

그래서 이 말씀들, 이 구절에 감동되어 마리아넬라와 내가 지속적인 흠숭자들의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수도회처럼 아주 완전하게 지속적인 흠숭을 해나가는 그런 방법으로 수도회가 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도회의 제3회처럼 일반에게도 열려 있는 지속적인 흠숭자 모임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수도회가 될 모임은 마리아넬라와 내가 벌써 시작을 했습니다.

이미 설립되어 있습니다. 이 하느님 뜻의 지속적인 흠숭자의 제3회 같은 모임에는 결혼한 여자든지 처녀든지 모든 신분의 여자들도 남자들도 다 들어올 수 있습니다. 형제회라든지 그런 단체가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삶을 지속적인 흠숭자로 완전히 바쳐서 그렇게 수도자처럼 살고 싶은 사람들은 레온교구 주교님의 축복 하에 현재 시작을 하였습니다. 그 단체의 회헌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은 벌써 레온 교구의 찬슬레(교회의 법리 고문)와 함께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벌써 개인적인 허원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타이베이(에프라임)의 양로원을 교구의 부탁으로 운영하고 있는데(제1강의 7항 참조) 지금 거기에 살면서 노인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바로 지속적인 흠숭자 회원들입니다.

 

질문 : 진짜로 수도자들입니까?

답 :  아직까지는 개인적으로 서원을 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뜻의 지속적인 흠숭자들은, 지속적인 성체 조배자들처럼 항상 성체 앞에만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속적인 성체 조배자들이 하듯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하루 중의 몇 시간은 성체 조배를 합니다. 이것은 제3회 같은 모임에 대한 말씀은 아닙니다. 수도자처럼 될 사람들은 하루에 얼마동안은 성체조배를 하지만, 나머지 시간은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기 위하여 각각 다 자기 자리에서 교회가 요청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이베이의 경우에는 양로원 노인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조금씩 조금씩 발견해 가고 있는 것은 이 그룹에서 어느 정도는 관상생활 같은 것을 하기를 주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삶의 한 부분은 관상생활의 삶에 있고, 또 한 부분은 활동적인 면을 원하시는 것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런 모든 것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전파하는 일을 하거나 하느님 뜻의 전파를 돕는 일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도회원이 될 그룹과 제3회원이 될 그룹, 이 두 그룹 모두는 하느님 뜻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되고, 자기들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성취해 나가는 그런 식별을 해야 되고, 또 순명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제3회원이 될 사람이 만약 한 가정의 엄마라면 엄마로서의 모든 것을 다 하면서 이 지향으로 사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통역을 하고 있는 벤실라 수녀님이 이렇게 지속적인 흠숭자 회원이 되려면, 벤실라 수녀님은 자기 수녀회 삶을 더 완전히 잘 살면서 거기에 추가해서 하느님의 뜻 전파를 하고, 지금 말한 것을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도자는 제3회원 같은 일반회원은 될 수 있지만 수도회와 같이 함께 사는 것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수도회 안에 들어가서 거기서 살면서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지속적인 흠숭자 제3회 회원이 될 수 있습니까?

 “내 뜻을 지속적으로 흠숭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어떤 피조물도 내 사랑에 응답을 해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루이사 네가 지속적인 흠숭자가 되어라.” 라고 조금 전에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청하셨습니다. 지속적인 흠숭자의 제3회원이 되고 싶으면,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을 제대로 느끼고, 이것에서 깊이 감동받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살고 있는 생활의 상황 안에서 하느님 뜻을 완성하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매일 수난의 시간들을 읽으려고 자신을 봉헌하고 헌신하고, 또 그 약속을 해야 됩니다. 꼭 이행해야 합니다. 영적 순례도 특별히 꼭 해야 됩니다. 물론 수난의 시간들도 자신을 전적으로 투신해서 의무적으로 하고 영적 순례도 해야 되는데, 영적 순례야말로 진정으로 이 하느님 뜻에 지속적인 흠숭을 하는 것입니다. 이 영적 순례는 아주 중요하므로 꼭 해야 되고, 동정 마리아 책에 있는 그 과목들을 읽어야 되고, 그리고 루이사의 글을 매일 읽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 4가지는 누구나 다 해야 됩니다. 어떤 할머니든지, 어떤 수도자든지 지속적인 흠숭자가 되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4가지를 다 해야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지속적인 흠숭자로 불림을 받은 사람, 수도자처럼 살도록 불림을 받은 사람은 이 4가지가 다 그들의 삶 안에서 실천되어야 하고, 이 4가지를 더 신중하게 더 깊이 해야 됩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 자신들의 삶을 완전히 봉헌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취지를 어떻게 실천하는지, 법적으로는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것을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 확실히 정해진 게 아니고 지금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 주교님이 이 모든 것을 시작하도록 지지해주고 계십니다.

 

질문 : 레온의 주교님이십니까?

답 : 예, 레온의 주교님이십니다. 세살 보스코 비바스 주교님이십니다. 로마의 황제 시저와 같은 스펠링입니다. 돈 보스코의 보스코이고, 비바스는 살아있는, 만세와 같은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또 예루살렘의 주교님이 이 공동체를 좋아하시고 지지해주고 계속 밀어 주고 계십니다.

 

질문 : 두 주교님이 이 뜻의 내용을 잘 알고 계신지요?

답 :  이 내용을 다 안다고 할 수는 없고 지금 알아가고 있는 중이십니다. 물론 레온교구의 주교님이 축복을 해주셨습니다.

 

지금 지속적인 흠숭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레온 교구에 있는 하느님 뜻 집은 교회 법적으로 이미 승인되어서 세워진 집입니다. 타이페이의 하느님 뜻 집도 레온 교구의 주교님의 허락 하에, 축복 하에 시작된 것입니다.

 

주교님의 축복으로, 교회의 그 모든 기관들은, 수도회들은 탄생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뜻 집은 레온 교구에서 한번 탄생했습니다. 레온 교구에서 법적으로 하느님 뜻 집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일단 레온에서 교회 법적으로 정식으로 생겨났으니까 그 다음에는 다른 교구 주교님들이 초대하면 거기에서도 법적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지금 타이페이에 있는 하느님 뜻 집은 레온 주교님의 축복 하에 공식적으로 설립된 집으로서 지금 저는 그곳 주교님의 초청으로 그곳에 들어가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 집은 교회 안에 공식적으로, 교회 법적으로 생겨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초청만 있으면 어느 교구에나 갈 수 있고 그것이 하느님 뜻 집이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 뜻 집 안에 이 지속적인 흠숭자 회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속적인 흠숭자 회는 아직은 하느님 뜻 집 안에 있습니다.

앞으로는 교회 법적으로 따로따로 독립해서 지속적인 흠숭자 회가 생길 수도 있지만 아직은 모릅니다.

 

질문 : 하느님 뜻 집이라고 하는 것이 단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건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답 : 단체입니다. 수도회처럼 단체입니다.

 

질문 : 그럼 교구에서 인정하는 평신도 단체와 같이 그런 식으로 되어 있나요?

답 : 협회의 이름입니다. 어느 건물 속에서나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 뜻 집 회원들은 어느 집에서나 살 수 있습니다. 수도회 같이 그 단체의 이름이 ‘하느님 뜻 집’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뜻 집은 실제적인 건물도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집은 온 사방에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또 그 지역 주교의 인정을 받고 초청을 받으면 어디나 갈 수 있습니다.

 

질문 : 명칭이 하느님 뜻 집으로 된 이유는?

답 : 루이사의 가르침과 루이사가 받은 모든 하느님의 뜻이 다 이루어지는 곳이 하느님 뜻 집이라는 이름을 갖기를 안니발레 성인이 원했기 때문에 거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동정 마리아 책에 하느님 뜻에 대한 설명이나 강의는 하느님 뜻 집에서 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질문 : 그러면 하느님 뜻 집의 깊은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우리 각자가 다 하느님 뜻 집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뜻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 집이란 말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느님의 뜻이 다스리는데, 그 뜻이 다스리는 집이 되기를 원하는, 모두가 다 나자렛처럼 하느님 뜻이 다스리는 집이 되라는 그런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뜻 집이란 말은 나자렛에서 하느님의 뜻이 정말 실제적으로 다스렸기 때문에 나자렛처럼 되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질문 : 이제 다른 면 하나는, 남자들은 그럼 어떠냐? 하는 것입니다.

답 : 신부들도 다 그 지속적인 흠숭자 제3회 같은 것에 들 수 있고,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신부님들이 특별히 그렇습니다. 지속적인 흠숭자회 수녀처럼 평생 헌신하면서 사는 그룹이 있고, 그 다음에 아까 여자든지 엄마든지 수녀든지 들어갈 수 있는 여자들 그룹이 있고, 지금 이 남자 그룹이 있는 것입니다. 이 그룹에는 신부님도 들어가고 일반 남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 그룹이 있습니다. 수도회에 들어갈 사람들, 그 다음에 남자 제3회원, 여자 제3회원이 있습니다.

 

하느님 뜻의 지속적인 흠숭자들에 대해서 우리가 읽은 것은 그 지속적인 흠숭자들의 정신적인 기반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계시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안 하셨으면 누가 이런 생각을 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안 하셨으면 일반적으로 교회에서는 성체조배, 성체에 계시는 예수님을 조배하는 것, 그 얘기만 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성체조배만 생각했지 모든 피조물 안에 하느님의 뜻이 현시되어 있고 그 뜻을 우리가 흠숭해야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안 하셨으면, 아마 우리는 죽을 때까지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지속적으로 흠숭하는 것에 대한 인식을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당신의 뜻이 알려지고 계시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주님께서는 그 영원한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또 우리가 알기를 원하시고 이 모든 것을 통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 장의 이 말씀에서 우리가 우리의 흠숭으로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 확실히 드러납니다. 우리가 하느님 뜻 집에서 시작한 일들, 특별히 마리아넬라가 시작한 일은 이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첫 번째 사람은 언제나 우리의 동정 마리아 성모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 중에서는 루이사가 첫 번째입니다. 루이사가 이 지속적인 흠숭자가 되고 이렇게 하느님 뜻을 흠숭하는 것을 시작한 첫 번째 사람입니다.

 

그 다음으로 이제 우리 모두가 지속적인 하느님의 뜻을 흠숭하는 일을 하도록, 루이사를 따라서 하라고 불림을 받았습니다. 제가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지속적인 흠숭자들의 삶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고 하는 회헌이나 회칙 같은 것이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미 레온 주교님의 축복을 받았고 지금 이렇게 추진해 나갈 수 있도록 일생을 헌신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성지의 주교님의 허락 하에서 지금 이 과정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하느님 뜻 집이 예루살렘 성지에 있으니까 마리아넬라도 예루살렘 성지에 살고 있습니다만, 만약에 어떤 여자가 성지에 가서 수도자처럼 지속적인 흠숭자로 일생동안 그렇게 사는 삶에 관심이 있다면, 평생 지속적인 흠숭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연락을 해 주십시오. 마리아넬라에게도 알려서 그런 성소가 있는지 식별을 해 볼 수 있게 알려주십시오.

 

하느님의 섭리로 예루살렘 성지에서 하느님 뜻을 사는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존재하기를 하느님이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지금 성지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아주 실제적으로 지역 교회의 요구에 확실하게 응하면서 지금 양로원에서 노인들을 돌보고 있는 것입니다. 양로원을 운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지에 있는 더 중요하고 더 큰 목적은 그 대교구, 그 지역 교회에게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을 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지의 지역 교회가 하느님 뜻이 좋다, 전파하라, 그것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지의 지역 교회가 ‘당신들의 사명인 하느님 뜻 전파하는 것을 충실히 완수하십시오. 그러면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이왕이면 이 양로원과 이 피정의 집을 돌보면서 우리 교구를 도와주십시오.’ 라고 우리에게 요청을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 주님께서 거기에서 지금 살고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분명히 주님의 요구입니다.

 

다시 한 번 누가 예루살렘 성지에 가서 마리아넬라와 함께 이렇게 지속적인 흠숭자의 삶을 살려고 희망한다면 하느님 뜻 집 사람으로서 나도 그분들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럴 지향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꼭 알려주십시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실제적으로 지금 필요한 사람은 여자뿐입니다. 여자여야 되고, 거기 가서 일도 하고 살 수 있을 만큼 육체적으로 건강한 여자라야 되고, 아랍어를 할 줄 알면 기가 막히게 좋지만, 아랍어는 몰라도 영어를 하는 여자면 아주 좋습니다. 지금 양노원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영어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양노원에 있는 노인들 중의 몇 사람도 영어를 좀 합니다. 그러나 영어를 몰라도 별다른 장애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거기로 갈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지에 가는 것을 여행자나 순례자로 가려는 마음으로 가면 안 됩니다.

 

하느님 뜻을 흠숭하는 지속적인 흠숭자로서 죽을 때까지 일생동안 살고자 하는, 주님의 부르심을 느끼는 사람이면 됩니다. 그런 사람만이 갈 수 있습니다.

 

 아멘.

 

 

 

 

제 17 강의

(2010. 9. 14. 사제 피정)

 

17. 하느님 뜻의 지속적인 흠숭자

 

 주님의 기도

 성모송

 

시작기도에서 나오는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아주 중요한 점이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뜻 안으로 들어가오니…” 루이사는 여러 면에서 벌써 하느님 뜻 안으로 들어갔고 그 안에서 자신이 녹아들어 그분의 일에도 어느 정도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생각이 루이사의 마음에 생겨났습니다.

 

2 “하느님의 뜻은 안 계신 데가 없어 내가 이미 그 안에 있는데도 '저는 당신 뜻 안으로 들어갑니다.' 하고 말씀드리다니?” (천상의 책 15-37,2)

 

그래서 주님께서 루이사한테 말씀하셨습니다.

 

15권 37장 1923년 6월 21일 : 의지적으로 하느님 뜻의 성역 안으로 들어와 활동하는 사람과 아무런 의식 없이 활동하는 사람의 엄청난 차이

 

2 그런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한편으로 이런 의문이 생겼다. ‘이건 어째서일까? 하느님의 뜻은 안 계신 데가 없어 내가 이미 그 안에 있는데도 '저는 당신 뜻 안으로 들어갑니다.' 하고 말씀드리다니?’

 

3 내가 그러고 있노라니 인자하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걸음을 옮기시며 이르셨다.

딸아, 내 뜻은 본성상 어디에나 있으므로 어디서든지 사람을 감싼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의식 없이 기도하고 행동하는 사람과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의식하면서 자기 의지로 내 뜻의 성역 안으로 들어와서 행동하며 기도하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내 뜻은 본성상 어디에나 있으므로 어디서든지 사람을 감싼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의식도 없이 기도하고 행동하는 사람과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의식하면서 자기의 의지로 내 뜻의 성역 안으로 들어와서 행동하며 기도하는 사람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하느님 뜻이 너무 크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하느님 뜻 안에 있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하느님 뜻을 알고 하느님 뜻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고, 또 하느님 뜻 안에서 행동하고 싶어서 하느님 뜻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에 관련해서 말하면 여기에 같은 것이 적용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이걸로 제가 신부님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대신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인성 안으로 들어가느냐?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겠습니다.

 

지난 번 다른 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신 것을 우리가 읽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내 앞에 있고, 나는 그들을 다 알고 그들을 내가 전부 다 각자의 이름으로 부른다.다 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머리로서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예수님 안에 있는 것과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싶어서 예수님 인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분을 알기 때문에 내가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이 내 방문 앞에서 방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나와 함께 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께 문을 열어드려서 예수님을 들어오시게 하는 것, 이 두 가지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인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의 사랑으로, 우리의 의지로, 뜻으로 예수님의 인성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여러 장에서 어떻게 예수님의 인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단계적으로 예수님이 설명하신 것이 많이 있습니다. 열쇠, 핵심은 내 자신이 그것을 알고 원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모든 피조물 안에 주님의 뜻이 현시되어 있는 것, 성체 현시처럼 현시되어 있는 장으로 가겠습니다.

 

 21권 2장 1927년 2월 26일 :

권능, 지혜, 사랑의 끈 셋을 가진 영혼. 모든 조물 안에 현시된 하느님 뜻.

 

7  그 후 나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사’, 곧 성체가 성전에 현시되어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혼자 속으로 생각하기를, ‘나에게는 성체 현시도 조배도 없구나.’ 하였다. 그러자 다정하신 예수님께서 내게 다른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을 주시지 않고 내 안에서 나오시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너에게는 현시가 필요하지 않다. 내 뜻을 실행하는 사람에게는 내 뜻이 모든 조물 안에 나타내 보이는 더 크고 더 지속적인 현시가 있는 까닭이다. 더욱이 각 조물은 내 뜻에서 생명을 받기에, 존재하는 조물의 수만큼이나 셀 수 없이 많은 현시를 이루는 것이 내 뜻이다.

 

누가 성체 안에 내 거룩한 생명을 형성하느냐? 나의 뜻이다. 성체가 내 지고한 뜻에서 생명을 받지 않으면 그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없을 것이고, 따라서 신자들의 경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단순한 흰 제병에 불과할 뿐이다.

 

10  그런데, 딸아, 내 뜻은 태양 안에 자신을 현시한다. 내 뜻이 내 생명을 숨기는 장막으로 성체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태양 안에서도 내 뜻을 숨기는 빛의 장막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태양 안에 현시된 내 뜻 앞에서 무릎을 꿇고 경배의 입맞춤을 보내며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느냐?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배은망덕하게도!

 

 모든 교회들 안에서 가장 거룩한 성체성사의 현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생각했습니다. “내게는 성체 현시도 없고, 성체 강복도 없다.” 루이사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본당에서는 성체 현시와 성체 강복 같은 게 있지만, 루이사는 성당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 딸아, 너한테는 성체 현시는 필요가 없다. 내 뜻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창조물 안에서 나타나는 내 뜻의 현시가 지속적으로 더 훌륭하게 더 크게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만 보면 우리가 나쁜 결론에,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 잘못된 결론이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 뜻 안에서 사니까 우리는 성체성사도 필요 없다는 그런 결론에 도달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결론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걸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루이사 입장을 생각해야 됩니다.

 

루이사가 왜 나한테는 성체 현시도 없고 성체 강복도 없다는 말을 했는지 그 이유를 우리가 알아들어야 됩니다. 루이사는 침대 위에 누워서 하느님의 뜻을 완수하고 있었습니다. 루이사의 경우에는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의 특별한 사정과 관련되지 않는 모든 것은 다 하느님 뜻에 속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루이사한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걸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루이사에게 그것이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의 뜻으로 우리가 병원에 입원해 있고 내일 외과 수술을 받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은 주일입니다. 그런 형편에 있는 우리에게는 주일날 미사에 못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뜻이 우리가 병원에 있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고 또 내일 수술받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루이사의 형편에 대해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아주 깊은 이유를 또 하나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모든 창조물 안에 하느님의 뜻이 현시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당신의 현존에 대해서 그 놀라운 일을 부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창조물 안에 있는 당신의 뜻의 현시가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를 더 설명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모든 피조물 안의 내 뜻의 현시를 흠숭하고 있으니까 성당에 갈 필요도 없고 성체조배를 할 필요도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체현시도, 하느님 뜻의 현시도 모두 다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또 설명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창조된 모든 것들은 각각 다 하느님 뜻에 의해서 생명을 받고 활기를 받기 때문에 피조물들이 존재하는 그 정도만큼 현시가 수없이 많다.”

그 다음에 주님께서 성체 이야기로 들어가십니다.

 

9 “누가 성체 안에 내 거룩한 생명을 형성하느냐? 나의 뜻이다. 성체가 내 지고한 뜻에서 생명을 받지 않으면 그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없을 것이고, 따라서 신자들의 경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단순한 흰 제병에 불과할 뿐이다.” (천상의 책 21-2,9)

 

 그 성체 안에 예수님이 현존하신다는 그 굉장한 선물은 하느님 뜻에서 오는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성체성사를 원하셨기 때문에 성체성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성변화를 일으키는 그 기적도 하느님의 뜻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면 우리가 제병을 축성할 수도 없고 성체를 이룰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기가 막힌 기적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라고 예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에 되는 겁니다. 미사 때마다 하느님의 뜻과 내 뜻이 합쳐져서 그 굉장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를 가지기 위해서 우리는 3가지 요소를 필요로 합니다.

 빵과 포도주, 하느님의 뜻, 사제의 뜻, 이 3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이 셋 중의 하나라도 부족하면 성체성사는 이뤄질 수가 없습니다.

 

 “내 딸아, 내 뜻은 태양 안에 현시된다. 제병이 내 생명을 가리듯이 지금 내 뜻은 태양 안에서 빛으로 감춰진다. 그러니까 빛이 내 의지를 가린다. 그러면 누가 태양 안에 현시된 나의 뜻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그리고 또 흠숭의 입맞춤을 보내주느냐? 무릎을 꿇고서 누가 그렇게 하느냐?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 주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끌어낼 수 있는 잘못된 결론은 무엇이겠습니까? 잘못된 결론은 우리가 태양을 흠숭해야 된다는 것이 됩니다. 태양 안에 하느님의 뜻이 가려져 있으니까, 현시되어 있는데 태양의 빛으로 가려져 있으니까 우리가 태양을 흠숭해야 된다는 이런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지금 교회 안의 공동체들과 수녀님들의 일부도 그러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나무나 자연의 요소들을 흠숭하는 수녀들도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배은망덕한 일입니까? 얼마나 은혜를 모르는 짓입니까? 아무도 하느님 뜻에 경배하거나 감사의 입맞춤을 보내지 않고 있는데, 나무나 자연의 요소들을 흠숭하는 잘못된 결론에 따른 행위, 이런 것이 지금도 그냥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빛의 베일 속에서 사람의 발걸음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그런 행위를 계속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람들로부터 감사도 못 받고, 흠숭의 입맞춤도 못 받는데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뜻은 사람들에게 항상 선행(善行)을 해 주십니다. 그 빛이라는 것에 가려져 있으면서도 사람의 발걸음을 따라가고 또 그 자신의 행동을 계속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어떤 길을 가든 하느님 뜻의 빛은 그 자신이 그 사람 앞에서 발견되도록 만들고, 또 그 사람 뒤에 있어서 그 사람을 이끌고, 빛의 중심에서의 승리와 같이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언제나 열려 있고 빛을 줍니다. 그 사람이 그것을 원하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은 계속 그렇게 좋은 것을 합니다.

 

 복음에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너무나 좋으셔서, 착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고, 착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준다.”

이것은 사람이 못 알아보고 감사하지 않아도 계속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설명에서 주님께서는 굉장히 중요한 것을 우리한테 열어 보여 주셨는데, 그것은 주님이 우리와 굉장히 가까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태양 안에 있는데 태양의 빛들이 하느님의 뜻을 다 가리고 있어서 우리가 못 봅니다. 이렇게 인간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감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태양의 광선과 자연의 빛을 가지고 인간에게 입맞춰 주시고, 포옹해 주시고 이렇게 쓰다듬어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 뜻의 달콤함을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오늘 저녁 우리가 먹었던 달콤한 후식처럼 모든 것 안에서도, 그 향기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이 우리를 어루만지십니다.

 

 우리의 심장 박동이 또 하느님 뜻의 사랑 행위를 가립니다. 안 보이게 합니다. 심장 박동도 본래 안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슴에 손을 대면 심장 박동을 느낍니다. 손을 이렇게 대고 있으면 심장이 박동하는 것,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심장 박동은 우리 일생 동안 예수님께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사랑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인데 심장 박동을 우리가 못 듣고 있습니다. 태양 안에 하느님 뜻의 의지가 있는 것을, 현시되는 것을 우리가 못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문단을 끝내십니다.

 

11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뜻은 멈추지 않는다. 언제나 흔들림 없이 선을 행한다. 빛의 장막에 둘러싸인 채 사람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그의 행위들을 휩싼다. 사람이 어떤 길로 접어들든 내 뜻의 빛이 사람의 앞뒤에 있으면서 그를 승리자처럼 그 빛의 태 안으로 데려간다. 그에게 선을 베풀며 - 설령 그가 원하지 않더라도 - 빛을 주려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다.

 

12  오! 나의 뜻아, 너는 얼마나 막강하고 사랑스러우며 칭송할 만한지! - 변함없이 선에 항구하고 지칠 줄 모르며 (베푼 선을) 도로 거두어들이는 일이 없는 너는!

 

13 성체 현시와 만물 안에서 지속적인 행위로 자신을 드러내는 내 뜻의 현시 사이의 큰 차이를 보아라.

성체 현시의 경우에는 사람이 몸소 밖으로 나가서 성체를 향해 다가가야 하고 그 좋은 것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반면에 만물 안에 나타나는 내 뜻의 현시일 경우에는 내 뜻이 사람을 향해 밖으로 나가고, 사람이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도 좋은 것들을 넘치도록 풍부하게 준다. 그러나 그 수많은 현시들 속에서도 내 뜻에 경배하는 사람은 없다.

 

14  내 뜻은 바다에서 스스로를 현시한다. 성체의 상징인 태양 안에서는 그 자신의 빛과 열을 주고 좋은 것들을 수없이 주되 언제나 침묵 중에 주고, 얼마나 끔찍한 죄악들을 보든 한마디 말도 나무람도 없지만, 바다에서는 물의 장막 속에서 아주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를 나타내 보인다. 그 장막 속에서 철썩대며 말을 하는 것 같고, 세차게 소용돌이치며 노호하는 파도 소리로 무서움에 떨게 하는가 하면, 선박과 사람들을 뒤덮어 바다 깊은 곳에 매장하기도 한다. 그러면 아무도 저항하지 못한다.

 

15  이와 같이 내 뜻은 바다에서 자신의 권능을 현시하고, 물결치는 소리로 말을 한다. 사납게 일어나는 큰 물결로 말하고, 엄청나게 거대한 파도로 말하면서 사람을 불러 내 뜻을 사랑하며 경외하라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것을 본 이 뜻은 거룩한 정의를 나타내 보이면서 바닷물의 장막을 폭풍으로 바꾼다. 그리하여 가차 없이 사람에게 덤벼든다.

 

16  아! 사람들이 창조된 만물 안에 나타난 내 뜻의 모든 현시들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언제나 경배하는 자세로 있을 것이다. 내 뜻의 향내가 퍼진 꽃핀 들판에 현시된 내 뜻에 경배하기 위해서, 또한 내 뜻의 온갖 단맛이 퍼진 열매 달린 나무들에 현시된 내 뜻에 경배하기 위해서 말이다.

 

17  내 뜻이 거룩하고 특별한 자기 현시를 하지 않은 조물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뜻에 합당한 영예를 주지 않으니, 모든 조물 안에 나타난 ‘지고한 피앗’의 현시에 항구한 경배를 유지하는 것이 너의 임무다. 딸아, 너는 다른 경배자도 피조물 편의 사랑의 보상도 없이, 이 뜻의 영구적인 경배자로 자기 자신을 바쳐야 할 사람이다.”

(천상의 책 21-2,11-17)

 

 마지막 설명은 하느님의 뜻이 태양의 빛 안에 현시되는 것입니다. 태양의 빛은 침묵합니다. 아무 말도 안 합니다. 또 하느님의 뜻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봅니다. 그래도 한 말씀도 안 하십니다.

 

 주님은 이런 말씀을 통해서 아주 굉장히 특별한 차원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창조 안에는 하느님의 그 무한함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피조물들 안에는 하느님의 그 무한함이 있습니다. 각 피조물 하나하나가 다 한 가지 가르침을 가지고 있고, 피조물 하나하나가 다 큰 교향악단의 한 악기와 같습니다. 각각 여러 가지 특별한 음을 내면서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악기들마다 각각 다른 소리를 내면서 교향악단 속에서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피조물들이 내 뜻의 이런 현시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또 모든 피조물 안에 있는 내 뜻의 현시에 피조물들이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피조물들은 계속해서 지속적인 흠숭의 행위 속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피조물들은 꽃이 핀 들판에서 내 뜻의 향기를 퍼트리고 있는 내 뜻을 흠숭할 것이다. 열매들을 맺은 나무들도 하느님 뜻의 달콤함과 다양함을 널리 퍼트릴 것이다. 하느님 뜻의 신성하고 특별한 현시를 하지 않는 피조물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모든 피조물 안에는 하느님 뜻의 특별한 현시가 있다. 피조물들이 하느님 뜻이 마땅히 받아야 할 공경을 안 드리고 있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 안에서 하느님의 피앗이 만들어 내고 있는 이 현시를 지속적으로 흠숭하는 것이 너의 본분이고 의무이다. 

 내 딸아, 사람들이 아무도 흠숭하지 않고 어떤 피조물도 사랑의 대답을 보내주지 않는 이 나의 의지에 지속적인 흠숭자로서 너 자신을 봉헌해라. 내 딸아.”

 

 주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무한히 방대한 문을 열어주시는지, 모든 피조물들 안에 있는 이 당신의 기막힌 뜻의 현시를 우리에게 알려주시면서 굉장한 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찬미와 감사와 흠숭이 없는 것은, 피조물들이 그렇게 안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대단한데 아무도 감사하지도 않고 흠숭하지도 않고 찬양하지도 않습니다.

 

 “내 뜻이 모든 것을 돌보면서 모든 피조물들 안에 이렇게 감미롭게 현존하는데, 아무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너를 부른다. 이 모든 피조물들이 하지 않는 이 모든 것을 네가 해달라고 나는 너를 부른다.”

 

 이것이 하느님 뜻의 지속적인 흠숭자들이 해야 될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마리아와 루이사의 도움으로, 이 모든 가르침의 도움으로 인류의 역사상, 교회의 역사상 아무도 행하지 않았던 위대한 과업을 이제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의 흠숭, 조배, 찬양 주님께서 이런 것들을 해달라고 우리 모두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지속적인 흠숭에 대한 이야기는 끝내고, 하느님 뜻에 지속적인 흠숭을 드리는 우리의 의무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질문 : 지속적인 흠숭을 하려면 하느님 뜻 안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뜻을 소유해야 이것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답 : 물론 우리는 하느님 뜻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 뜻 안의 삶에 관한 첫째 가르침은, 하느님 뜻의 지속적인 흠숭자가 되기 위해서 루이사처럼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꼭 루이사처럼 하느님 뜻 안에서 살아야만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뜻에 감사드리고 흠숭을 드리고 찬미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일단 하느님께서 우리 앞에 문을 열어 주시면 들어갈 수 있고 우리는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초대를 받았고 또 어느 정도 조금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신부님의 질문에 감사드립니다. 누가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지, 누가 하느님 뜻 안에서 살지 않는지에 대해서 말을 하게 되어 지금 질문하신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먼저 질문하신 신부님한테 제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질문 :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까?

답 :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질문 : 그리고 또 무엇이 있습니까?

답 : 세례를 받아야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으면 그러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세례를 받는 순간에 벌써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세례 받았다고?

물론 아닙니다. 세례받은 사람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입니다. 하느님 뜻에 대해서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뜻을 받는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일단 이 하느님 뜻의 기쁜 소식을 받고, 주님께서 당신 뜻 안으로 들어오도록 신부님을 초대하시고 그리고 신부님이 주님께 “피앗! 네, 제가 원합니다.” 하고 주님께 말씀드리면, 그때 신부님은 그 과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벌써 신부님은 하느님 뜻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신부님은 아직은 하느님 뜻의 작은 딸인 루이사 같지는 않습니다. 신부님은 남은 일생 동안 성장하면서 하느님 뜻 안에서 배운 것을 실천해 나가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뜻 안에서 살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들이 하느님의 뜻 안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어느 정도의 완전함에 도달해야 하는지를 저도 아직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선물이고 이미 당신에게 주어졌습니다.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의 뜻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면, 내가 그 사람에게 내 뜻의 선물을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해주는 것이 벌써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 말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내 말은 너희들 말과 같지 않다. 내가 말하면 그것은 내가 말하는 것을 실제로 주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듣는 사람의 응답에 달려있다.”

 

 다른 날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하느님 뜻의 이 나라에서는 일단 당신이 그 하느님 뜻의 왕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주님이 들어오라고 초대했기 때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성경 속의 비유에 있듯이 절름발이고 장님이고 내 잔치에 다 불러 오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당신 궁전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뜻의 그 왕궁 안에는 단계가 많이 있습니다.

 

 왕궁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사람은 영적 순례를 합니다. 왕궁의 구석구석을 전부 돌아봅니다. 그 왕궁에서는 한국말을 쓰지도 않고 영어를 쓰지도 않습니다. 하느님 뜻의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하느님 뜻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하느님 뜻 말을 합니다. 이 왕궁에서 살려면 하느님 뜻의 지속적인 흠숭자가 되어야 됩니다. 이런 것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 쪽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면 그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주님께서 다 해주십니다. 누가 와서 당신에게 “당신은 하느님 뜻 안에서 삽니까?” 하고 물어보면 물론 “네!”라고 대답하십시오. “예, 나는 하느님 뜻 안에서 삽니다.” 라고 대답하십시오.

성 바오로처럼 내가 이미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목적지만 바라보고 달린다고 하십시오. 하느님의 뜻 안에서의 삶에 대해서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말해야 되고, 우리의 마음을 다 해서 이렇게 믿고 이렇게 살아야 됩니다.

 

질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사처럼 어느 시점에 하느님의 뜻 안으로 영구적으로 들어가는 그런 때는 있겠지요?

 답 : 하느님 왕궁 안에는 그런 어떤 단계가 있습니다. 시점이랄까 그런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시점에 대해서 여러 곳에서 많은 설명을 하셨습니다. ‘그 시점이 되면 너는 되돌아갈 수가 없다.’ 왕궁에서 살기 시작한 초기단계에서는 왕궁 밖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분심도 있고, 당신의 인간적인 의지가 막 난리를 치므로 이런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나는 그런 시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너의 뜻은 하느님 뜻에 완전히 묶인다.’

하느님의 영원한 행위에 완전히 묶이는 그런 시점이 있습니다. 영원토록 묶입니다.

 

 ‘그러면서도 너는 이 땅 위에 살고 있다. 그리고 너는 되돌아갈 수 없다. 그것은 네가 자유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의 모든 것을 영원토록 하느님께 묶어 놓았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루이사가 자기가 바다 밑바닥에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막 애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루이사야, 헛된 수고 하지 말아라. 너는 도무지 나갈 수가 없다. 이 바다 밑바닥에서. 루이사 네가 너와 나 사이를 여러 가지 쇠고리로 여러 번 묶어 놓았기 때문에 너는 도무지 나갈 수가 없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차이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 뜻의 신성한 빛을 일단 한번 나에게 주시면 내가 그 빛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네!’ 라고 대답하면, 하느님 뜻 안에서의 내 영혼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내 영혼이 그 안에서 얼마나 자랄 수 있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 다음으로 이제 영적 순례를 시작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이 왕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삼위일체의 세 위격의 특별한 신비 속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그러니까 삼위께서 하시는 그 대단한 일, 창조와 구속과 성화의 그 세 가지 일을 세 분이 함께 하십니다. 이 세 가지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세 분을 갈라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사업의 모든 완성, 열매 이런 것들이 다 그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21권에 있는 이야기들을 방금 읽었습니다.

삼위께서 함께 하신 세 가지 일이 우리들에게는 신비이고 휘장에 가려져 있습니다. 우리 인류 역사 안에서의 모든 사건들, 모든 구속 사업의 일, 동정 성모 마리아의 삶과 예수님의 삶, 오늘날까지 교회의 삶 속에서 성령이 하신 모든 일, 그리고 또 앞으로 일어날 일들, 이 모든 것들은 하느님 뜻의 완성된 열매들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다 우리에게 유산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우리 하느님께 달려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속한 이 모든 것들은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들에게 속하고 나에게도 속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의 권세나 천사들 그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의 인성을 위해서 창조된 것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인성과 하나가 되고, 예수님 몸의 지체들이 되면 예수님께 속한 모든 것이 다 내 것이 됩니다.이것이 지속적인 흠숭자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흠숭하는 일을 하는 데로 가는 여러 단계들을 생각해보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고, 예수님의 인성과 예수님의 뜻과 예수님의 신성 안으로 들어가고, 그리고는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찬양하고,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이 포함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을 내 것으로 껴안고, 특별히 나를 위해서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을 하신 것처럼 그 모든 것을 내가 껴안고, 내 이름으로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이름으로 이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순례의 핵심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 왕궁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은 각자가 왕궁 안에 방을 하나씩 가지고 있고, 하느님께서 그 방의 주인 각자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집어넣고, 주님이 그 각자의 방 안에서 그 방의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생각하면서 이 굉장한 왕궁을 짓고 내 방을 만들어 놓고 주님이 내 방 안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방을 만들어 놓고 그 방을 아름답게 장식하셨습니다. 각 사람의 방을 각각 다르게 장식을 해주십니다. 각 방의 주인들을 기쁘게 해주려고, 방마다 각각 다른 음악을 틀어주시고 각 방 안에 맛있는 물이 나오는 샘들도 만들어 주십니다. 각 방 안에 굉장히 맛있는 음식들도 준비해 주시고, 그리고 왕궁 주변에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정원도 만드셨고 주님이 기다리십니다. 우리 각자가 방문해주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느님이 나를 위해서 다 준비를 해뒀는데도 이제 내가 그 궁전 안에 들어가서는 아무 곳도 찾아가 보지도 않고 구경도 안하고 가만있으면 하느님께서 슬퍼하십니다. 그분이 하신 모든 것을 하나씩 방문해 보는 것, 그런 모든 것 안에서 나를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래서 그분이 마땅히 받아야할 사랑의 응답을 해드리는 것이 바로 피조물로서 해야 될 첫째 본분입니다.

피조물이 이렇게 하는 것이 영적순례입니다.

 

성경에서 발견한 것을 우리가 이미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일 날 아침기도에서

 ‘해야 달아 주님을 찬미하라, 하늘의 별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바다와 강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고기와 물에 사는 모든 것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전례적인 해들을 보면 A, B, C 해의 순서대로 구원의 일을 이렇게 그냥 빙빙 돌아가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동정 마리아의 생애의 각 부분들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그런 순간들을 방문합니까? 왜 축하합니까?

그런 것들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보고, 그런 사건들이 우리에게 주는 그 가르침들을 우리 안에 받아들여서 우리 것으로 만들고,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좀 더 나은 방법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발견하고, 하느님 나라가 오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그런 순간들을, 축일들을 지내면서 하느님께 바치는 겁니다.

 

묵주기도는 무엇입니까?

묵주기도도 이렇게 도는 겁니다. 순례입니다. 환희의 신비, 빛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 이것이 다 도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순례라고 말하는데, 성무일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무일도를 하면서 성경 안의 모든 것들을 방문합니다. 돌아가면서 방문합니다.

 

영적 순례하는 것은 사실은 아주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영적 순례는 새로운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서 하던 것인데, 이 영적 순례에서 우리가 하는 것에 새로운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주님께서 왜 우리가 이런 것을 해야 되는지를 새로운 빛으로 알려주신 것, 그 빛을 받아서 하는 것, 그것이 새로운 것입니다.

 

질문 : 영적순례 책은 루이사가 직접 쓴 것인가요?

답 :  루이사가 직접 쓴 것입니다. 날짜는 없습니다.

수난의 시간들 책과 동정 마리아 책 그 사이에 아마 이 영적 순례를 썼을 것입니다. 1920년 말경일 것입니다. 동정 마리아 책이 1921년에 써졌습니다. 그러니까 영적 순례 책은 1920년에 써졌을 것입니다. 수난의 시간들은 1910년에서 1912년 사이 그쯤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순례 책은 중간에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20권에서 주님께서 창조에 대해서 설명을 상세히 많이 하셨는데 아마 그것과 연결이 되었을 것입니다. 내일 계속되는 강의에서도 영적순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멘.

 

 

 ‘하느님 뜻에 대한 지속적인 흠숭자' 기도에 초대합니다

http://cafe.daum.net/DivineVolition/TdDy/16